삶과 죽음의 파반느
- 카르페 디엠(carpe diem), 곧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반드시 아모르파티(Amor fati) !
-이기철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정동수 시집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천년의 시작, 2022)
이 령 (시인)
지식과 경험과 좌절의 총체가 지혜라고 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 부단한 자기갱신의 노력과 견딤의 의지를 조화롭게 일궈내는 이다. 시도 시를 쓰는 시인도 마찬가지다. 내 속의 울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울음까지 울어줄 줄 아는 이라 해서 시인을 예로부터 곡비(哭婢)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요즘 발간되는 많은 시집들을 읽으면서 ‘나이(연륜)는 실력이다’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뜻하는 나이는 비단 생물학적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 연륜이라는 것은 시인이 걸어 온 시작의 길과 그 길을 걸어오면서 내면화된 사유, 부단한 훈습과 자기 갱신의 의지, 지난한 생을 굳건하게 지나온 견딤, 즉 총체적인 지혜가 문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기 마련이고 또 그들의 작품은 독자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시는 절규, 눈물, 애무, 키스, 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 것, 또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그런 것, 또는 그런 것을 절조 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시의 감화 감동적인 기능을 담보하는 시인들의 미적 경험은 인간고유의 경험양식인 동시에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것을 좋은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은 시인 개개인이 걸어온 생의 결에 달려있다 생각 한다.
인간의 전 생애를 통찰하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인 현실에 충실 하라!,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 하라!로 집약할 수 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파반느, 깊고 우아한 음률 같은 두 권의 시집을 소개한다.
1.
이기철 시인의 『영원 아래서 잠시』 는 이미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시집이다. 시인은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등 많은 시집과 김수영 문학상, 최계락 문학상, 2022 동리목월문학상등을 수상하며 쉼 없이 시작을 펼치며 문청들의 스승으로 현재는 ‘예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고 계신 원로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소재는 대체로 자연현상들이다. 자연현상에서 생명성을 발견하고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확행의 기쁨을 일상적 언어로 마치 수를 놓듯 자분자분 채우고 있다. 이 시집은 4부에 걸쳐 총 74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는 것처럼 영원과 잠시라는 시간적 극명한 대비를 통해 시인은 전 생애를 거쳐 깨달은 생의 지혜를 작품 면면 전하고 있다.
세상은 나의 교실이고 사람살이가 나의 교과서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이 세계, 어느 외딴곳에 아름다움을 심는
사람, 슬픔을 가꾸어 기쁨을 꽃피우는 사람, 그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인의 말」 전문
시인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자기구속의 행태의 표출로서 시를 쓰지만 시인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지 간에 결국 자기 해방을 도모함과 동시에 그 활동들에서 기인한 일련의 결과들이 결국 사회참여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개인의 보편적 경험의 기저에는 사회적 공감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경험의 보편적 속성인 사회적 공감이야말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지탱하는 마뜩한 생의 지혜이자 곡진한 자세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시인은 그러한 사유를 구축하기까지 많은 경험과 다단한 삶의 시간들을 견뎌왔을 것이고 그 견딤과 깨달음의 과정이 그들이 구사하는 시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세상 밖으로가 아닌 세상 속으로의 자유가 시작(詩作)의 본류임을 고백하고 있다.
여름은 너무 많은 입을 가졌으니 차라리 적막 두 장 홑
옷으로 견디는
가을의 마른 잎새 소리로 말하게 하라
뿌리로부터 걸어 온 물의 체온을 달래어 실가지 끝에
한 우주를 올려놓은
과일의 쟁의로 말하게 하라
지구를 장식했던 백 가지 물색들이 대지의 화판을 단색
의 화폭으로 색칠하는
캔버스의 붓으로 말하게 하라
돌을 주워 하늘로 던지며 별이 될 거라 믿었던 어린 정
서가 정으로 새긴 영혼의 글씨가 되는 과정을 흰 종이의
맨살로 고백하게 하라
완전히 파괴된 폐를 안고도 좋은 날씨와 햇빛의 축복만
을 편지에 쓴 불멸의 시인*, 그 핏빛 영혼으로 말하게 하라
나는 언제 아픈 세상을 위해 한 편의 송가를 쓰나, 언제
추운 시대를 보듬는 축시를 쓰나, 오늘 내가 오른 서릿발
벼랑의 높이로 대답하게 하라
-「벼랑에서 말하다」 전문
현상의 한 순간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끊임없이 잃어버린 순수를 호출하는 ‘서릿발 벼랑의 높이’로 깨어있는 시인의 꼿꼿한 정신을 본다.
‘적막 두 장 홑옷으로 견디는 가을의 마른 잎새’, ‘실가지 끝에 한 우주를 올려놓은 과일의 쟁의’, ‘단색의 화폭으로 색칠하는 캔버스의 붓’, ‘흰 종이의 맨살’, ‘핏빛 영혼’은 앞서 언급한 시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현상, 사람, 모든 관계성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공감하면서 배우고자 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기품 있는 고백이자 방백의 노래다. 시의 음률과 의미와 자아, 시적 담지자로서 모든 현상을 향한 풍크튬의 환상적 송가로 들린다.
채소도 아닌데 어떻게 시를 가꾸느냐고
사람들은 핀잔하고 새는 노래한다
이런 때는 사람보다 새가 시를 가꾼다
산속 마을은 골마루처럼 깊어 실로폰 바람 지나가면
마당가엔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풀꽃들 있어
단추꽃 댕기꽃이라 짐짓 불러 보는데
꽃나무는 저 부르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흘 전 흙에 묻은 상추씨만 젖니 같은 이파리 밀어 올린다
시는 읽는 것이지 가꾸는 것 아님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책상과 난로들
여기서 실날같은 생각 하나 가락지 낄 수 있다면
하늘 스무 평 공짜로 얻은 셈은 되지 않을까
열 사람 가고 혼자 남은 저녁에게 말 걸면
저녁이 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고
달빛을 끌어다 방석을 내주기도 한다
이럴 땐 슬픔이 새끼 쳐 쫑알대지만
나는 그에게 줄 좁쌀 한 홉도 마련하지 못했다
사람은 가도 저녁은 남아 담요처럼 깔리는 적요
왔다가는 가 버리는 하루에 시비 걸 마음은 없으나
어느 하루도 공으로는 다녀가지 않는
밤이 떨어뜨리고 간 바늘 같은 저 저녁별!
-「시 가꾸는 마을」 전문
지난해 선생님께서 본 시집으로 제15회 목월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사)동리목월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은 필자는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 북 콘서트 진행을 한 인연이 있다. 북 콘서트 진행시 선생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참 겸손하시구나! 느꼈다. 교직에서 은퇴하시고 현재는 고향에서 ‘여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고 계신다. 모든 시인은 밀실과 광장을 경영하는 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인들이 시작에 몰두할수록 밀실의 평수는 늘기 마련이나 광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꺼려지기 마련인데, 선생님은 자신의 시작은 물론이거니와 시 가꾸기 운동을 펼치면서 많은 문청들을 시의 광장으로 이끌고 계신다. 시작(詩作)과 그 시작의 바탕이 되는 모든 현상들에 귀 기우리시는 모습이 시와 삶이 일치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핀잔하고 새는 노래’ 하기에 ‘실날같은 생각 하나 가락지 낄 수 있다면’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풀꽃들 있어 단추꽃 댕기꽃이라 짐짓 불러’내고 시인은 ‘어느 하루도 공으로는 다녀가지 않는 밤이 떨어뜨리고 간 바늘 같은 저 저녁별!’에 식지 않는 시심을 담아 영원히 빛날 것이다.
2. 정동수 시인이 시집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웃었다』를 출간했다. 그의 두 번째 시집으로 모두 4부에 걸쳐 총53편의 작품이 실렸다. 우선 인간사 생몰(生沒)의 아이러니와 슬쁨*을 집약한 아포리즘 적 시제가 인상적이다. 시집의 표제작에서도 언급된 목줄에 묶여 야성을 잃어가는 개를 보며 시인은 시인의 시는 제도와 관습에 잠식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한 것일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웃었다’라는 진술이 이 시집을 관통하는 풍크툼의 시작이다.
버리는 일로 나는 시작된다
태어나 처음 한 일도 울음을 버리는 일이었다
어떤 일은 절로 버려졌고
어떤 일은 의식적으로 버렸다
생강 꽃이 피어나고
마지막 한 송이가 지기까지 버리지 못한 흔적들
닭은 새벽마다 목청을 높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내 목청이 더 높을 때가 많다
생강나무가 결국 꽃을 떨구듯이
달이 어느 순간 빛을 버리듯이
버려야 하는 것을 그린다
-「시인의 말」
시인은 자신의 시작(詩作)의 의미를 ‘버려야 하는 것을 그린다’고 고백한다. 허명에 기대어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무엇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닌 허위를 버리고 본래의 존재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 정신이다. 분리돼 버려진 것들은 모두 누군가 쓰고 지워낸 생의 알뜰한 목록일 것이다. 생의 드러난 어둠과 매복된 희망이 그로테스크하게 조합된 궁행(躬行), 얼룩진 기억을 필사적으로 구겨 넣기 위해 모두 한번쯤 그림자 말아 쥔 그림을 품었던 자세, 그것이 어쩌면 삶의 모습이고 시인에게 있어선 시일지도 모르겠다. 버림과 비움 사이 시간이 머문 자리마다 채록된 풍경들, 기억 창고에 저장된 다채로운 흔적들, 버려지기 전 버린다는 것은 황혼의 리듬을 우리 함께 타는 건 아닌지,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자취로 깊어지고 버릴게 많을수록 흔들리다 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시인이 걸어온 길에 그림자와 그림자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짙다는 뜻이겠다.
마취 총을 맞으면 백발백중 더는 골목의 자유를
누비지 못한다며 소방 구조대원은 죽음과 삶을 재단 하
듯 말했다
순간, 어딘가에 늘 도취되어 있던 나는
나의 시는 멈춰 있는 심장 이었다
기사회생해서 돌아오면
삶에서 기사회생하여 죽음으로 되돌아갔다
좀 살아 봐서 아는데
사는 일이란 참 소태 씹는 맛이지,
가슴에 표적을 그리고
표적으로 살아왔었어,
목줄을 벗어던진 표적은 이미 바람이었다
야성이 눈빛이 빛 속에서 빛났다
나는 개의 눈빛이 빛나고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나도록 협조했다
목덜미라도 물리면 야성의 눈빛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마취 총이 바람을 뚫고 지나갔다
마당엔 목줄에 묶인 개 두 마리와 내가
골목의 자유를 향하여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목줄에 포박당한 개와 제도와 관습에 길들여진 시인의 눈빛이 겹친다. 마취 총을 맞고 눈빛을 잃어가는 개와 ‘가슴에 표적을 그리고 표적으로 살아’ 왔다는 시인의 고백이 오버랩 된다. ‘사는 일이란 참 소태 씹는 맛’이고 결국 ‘기사회생해서 돌아오면 삶에서 기사회생하여 죽음으로 되돌아’ 가지만 시인이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은 야생의 눈빛,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이며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시 정신으로 읽힌다. ‘목줄을 벗어던진 표적은 이미 바람 이었다 야성이 눈빛이 빛 속에서 빛났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자유를 갈구하며 의식적으로 기존의 관습과 표적을 향해 던지는 한 악장의 레퀴엠을 연주하는 듯하다.
검게 그을린 웃음이었다
1월 8일자 신문에 실린 소방복 입은 마지막 웃는 모습
웃음은 곧 불길 속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남겨두는
상형문자 같았다
나는 앞으로 불을
불꽃이라 부르기로 한다
운명은
끼니로 때우는 팥빵 위에도 앉아 있고 벌컥벌컥 들이키던
바나나 맛 단지 우유 속에도 찾아와 있다
길을 가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는 순간
체념이 가져다주는 감정적 평온
빗물이 속살로 흘러내릴 때
그 희열
발톱이나 머리카락은 몸에서 떨어져 나간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니
죽음이여 몸에 꼭 붙어 있어 두려움이 되길
불이 운명이라면
꽃으로 기다리겠으니
-「그을린 휴식」 전문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페르소나는 ‘웃음’이다. 시인이 여러 작품에서 내포하고 있는 웃음은 운명을 부정하지 않고 운명을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생으로 추동하는 수긍의 자세로 보여 진다. 즉 죽음을 인식하고 현실을 살아가자는 긍정과 달관의 웃음이다. 사람은 모두 필멸의 존재들이다.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운명적 고리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때 좀 더 의미 있는 생을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삶은 시작된다. 언제가 되 든 찾아오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숭고한 삶의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난다. 삶과 죽음 사이에 생의 철학이 존재하며 사유의 총체가 이론적이고 실제적으로 삶을 향상시키기에 이는 “철학한다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를 배우는 것”, 이라고 한 키케로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마침내 시인은 ‘나는 앞으로 불을 불꽃이라 부르기로 한다’ 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이번 시집은 마치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에서 서사의 불연속성을 보완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바꿔 연속적인 시간대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인버전처럼 ‘웃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미하면서 비장함이 더해지고 개연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서사적인 측면에서 감정이입을 돕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삶과 죽음, 생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죽음과 가깝지만 오히려 더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건강한 ‘웃음’을 전파하는 생의 담지자(擔持者)로 명명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