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입처는 다음과 같다.
12入處 | | |
6內入處 | 6外入處 | | |
眼[눈] | 色[빛깔] | 色入 (장아함경_10. 십상경) | |
耳[귀] | 聲[소리] |
鼻[코] | 香[냄새] |
舌[혀] | 味[맛] |
身[몸] | 觸[감촉] |
意[뜻] | 法[법] | | |
아함경에서는 6외닙처의 色을 ‘빛깔’로 번역하였다. 이 色을 ‘물질’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빛깔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 보인다.
色은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에 대립하는 것이다.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은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라는 자각 기관에 의하여 지각된 대상으로서 물질의 한 특성들이다. 따라서 色도 눈이라는 기각 기관에 의하여 지각된 재상으로서 물질의 한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은 물질의 일반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크거나 작거나 소란스럽거나 부드럽거나 하는 소리들을 가리키고, 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각각 다양한 모습의 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도 눈이라는 지각 기관에 의하여 구별된 물질들의 모습들, 곧 어떤 빛깔과 어떤 모양으로 된 물질들을 나타낸다. 예컨대 땅, 산, 물, 나무, 꽃, 강물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컨대 눈이라는 지각 기관에 비친 물질들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물질은 기본적으로 빛으로 드러나니까, 색을 빛깔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色入의 色도 ‘빛깔’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지각에서 눈으로 보는 것[빛깔]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빛깔을 지각의 대표로 내세우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째, 6내입처의 눈ㆍ 귀ㆍ코ㆍ혀ㆍ몸도 다른 6내입처의 처지에서 보면 6외입처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6내닙처의 意를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 意는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意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에 대립하는 것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은 지각 기관이니, 意도 지각 기관으로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뜻’은 어떤 의도를 가진 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은 어떤 의도를 가진 지각 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각 기관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그 기관들이 작동할 때 어떤 의도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른 의도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의도와 무관한 지각 기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意를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마음이란 용어는 일차적으로 의도에 중립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意를 ‘마음’으로 번역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마음의 한자어네는 心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 다시 논의한다.]
12처와 5음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8界 | | |
12入處 | 6識 | 6觸 | 6受 | 6想 | 6思(=行) |
色入 | 眼識 | 眼觸 | 眼觸生受 | 眼觸生想 | 眼觸生思 |
耳識 | 耳觸 | 耳觸生受 | 耳觸生想 | 耳觸生思 |
鼻識 | 鼻觸 | 鼻觸生受 | 鼻觸生想 | 鼻觸生思 |
舌識 | 舌觸 | 舌觸生受 | 舌觸生想 | 舌觸生思 |
身識 | 身觸 | 身觸生受 | 身觸生想 | 身觸生思 |
마음ㆍ法 | 意識 | 意觸 | 意觸生受 | 意觸生想 | 意觸生思 |
아함경의 중국어 번역의 色ㆍ受ㆍ想ㆍ行ㆍ識은 한국어 번역에서 음차로 번역하여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라 하였다.
그런데 5음의 色은 12압처의 色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12입처의 번역에서와 같이 빛깔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受ㆍ想ㆍ行ㆍ識은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으로 번역하였다.
5음의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은 12입처의 6느낌ㆍ6생각ㆍ6의도ㆍ6인식이다.
‘접촉[촉]’은 ‘내입처와 외입처, 인식이 화합한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눈의 접촉[안촉]은 눈과 빛깔과 눈의 인식[안식]의 화합이다.
‘X觸生Y’는 ‘X의 접촉으로 생기는 Y’라는 뜻이다. 예컨대 眼觸生受는 눈의 접촉으로 생기는 느낌이고, 意觸生思은 마음의 접촉으로 생기는 의도이다.
5음에서 빛깔[색]은 마음과 법에 대립하는 것이다.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은 몸의 그것들과 마음의 그것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의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은 마음의 작용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작용과 함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몸의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이 마음의 작용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예컨대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감촉을 느끼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움직여 어떤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의 몸의 인식ㆍ느낌ㆍ의도는 마음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몸의 인식ㆍ느낌ㆍ의도이다.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몸이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찰나에 이루어지는 원시적 형태의 생각을 고려하다면,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생각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듯하기는 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몸이 빛깔을 접촉하거나 몸의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이 일어날 때는 마음의 작용이 함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 경우에도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없다면, 또는 소나 개, 참새, 독수리, 박쥐, 뱀, 고래, 미꾸라지와 같은 다른 몸을 가졌다면, 빛깔이나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이 어떤 모습일지 생갹해 본다면,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있는 경우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6내입처의 마음으로서 순전히 지각을 수행하는 기관으로서의 마음이다. 예컨대 ‘마음으로 본다’고 할 때의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이 일어날 때 함께 작용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보거나 들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몸의 접촉과 함께 일어나는 가지가지의 마음이다. 예컨대 좋거나 싫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마음, 어리석거나 성내거나 산란한 마음 등의 마음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거나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할 떼의 마음이다.
[참고] 마음과 관련된 말의 번역
산스크리트어 | 대응하는 번역 |
중국어 | 영어 | 한국어 | 이 글 |
manas | 意 | mind | 뜻 | 마음1 |
citte | 心 | mind | 마음 | 마음2 |
vijñāna | 識 | consciousness | 식 | 인식 |
부파불교의 유식론이나 대승불교의 유심론에서는 manas과 citte, vijñāna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심의식, 마음, 나까야(나 아함경)과 아비달마[논]의 견해의 차이)
그런데 아함경의 체계에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이것들의 용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manas는 지각 기관인 6내입처의 하나로서 눈ㆍ귀ㆍ코ㆍ혀ㆍ몸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vijñāna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리고 citte는 4념처(smṛty-upasthāna)에서 ‘몸(rupa), 느낌(vedana), 법(dharma)’에 대립하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