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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19권
대지도론_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이 장은 먼저 37도품이 성문과 보살에 모두 포함되는 법이라는 것을 논하고, 그 다음에 이 차례로 논하였다. 1. 성문법에서 분별한 37도품의 이치 2. 마하연에서 말하는 37품의 이치 |
【經】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되 [머문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까닭에,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분(覺分)‧8성도분(聖道分)을 구족한다.
【論】
【문】 37품은 성문ㆍ벽지불의 도요, 6바라밀은 보살마하살의 도이거늘, 무슨 까닭에 보살의 도에서 성문의 법을 말하는가?
【답】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착한 법과 일체의 도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일체의 착한 법과 일체의 도를 모두 배운다.
이른바 건혜지(乾慧地)1) 내지는 불지(佛地)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아홉 지위는 마땅히 배우지만[學] 증득하지는[證] 못한다.
불지는 배우기도 하고 증득하기도 한다.
또한 어디에서 37품이 성문과 벽지불만의 법이요, 보살의 도가 아니라 하였는가?
이 『반야바라밀경』의 「마하연품(摩詞衍品)」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4념처로부터 8성도분에 이르기까지를 말씀하셨으며, 이 마하연의 삼장 가운데에도 역시 37품이 오직 소승만의 법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하신 까닭에 37품의 열반도(涅槃道)를 말씀하시어 중생들의 서원과 중생들의 인연에 따라 제각기 도를 얻게 하시니,
성문을 구하는 이는 성문의 도를 얻게 하고,
벽지불의 선근을 심은 이는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고,
불도를 구하는 이는 불도를 얻게 하여,
그들의 본원(本願)과 근기의 날카롭고 둔함에 따라 크게 가엾이 여김이 있기도 하고 혹은 가엾이 여김이 없기도 하다.
비유하건대 용왕이 비를 내려 온 천하를 적실 때 비에는 차별이 없지만 큰 나무나 큰 풀은 뿌리가 큰 까닭에 많이 받고 작은 나무나 작은 풀은 뿌리가 작은 까닭에 적게 받는 것과 같다.
【문】 37품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비록 성문ㆍ벽지불만의 도이지 보살의 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의미로써 추측하건대 보살은 오랫동안 생사에 머물러 다섯 길을 왕래하면서 신속히 열반을 취하지 않거늘, 이 37품은 열반의 법만을 말하고 바라밀을 말하거나 대비를 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답】 보살이 비록 오랜 동안 생사에 머물지만, 마땅히 진실한 도와 진실치 않은 도를 알고 세간과 열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안 뒤에는 큰 서원을 세우되,
“중생들은 가엾도다. 내가 마땅히 건져내서 무위의 경지로 데려가리라” 하고는,
이러한 진실한 법으로 모든 바라밀을 행하여 능히 불도(佛道)에 이른다.
보살이 비록 이 법을 배우거나 알았더라도 아직 6바라밀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깨달음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유하건대 허공을 우러러 활을 쏠 때, 화살마다 서로 버티게 하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셨다.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의 화살로써 3해탈문(解脫門)의 허공에 쏘아올리고, 다시 방편의 화살로써 반야의 화살을 쏘아 올려서 열반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하셨다.
또한 그대가 말하듯이 보살이 오랜 동안 생사에 머물러 응당 몸과 마음의 갖가지 고뇌를 받아야 한다면, 만일 진실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그런 일을 참겠는가?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이 도품(道品)의 진실한 지혜를 구할 때, 반야바라밀의 힘으로써 능히 세간을 바꾸어 도과의 열반으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계의 세간이 모두가 화합으로부터 생긴 까닭이다. 화합으로 생긴 것은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취할 수 없으니, 취할 수 없는 모습이 곧 열반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보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되 머문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까닭에 마땅히 4념처를 구족한다” 했다.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에서는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가 모든 법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살의 법에서는 세간이 곧 열반이라 말하나니, 지혜가 모든 법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물질[色]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며, 공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공이니라”하셨다.
『중론(中論)』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반이 세간과 다르지 않고
세간이 열반과 다르지 않으니
열반의 경계와 세간의 경계는
한 경계이어서 차이가 없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실상(實相)을 얻는 까닭에 세간을 싫어하지 않고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나니, 37품(品)이 진실한 지혜의 길이다.
【문】 4념처만으로도 도를 갖추어 얻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37품을 말씀하셨는가?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간략히 말하기 위하여 4념처이고, 자세히 말하기 위하여 37품이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자세히 말해야 한다면 한량이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답】 4념처가 구족되어 비록 능히 도를 얻지만, 또한 4정근(精勤) 등의 모든 법도 말해야 된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마음은 갖가지로 동일하지 않고 번뇌도 또한 갖가지이며, 원하는 바도 이해하는 바도 역시 갖가지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비록 하나의 진실, 하나의 모습이기는 하나,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12부경(部經)2), 8만 4천의 법무더기[法聚]에 대해 이렇게 분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 법륜(法輪)을 굴리실 때 4성제(聖諦)를 말씀하심으로써 족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다른 법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중생들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에 집착되었기에,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4성제를 말씀하시어,
“몸과 마음 등의 모든 법은 모두가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다.
이 괴로움의 인연은 애착[愛] 등의 모든 번뇌에서 유래한다.
이 괴로움이 다한 곳을 열반이라 하며, 방편으로 열반에 이르니 이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 하셨다.
중생은 생각이 많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뒤바뀌었기에 이 몸ㆍ느낌ㆍ마음ㆍ법에 집착되어 삿된 행을 짓나니, 이런 사람을 위하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한다.
이렇듯 갖가지 도법은 각각 중생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약사가 한 가지 약으로 뭇 병을 고칠 수 없으니, 병이 같지 않다면 약 또한 하나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마음의 병이 갖가지임을 따라서 뭇 약으로써 그것을 다스리신다.
혹은 한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부처님께서 어떤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 물건이 아니거든 가지지 말라.”
비구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알았느냐?”
비구가 대답했다.
“모든 법이 내 것이 아니기에 가지지 말아야 하옵니다.”
혹은 두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선정ㆍ지혜요,
혹은 세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계율ㆍ선정ㆍ지혜요,
혹은 네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4념처이다.
그러므로 비록 4념처로써 도를 얻을 수는 있으나, 다른 법의 행(行)이 다르고 분별하는 수량[多少]이 다르다면 관법 역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4정근 등 다른 법도 말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믿음의 힘이 크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시에 37품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다른 법의 도문(道門)이나 10상(想) 등을 말하더라도 모두가 37품 가운데 포함된다.
이 37품의 뭇 약이 화합해서 일체 중생의 병을 치유하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니, 예컨대 부처님에게는 비록 한량없는 힘이 있으시나 다만 10력(力)만 말해도 중생을 제도하기에 족한 것이다.
[37품의 근본, 10법]
이 37품은 10법으로 근본을 삼는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곧 믿음[信]ㆍ계율[戒]ㆍ사유(思惟)ㆍ정진(精進)ㆍ기억[念]ㆍ선정[定]ㆍ지혜[慧]ㆍ제함[除]ㆍ기쁨[喜]ㆍ버림[捨]3)이다.
믿음이라 함은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이요,
계율이라 함은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이요,
정진이라 함은 4정근과 정진근(精進根)과 정진력(精進力)과 정진각지(精權覺支)와 정정진(正精進)이요,
기억이라 함은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지(念覺支)와 정념(正念)이요,
선정이라 함은 4여의족과 정근(定根)과 정력(定力)과 정각[定覺支]과 정정(正定)이요,
지혜라 함은 4념처(念處)와 혜근(慧根)과 혜력(慧力)과 택법각지(擇法覺支)와 정견(正見)이다.
이러한 모든 법의 생각[念]이 지혜에 수순해서 대상[緣] 가운데 머문다면, 이러한 때를 염처(念處)라 한다.
삿된 법을 깨뜨리고 바른 도 가운데에 행하는 까닭에 정근(正勤)이라 하고,
마음을 안온하게 대상 가운데서 거두는 까닭에 여의족(如意足)이라 하고,
부드러운 지혜를 마음으로 얻는 까닭에 근(根)이라 하고,
날카로운 지혜를 마음으로 얻는 까닭에 힘[力]이라 하고,
수도[修道位]의 작용인 까닭에 각(覺)이라 하고,
견도[見道位]의 작용이기 때문에 도(道)라 한다.
【문】 도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를 행한 뒤에야 모든 착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길을 간 뒤에야 갈 곳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제는 어찌하여 뒤바꿔 4념처를 먼저 말하고, 나중에 8정도(正道)를 말하는가?
【답】 뒤바뀌지 않았으니, 37품은 처음으로 도에 들고자 할 때의 이름이다.
마치 수행자가 스승에게 가서 도법(道法)을 듣는 것과도 같다.
먼저 기억하여 이 법을 간직하나니, 이때를 염처라 한다.
간직한 뒤에는 그 법 가운데서 과위를 구하는 까닭에 정진하나니, 이때를 정근이라 한다.
정진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한데 마음을 거두어 부드럽게 조절하는 까닭에 여의족이라 한다.
마음이 길들여진 뒤에는 5근이 생겨난다.
모든 법의 실상은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근(信根) 때문에 능히 믿게 되니, 이를 신근(信根)이라 하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심으로 도를 구하니, 이를 정진근(精進根)이라 하고,
항상 불도(佛道)만을 생각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를 염근(念根)이라 하고,
항상 마음을 거두어 도에 두니, 이를 정근(定根)이라 하고,
4제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니, 이를 혜근(慧根)이라 한다.
이 5근이 늘어나 능히 번뇌를 가리나니, 마치 큰 나무의 힘이 능히 홍수를 막는 것과 같다.
이 5근이 늘어나면 능히 깊은 법으로 옮겨 들어가나니, 이를 힘[力]이라 한다.
힘을 얻은 뒤에는 도법(道法)을 분별하는데 세 부분이 있다.
택법각지[擇法覺]와 정진각지[精進覺]와 희각지(喜覺支) 등 이 세 법은 도를 행할 때에 마음이 침몰하면 제각지(除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를 일으키고,
다시 이 세 법은 도를 행할 때에 마음이 흔들리고 흩어지면 능히 거두어서 정ㆍ염각지를 두 곳에 있게 하며, 능히 착한 법을 모으고 악한 법을 막는다.
마치 문을 지키는 사람이 이익이 되는 이는 들어오게 하고,
이익이 없는 이는 막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침몰할 때엔 염(念)의 세 가지 법을 일으키고,
마음이 산란할 때에는 염의 세 가지 법은 무각(無覺)과 실각(實覺)에 포섭된다.
이 일곱 가지로 능히 이르게 되기 때문에 부분[分]이라 한다.
이 법을 얻어서 안온함이 구족한 뒤에는 열반의 무위성(無爲城)에 들고자 하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을 행하나니, 이때를 도라 한다.
1. 성문의 법에서 분별한 37도품의 이치
[4념처]
【문】 무엇이 4념처인가?
【답】 신념처(身念處)와 수(受)ㆍ심(心)ㆍ법(法)의 염처이니, 이것이 4념처이다.
네 가지 법을 네 종류로 관찰하니,
곧 몸이 부정하다고 관찰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찰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찰한다.
이 네 가지 법이 각각 네 가지 법을 갖추고 있으나,
몸에서는 부정을 많이 관하고,
느낌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관하고,
마음에서는 무상함을 많이 관하고,
법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관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가 아직 도에 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 법에서 삿된 행을 하거나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을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이 4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신념처(身念處)를 말하고,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수념처(受念處)를 말하고,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심념처(心念處)를 말하고,
나가 있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이런 까닭에 넷을 말하니, 이는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것이다.
【문】 어찌하여야 이 4념처를 얻는가?
【답】 수행자는 청정한 계에 의하여 일심으로 정진을 행해 몸의 다섯 가지 부정함을 관찰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태어나는 곳이 부정함[生處不淨]이요,
둘째는 종자가 부정함[種子不淨]이요,
셋째는 자성이 부정함[自性不淨]이요,
넷째는 자상이 부정함[自相不淨]이요,
다섯째는 끝까지 부정함[究竟不淨]이다.
무엇이 태어나는 곳이 부정한 것인가?
머리ㆍ발ㆍ배ㆍ등ㆍ옆구리ㆍ갈비 등 모든 부정한 물건이 화합된 것을 여자의 몸이라 하는데,
안으로는 생장(生藏)과 숙장(熟藏)과 오줌ㆍ똥 등 부정한 것이 있고,
밖으로는 번뇌와 업인연의 바람이 식의 종자[識種]를 불어 두 장[藏] 사이로 들어가서 8개월이나 9개월 동안 있게 하니,
마치 분뇨 구덩이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게송이 있다.
이 몸은 냄새 나고 더러운 것
꽃 사이에서 난 것도 아니요
첨복(瞭舊)4)에서 난 것도 아니며
보배산[寶山]에서 난 것도 아니네.
이것을 태어나는 곳이 부정하다 한다.
종자가 부정하다 함은,
부모가 망상과 삿된 생각[邪憶念]의 바람이 음욕의 불에 분 까닭에 피와 골수가 흐르고 열이 변하여 정자[精]가 되었는데, 숙업행의 인연인 식의 종자는 붉은 정[赤精]과 흰 정[白精] 사이에 머무르니, 이를 몸의 종자라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이 몸의 종자는 부정한 것이니
별달리 묘한 보물이 아니네.
맑고 깨끗함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직 요도(尿道)를 따라 나온 것일 뿐이네.
이를 종자가 부정하다 한다.
자성이 부정하다 함은,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얇은 가죽으로 덮였고, 그 속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한다.
의복으로 장식하고 목욕시키고 꽃과 향으로 치장하며, 최상의 반찬과 온갖 맛난 음식을 먹이나 하룻밤 사이에 모두가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설사 하늘의 옷을 입히거나 하늘의 음식을 먹이더라도 몸의 성질 때문에 역시 더러워질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의 의식(衣食)이겠는가.
이런 게송이 있다.
흙ㆍ물ㆍ불ㆍ바람의 성질은
부정한 것 없앨 수 있으나
바닷물 다하도록 이 몸 씻어도
향기롭고 맑게 하지는 못하리.
이것이 자성이 부정한 것이다.
자상의 부정함이라 함은,
이 몸의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내리니, 눈에서는 눈곱과 눈물이 흐르고, 귀에서는 귀지가 나오고, 코에서는 콧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배설기관에서는 항상 똥오줌이 흘러나오고, 모든 털구멍에서는 땀이 흘러 부정하다.
이런 게송이 있다.
갖가지 더러운 물건이
몸 안에 가득하여
항상 쉬지 않고 흘러나오니
새는 주머니에 물건을 담은 듯하네.
이것이 자상의 부정이다.
끝까지 부정하다 함은,
이 몸을 불에 던지면 재[灰]가 되고, 벌레가 먹으면 똥[尿]이 되고, 땅에 묻으면 썩어서 흙이 되고, 물에 두면 불어터지거나 혹은 물벌레에게 먹힌다.
일체의 시체 가운데서는 인간의 몸이 가장 부정하다.
부정한 법에 대하여는 9상(相)5) 가운데 자세히 설명하리라.
이런 게송이 있다.
이 몸을 자세히 관찰하니
마침내는 무덤으로 돌아가네.
힘들여 모셔도 돌아오지 않으니
은혜를 저버리기 소인(小人)과 같도다.
이것이 끝까지 부정한 것이다.
또한 이 몸이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 이 몸이 가까이했던 곳이나 몸을 두었던 곳은 모두가 부정하다.
예컨대 향기롭고 아름답고 깨끗하던 물도 백 가닥의 개울을 따라 바다로 들어가면 짜고 쓴 맛으로 변하듯이,
이 몸에 먹었던 갖가지 맛난 맛과 좋은 빛과 좋은 향기와 부드러운 반찬들도 배라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몸은 이와 같이 생겨날 때부터 종극에 이르기까지 항상 부정한 것이 있으니, 몹시 싫증날 일이다.
수행자들은 생각하라.
이 몸이 부정하건만 조그만치의 항상함이 있으면 조금 나은 것 같다가 다시 무상해진다.
또한 부정하고 무상하건만 조그만치의 즐거움만 있으면 조금 나은 것 같다가 다시 매우 괴로워진다.
이 몸은 뭇 고통이 생기는 곳이니,
마치 물이 땅에서 나고, 바람이 허공에서 나오고, 불이 나무로 인하여 생기는 것과 같다.
이 몸도 그와 같아서 안팎의 괴로움은 모두 몸에서 나온다.
안의 괴로움이란 늙음ㆍ앓음ㆍ죽음 등이요,
밖의 괴로움이란 폭력[刀杖]ㆍ추위ㆍ더위ㆍ주림ㆍ목마름 등을 말한다.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문】 몸은 괴로운 성품일 뿐 아니라 몸으로 인하여 즐거움도 있다.
만약에 몸이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5욕을 누가 누리겠는가?
【답】 4성제(聖諦)의 괴로움을 성인은 실로 괴로운 것인 줄 알지만, 우매한 범부는 즐겁다 한다.
성인은 실로 의지할 만하거니와, 어리석은 이는 미혹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 몸은 실로 괴롭거늘 큰 괴로움이 그쳤으므로 작은 괴로움을 즐겁다 여긴다.
예컨대 죽임을 당하게 된 사람이 형벌로 목숨을 대신하게 되면 몹시 기뻐하는 것과 같다.
형벌이 실로 괴롭거늘 죽음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즐겁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괴로움은 즐겁고 묵은 괴로움은 고통스럽나니,
마치 처음 앓았을 때엔 즐겁다가 오래 되면 곧 괴로움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다니거나 앉거나 누었을 때는 즐겁다가 오래되면 역시 괴로운 것과 같다.
구부리고 펴고 숙이고 우러르고 바로 보고 곁눈으로 보고 헐떡이고 숨을 쉴 때에도 괴로움은 항상 몸을 따르니,
처음 태에 들어 출생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즐거울 때가 없다.
만일 그대가 음욕을 느낌으로써 즐겁다 한다면 음욕의 법이 중해진 까닭에 밖의 여색을 구하니, 얻어지는 것이 많을수록 병은 더욱 중해질 것이다.
마치 소양병을 근심해 불을 쏘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불에 쪼여서 긁으면 당시에는 조금 즐거운 듯하나 이내 큰 아픔이 더욱 깊어지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작은 쾌락도 역시 병의 인연으로 있는 것이지 실제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병 없는 사람이 그를 본다면 가엾다는 생각을 내듯이,
음욕을 여읜 사람이 음욕에 빠진 이를 관찰하는 것 역시 이와 같아서, 이 어리석은 자가 음욕의 불에 타서 많은 고통 받음을 가엾이 여긴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몸의 괴로운 모습과 괴로움의 원인을 안다.
수행자는 오직 몸은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로운 물건인 줄을 알지만, 부득이 하여 그것을 양육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부모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포악하더라도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반드시 잘 양육해 길러주는 것과 같다.
몸은 진실로 나가 없나니,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은 구부리거나 쳐들거나 가거나 오지 못하며,
목병을 앓는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몸은 자유롭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다가 써야 하는데 몸은 그렇지 못하다.
자재롭지 못한 까닭에 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수행자는 이 몸이 이렇게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사유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이 있으니, 이러한 갖가지 방법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신념처라 한다.
이 신념처를 얻은 뒤에는 다시 생각한다.
‘중생은 무슨 까닭에 이 몸에 탐착하는가?
곧 즐거운 느낌 때문이니,
왜냐하면 안의 6정(情)과 밖의 6진(塵)의 화합을 따르는 까닭에 6식을 내고,
6식 가운데 세 가지 느낌[三受]을 내나니,
곧 괴로운 느낌[苦受]ㆍ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
이 즐거운 느낌은 일체 중생이 바라는 바이고,
괴로운 느낌은 일체 중생이 바라지 않는 바이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이런 게송이 있다.
악을 짓는 이나 출가한 이나
하늘 무리나 인간이나 벌레들이나
일체 시방의 5도 가운데 모두가
즐거움을 좋아하고 괴로움을 싫어하지 않는 이 없네.
미치고 뒤바뀌고 어리석어서
열반의 항상한 즐거움 알지 못하네.
수행자는 이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여 실제로 그것을 안다면, 즐거움은 없고 오로지 뭇 고통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즐거움이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뒤바뀜이 없어야 하거늘, 일체 세간의 즐거운 느낌은 모두 뒤바뀜으로부터 생겨나 진실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즐거운 느낌으로는 아무리 즐거움을 구하여도 큰 고통을 받기만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폭풍을 만나면
파도가 솟구쳐 마치 흑산(黑山)과 같고,
어떤 사람이 큰 싸움터에 들어가면
매우 험하고 거친 길을 지나야 하리.
귀한 장자(長者)도 신분을 낮추어
소인들을 가까이함은 색욕 때문이니
이러한 갖가지 큰 고통들은
모두가 쾌락에 집착하는 탐심 때문이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은 능히 갖가지 괴로움을 낸다는 것을 안다.
또한 부처님께서 세 가지 느낌에 비록 즐거운 느낌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즐거움이 적은 까닭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한 말[斗]이나 되는 꿀도 강에 던져지면 꿀의 기운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문】 만약에 세간의 즐거움이 뒤바뀐 인연 때문에 괴롭다면 성인들의 선정은 무루의 즐거움을 내니, 마땅히 실다운 즐거움이어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 즐거움은 어리석은 뒤바뀜에서 생겨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 괴로움이라 하는가?
【답】 이것은 괴로움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무상한 것이 곧 괴로움이라 하셨지만, 유루의 법이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유루의 법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유루의 법은 무상하여 잃어지고 무너지는 까닭에 괴로움을 내거니와,
무루의 법은 마음으로 집착할 수 없기에 비록 무상하더라도 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등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번뇌[結使]가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루의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도제(道諦)를 따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리니, 고제(苦諦)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으니, 유루의 즐거움과 무루의 즐거움이다.
유루의 즐거움은 하천하고 추악하며, 무루의 즐거움은 높고 묘하다.
그런데 왜 하천한 즐거움에는 집착을 내면서 상묘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집착을 내지 않는가?
상묘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집착을 내야 하나니, 마치 금ㆍ은 등 보물은 탐착도 더 무거우리니, 어찌 초목과 같으랴.
【답】 무루의 즐거움은 높고 묘하며 지혜도 많다. 지혜가 많으므로 능히 이런 집착을 여읜다.
유루의 즐거움에는 애욕 등의 번뇌[結使]가 많으니, 애욕은 집착의 근본이 된다.
하지만 진실한 지혜로는 능히 여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집착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무루의 지혜는 항상 일체의 무상을 관찰하나니, 무상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애욕 등 모든 번뇌를 내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양이 호랑이 곁에 있으면 아무리 좋은 풀과 맛있는 물을 얻더라도 살이 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 역시 비록 무루의 즐거움을 받으나 무상과 공을 관찰하기 때문에 염착의 때[脂]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무루의 즐거움은 세 가지 삼매와 열여섯 가지 거룩한 행상[十六聖行]6)을 여의지 않으며, 항상 중생상(衆生相)이 없다.
만일 중생상이 있다면 집착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무루의 즐거움이 비록 가장 묘하더라도 집착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다고 관찰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여 무너지는 모습이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다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욕심의 집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쾌락 때문에 몸을 탐내거니와 누가 이 즐거움을 느끼는가’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마음을 따라 느낀다는 것을 안다.
중생들의 마음은 사리분별을 못하고 뒤바뀐 까닭에 이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 마음은 무상하게 생멸하는 모습이어서 잠시도 머물지 않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가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사람들은 뒤바뀐 까닭에 즐거운 느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욕망을 느끼려 할 때의 마음과 즐거움이 생길 때의 마음은 달라져서 각각 서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마음이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겠는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은 잠깐 머물렀다가 급히 지나가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문】 과거와 미래는 당연히 즐거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현재의 마음이 잠시 머무를 때엔 마땅히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느끼지 않는다” 하는가?
【답】 내가 이미 말하기를,
“급히 지나가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했다.
또한 모든 법은 덧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머물 겨를이 없다.
만일 마음의 첫 생각이 머무른다면 제2의 생각도 머무르리니, 그렇다면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멸하는 모습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일체 유위법의 세 가지 모습[三相]의 머무름[住] 가운데도 멸하는 모습이 있다” 하셨다.
만일 멸함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법이 나중에 멸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이미 멸함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새 옷을 입은 것과 같으니, 처음 입은 날에는 헐지 않으며, 둘째 날에도 헐은 줄 모른다. 이렇게 해서 10년이 되도록 항상 새로워서 헐지 않은 듯하나 실은 이미 헌 것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새것일 때에 약간 헌 기분이 함께했거늘 깨닫지 못한 채 헌 것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머무는 시간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머무를 때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오.
만일 머무름이 없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자가 있을 수 없건만,
세속의 법에 따라 온갖 마음으로 상속하기 때문에 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느낀다고 이르는 줄 알라.
【문】 어찌하여야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한 줄을 아는가?
【답】 내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제 다시 대답하리라.
이 유위의 법은 일체가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먼저는 없다가 이제 있으며, 지금 있다가 나중에 없어지기에 무상하다.
또한 무상한 모습은 항상 유위의 법을 따르며, 유위의 법은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모든 유위의 법은 서로 침범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한 유위의 법에는 두 가지 늙음이 항상 뒤를 따르나니, 첫째는 장차 늙는 것이요, 둘째는 무너져 늙는 것이다.
두 가지 죽음을 항상 따르나니, 첫째는 스스로 죽는 것이요, 둘째는 남이 죽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유위의 법은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유위의 법 가운데서 마음의 무상함은 가장 알기 쉬우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범부들은 가끔 몸이 무상한 줄은 아나, 마음이 무상한 줄은 알지 못한다.
가령 어떤 범부는 ‘몸은 항상하다’고 말하면서 더욱이 마음을 항상한 것으로 삼는데, 이는 큰 미혹이다.
왜냐하면 몸은 10년 또는 20년 동안 머무를 수 있지만,
이 마음은 일월(日月)과 시각[時頃]으로 잠깐 잠깐 지나가 생하고 멸함이 각각 다르고, 생각 생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하려 하니 벌써 생과는 달라졌고, 멸하려 하니 벌써 멸과는 달라지니, 마치 환술과 같아 진실한 모습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이 마음은 누구에게 속했으며, 누가 이 마음을 부리는가?’ 한다.
이렇게 관찰하고는 주재자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일체의 법은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못하고,
자재하지 못하기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
나가 없다면 누가 이 마음을 부릴 수 있겠는가?
【문】 응당 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능히 몸을 부리니, 역시 나가 있어서 능히 마음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국왕이 장수를 부리고, 장수는 병사를 부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당 나가 있어서 마음을 부리고, 마음이 있어 몸을 부리게 되는 것이니, 5욕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까닭이다.
또한 제각기 나의 마음이 있는 까닭에 실제로 나가 있는 줄 안다.
만일 몸에 대해 마음이 뒤바뀌어 나로 착각하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에 남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제각기 나가 있는 줄 안다.
【답】 만일 마음이 몸을 부리고 나가 있어 마음을 부린다면, 응당 다시 나를 부리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다시 나를 부리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끝도 없다.7)
또한 나를 부리는 자가 다시 있다면 두 개체의 정신이 있을 것이요,
만일 다시 나가 없고 나가 마음을 부릴 뿐이라면 또한 마음만이 몸을 부려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정신에 속한다고 한다면, 마음을 제하면 정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만일 아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능히 마음을 부리겠는가?
만일 정신에 앎의 모습이 있다면 어찌 마음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마음만이 의식의 모습이어서 스스로 능히 몸을 부리는 것이요, 정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치 불의 성질이란 능히 물건을 태우는 것이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다.
【문】 불에는 비록 태우는 힘이 있기는 하나 사람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마음에 비록 의식의 모습이 있으나 정신이 아니면 부리지 못할 것이다.
【답】 모든 법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정신은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그대가 비록 숨의 출입이나 고ㆍ낙 등을 느끼는 것으로 정신의 모습이라 여기려 하나 이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호흡의 출입 등은 몸의 모습이요, 고와 낙을 느끼는 것은 마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몸과 마음의 모습을 정신의 모습이라 하겠는가?
또한 때로는 불 스스로가 능히 태워서 사람을 기다리지 않거늘 다만 이름을 붙이기 위하여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는 것이니, 그대의 논리는 틀렸다.
왜냐하면 정신이 곧 사람이니, 사람으로 사람을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이 저마다 있으므로 실제로 나가 있는 줄로 안다.
다만 몸과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나라고 계교한다고 한다면 어째서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 한다.
하지만 그대는 나 있음과 나 없음의 이치도 알지 못한 채,
“어째서 남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라며 묻는구나.
내 몸이나 남의 몸이 모두가 나로부터 있는 것이나 나라는 것은 역시 얻을 수 없다.
물질적 모습인지 혹은 비물질적 모습인지,
항상한지 혹은 무상한지,
끝이 있는지 혹은 끝이 없는지,
가는 자가 있는지 혹은 가는 자가 없는지,
아는 자가 있는지 혹은 아는 자가 없는지,
짓는 자가 있는지 혹은 짓는 자가 없는지,
자재로운 자인지 혹은 자재치 못한 자인지 등 ,
이렇듯 갖가지에서 나란 모습을 얻을 수 없으니,
앞의 「아문품(我聞品)」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모든 법이 화합의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다고 관찰하니,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
[4념처의 세 종류]
이 4념처에 세 종류가 있으니, 성념처(性念處)ㆍ공념처(共念處)ㆍ연념처(緣念處)이다.
무엇이 성념처인가?
몸을 관찰하는 지혜를 신념처(身念處)라 하고,
모든 느낌을 관찰하는 지혜를 수념처(受念處)라 하고,
모든 마음을 관찰하는 지혜를 심념처(心念處)라 하고,
모든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법념처(法念處)라 하나니,
이것이 성념처이다.
무엇이 공념처인가?
몸을 으뜸으로 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도법이 유루인가, 혹은 무루인가를 관찰하는 것이 신념처(身念處)이다.
느낌ㆍ마음ㆍ법을 으뜸으로 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도법이 유루인가 혹은 무루인가 관찰하는 것을 수심법(受心法)의 염처(念處)라 한다.
이것이 공념처이다.
무엇이 연념처(緣念處)인가?
모든 색법(色法), 이른바 10입(入)과 법입(法入) 중 일부분을 신념처라 하며,
여섯 가지 느낌, 즉 눈의 닿임으로 생긴 느낌과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닿임으로 생긴 느낌을 수념처라 하며,
6식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의식을 심념처라 하며,
생각[想衆]과 지어감[行衆]과 세 가지 무위(無爲)를 법념처라 한다.
이것이 연념처이다.
이 성념처는 지혜의 성품이기 때문에 모양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대할 수도 없다.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유루에는 과보가 있고 무루에는 과보가 없거니와, 모두가 유위의 인연으로 생기어 3세(世)에 속하고, 이름에 속하며, 바깥 경계[外入]에 속한다.
지혜로써 관찰하여 유루는 끊어지는 것임을 알고 무루는 끊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며,
유루는 끊을 수 있는 줄 알고 무루는 끊을 수 없음을 안다.
이 닦아야 할 법은 곧 무구[無垢]이니, 결과이기도 하고 결과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체는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니고 4대(大)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위[上]가 있는 법이자 유루의 염처(念處)이니,
여기에 무루의 염처가 있다.
이것은 모두 서로 대응하는 원인이 있다.
4념처는 여섯 종류의 선(善) 가운데서 한 가지인 행중선(行衆善)의 일부를 포섭하고, 행중선의 일부는 4념처를 포섭한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번뇌[漏] 사이에서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혹은 4념처가 유루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유루이면서 4념처 아닌 것도 있으며,
혹은 4념처가 유루인 것도 있고,
혹은 4념처가 아니면서 또한 유루가 아닌 것도 있다.
4념처가 유루 아닌 것이라 함은 무루의 성품인 4념처요,
유루이면서 4념처 아니라 함은 유루의 성품인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의 부분이요,
4념처이면서 유루의 법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성품인 4념처요,
4념처도 아니고 유루의 법도 아니라 함은 무루의 성품인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무루의 법을 말한다.
무루의 네 구절도 또한 이와 같다.
공념처(共念處)라 함은,
이 공념처 가운데 몸과 입의 업은 색(色)이고 나머지는 색이 아니니, 일체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다. 혹은 유루이고 혹은 무루이나 모두가 유위이다.
유루의 염처는 과보가 있고, 무루의 염처는 과보가 없다. 인연으로 생겨난 법으로서 3세에 속한다.
몸과 입의 업은 색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명칭에 포섭되며, 마음ㆍ뜻ㆍ의식은 내입(內入)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외입(外入)에 포섭된다.
지혜로써 유루가 끊어짐을 알며, 무루는 끊어지지 않음을 안다.
또한 유루는 끊을 수 있고 무루는 끓을 수 없음을 아나니, 모두가 닦을 법[修法]으로 모두가 때 없음[無垢]이다. 이는 결과이자 또한 결과를 소유하기도 한다.
일체가 느낌의 법[受法]은 아니니, 몸과 입의 업은 4대로 지어진 것이요, 나머지는 4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두가 위가 있는 법으로서 유루의 염처가 된다.
여기에 무루의 염처가 있으니, 이것은 몸과 입의 업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 있는 것은 아니고, 서로 응하는 인이 아니며, 나머지는 서로 응하는 인이다.
5선분(善分)은 4념처를 포섭하고, 4념처는 또한 5선분을 포섭하거니와 나머지는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누법(漏法)에 속하지 않는다.
혹은 4념처가 유루가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유루이면서 4념처가 아닌 것도 있으며, 혹은 4념처가 유루이기도 한 것도 있고, 혹은 4념처도 아니고 유루도 아닌 것이 있다.
4념처가 유루가 아닌 것이라 함은 무루의 4념처를 이르는 말이요,
유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라 함은 유루의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의 법이요,
4념처가 유루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4념처요,
4념처도 아니요 유루도 아니라 함은 허공, 수연진(數緣盡)과 비수연진(非數緣盡)이다.
혹은 4념처가 무루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4념처가 무루이기도 하고, 혹은 4념처가 아니기도 하고 무루가 아니기도 하다.
혹은 4념처가 무루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4념처요, 무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라 함은 세 가지 무위법이요, 4념처가 또한 무위법이라 함은 무루의 4념처를 말한다.
4념처도 아니고 무루도 아니라 함은 유루의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법을 말한다.
이것이 연념처이다.
연념처(緣念處) 가운데 한 염처는 색(色)이며 세 염처는 색이 아니다.
세 가지는 볼 수 없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볼 수 있는 것이란 1입(入)이요, 볼 수 없는 것이란 9입 및 나머지 1입의 일부분[少分]이다.
세 가지는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대할 수 있는 것은 10입이며, 대할 수 없는 것은 나머지 1입의 일부분이다.
신념처에서 유루는 10입과 1입의 일부분이요, 무루는 1입의 일부분이다.
수념처에서 유루의 의근(意根)과 상응하는 것은 유루요, 무루의 의근과 상응하는 것은 무루이다.
심념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법념처에서 유루의 상온[衆]과 행온은 유루요, 무루의 상온과 행온과 무위법은 무루이다.
세 가지 무위가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상온과 행온은 유위요, 세 가지 무위법은 무위이다.
착하지 못한 신념처와 착한 유루의 신념처는 과보가 있고, 무기의 신념처와 무루는 보가 없다.
수념처ㆍ심념처ㆍ법념처 역시 그와 같다.
셋은 인연에서 생긴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는 인연에서 생기고, 무위는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셋은 3세(世)에 포섭된다. 마땅히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는 3세에 포섭되고, 무위는 3세에 포섭되지 않는다.
한 염처는 색(色)에 포섭되고, 셋은 명(名)에 포섭된다.
한 염처는 내입(內入)에 포섭되고 수념처와 법념처는 외입(外入)에 포섭된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는 내입에 포섭되기도 하고 외입(外入)에 포섭되기도 한다.
다섯 가지 내입은 내입에 포섭되고, 다섯 가지 외입 및 나머지 일입의 일부분은 외입에 포섭된다.
지혜로써 아나니, 유루는 단견(斷見)이고 무루는 단견이 아니며, 유루는 끊을 수 있고 무루는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닦는 법[修]을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선(善)은 마땅히 닦아야 하고,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닦지 말아야 한다. 수념처ㆍ심념처 역시 그와 같다.
법념처에서 유위의 착한 법은 닦아야 하고, 불선과 무기와 수연진(數緣盡)8)은 닦지 말아야 한다.
때[垢]를 분별하건대, 신념처가 숨어 없어지는 것은 때요, 숨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때가 아니다.
수ㆍ심ㆍ법의 염처 역시 그와 같다.
3념처는 결과[果]이면서 또한 과보를 지니는 것이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는 혹은 결과이면서 결과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기도 하고, 혹은 결과이기도 하고 결과를 가지지 않기도 한 것이 있다.
수연진은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지 않은 것이요,
유위의 법념처는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기도 한 것이요,
허공과 비수연진(非數緣盡)9)은 결과도 아니면서 결과를 가지지도 않은 것이다.
세 가지 불수(不受)를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수(受)이고, 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은 불수(不受)이다.
세 가지가 4대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9입과 2입의 일부는 4대로 지어진 것이고, 1입의 일부는 4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세 염처에 위가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 허공과 비수연진은 위가 있고, 열반은 위가 없다.
4념처는 혹은 유루이면서 유(有)이고, 무루이면서 비유(非有)이다.
2념처는 상응하는 인[相應因]이요 1념처는 상응하지 않는 인[不相應因]임을 일단 분별하건대,
수념처와 심념처는 상응하는 인이요,
신념처는 상응하지 않는 인이다.
법념처에서 상온 및 상응하는 행온은 상응하는 인이요,
나머지는 상응하지 않는 인이다.
4념처의 부분이 여섯 가지 선법(善法)을 포섭하고, 여섯 가지 선법이 또한 4념처분을 포섭한다.
불선분(不善分)ㆍ무기분(無記分)도 그와 같아서 종류에 따라 서로 포섭한다.
세 가지 누(漏)가 1념처분에 포섭되고, 1념처분이 다시 세 가지 누에 포섭되며,
유루가 4념처분에 포섭되고, 4념처분이 다시 유루에 포섭되며,
무루가 4념처분에 포섭되고, 4념처분이 다시 무루에 포섭된다.
이러한 이치들은 「천난품(千難品)」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안의 몸, 밖의 몸]
【문】 무엇을 안의 몸이라 하며, 무엇을 밖의 몸이라 하는가?
안팎의 몸은 말할 때 이미 다 포섭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안팎의 몸의 관법을 말하는가?
【답】 안이란 자기의 몸이요, 밖이란 남의 몸이다.
자기의 몸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몸 안의 부정함이요, 둘째는 몸 밖의 가죽ㆍ털ㆍ손발톱ㆍ머리카락 등이다.
또한 수행자는 시체가 부풀어 터진 것을 보면 그 모습을 취하여 자신을 관찰하기를,
“자신의 몸도 그러한 모습이고 그러할 것이니, 나는 이러한 법을 아직 여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의 죽은 시체는 밖의 몸이요, 수행자의 몸은 안의 몸이다.
수행자가 가끔 단정한 여자를 보고 마음이 집착되면 즉시에 그 몸이 더러운 것이라고 관찰하나니, 이것이 밖의 몸이요,
자신의 몸도 역시 그러하리라고 관찰하는 것은 안의 몸이다.
또한 눈[眼] 등 다섯 감관[情]은 안의 몸이요, 색 등 5진(塵)는 밖의 몸이며,
4대는 안의 몸이요, 4대로 지어진 색은 밖의 몸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자리는 안의 몸이요,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곳은 밖의 몸이며,
자기의 몸과 눈 등 모든 감관은 안의 몸이요, 처자ㆍ재보ㆍ전답ㆍ주택 등 사용되는 물건들은 밖의 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물질의 법[色法]이 모두 신념처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이 안의 몸에서 깨끗하고 항상하고 나 있고 즐거움을 구하되 자세히 구하여도 도무지 얻지 못하니, 먼저 말한 관법에서와 같다.
안으로 관찰하여 얻을 수 없으니 행여 밖에 있을까 한다. 왜냐하면 밖의 물건은 중생들의 집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밖의 몸을 관찰할 때에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안으로 관찰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밖에 혹 있을까’ 하여,
밖으로 관하나 역시 얻지 못한다.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잘못 관찰했다면 이제 다시 안팎을 통틀어 관찰하리라’ 한다.
안을 관찰하고 밖을 관찰하는 것은 별상(別相)이요,
동시에 함께 관찰하는 것은 총상(總相)이다.
총관과 별관으로도 모두 얻을 수 없으면 관할 바가 이미 끝난 것이다.
[안의 느낌과 밖의 느낌]
【문】 신념처로 안팎을 얻어야 한다면, 모든 감각[受]은 외입에 속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안의 느낌[內受]과 밖의 느낌[外受]을 분별하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느낌[受]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다.
몸의 느낌은 밖이요, 마음의 느낌은 안이다.
또한 다섯 의식[識]과 상응하는 느낌은 밖이요, 제6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안이다.
12입의 인연으로 생긴 모든 느낌에서 안의 6입의 영역[分]에 생긴 느낌은 안이요, 밖의 6입의 영역에 생긴 모든 느낌은 밖이며,
거친 느낌은 밖이요, 미세한 느낌은 안의 것이다.
두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안의 괴로움[內苦]과 밖의 괴로움[外苦]이다.
안의 괴로움에 두 종류가 있으니,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이다.
몸의 괴로움이란, 몸이나 머리의 통증 등 404종의 병으로서 이것을 몸의 괴로움이라 한다.
마음의 괴로움이란, 근심ㆍ걱정ㆍ성냄ㆍ두려움ㆍ질투ㆍ의심 등이니, 이런 것들이 마음의 괴로움이다.
이 두 가지 괴로움이 합쳐서 안의 괴로움이 된다.
밖의 괴로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왕[王者]ㆍ자신을 압도하는 자ㆍ악적ㆍ사자ㆍ호랑이ㆍ독사 등이 핍박해서 해치는 일이요,
둘째는 바람ㆍ비ㆍ추위ㆍ더위ㆍ우레ㆍ번개ㆍ벼락 등이니, 이 두 가지 괴로움을 밖의 느낌이라 한다.
즐거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안의 법을 반연하는 것을 안의 느낌이라 하고, 밖의 법을 반연하는 것을 밖의 느낌이라 한다.
또한 108가지 느낌을 안의 느낌이라 하고, 나머지는 밖의 느낌이라 한다.
[안의 마음, 밖의 마음]
【문】 마음은 내입에 속하거늘 어찌하여 밖의 마음을 관하라 하는가?
【답】 마음이 비록 내입에 속하기는 하나 밖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밖의 마음이라 하고,
안의 마음을 반연하기 때문에 안의 마음이라 한다.
의식은 안의 마음이요, 5식은 밖의 마음이다.
마음을 거두어 선에 드는 것은 안의 마음이요, 산란한 마음은 밖의 마음이다.
안의 5개(蓋)와 안의 7각지[覺]에 상응하는 마음은 안의 마음이요, 밖의 5개와 밖의 7각지에 상응하는 마음은 밖의 마음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안팎을 분별하나니, 이것이 안팎의 마음이다.
[안의 법, 밖의 법]
【문】 법념처는 외입에 속하거늘 어찌하여 안의 법을 관찰한다 하는가?
【답】 느낌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에서 능히 안의 법을 반연하는 마음에 속하는 법은 안의 법이요,
밖의 법을 반연하는 마음에 속하는 법 및 무위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밖의 법이 된다.
또한 의식으로 반연하는 법을 안의 법이라 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연에 의하여 의식이 난다” 하셨다.
여기에서 느낌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속하는 법은 안의 법이요, 그 밖의 심불상응행과 무위의 법은 밖의 법이다.
[4정근]
4정근(正勤)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성정근(性正勤)이요, 둘째는 공정근(共正勤)이다.
성정근이라 함은 도를 위하는 까닭에 네 가지 정진이 있으니, 곧 두 가지 착하지 못한 법을 막고, 두 가지 착한 법을 모으는 것이다.
4념처의 관법을 행할 때에 게으른 마음이 생기면 5개(蓋) 등의 번뇌가 마음을 덮고, 다섯 가지 믿음 등 선근을 여읜다.
이때 착하지 못한 법이 이미 생겼거든 끊기 위해서,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생기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한다.
믿음 등 선근이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생기게 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거든 더욱 늘어나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한다.
정진의 법이 4념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정근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일곱 종류의 법 가운데서 이 네 가지를 정근이라 하고, 나중의 여덟 가지는 정도(正道)라 하면서,
나머지의 것은 정(正)이라 부르지 않는가?
【답】 네 가지 정진은 마음이 용맹하게 발동(發動)하여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정근이라 하고, 도취(道趣)의 법을 행하는 까닭에 삿된 법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정도라 한다.
성(性)이란 네 가지 정진의 성품이요,
공(共)이란 네 가지 정진의 성품을 으뜸으로 삼은 인이연으로 생한 도이다.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 색이거나 혹은 무색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4정근을 행할 때에 마음이 조금 산란해지는데, 선정으로 마음을 거두기 때문에 여의족(如意足)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좋은 음식에 소금이 적으면 맛이 없다가 소금을 넣으면 맛이 구족해져 뜻에 맞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사람이 두 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곁들여 좋은 말이나 좋은 수레를 얻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듯이,
수행자 역시 이와 같아서, 4념처의 진실한 지혜와 4정근 가운데 정정진을 얻으면 정진하는 까닭에 지혜가 더욱 많아진다.
이에 정의 힘이 조금 약해도 네 가지 선정을 얻어 마음을 거두기 때문에 지혜와 선정의 힘이 균등해져서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여의족이라 한다.
【문】 4념처와 4정근에도 이미 선정이 있거늘 어찌하여 여의족이라 하지 않는가?
【답】 거기에도 비록 정이 있기는 하나 지혜와 정진의 힘만 많고 선정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수행자는 뜻하는 대로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네 가지 선정이라 함은 욕(欲)10)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고, 정진(精進)11)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는다. 다시 선정의 인연으로 도가 생겨나니,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마음12)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고, 사유(思惟)13)가 주가 되어 선정을 얻는다.
선정의 인연으로 도가 생겨나니,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착한 5중(衆)과 함께하는 것을 공여의라 하고, 욕(欲)ㆍ주(主)ㆍ등(等)의 네 가지 선정을 성여의라 한다.
4정근ㆍ4여의족은 성념처와 공념처 가운데에서 자세히 분별해 설명하는 바와 같다.
[5근]
5근(根)이라 했는데,
도(道)와 조도(助道)의 착한 법을 믿으니, 이를 신근(信根)이라 한다.
수행자가 이 도와 조도법을 행할 때에 부지런히 구하여 쉬지 않는 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 하며,
도와 조도법만을 생각할 뿐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을 염근(念根)이라 하며,
일심으로 생각해 흩어지지 않는 것을 정근(定根)이라 하며,
도와 조도법을 위하여 무상 등의 열여섯 가지 행(行)을 관찰하는 것을 혜근(慧根)이라 한다.
[5력]
이 5근이 자라나서 번뇌에 파괴되지 않는 것을 역(力)이라 하나니, 5근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5근ㆍ5력은 행온[行衆]에 속하여 항상 함께 서로 응하나니, 심행(心行)ㆍ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을 따르며, 마음과 함께 생겨나고 마음과 함께 머무르며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
만일 이런 법이 있으면 반드시 바른 선정에 들고, 이런 법이 없다면 반드시 삿된 선정에 든다.
[7각지]
7각지의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앞에서 뜻을 설명하기는 했으나 아비담의 가르침으로 설명한 것은 아니다.
【답】 그렇다면 이제 마땅히 설명하리라.
4념처는 그 의미가 곧 7각분(覺分)이니, 무색이고, 볼 수 없고, 대할 수 없고, 무루이고, 유위이고, 인연으로 생긴 것이고, 삼계에 속하고, 이름에 속하고, 외입(外入)에 속한다.
지혜로써 견해를 끊는 것이 아니며,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닦는 법은 때[垢] 없는 법이 된다.
이는 과위이며, 또한 결과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느낌의 법이 아니며, 4대(大)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위가 있는 법도 아니며, 상응하는 인[相應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두 선분[二善分]14)은 7각분에 포섭되고, 7각분은 두 선분에 포섭되나, 불선(不善)과 무기법(無記法)과 유루법(有漏法)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의 두 부분[二分]이 7각분을 포섭하고, 7각분이 무루의 두 부분을 포섭하나니, 이러한 갖가지는 「천난품(千難品)」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8정도]
8성도분(聖道分)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정견(正見)이 곧 지혜[慧]이다. 이는 4념처와 혜근(慧根)과 혜력(慧力)과 택법각분(擇法覺分)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정사유(正思惟)는 4제를 관찰할 때에 무루의 마음에 상응하며, 사유가 발동하여 지각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정방편(正方便)은 4정근과 정진근과 정진력과 정진각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정념(正念)은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분(念覺分)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정정(正定)은 여의족(如意足)과 정근(定根)과 정력(定力)과 정각분[定覺]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을 이제부터 설명하리라.
이들은 네 가지 삿된 생활[邪命]을 제거하여 구업(口業)을 다스려서, 무루의 지혜로 그 밖의 삿된 구업을 제거하고 버리며 여읜 것을 정어(正語)라고 한다.
정업(正業)도 또한 이와 같다.
다섯 가지 삿된 생활을 무루의 지혜로써 제거해 버리고 여의는 것을 정명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삿된 생활인가?
【답】 첫째는 수행자가 이양을 위하여 거짓으로 특이한 모습을 꾸며 나타내는 것이요,
둘째는 이양을 위하여 자기의 공덕을 선전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양을 위하여 길흉을 점쳐 남에게 말해 주는 것이요,
넷째는 이양을 위하여 높은 소리로 다투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이양을 위하여 이미 얻은 공양을 자랑삼아 이야기해서 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곧 삿된 인연으로 살아가는 까닭에 사명(邪命)이라 한다.
이 8정도에 세 구분이 있다.
세 가지는 계의 구분[戒分]이요, 세 가지는 선정의 구분(定分)이요, 두 가지는 지혜의 구분[慧分]이다.
지혜의 구분과 선정의 구분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으며, 이제 계의 구분에 대하여 설명하리라.
계의 구분은 곧 물질의 성품ㆍ볼 수 없음ㆍ대할 수 없음ㆍ무루ㆍ유위ㆍ인연생ㆍ3세(世)에 속하고 물질에 속한다.
이름에 속하거나 외입(外入)에 속하지 않으며, 견해를 끊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혜로써 안다.
법을 닦음은 때[垢] 없는 법이다. 이는 과위[果]이며 또한 결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느낌의 법이 아니고, 4대로 지어진 것ㆍ위가 있는 법ㆍ 상응하는 인(因)이 아니다.
한 선분[一善分]으로 세 정[三正]15)을 포섭하고, 세 정으로 한 선분을 포섭하며,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와 누(漏)와 유루(有漏)는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의 한 법이 세 정을 포섭하고, 세 정이 또한 무루의 한 법을 포섭하나니, 이렇게 갖가지로 분별함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 37품은 초선의 경지[初禪地]에 빠짐없이 있고, 아직 이르지 않은 지위에는 36품이 있으니, 희각지(喜覺支)를 제한다.
제2선에도 36품이 있으니, 정행(正行)을 제한다.
선의 중간인 제3선과 제4선에는 35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을 제한다.
3무색정에는 32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과 정어와 정업과 정명을 제한다.
유정(有頂)에는 22품이 있으니, 7각지와 8성도분을 제한다.
욕계 중의 22품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이 성문의 법에서 분별한 이치이다.
2. 마하연에서 말하는 37품의 이치
[4념처]
【문】 마하연에서 말하는 37품의 이치는 어떠한가?
【답】 보살마하살은 4념처를 행하여 이 안몸을 관찰하되,
“무상하고 괴롭기가 마치 병 같고 종기 같다.
고깃덩어리는 썩고 문들어지며 더러운 것이 가득하여 아홉 구멍에서 흘러나오니, 이는 다니는 변소[行廁]이다”라고 본다.
이와 같이 몸은 나쁜 것만이 드러나서 하나도 깨끗한 곳이 없거늘 뼈가 버티고 살로 덮이고 힘줄이 얽히고 가죽으로 싸여 있다고 관찰한다.
몸은 또한 전생의 유루업의 인연으로 받은 것으로, 금생에 목욕과 꽃ㆍ향ㆍ의복ㆍ음식ㆍ와구ㆍ약품 등으로 이루어진 바이다.
마치 수레에 두 바퀴가 있어 소가 끄는 힘 때문에 능히 목적지에 이르듯이,
두 세상의 인연으로 몸이란 수레가 이루어지고, 의식의 소에 끌리어 두루 왕래한다.
이 몸은 4대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마치 물거품 덩어리와 같아 허망하여 견고함이 없다.
이 몸은 무상하여 오래되면 반드시 무너진다.
이 몸의 모습은 몸 안에서도 얻을 수 없고, 밖에 있지도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다.
몸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하니, 지각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 마치 담장이나 기와쪽 같다.
이 몸에는 일정한 몸의 모습도 없고, 이 몸을 만든 이도 없고, 또한 만들게 하는 자도 없으니,
이 몸은 과거[先際]나 미래[後際]나 현재[中際]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8만 털구멍마다의 벌레와 한량없는 질병과 주림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형벌 등이 항상 이 몸을 괴롭힌다.
보살마하살은 몸에 대하여 이같이 관찰하고는 나의 몸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며,
자유롭지 못하여 스스로 짓거나 짓는 자가 있어 이 몸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몸의 모습은 공하여 허망한 인연으로부터 생겼고,
이 몸은 거짓으로 존재하며, 본업의 인연에 속함을 안다.
보살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의 모습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
몸을 두루 관찰하건대 이 몸은 나 없고,
나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기에 원(願)을 짓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한다면 작위 없는 지혜의 문[無作智門]에 들어가 몸이 무작(無作)임을 알게 된다.
무작이란 다만 모든 법이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이 모든 인연이 이 몸을 짓는 자이면서 또한 허망한 전도 때문에 존재하나니,
이 인연 가운데는 또한 인연의 모습이 없으며, 이 인연에 의해 생한 것에도 또한 생하는 모습이 없다.
이와 같이 사유한다면 이 몸은 본래부터 나는 모습이 없음을 아나니,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잡을 수 없다.
무생이기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기에 무생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범부인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모든 물들은 욕망[染欲]과 집착심을 여의고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밖의 몸을 관찰하고 안팎의 몸을 관찰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보살은 어떻게 모든 느낌을 관찰하는가?
곧 안의 느낌을 관찰하건대, 이 느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혹은 괴롭고 혹은 즐겁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이 모든 느낌은 온 자리도 없고, 멸하여 이르는 곳도 없다. 오직 허망하게 전도된 망상에서 생겼으며, 이의 과보는 전생의 업과 인연에 속한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느낌을 구하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지도 않으니, 이 모든 느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我所] 없으며, 무상하고 무너지는 법임을 안다.
이 3세의 모든 느낌이 공ㆍ무상ㆍ무작임을 관찰하고는 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간다.
또한 모든 느낌의 생멸을 관찰하여 모든 느낌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도 아나니, 이와 같이 해서 불생문(不生門)에 들어간다.
모든 느낌이 불생임을 아는 까닭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으므로 불생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서 마음을 대상에 묶어둔다면,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있을지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써 모든 느낌을 관찰하니, 이것이 수념처이다.
밖의 느낌을 관찰하고, 안팎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하는가?
곧 보살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생(生)ㆍ주(住)ㆍ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일정한 실제 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성품 없고 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항상 깨끗한 모습이거늘 객진번뇌[客煩惱]16)의 모습에 집착되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지말에 진실한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시간ㆍ다가올 시간ㆍ현재의 시간도 없으며,
빛 없고 형상 없고 대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진실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이라 한다.
마음의 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로 생멸하는 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분별치 않으나 마음의 청정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객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은 어떻게 법념처(法念處)를 관찰하는가?
곧 일체법을 관찰하건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거늘,
오직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 허망한 견해에서 생겨나 실제로 정해진 것이 없다.
이 법이 누구의 법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곧 모든 법 가운데에서 법의 모습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어떤 법이 합하거나 흩어지는 일은 없다.
일체법이 존재하지 않음이 마치 허공과 같고,
일체법이 거짓됨이 마치 허깨비 같으니,
모든 법은 성품은 깨끗해서 서로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은 받아들임이 없으니, 모든 느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알 수가 없으니,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거짓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어떤 법이 같은 모습[一相]이라거나 혹은ㆍ다른 모습[異相]임을 보지 않아 일체법은 공하고 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한 공이다.
진실한 공인 까닭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는 까닭에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법이 일어나거나 혹은 멸하거나 머무름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문에 들어간다.
이때 비록 모든 법의 생멸을 관찰하나 또한 무상문(無相門)에도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일체법이 모든 모습을 여읨은 지혜로운 이라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마음을 대상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법의 모습을 수순하되,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네 가지 법이 처할 바가 없는 줄 안다.
이것이 안의 법념처이다.
밖의 법념처와 안팎의 법념처 역시 이와 같다.
[4정곤, 4여의족]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도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공하여 처할 바가 없음을 관찰해야 한다.
[5근]
어떤 것이 보살이 5근(根)을 행하는 것인가?
곧 보살마하살이 5근을 관찰하여 5근을 닦는 것이다.
신근(信根)이라 함은 일체법이 인연에서 생겨나, 뒤바뀐 망견의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마치 불을 돌리는 바퀴[旋火輪] 같고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줄 믿으며,
모든 법은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나가 없으며, 질병 같고 종기 같고 가시(刺) 같아서 불행하게 변하고 무너진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어서 마치 빈주먹으로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있지 않고 온 곳도 없으며, 멸하여 이르는 곳이 없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공하고 모습이 없고, 지음이 없고,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지음 없고, 모양 없다고 믿으며, 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믿는다.
이러한 신근을 얻는 까닭에 다시는 물러서지 않나니, 신근으로 으뜸을 삼아 지계에 잘 머무르고, 지계에 머무르고 나서는 신심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일심으로 업과 과보에 의함을 믿고 모든 사견을 여의어 다시는 다른 말을 믿지 않으며,
오직 불법만을 받아들이고 중승(衆僧)을 믿으며,
진실한 도에 머물러서 곧은 마음으로 유연하게 참아내며,
통달하고 걸림 없어 동요치 않고 무너지지 않아 힘의 자재로움을 얻는다.
이것이 신근이다.
정진근이라 함은 밤과 낮으로 항상 정진하여 5개(蓋)를 제거해 5근(根)을 잘 지키는 것이다.
또한 깊은 경법을 얻고자 하고 알고자 하고 행하고자 하고 외우고자 하고 읽고자 하며, 나아가 듣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착하지 못한 법이 일어나거든 신속히 멸하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겨나지 못하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모든 착한 법은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더욱 늘어나게 한다.
또한 착하지 못한 법을 싫어하지 않고, 착한 법을 사랑하지도 않아서 평등한 정진을 얻으며,
곧장 전진하여 물러나지 않아서 바른 정진을 얻어 집중된 마음[定心]인 까닭에 일컬어 정진근이라 한다.
염근(念根)이라 함은 보살이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을 갖추고자 하고, 몸ㆍ입ㆍ뜻의 업을 맑히고자 하며,
모든 법의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짐을 지혜 가운데서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며,
일심으로 고ㆍ집ㆍ멸ㆍ도를 생각하며,
일심으로 생각해 근ㆍ력ㆍ각지ㆍ도ㆍ선정ㆍ해탈ㆍ생멸ㆍ출입을 분별하며,
일심으로 모든 법의 불생ㆍ불멸ㆍ무작(無作)ㆍ무설(無說)을 생각하며,
무생지혜(無生智慧)를 얻어 모든 불법을 구족하려는 까닭에 일심으로 생각하며,
성문ㆍ벽지불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도록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은 심히 깊고 청정한 관행(觀行)을 얻는 까닭에 이 같은 자재한 생각[念]을 얻으니, 이것이 염근이다.
정근(定根)이라 함은 보살이 선정의 모습을 잘 알아서 능히 갖가지 선정을 내고, 분명하게 선정의 문호를 알며,
선정에 들고 선정에 머물고 선정에서 나오기를 잘 알며,
선정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맛들이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대상할 바[所緣]와 대상을 깰 바[壞緣]를 잘 알아서 모든 선정에 자재하게 노닐며,
또한 대상없는 선정도 잘 알며,
남의 말을 따르지 않고 선정만을 따르지도 않아서 행함에 자재롭고 출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정근이라 한다.
혜근(慧根)이라 함은 보살이 괴로움을 다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지혜로써 모든 법을 여의고 열반을 이룬다. 곧 지혜로써 일체의 삼계는 무상하며 3쇠(衰)17)ㆍ3독(毒)의 불에 탄다고 관찰하니, 이렇게 관하고는 삼계 안에서 지혜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일체의 삼계를 도리어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으로 삼아 일심으로 불법을 구하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한다.
이 보살의 지혜는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삼계에서 의지하는 바가 없어 생각을 따라 일어나는 5욕에서 마음은 늘 떠나 있나니, 이 혜근의 힘 때문에 한량없는 공덕을 쌓아 모은다.
모든 법의 실상에 예리하게 들어가 장애 없고 어려움 없으며, 세간에 대해서 근심하는 일 없고, 열반에 대해서 기뻐하는 일 없나니, 자재로운 지혜를 얻는 까닭에 혜근이라 한다.
보살이 이 5근(根)을 얻으면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모습을 잘 아나니,
욕망에 물든 중생의 근기를 알고, 욕망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내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냄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어리석은 중생의 근기를 알고, 어리석음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악도(惡道)에 떨어지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인간세상에 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천상에 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상ㆍ중ㆍ하의 중생의 근기를 알며,
죄지은 중생의 근기를 알며, 죄 없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거슬리고 순종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항상 태어날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선근이 두터운 중생과 얕은 중생의 근기를 알며, 바르게 집중됐거나 삿되게 집중됐거나 집중되지 못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가벼이 날뛰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지중(持重)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간탐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능히 버리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공경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공경치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계행이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못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내거나 인욕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정진하거나 게으름 피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마음이 산란하거나 섭수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우치하거나 지혜로운 중생의 근기를 알며,
두려움이 있거나 두려움이 없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잘난 체하거나 잘난 체하지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바른 도와 삿된 도의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감관을 지키거나 감관을 지키지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문을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벽지불을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불도를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아나니,
중생의 근기를 아는 가운데 자재한 방편의 힘을 얻는 까닭에 일컬어 근기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 5근을 행하고 증장시켜 능히 번뇌를 깨뜨리고 중생을 제도하며 무생법인을 얻나니, 이를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 한다.
또한 하늘ㆍ마ㆍ외도가 능히 방해하거나 부수지 못하니, 이것을 힘이라 한다.
[7각분]
7각분(覺分)이라 함은,
보살이 일체법에 대해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염각분(念覺分)이라 하고,
일체법 가운데 착한 법ㆍ나쁜 법ㆍ무기의 법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을 택법각분(擇法覺分)이라 하고,
삼계에 들지 않고서 모든 계의 모습을 파괴하는 것을 정진각분(精進覺分)이라 하고,
일체의 만들어진 법에 대하여 즐기어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 근심과 기쁨의 모습이 무너진 까닭에 희각분(壽覺分)이라 하고,
일체법 가운데 마음의 대상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으므로 제각분(除覺分)이라 하고,
일체법은 항상 안정된 모습이어서 어지러운 것도 흩어진 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을 정각분(定覺分)이라 하고,
일체법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러한 버리는 마음[捨心]조차 보지 않는다면 이를 사각분(捨覺分)이라 한다.
보살이 7각분의 공함을 관찰함은 이와 같다.
【문】 이 7각분은 어째서 간략하게 설명하는가?
【답】 7각분 가운데서 염ㆍ혜ㆍ정진ㆍ정은 위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나머지 세 각분을 설명하리라.
보살은 이 희각분을 행할 때에 이 희(喜)가 진실이 아닌 줄 관한다. 왜냐하면 이 희는 인연으로부터 생겨난 작법(作法)이고, 존재의 법[有法]이며, 무상한 법이며, 집착할 만한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집착이 일어나면 이것은 무상한 모습이고, 변하고 무너져 버려 곧 근심을 일으키게 된다.
범부들은 뒤바뀌었기 때문에 마음이 집착한다.
만일 모든 법이 실제로 공한 줄로 알면 이때에 뉘우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헛된 것을 받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암흑 속에서 기갈에 시달리다 더러운 것을 먹었는데 낮에 보고서야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과 같도다.’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진실한 지혜 가운데에서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참기쁨(眞喜)이다.
이러한 참기쁨을 얻고는 먼저는 몸의 거칢[身麤]을 제거하고, 다음에는 마음의 거칢을 제거한다. 그러고 나서는 일체의 법상을 제하고 쾌락이 몸과 마음에 두루함을 얻게 되나니, 이것이 제각분이다.
이미 희각분과 제각분을 얻고는 모든 관행(觀行)을 버리나니,
이른바 무상관ㆍ고관(苦觀)ㆍ공관(空觀)ㆍ무아관(無我觀)ㆍ생멸관(生滅觀)ㆍ불생불멸관(不生不滅觀)ㆍ유관(有觀)ㆍ무관(無觀)ㆍ비유비무관(非有非無觀)이다.
이러한 희론을 모두 버리나니, 왜냐하면 모습 없고, 반연 없고, 지음 없고, 희론 없어서 항상 적멸한 것이 참된 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버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문득 모든 다툼이 있게 된다.
만일 유를 진실이라 한다면 무를 헛되다 하고,
무를 진실이라 한다면 유를 헛되다 하며,
비유ㆍ비무를 진실이라 하면 유무를 헛되다 하며,
진실에다 애착을 내고 헛된 데는 성을 내어 근심과 기쁨의 영역을 일으키거늘, 어찌 버리지 않으리오.
이와 같이 해서 희각분과 제각분과 사각분을 얻으면 7각분이 구족히 만족해진다.
[8정도]
이라 했는데, 정견(正見)ㆍ정방편(正方便)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니, 이제 정사유(正思惟)만을 말하리라.
[정사유]
보살은 모든 법이 공하여 얻을 바 없음에 머무른다.
이러한 정견 가운데서 정사유의 모습을 관찰하여 모든 사유는 모두가 삿된 사유임을 안다.
나아가 열반을 사유하고 부처를 사유함도 또한 이와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사유의 분별을 끊는 것을 정사유라 하기 때문이다.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진실치 못하고 거짓되고 뒤바뀐 것을 따르기 때문에 있을 뿐으로 분별ㆍ사유의 모습이란 모두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이처럼 바른 사유 가운데 머물러서 바르거나 삿됨을 보지 않고 모든 사유와 분별을 초월하나니, 이것이 정사유이다.
일체의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평등하며, 평등하기 때문에 마음이 집착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일컬어 보살의 정사유의 모습이라 한다.
[정어]
정어(正語)라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말이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치 못하고 뒤바뀐 것을 따라 모습을 취하고 분별해서 생겨나는 것임을 안다.
이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語]에는 말의 모습이 없어서 일체의 구업(口業)이 멸하고 모든 말의 진실한 모습을 아는 이것이 정어이다. 이러한 말은 모두가 온 곳도 없고, 사라져도 가는 곳도 없다.’
이러한 보살이 정어의 법을 행해 말한다면, 이는 모두 실상 가운데 머물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이 정어에 머무르면 청정한 구업을 짓고 일체의 언어의 실상을 알며, 비록 말하는 바가 있으나 삿된 말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다.
[정업]
정업(正業)이라고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업은 삿된 모습이고 허망하고 진실이 없으며, 모두가 짓는 모습이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어떤 업도 정해진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만일 일체의 업이 모두 공하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시 등은 착한 업이고, 살생 등은 나쁜 업이고, 그 밖의 동작은 무기업이다” 하셨는가?
【답】 모든 업 가운데는 하나조차 없거늘 어찌 셋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행하는 때[時]가 이미 지났으면 지난 업은 없는 것이요, 아직 이르지 않았더라도 역시 지난 업은 없는 것이요, 현재 지나가고 있는 때에도 역시 지난 업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난 업은 없는 것이다.
【문】 이미 지난 곳에는 없어야 되고, 아직 이르지 않은 곳 역시 없어야 되겠지만, 지금 지나가는 곳이라면 마땅히 지나는 업이 있어야만 되지 않겠는가?
【답】 지금 지나가는 곳에도 역시 지난 업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난 업을 제하고는 지금 지나는 곳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난 업을 제하고도 지금 지나가는 곳을 얻을 수 있다면, 여기에 마땅히 ‘간다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지금의 가는 곳을 제하면 곧 가는 업도 없고, 가는 업을 제하면 곧 지금의 간다는 것도 없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연하는 까닭에 지금의 가는 곳에 감이 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가는 곳에 지난 업이 있다면 지난 업을 떠나서 마땅히 지금 가는 곳이 있어야 하고, 지금의 가는 곳을 떠나서 마땅히 지난 업이 있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가?
【답】 한때에 두 가지 가는 업[去業]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가지 지난 업이 있다면, 두 가지 가는 이[去者]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는 이를 제하고는 감도 없고, 가는 이를 제하고는 지금의 가는 곳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가는 곳이 없는 까닭에 가는 이도 없다.
또한 가지 않는 이 역시 가지 않는 까닭에 가는 업이 없나니, 만약에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를 제하면 셋째의 가는 이는 없다.
【문】 가지 않는 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럴 수 있겠지만, 가는 이야 어찌하여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지난 업을 제하고는 가는 이는 얻을 수 없고, 가는 이를 제하고서는 지난 업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업이 공한 것을 정업이라 한다.
보살들은 일체의 업의 평등에 들어가서 삿된 업으로써 악을 이루지 않고, 바른 업으로써 선을 이루지도 않는다. 곧 짓는 바가 없어서 바른 업도 짓지 않고 삿된 업도 짓지 않는다. 이것을 진실한 지혜라 하니, 이것이 곧 정업이다.
또한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바름도 없고 삿됨도 없으니, 여실하게 모든 업을 알며, 여실하게 알고 난 뒤에는 짓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
이 같은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바른 업만 있고 삿된 업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의 정업이라 한다.
[정명]
정명(正命)이라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생활수단이 모두 바르고 삿되지 않으며,
희론 아닌 지혜에 머물러서 정명을 취하지도 않고 삿된 생활 방법을 버리지도 않는다.
또한 바른 법에 머무르지도 않고 삿된 법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항상 청정한 지혜에 머물러서 평등한 정명에 들어간다.
곧 정명과 사명을 보지 않으니, 이처럼 진실한 지혜를 행하므로 정명이라 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능히 37품을 관한다면 성문ㆍ벽지불의 경지를 초월하게 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점차로 일체종지를 성취하게 된다.
1)
범어로는 tarka-bhūmi.
2)
범어로는 dvādaśāńga-dharmapravacana.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12분교(分敎) 혹은 12분성교(分聖敎)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경(經, sūtra):산문형식의 경설. ②중송(重頌, geya):산문형식에 교설에 운문의 게송을 붙여 그 내용을 거듭 나타낸 형식. ③기별(記別, vyākaraṇa):문답체에 의한 교설. ④게(偈, gāthā):산문이 없이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교설. ⑤자설(自說, udāna):감흥에 겨워 스스로 설하신 교설. ⑥여시어(如是語, ityuktaka):‘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교설. ⑦본생(本生, jātaka):부처님의 전생이야기. ⑧방광(方廣, vaipulya):제자들이 환희를 거듭하면서 질문을 거듭해 가는 일존의 교리문답. ⑨미증유법(未曾有法, adbhutadharma):부처님 및 불제자들의 뛰어난 덕상을 찬탄하는 교설. ⑩인연(因緣, nidāna):경과 율들이 설해지게 된 배경이나 이유에 대한 설명. ⑪비유(譬喩, avādana):주로 부처님 이외의 인물들에 대한 전생이야기. ⑫논의(論議, upadeśa):부처님이나 불제자들이 간략한 경설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3)
제각지(除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이다.
4)
범어로는 campaka.
5)
9상(想)이라고도 한다. 탐심과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시신을 관찰하는 아홉 가지 관상법을 말한다.
6)
범어로는 ṣo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16행상(行相)이라고도 한다.
7)
몸을 부리는 내가 있고 다시 그 나를 부리는 나가 있다면, 바로 이 나를 부리는 제 삼의 나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끝없이 주재자로서의 나가 필요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8)
범어로는 pratisaṁkhyā-nirodha. 신역어로 택멸(擇滅)이라고도 한다.
9)
범어로는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이라도 한다.
10)
4여의족 가운데 욕신족(欲神足)을 말한다.
11)
4여의족 가운데 근신족(勤神足)을 말한다.
12)
4여의족 가운데 심신족(心神足)을 말한다.
13)
4여의족 가운데 관신족(觀神足)을 말한다.
14)
4정근의 둘을 말한다.
15)
정어ㆍ정업ㆍ정명이다.
16)
범어로는 āgantukakleśa. ‘객진(āgantuka)과도 같은 번뇌’라는 뜻이다.
17)
3독(毒)의 이칭이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