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하권
34. 삼천대천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일합상이 아니다
【經】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세한 먼지로 만들고,
다시 그러한 미세한 먼지처럼 많은 세계를 부수어 아승기의 미세한 먼지로 만들었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많은 미세한 먼지가 어찌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저 미세한 먼지의 수효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세한 먼지의 수효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이 미세한 먼지의 수효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세한 먼지의 수효는 미세한 먼지의 수효가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미세한 먼지의 수효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곧 이것은 하나로 합쳐진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해진 형상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는 것은 곧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런데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따름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 남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오래 산다는 견해를 말씀하신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말한 것이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 여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오래 산다는 견해는, 곧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오래 산다는 견해가 아니므로, 이것을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오래 산다는 견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라면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하고, 이와 같이 법의 모습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법의 모양이다, 법의 모양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래께서 법의 모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법의 모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하고,
또 다른 선남자와 선여인은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반야바라밀과 나아가 4구게(句偈) 등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그 복은 저 무량 아승기의 보배를 보시한 복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니라.
어떻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가?
설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설법이라고 하느니라.”
【論】
부수어서 미세한 먼지로 만든다는 비유는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세계를 미세한 먼지로 만든 것은
여기에 비유하여 저 뜻[法界]을 나타내 보인 것이고,
미세한 먼지를 다시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번뇌의 멸진(滅盡)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 게송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 법계의 처소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모든 여래께서 진여의 법계 안에서 한곳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각기 다른 곳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니,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를 부수어 미세한 먼지로 만든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는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미세한 먼지를 다시 부수어 가루로 만든 것은 번뇌의 멸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많은 미세한 먼지를 모아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으로써 하나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비유이다.
이 뜻은 또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도 아니요, 합하여 모인 것도 아니며
오직 한 덩어리만도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모여서 덩어리가 된 처소는 저것이 아니요
이것은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님을 비유했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미세한 먼지를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요,
모여 덩어리가 된 물건이 없으므로 또한 각기 다른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여서 덩어리가 된 미세한 먼지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도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에 따로따로 머물지도 않는다.
이와 같아서 모든 불ㆍ여래는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었으니,
머무시는 저 법계 가운데 한 장소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요 또한 각기 다른 장소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아서 삼천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형상의 비유는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경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진실로 모여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물질이라면 여래께서는 미세한 먼지가 모여서 된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아서 만약 진실로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여래께서는 삼천대천세계를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경에서
“만약 세계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곧 이것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일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뿐이라고 한 것은 저 모여서 이루어진 덩어리엔 어느 물건도 취할 것이 없는데도 허망하게 분별하고 있는 까닭에 범부들이 허망하게 집착한다고 하였다.
만약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곧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허망한 집착임을 알 수 있다.
무슨 까닭에 범부는 집착할 만한 물건이 없는데 물질에 집착하는가?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는 것은 곧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뿐이다’라고 하셨다”라고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만 음성만을 따라서
범부는 뒤바뀐 모습에 집착한다.
두 가지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하여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니
아집과 법집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오래 산다는 견해를 말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오래 산다는 견해’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두 가지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하여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도 없는 것이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일을 여읜다 하더라도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가?
저 두 가지 견해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보리를 증득하니,
게송에 이르기를
“아집과 법집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옳은 견해가 아니니
실제가 없는 것을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니
진여를 깨달음으로써 멀리 여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견해는 곧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이치가 없는 것인데도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나라는 것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저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잘못된 견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상이 없다’는 것은 곧 아무 물질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허망한 견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임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법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도 역시 잘못된 견해라고 하셨다.
경에서
“수보리야,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라면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하고 이와 같이 법의 모습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법의 모습이라고 보는 견해는 곧 모습에 대한 옳지 못한 견해이니, 마치 저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가 곧 옳지 못한 견해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이 두 가지 견해를 옳지 못한 견해라고 말하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니 진여를 깨달음으로써 멀리 여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저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와 법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다. 저 두 가지를 옳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깨달아야 멀리 여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게송에 이르기를 “진여를 깨달아 멀리 여읜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지혜와 삼매
이러한 것을 얻어 멀리 여의는데
화신(化身)으로 복을 나타내 보였으니
무진(無盡)한 복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간지[世智]와 제일의지(第一義智)와 삼매에 의지하여 저러한 장애를 멀리 여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그런 까닭에 뛰어난 복의 비유를 들어 거듭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화신으로 복을 나타내 보였으니, 무진한 복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비록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화신으로 업(業)을 짓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량없고 다함없는 무루(無漏)의 공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가?
설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설법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
이것은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그런 까닭에 그 말씀 바른 말씀이라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만약 화신의 여러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라면 ‘나는 곧 화신이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분들이 말씀하신 것은 곧 올바른 말씀이 된다.
만약 이와 다르게 말씀하셨다면 교화시킨 중생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것이요 곧 그 말씀은 바른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곧 화신불이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