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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7권
변연기품 ⑦
10) 유(有)
이와 같은 ‘취’를 연으로 삼아 마음에 드는 여러 경계대상으로 마구 치달아 추구[馳求]할 때, 필시 결정적으로 당유(當有,미래존재)를 초래하는 업을 견인하여 낳게 된다. 즉 ‘애(愛)’의 힘으로 말미암아 ‘취(取)’가 증성될 때 선ㆍ불선의 여러 경계대상으로 마구 치달아 추구하여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정(淨)ㆍ부정(不淨)의 업을 집적하는데, 이러한 업이 생겨나는 상태[의 5온]을 총칭하여 ‘유(bhāva)’의 지분[有支]이라고 한다.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근거하여 능히 당래(미래)의 과보[當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유’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1) ‘유’의 명의(名義)에 관한 상좌설 비판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하였다.
“유(有)라고 함은 유성(有性,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後有)의 생기이다’고 설하였던 것으로,1) ‘유성(존재하는 것)’은 바로 당래세 중에 과보가 생기하였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정리(正理)나 성교(聖敎)와 서로 모순되니, [이 같이 해석할 경우] ‘유’는 ‘생(生)’과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당래 과보의 생기는 바로 ‘생’의 지분[生支]으로서, 그럴 경우 연기의 지분은 마땅히 그 수가 감소해야 하는 것이다.2)
만약 현재의 업은 바로 ‘유’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유’라는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업 자체는 바로 현재 존재하는 것[有性]이기 때문이다. 즉 업은 바로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능히 당유(當有,미래 존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유’의 원인이기 때문에 ‘유’라고 이름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업의] 자성이 바로 실유인데 어찌 그 명칭을 일시 설정할 것인가?
예컨대 업유(業有)를 원인으로 하여 이숙유(異熟有)를 초래하였을 경우, 이러한 결과로서의 존재[果有,즉 이숙과로서의 생유]가 어찌 원인으로서의 존재[因有,즉 이숙인으로서의 업]에 대해 일시적 명칭이 된다고 하겠는가? 설혹 [결과에 따라] 그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존재자체[有自體]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니, 능히 존재하게 하는 것[能有,즉 원인]도, 그것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所有, 즉 결과]도 다 같이 ‘존재하는 것[有性]’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의 뜻을 입증하기 위해 마땅히 이러한 경을 인용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한 경문(經文)에 대해 달리 암송하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리 암송한다는 것인가?
예컨대 어떤 이는 “‘유’란 말하자면 능히 후유(後有)를 생기하게 하는 것이다”로 암송하고 있다.3) 그러나 설혹 그와 같이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後有)의 생기이다’고] 암송하더라도 이치상으로 역시 어긋남이 없으니, 이는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 자체는 바로 당유(當有)의 생기원인이기 때문에 [계경에서는]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일시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의 생기이다”고 설한 것으로,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 설한 다음에 ‘유’가 바로 ‘생’의 연이 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계경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유’는 ‘생’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으로, 그래서 계경에서는 “업은 생의 원인[生因]이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업유(業有)가 바로 ‘생’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업유라는 원인상에 결과의 명칭을 일시 가설하였으니, 이 같은 사실은 필시 그러하기 때문이며, [그 계경] 후반부에서 “‘취’를 연하여 ‘유’가 있고, ‘유’를 연하여 ‘생’이 있다”고 전체적으로 결론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부처님께서 경희(慶喜,아난다)에게 고하기를,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여기서 ‘유’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좌가 인용한 계경은 자신이 해석한 ‘유’를 입증할 만한 논거가 될 수 없으며, 오로지 대법자(對法者)가 해석한 ‘유’의 명의(名義)만이 이치에 부합하고 경에도 수순(隨順)하여 가장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유’는 욕ㆍ색ㆍ무색의 3유(즉 이숙유)라는 상좌설 비판
‘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업유(業有)와 이숙유(異熟有)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12연기 중의 有支)서는 오로지 업유만을 취하니, 당래 ‘생’이라는 과보의 직접적 원인에 대해 분별하고 있기 때문으로, 앞서 다르게 암송되어 [전승된] 계경 중에서 “‘유’란 말하자면 능히 후유(後有)를 생기하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전제(前際)의 업을 ‘행’의 지분[行支]’이라고 설하였듯이 지금 후제(後際) 중의 업을 일컬어 ‘유’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생사(生死)의 전ㆍ후제가 다 같이 혹(惑,번뇌)과 업을 원인으로 하여 이숙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4)
[그럼에도] 상좌(上座)는 거짓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러한 [12연기 중의] 유지[有支]라는 말에는 일체의 ‘유’가 모두 포섭되니, 경에서 [그것이 업유라고] 별도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유’에는 간략히 세 가지가 있다고 전체적으로 설하였기 때문에 ‘유지’는 일체의 ‘유’를 포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5)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다만 마땅히 이를 설하여 ‘행’이라 하든지 혹은 업이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시 경설로써도 입증될 수 있으니, 계경에서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後有)의 생기이다”고 말한바와 같다. 또한 세존께서는 아난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유’에는 간략히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는 아난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업이 당래 후유를 초래하는 것을 ‘유’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 “온갖 ‘유’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이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취’는 능히 업유의 생인이 되고, 업은 ‘유’의 보조적인 원인이 되어 생유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상은 상좌가 종의로 삼는 바를 간략히 설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선설(善說)이 아니다. 비록 [경에서] 별도로 설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별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니, “식(識) 등을 연하여 명색 등이 있다”고 설한 경우와 같다. 즉 여기서는 비록 3계에 존재하는 연기[관계]를 전체적으로 설하였을지라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容有]에 근거하여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으며, 명색을 연하여 6처가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비록 [업유를] 별도로 설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별도로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3계에 계속(繫屬)된 업’을 ‘3계의 유’라는 말로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연기에] 무정물[非情]도 포섭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상좌)는 스스로 말하기를 “만약 이러한 법에 욕ㆍ색ㆍ무색계의 탐 등이 수증(隨增)되면, 이러한 법을 응당 3계의 ‘유’라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무정물의 제법에도 역시 욕ㆍ색계의 탐 등이 수증된다’는 사실에 대해 별도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 역시 [3계의 ‘유’에] 포섭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3계의 ‘유’에는 유정물과 무정물이] 모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6)
만약 여기서는 무명 등에 근거하는 유정에 대해 설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3계의] ‘유’라고 전체적으로 설하였을지라도 무정물 역시 포섭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 여기서는 다만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의 순서에 근거하여, 그리고 혹(惑)과 업(業)을 원인으로 하여 생(生)을 초래하는 순서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비록 ‘유’에 대해 전체적으로(다시 말해 3유로) 설하였을지라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다만 불선과 선의 유루업에 근거하여 욕ㆍ색ㆍ무색의 3유를 설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7)
만약 이러한 ‘유’의 본질[體]이 그 같은 ‘행’의 지분[行支]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와 같은 ‘행’이라는 말로 설하지 않은 것인가?
앞서 ‘행’의 명의(名義)에 대해 사택(思擇)하면서 이미 분별하였거니와 그 밖의 [업]은 이에 따를 만한 뜻이 없기 때문이다.8)
[만약 이러한 ‘유’의 본질이 그 같은 ‘행’의 지분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업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이는 후유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업의 차별이지만, 일체의 업이 다 후유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 ‘유’라는 명칭으로만 설정하고, 업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업을 ‘유’라고 말하는 것은 성교상으로도 지극히 잘 성취되니, 이를테면 『칠유경(七有經)』에서는 [업을] 업유라고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9) 따라서 그가 말한 “[경에서 그것이 업유라고] 별도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有支)라는 말에는 온갖 ‘유’(3유, 즉 이숙유)가 포섭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정리와 성교에 위배되기 때문에 선설(善說)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마땅히 그가 인용한 경에 대해 자세하게 분별하리라.
먼저 처음에 인용한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 중에서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後有)의 생기이다”고 설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10) 즉 이 경문을 다르게 암송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경설로써는 ‘유지는 3유를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능히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인용한 『삼유계경(三有契經)』과도 역시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그것은 ‘유’에 대해] 전체적으로 문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일체의 취온(取蘊)을 다 ‘유’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12연기 중의] ‘유’의 지분[有支]은 업유의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오로지 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난타는 온갖 ‘유’에 대해 전체적으로 물었을 뿐 [12연기 중의] ‘유’의 지분에 대해 물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또한 전체적으로 대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경은 “‘유’의 지분은 3계의 모든 ‘유’를 다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인용한 『이유계경(二有契經)』과도 역시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그것은 ‘유’에 대해]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업유(業有)와 이숙유(異熟有)를 전체적으로 ‘유’라는 말로 설한 것으로,11) 다 같이 존재하는 것[有性]이기 때문이다. 즉 앞의 [계경]에서는 3계의 ‘유’라고 하여 3계에 계속(繫屬)된 일체의 모든 업의 과보를 전체적으로 ‘유’라는 말로 설하였던 것이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인과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업과 이숙(즉 후유)을 별도의 ‘유’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앞의 계경에서는] 3계의 ‘유’라고 하여 하나의 ‘유’라는 말로써 무량(無量)의 온갖 유루법을 설하였던 것이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다만 당래[의 후유]를 초래하는 업과 후유의 과보를 전체적으로 ‘유’라는 말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이 경에서는 “업이 당래 후유를 초래하는 것을 ‘유’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 경은 바로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일컬어 ‘유’의 지분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분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인용하여 [12연기 중의 ‘유’의 지분은 업유가 아니라] ‘유’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까닭에 이 같은 경문을 설한 후 다시 “만약 욕계에 계속(繫屬)된 업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유를 시설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존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요컨대 업유가 존재할 때 비로소 이숙유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로 “‘유’를 연하여 ‘생’이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당래 태어나는 상태[當生位]에서 이미 신근(身根)과 명근(命根)의 이숙[과]가 존재하는 것을 이를 후유(後有)라고 말하였으니, 이와 같다고 한다면 ‘유’라는 말로 ‘생’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업과 함께 작용[俱行]하는 이숙[과]에 대해서는 ‘유’라고 말하지 않으니, 이는 후유를 초래하는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좌가 인용한] 성교는 대법(對法)의 종의에도 수순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인용하여 그의 종의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가 인용한 『대연기경(大緣起經)』의 “온갖 ‘유’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이 존재할 것인가?”하는 등의 경문 역시 [‘유’가 업이라는] 뜻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인용하여야 한다. 즉 여기서 세존은 ‘행’과 ‘유’의 취과(取果)와 여과(與果) 공능의 시간적 차별을 분별하기 위해 “온갖 ‘유’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이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던 것으로, 물음에 따라 업이 취과하는 때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만약 이때 현재의 업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필시 당래의 생유를 능히 인기한다는 뜻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경문을 설한 후 다시 “온갖 ‘유’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이 생겨날 것인가,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물음에 따라 업이 여과하는 때를 나타낸 것으로, 만약 과거의 업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필시 생유가 바로 생기하게 되었다는 뜻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 같은 뒤의 경문의 뜻은, 업유가 비록 취과하였을지라도 요컨대 단멸(斷滅)하지 않아야 비로소 ‘유’는 ‘생’을 부여하여(낳아) 바로 일어나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과거의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다시 말해 과거 업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면), 비록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소멸하여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능히 ‘생’을 부여할 수(낳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지금 이 계경에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구(舊) 수계(隨界)가 존재하기 때문에 [능히 ‘생’을 부여할 수(낳을 수) 있다]고 한다면,12) 이는 다만 언어적 개념[言]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니, 원인이 될 만한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일분(一分)은 경의 뜻과는 차이가 있으니,13) ‘요컨대 현재의 업유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현재의 과유(果有)도 역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업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현재 업의 과보가 아니거늘 어찌 [그것을 초래한]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그러한 [업유에 의해 초래되지 않은] ‘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4)
따라서 이 경(『대연기경』)으로 [12연기의] ‘유’의 지분은 [일체의] ‘유’를 모두 포섭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즉 여기서 업유는 바로 ‘능히 존재하게 하는 것[能有]’으로, 만약 이숙유가 바로 그것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所有]’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존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당래(미래세) ‘업의 과보로서 생겨난 것’의 다른 뜻이다.15) 이 경에서는 바로 ‘능히 존재하게 하는 것’(즉 업유)을 설하여 ‘유’라고 한다는 사실을 이미 온전하게 성립시키고 있으니, 이는 앞의 ‘행’의 지분과 같다.
그런데 그(상좌)는 다시 “따라서 ‘취’는 능히 업유의 생인이 되고, 업은 ‘유’의 보조적인 원인이 되어 생유를 일어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진실한 말[諦說]이 아니니, 이러한 ‘유’의 지분은 오로지 온갖 업만을 취하는 것이라고 이미 앞에서 누누이 성립시켰기 때문이며, 계경에서도 오로지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 설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며, 오로지 업유는 ‘취’를 연으로 삼는다는 사실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찌 상좌도 이러한 의미에서 [12연기 중의] ‘유’의 지분은 오로지 업유라는 사실을 이미 설정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취’를 연하여 이숙유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가 설한 “업은 ‘유’의 보조적인 원인이 되어 생유를 일어나게 한다”는 말은 다만 어린애들이 저들 방안에서 장난삼아 지껄인 말과 같으니, 부처님께서 설한 것[佛說]이 아니기 때문이며, 업과 동시에 작용[俱行]하는 ‘유’는 후과(後果)를 낳는데 어떠한 공능도 갖지 않는다고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16)
만약 “업유는 [업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숙유가 그 힘을 돕기 때문에 생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그의 종의에 의하는 한 무색계에 태어나 업유가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이숙이 존재하지 않아 이미 [업유를] 돕는 힘이 없으므로 마땅히 ‘생’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때는 이숙계(異熟界)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같은 과실은 없다”고] 한다면,17)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에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설혹 “업유는 [업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숙유가 그 힘을 돕기 때문에 생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유’의 지분은 오로지 업유로서, 오로지 이러한 업유만이 ‘취’를 연으로 하고 능히 ‘생’의 연이 된다고 할 때 그 뜻이 성립한다. 즉 모든 대법자(對法者)들 역시 무명 등 일체의 모든 단계에서도 다 5온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한다.18) 그렇지만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지분[支]의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그 밖의 구생(俱生)하는 저열한 법은 다만 그것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것[助伴]이 된다. 따라서 [업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숙유는 ‘유’의 지분 중에서 명칭상의 근거로 설정하지 않으니, 수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9)
또한 저 상좌(上座)는 분함과 시기의 마음[忿嫉纏心]에서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 함은 오로지 업유를 ‘유’의 지분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선현(先賢)들의 분별(해석)을 헐뜯고 꾸짖었을 뿐이니, 그래서 스스로 “계경에서 설한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 함은 어떤 근거에서 알게 된 것인가?”라고 묻고서 바로 [다음과 같이] 스스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바로 관찰하건대, 무량의 유정은 욕취(欲取)를 원인으로 하여 여러 가지의 온갖 업을 짓고, 내외의 도인(道人)들은 계금취(戒禁取)를 원인으로 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온갖 고행과 난행(難行)의 업을 수지하며, 비바사사(毘婆沙師)와 외도들은 견취(見取) 등을 원인으로 하여 쟁론의 업을 일으킨다.”고.
여기서 그 자신은 “‘유’의 지분이란 이를테면 ‘취’를 연으로 한 업유와 이숙유를 말한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부처님 역시 업을 떠난(배제한) ‘유’의 지분을 설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말한 “[‘유’의 지분은] 일체의 ‘유’를 모두 포섭한다”는 사실과 “‘취’를 연으로 하여 ‘유’가 있다”는 것은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성언(聖言)을 따르지 않는 이는 불제자가 아님에도 이와 같이 정리와 성교에 위배되는 말을 설하면서 성교와 정리에 위배되는 말에 집착하여 전도된 거짓된 견해[妄見]를 진실의 정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바사사의 말은 성교와 정리에 수순하는 것일뿐더러 그들의 견해도 정리와 성교에 부합하여 외도의 종의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여 어긋나고 거짓된 것[邪妄]이라 하여 여러 외도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니, 이와 같은 패거리[朋黨]는 [원래] 자신을 칭찬하고 다른 이를 헐뜯을 뿐이다. 지혜 있는 자가 들으면 가히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한 “지금 여기(12연기 중의 有支)서는 오로지 업유만을 취하니, 그것은 당래의 ‘생’이라는 과보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분별한 것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은 이치상 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 생(生)
오로지 업유로 말미암아 이 생(현생)으로부터 명종(命終)하고서 다시 당래의 생으로 맺어지는 것으로, 이생유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래서 바로 생유로 맺어지는 상태[의 5온]을 ‘생(jāti)’의 지분[生支]으로 설정하였다. 이는 곧 이 생 중에서 ‘행(行)’을 연으로 하였기 때문에 최초 결생(結生)하는 상태를 ‘식’의 지분[識支]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내생에서는 ‘유’를 연으로 삼기 때문에 최초 결생하는 상태를 일컬어 ‘생’의 지분이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는 이러한 명칭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즉 현세 [결생하는 상태]에 있어서는 ‘식’의 작용이 분명하며, 미래세 중에서는 ‘생’의 작용이 가장 현저하니, 자신의 작용 중 [가장] 현저한 것에 따라 지분[支]의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혹은 다른 계경 중에서 “‘생’은 괴롭기 때문에 천취(天趣)라는 후유의 업을 짓고자 하는 자는 ‘생’을 염사(厭捨)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당래의 과보를] ‘생’이라고 설하였다. 혹은 후유의 업은 모두 다 능히 괴로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나타내어 그것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생’이라고 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따라 다른 경에서는 “‘생’ 등의 괴로움이 필경 적멸(寂滅)한 것을 반열반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생’이라는 말의 근거가 불상응행(不相應行)이라고는 설하지 않는다.20) 그렇기 때문에 상좌(上座)가 시설한 힐난의 말은 마치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우는 것과 같다.21) 또한 앞서 유위상(有爲相)에 대해 사택하면서 이미 그의 말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12) 노사(老死)
이러한 ‘생’의 지분 이후 당래 ‘수’의 지분[受支]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의 온갖 상태[의 5온]을 전체적으로 ‘노사(老死,jarā-maraṇa)’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즉 현재의 명색ㆍ6처ㆍ촉ㆍ수의 4지(支)와 같은 것으로, 미래 생에서 이와 같은 네 단계를 일컬어 ‘노사’라 한 것은 당유(當有,미래존재)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싫어하여 버리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노사’라는 명칭으로써 당래의 과환(過患)을 나타내었던 것이다.22) 이상의 3세 양중(兩重)의 연기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구분 | 12연기 지분 (12支) | 인과 관계 | 세약 (시제) | 설명 |
| 원인 (因) | ① 무명(無明) ② 행(行) | 과거의 인(因) | 과거세 | 전생의 미혹과 업 |
| 결과 (果) |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입(六入) ⑥ 촉(觸) ⑦ 수(受) | 현재의 과(果) | 현재세 | 과거의 업으로 인해 금생에 받은 결과(5온) |
| 원인 (因) |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 현재의 인(因) | 현재세 | 금생에 살아가면서 짓는 새로운 미혹과 업 |
| 결과 (果) | ⑪ 생(生) ⑫ 노사(老死) | 미래의 과(果) | 미래세 | 현재 지은 업으로 인해 내생에 받을 결과 |
만약 금세의 ‘식’이 미래세의 ‘생’이라면, 금세의 경우 ‘식’이 연이 되어 단지 ‘명색’만을 낳을 뿐이므로 [미래세의] ‘생’도 마땅히 두루 ‘노사’의 연이 되지 않아야 하거나,23) 혹은 ‘노사’라는 말은 네 단계와 통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당래의 [명색으로부터] 수에 이르기까지를 노사라고 한다’는 말에 대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노사’의 지분이라는 말은 결정코 네 단계와 통하는 것으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容有]에 따랐기 때문이며, [계경에서] “‘생’을 연으로 하는 각각의 지분을 다 ‘노사’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노사’의 단계에 4지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은 미래생도 역시 현재와 마찬가지로 전제와 후제로서 인과관계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께서 ‘노사’라는 말로써 당래의 명색 등의 네 단계를 모두 설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후제(後際)의 결과(즉 5과) 가운데 이미 1지를 설하였으니, 오로지 남은 것은 네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24) 이와 같다고 할 때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친] 3생 중에 12지가 갖추어져 존재의 수레바퀴[有輪]에 시작이 없음을 바로 나타낼 수 있으니, 이를 초과하여 설할 경우 쓸데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지만, 12지를 설하면 그 뜻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래의 과보로서 오로지 ‘생’만을 설하더라도 그 뜻이 두루 [원만]하여 나머지를 설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된다”고 한다면,25)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만약 단지 ‘생’만을 설할 경우에는 후제의 결과를 두루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과거세의 두 지분(무명ㆍ행)이 원인이 되어 현재세의 과보(‘식’ 내지 ‘수’)를 초래한다고 하여야 원만한 설이라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세의 세 지분(애ㆍ취ㆍ유)이 원인이 되어 미래세의 과보(생ㆍ노사)를 초래한다는 사실 역시 마땅히 갖추어 설해야 할 것이니, 후제의 경우도 전제처럼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성교는 감소의 과실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 후제의 과보를 두루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어리석은 자는 “만약 비슬노(毘瑟笯, 비쉬누) 등의 온갖 천(天)의 세계로 왕생하면, 그에게는 오로지 ‘생’만이 존재할 뿐 ‘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온갖 그릇된 원인[邪因]을 조작하여 추구하기에 여래께서는 “‘생’에는 모두 노사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니, 그(어리석은 자)가 생의 [그릇된] 방편을 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래 과보에 대해 단지 ‘생’으로만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26)
(1) ‘노사’ 지(支)에 관한 상좌의 논란 비판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노사’라는 말로써 당래의 4지(支)를 설한 것이 아니니, ‘노사’라는 말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계경에서 ‘내지 사(死)’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미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후제(後際)의 결과(즉 5과) 가운데 이미 1지를 설하였으니, 오로지 남은 것은 네 가지 뿐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4지가 비록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노사’의 뜻과 통하기 때문에 하나의 명칭으로써 네 지분을 설하더라도 허물이 없으며, 이와 같은 [형식으로] 설할 때 [지분의 수를] 늘이지도 않고 줄이지도 않고서 전ㆍ후제의 인과가 상응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 단계를 지나 ‘노사’의 지분을 설정하였다면, 설한 [지분의 수는] 바로 증가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역시 감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두루 [원만하게]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7)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노사’는 결정코 4지를 포섭하는 것이다.
‘내지 사(死)’라고 하는 말에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다시 말해 계경에서 ‘내지 死’라는 말을 설하였을지라도 노사의 지분에 4지가 포섭된다는 사실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전제의 업의 과보는 사(死) 즉 죽음을 후변(後邊,끝)으로 삼지만, 4지를 초과하여 별도의 ‘노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후제의 업의 과보도 이치상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에 최초의 단계인 ‘생’을 제외한 나머지 단계를 ‘노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 다하는 상태[終盡位]에 근거하여 ‘내지’라는 말을 설하였던 것으로, 그 이전 시기를 ‘노사’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또는 결정코 ‘유’에 근거하여 ‘내지’라는 말을 설하였으니, ‘생’의 지분 이후에 죽음은 결정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의 설은 거두어들여 채택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어떠한 까닭에서 단지 후제의 결과에 대해서만 유위상(有爲相)의 명칭으로 설하고, 전제[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관찰[現見]할 수 있고 바로 관찰할 수 없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전제의 결과 자체와 [그것의] ‘생’ 등은 다 같이 바로 관찰할 수 있어 [결과] 자체만 언급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후제의 두 종류는 다 같이 바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로지 그것의 허물을 드러내어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여 멈추게[厭息] 하려고 [유위상의 명칭으로 설한] 것이니,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색의 생상(生相)과 주상(住相)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괴로움의 생(生)과 병의 주(住)와 노사가 일어난다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나아가 [12연기에서] ‘생’과 ‘노사’를 각기 하나의 지분으로 설한 것은 그것이 작용[功能]하는 시분(時分)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28)
혹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12]연기 중에서 세속적 [의미로서의] ‘생’ 등이라는 말을 설한 것이지 승의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 즉 그는 [미래 생이] 처음 일어나는 상태[初起位]를 전체적으로 설하여 ‘생’이라 말하였으며, 끝내 다하는 상태[滅盡位]를 전체적으로 설하여 ‘사(死)’라고 말한 것일 뿐으로, ‘노(老)’는 결정코 실유가 아니지만 ‘사’에 수반되기 때문에 별도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노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혹은 온이 증장하는 상태를 전체적으로 설하여 ‘생’이라 말하였으며, 온이 감소하는 상태를 전체적으로 ‘노사’라고 말하였다. 혹은 어리석은 모든 이들이 흔락(欣樂)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생’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러한 어리석은 이들이 염리(厭離)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노사’라고 이름하였다. 그래서 ‘생’과 ‘노사’를 각기 별도의 하나의 지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역시 또한 ‘사(死)를 연하여 생(生)이 있다’고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생을 연하여 사가 있다’고만 설한 것인가?
[그것은] 결정적인 사실이기 때문으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즉 “‘사(死)’가 존재할지라도 결정코 ‘생(生)’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온갖 유정으로서 태어난 자는 결정코 죽기 때문이다”라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생’이 존재할지라도 결정코 ‘노(老)’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노’는 세속적인 [의미]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을 연하여 노가 있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생(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정코 ‘노(늙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으로, 구름이 없는 곳에 결정코 비가 내리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29) 그리고 여기서 ‘생’은 결정코 사유(死有)와 무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생’의 지분은 중유와 무간에 존재할 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생(生)을 연하여 사(死)가 있다’고만 말하고 ‘사를 연하여 생이 있다’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따라 부처님께서 유정(有情)의 연기를 12지로 설하게 된 의미는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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