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처음 펴신 가르침이 바로 소승불교이다. 부처님은 우리네 삶은 고통 그 자체이며,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파하셨다.
부처님이 설하신 소승불교는 세 가지 통찰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무상관(無常觀), 부정관(不淨觀), 무아관(無我觀)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통찰 중 무상관을 이야기 해보자.
‘무상관’은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조차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이것이 우주의 기본 성질이다.
아침 8시쯤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다고 하자.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강남에서 강북으로 건넌다고 하자. 그때 바라보는 강은 한 시간 전의 그 강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다. 8시와 9시에 바라보는 물은 똑같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계속 흘러간다. 물론 한강은 여전히 같은 한강이지만 아침 8시에 보았던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다.
따라서 아침 8시에 불렀던 ‘한강’은 아침 9시에 부르는 ‘한강’과는 다르다. 순간순간 강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우리 몸은 달라져 있다.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것이다. 전날 먹은 음식은 소화되어 있을 테고, 얼굴이나 치아나 피부 상태도 전날과 다를 것이다.
음식물은 끊임없이 대변과 소변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며, 얼굴은 이미 어제보다 늙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사람의 몸은 매 세포가 매일매일 교체돼 7년마다 완전히 탈바꿈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 “10년 전 나는 파리에 갔었다”고 얘기한다고 하자. 사실 그건 완전히 엉터리 같은 소리이다. 10년 전 파리에 갔던 육신은 엄격히 말하면 다른 사람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말하는 몸과는 다른 육신인 것이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한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오래 전 이 지구는 태양에서 나왔고 달은 지구에서 나왔다고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태양 에너지는 완전히 소진해서 점점 차가워질 것이다.
태양 에너지가 멈추면 지구 역시 점점 차가워진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텅 빈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게 덮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현상 세계를 제대로 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쥐고 흔들어대지 못할 것이다. 고통이란 바로 이렇게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삶은 아무 문제 없어.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아마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을 사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상한 것들을 붙잡고 욕심을 내고 언제나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좋고 싫은 것’을 엄밀히 구분해 놓고 이것을 진리처럼 껴안고 산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며, 외부 상황이 변해도 별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곧 사라지는데 왜 집착하는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 신혼 초기에는 “아!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어. 너무 행복해”라며 좋아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얼마나 계속될까?
1년, 2년, 3년? 아마 3년 이상 이런 느낌을 가지고 산다면 아주 특별한 커플일 것이다. 보통 3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변한다. “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들은 급기야 갈라서고 고통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계속 유지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 세상이 무상함을 먼저 알고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다 내려놓아라. 다 놓아버려라.
일부 소승불교와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승려들이 몸의 무상함을 경험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참선 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몸이 집착하는 욕망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무상관이다.
48.인생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들의 화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인 가운데 나옹 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갈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구름이 일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같네
뜬구름은 자체가 실이 없나니 생사 거래도 모두 이와 같도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참으로 명시다. 나는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생사없는 도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를 읽고 잘되었다, 못되었다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생사를 따르지 않는 담연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뜬구름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으리라.
기약이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것을 보라. 그것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이니라. 그러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저 담연한 일물을 생각하는 그 놈을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본다고 보아질 수 있는 물건인가? 아니다, 아니다. 보려고 애쓰면 도리어 보는 마음이 구름이 되니 그 마음까지 마저 비어 허공과 같이 하면 저절로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저 하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하라 멀리 망상과 모든 취(趣)를 여의면 마음 가는 곳에 걸림이 없으리라.
망상이란 속으로 온갖 분별과 시비를 일으키는 것이고 모든 취는 겉으로 받아들이는 온갖 세계의 일들을 반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백치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도 들은 바 없고 보아도 본 바 없는 가운데서 자기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충실하되 보는 놈, 듣는 놈, 먹는 놈, 입는 놈, 그 놈을 똑똑히 보면 그대로 여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였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한번 내가 붙이는 시 한 수를 들어 보라.
이 정각(正覺)의 성품은
위로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아래로 6범(六凡)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당당하게 뚜렷뚜렷히 구족(俱足)하여 티끌마다 다 통하고
물물(物物) 위에 나타나 닦을 것 없이 성취되어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
언제나 깨달아 있는 우리 본래의 마음이 어느 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설파한 시다. 부처님이라 하여 더하고 중생이라 하여 덜한 것이 아니라 지옥·아귀·축생·인·천·수라 등 6범이 똑같이 낱낱이 당당하게 구족하고 있고, 티끌·돌맹이·나무 하나하나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대로 보면 그만이지 구태여 닦고, 익히고, 이루고, 증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요명명이란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 부처다.
자, 그렇다면 이 부처를 보라(숭산 스님이 주장자를 들며 말하셨다).
보았느냐? (주장자를 내리치시고 또 물으신다)
들었느냐?
이미 분명하게 보고, 이미 또렷하게 들었으면, 결국 이게 무엇인가?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고 다르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
3×3 = 9이니라.
들은 것도 분별이고 보는 것도 분별이기 때문이다. 같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고 다르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다.
같다, 다르다 하면 3×3 = 9가 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에 팔리는 사람은 불교는커녕 속법도 제대로 얻기 어렵다
.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그대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니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고 누가 길이 견고(堅固)한 자이냐 그대들은 아는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고 오는 데 속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주장자를 한 번 친 후 말씀하셨다)
여삼세제불 일시성불공
십류군생 동일열반삼세
모든 부처님들이 일시에 성불하고
십류군생이 한날 열반에 들었다는 말이다.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하였다는 말은 그대가 성불하면 삼세제불이 언제나 성불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도 되지만 이미 시간 이전에 그들은 성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시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옥·아귀·축생·인·천·수라·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류군생이 함께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개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증과는 열반인데 제불이 일시성불하면 군생이 동일열반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거든 다음 글귀에 눈을 붙여 보라.
눈 가진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말없는 동자가 답답해 한다.
얼마나 답답하면 돌사람이 눈물을 흘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