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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예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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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의역사 기록서들 스크랩 [펌]요동정벌의 최초 기획자 우왕
알바트로스 추천 0 조회 7 14.05.21 10: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공민왕에서-이씨조선 개국이야기 2편) - 요동정벌의 최초 기획자 우왕 |고려 토론방
동명 | | 조회 53 |추천 0 | 2014.05.02. 22:32 http://cafe.daum.net/alhc/7h/615 

 

< (공민왕에서-이씨조선 개국이야기 2편) - 요동정벌의 최초 기획자 우왕 >

 

1368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카라코롬까지 ?겨난 원나라는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를 왕위에 올리고 감숙, 요양, 운남 등에 흩어져 있는 잔여 세력을 통합해 세력을 구축했다. 쾨쾨 테무르를 도총병이자 우승상으로 임명해 군사와 행정을 총괄케 했고 요동에 있는 나하추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북원과 거리를 두기로 하였으나, 나하추가 아직은 요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천식을 북원에 보낸다.

하지만 이는 북원을 속이기 위한 것이며, 공민왕의 마음은 이미 오왕(주원장)에게 있었다. 1369년 4월 고려 사신 장자온과 함께 명나라 사신 설사가 고려에 도착하였다. 원나라의 속국왕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공민왕과 원나라를 멸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가 필요했던 명나라가 드디어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표시로 지정 연호를 폐지하고, 동녕부 관할 일부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1370년 기철의 아들인 사인테무르가 김백안과 공모하여 원나라 유민들을 불러 모아 요동의 동녕부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킨다. 이해 8월에 공민왕은 이인임을 도통사로 삼고 이성계와 지용수에게 군사를 주어 드디어 요동의 동녕부로 출정하게 했다. 11월 고려군은 동녕부의 요동성을 함락하였다. 고려군이 회군하면서 동녕부에 아래와 같은 방을 붙여 초무하고자 하였다.

 

“요심(遼瀋)은 원래 우리나라 땅으로, 대군이 또 출정하면 선량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을까 우려된다.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주어 저마다 생업에 안착하게 해 주겠다.”

 

고려군이 회군하자 명나라도 움직였다. 북원과 요동과의 연대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요동에 관리를 파견하여 요양행성의 관민을 초무하는 회유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회유책에 1371년 요양행성 평장 유익과 왕우승 등이 항복하였다. 유익이 명나라에 항복하기 이전에 요양행성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하여, 고려 조정에 사자를 파견하여 명나라에 이주를 면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결국 명나라는 요양행성에 정료위를 설치하고 지휘사로 유익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요동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 할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고려가 나하추를 견제하는 효과까지 이득을 얻었다. 유익의 투항은 북원이 가진 요동에의 거점을 상실케 하였고 요양행성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던 고가노와 홍보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에 명나라는 1372년 서달을 대장으로 삼아 15만의 군대를 아유시리다라가 있는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시켰다. 하지만 서달의 중로군은 쾨쾨 테무르의 전술에 휘말려 패퇴하였고 이문충의 동로군은 톨강에서 북원군에게 괴멸되었다. 이 승리로 북원은 체제를 정비하고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반면에 명나라는 성급하게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승승장구하던 기세가 꺾이는 결과를 얻었다.

 

카라코룸 대패 이후 명나라는 북원에 대한 직접적인 정벌을 멈추고 통치지역에 위소를 설치하여 한족들을 이주시켜 체제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북원 최대 전략지역인 요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요동은 나하추가 장악하고 있었다. 나하추는 원나라말 요양행성 평장정사로 심양에 거주하다가 원나라가 북쪽으로 ?겨난 이후 개원 이북의 이통하 방면을 세력권으로 하고 금산에 거주했다. 이 지역은 서북쪽으로 북원과 접근성이 용이하고, 남쪽으로 요동반도에 있는 정요위를 공격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인 동시에 동남쪽으로 고려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에 명나라는 요동을 안정시킬 계획을 장기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1375년 정요도위를 요동도지휘사사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군사적 기능만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써 군정합일을 통해 이 지역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북원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요동의 나하추를 제압해야 하고, 나하추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고려와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하추와 고려에 대한 초무정책을 추진하였다.

 

명나라는 북원을 멸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차분히 추진하였다. 1381년 드디어 명나라는 부우덕을 남정장군, 남옥과 목영을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원나라 황족인 운남의 양왕을 정벌하였다. 이 원정에 27만 군사와 군마 22만 필이 동원되었다. 12월 백석강에서 대패한 양왕은 자결하였고 이듬해 정월 명나라는 운남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1382년 명나라는 양왕의 가솔을 고려의 제주도로 유배 보냈는데, 이로써 고려는 명나라가 운남을 평정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음 차례는 고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 명나라의 더러운 속셈을 인식하지 못했다. 명나라에 의해 운남이 평정되자, 위기감을 느낀 북원은 나하추를 통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이루자고 요청하였으나 고려 조정은 이미 명나라로 기울어 있었다. 이때부터 요동도지휘사 소속 군사들이 고려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사신을 명나라로 보내 우왕의 책봉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여러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공민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나이가 10살이었다. 우왕이 고려를 직접통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덕태후와 권문세족들이 고려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우왕이 이때에 이르러 성년이 되어서 직접적인 통치를 행사 하였지만, 아직은 국정을 이끌어갈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우왕은 명나라보다는 심정적으로 북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북원은 이미 왕위계승에 대한 책봉을 하였고, 명나라는 아직까지 우왕의 왕위계승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384년 명나라의 계속된 위협속에 우왕과 고려 조정은 이원굉을 특사로 파견하여 책봉문제를 매듭짓기로 하였다. 이원굉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요동도사가 여진족을 시켜 돌아가는 북원 사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고는 비밀리에 고려 조정에 알려왔다. 이에 김득경을 파견하여 이들을 격퇴하였다.

1385년 요동도지휘사가 정여를 파견하여 김득경이 명나라 군사를 살해한 것을 추궁하고 김득경 압송을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원굉의 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부득이 김득경을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었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었다. 이해 9월 명나라는 우왕을 고려국왕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우왕을 책봉한 진짜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이때 명나라는 대대적으로 나하추 토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와 나하추가 연합할 가능성을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는 책봉의 댓가로 공마(貢馬)를 요구하였다. 1386년 정몽주를 명나라로 보내 세공(歲貢)을 감액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나하추 토벌을 위해 명나라는 이해 11월 다시 말 5천 필을 요구하였다. 이는 지난번 5년치 세공으로 마필이 많이 빠져나간 다음이므로 무리한 요구였다. 더욱이 요동도지휘사와 서질을 통해 기해년에 고려로 피난 왔던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를 쇄환(刷還)하려 한다고 전했다.

 

1387년 정월 명나라는 풍승을 정로대장군으로, 부우덕과 남옥을 부장군에 임명하여 20만 대군을 이끌고 나하추를 토벌하게 했다. 또한 곽해룡에게 고려 사신의 요동 내왕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곽해룡이 돌아와 명나라의 속셈을 고려 조정에 알리자, 요즘말로 우왕은 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오 고려는 3월에서 6월까지 말 5천 필을 다섯 차례에 걸쳐 요동으로 보내었다. 한편 이해 6월 풍승의 부대가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에 이르러 포위하였다. 명나라는 나하추의 동생을 이용하여 협상을 벌였다. 결국 나하추는 그 무리 20만을 이끌고 명나라에 항복하였다.

이때 이원길이 정료위로부터 도망쳐 나와 “정료위가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 오려한다.”고 말했다. 우왕은 보고를 받고서 무기와 갑옷을 싣고 호곶으로 이동했다. 이로보면 우왕은 명나라와의 결전을 이때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왕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길 상황은 아니었다. 고려 조정은 명나라가 요구한 공마를 충실히 요동으로 보내고 있었다. 우왕은 호곳에서 칩거하며 명나라 사신의 귀국 인사까지 거부할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우왕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고려 조정은 장자온과 설장수를 잇따라 명나라로 보내 화평정책을 추진하였다. 8월 우왕은 호곳에서 각 사 및 성중관에게 명령하여 자신을 호위하라고 지시하였다. 우왕이 호곳에서 농성하자, 이인임은 노환을 핑계삼아 사직하고, 조정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 일당들이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였다. 한편 명나라는 나하추를 제거한 여세를 몰아 9월 남옥을 정로대장군에 임명하고 15만 대군으로 토구스 테무르의 본거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해 11월 우왕은 요동정벌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자, 임견미 족당인 왕복해 등을 거느리고 최영이 주둔하고 있는 해풍으로 갔다. 그러나 임견미 족당들이 우왕의 생각에 동조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영은 우왕의 생각과 같았다. 결국 우왕은 은밀히 최영을 찾아가 요동정벌에 대한 논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최영은 고려 조정을 차지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을 처단하지 않고는 일이 성사 되기 어렵다고 하였을 것이다. 최영은 나이 70세가 넘은 대신들의 모임인 기로회를 열어 한양에 산성을 수축할 것과 전함을 수리할 일을 논의하고서 우인열과 홍징을 한양부로 보내 중흥산성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우왕은 12월 임견미 족당의 척결을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우왕은 도당에 일러 각 창고와 궁사가 소유한 전민(田民)을 강탈한 자의 명단을 모두 작성해 보고하라고 했다. 허나 도당을 장악한 임견미 족당들은 우왕의 지시를 이행치 않았다. 이러한 때에 염흥방의 가노(家奴)가 전 밀직부사 조반의 땅을 빼앗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염흥방이 이 일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조반을 모반했다고 무고하여 순군으로 하여 조반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결국 조반은 체포되어 순군옥에 하옥되었다. 우왕은 최영의 집을 방문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조반의 옥을 계기로 사전 겸병으로 악명 높은 염흥방?임견미 등의 권문세족들을 척결하기로 하였다. 최영은 먼저 염흥방을 체포하여 순군옥에 가두고, 이성계에게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임견미 족당들의 체포령을 내렸다.

 

이달 10일 임견미 족당들은 모두 체포 되었다. 요동정벌에 최대 난적인 임견미 족당들을 일거에 제거한 우왕은 최영을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으로 우현보, 윤진, 안종원을 문하찬성사, 문달한, 송광미, 안소를 문하평리, 인원보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최영의 측근들을 대거 요직에 등용시킨 것이다. 이로써 요동정벌의 5부 능선을 넘었다. 그러나 아직은 문무백관들과 재추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2월 명나라로부터 귀국한 설장수가 고려가 보낸 말이 쓸모없다는 것과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는 주원장의 교시를 전한다. 우왕과 최영 입장에서 요동정벌의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우왕은 즉시 5도(道)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고, 원수(元帥)들을 서북 국경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또한 개경 각 방(坊)·리(里)의 군사를 동원해 한양의 중흥성을 수축하게 했다. 우왕은 박의중을 명나라로 보내어 철령 이북지역을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지시를 철회 할 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전하게 하였다. 이는 우왕의 노림수가 있었다. 문무백관들과 재추들에게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차후 요동정벌의 명분을 쌓고, 또한 명나라를 자극하여 영토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게 하여, 이를 이용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영열전에 따르면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압록강까지 보내, ‘명나라 호부는 명나라 황제의 칙령을 받들고자 한다. 철령 이북·이동·이서지역은 본래 개원로에 속한 지역이므로, 한인(漢人)·여진(女眞)·달달(達達)·고려를 막론하고 소속된 모든 군인은 그대로 요동에 귀속될 것이다.’는 방을 붙였습니다.”라고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가 보고하였다. 이에 최영이 재상들을 모아 정료위를 공격하는 안건과 화친을 요청하는 안건에 대해 의논하니 모든 재상들이 화친 쪽에 찬성했다. 그 후 조림이 다시 요동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자 최영이 철령 이북지역을 명나라에 할양하는 것에 대한 가부를 묻자 백관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우왕과 최영이 그동안 추진했던 요동정벌이 공론화 되었다. 그런데 이자송이 최영의 집을 찾아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다가 참살당하였다. 최영의 의지는 이만큼 확고 하였다. 우왕은 마침내 8도의 군사들을 징발하였고 최영이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였다. 얼마 후 명나라 사신 왕득명이 와서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이때 고려세가는 왕득명이 이색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영열전에는 최영이 요동기군 21명을 죽이고 이사경 등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시켰다고 한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최영열전 기록이 사실에 부합한다. 우왕은 우현보를 시켜 개경을 유수하게 한편 오부의 장정들을 군사로 징발하였다. 또한 세자 왕창 및 정비와 근비 등 왕비들을 한양에 있는 산성(山城)으로 옮기게 했다.

 

4월 우왕과 최영이 봉주에 당도하여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을 말하였으나, 이성계가 4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당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으로 철령 이북의 요동귀속 사태에 따른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인데, 갑자기 이성계만 별도로 불러 요동정벌 계획을 말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추정하면 우왕이 요동정벌에 앞서 최영, 이성계과 함께 군사작전을 상의하기 위한 모임이라는 생각이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다.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다.”라는 이성계의 불가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군대의 전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행동 적합하지 않는 시기를 들어 가을철에 진격하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기록처럼 이성계가 반대를 하였을 수 있다. 허나 이는 요동정벌의 대의를 반대했다기 보다는 군사적 측면에서 전술적인 문제를 제기 하였다고 본다. 어째든 우왕은 서경에 머물며 최영을 8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우왕의 요동정벌이 과연 후세 사가들의 평가처럼 성취 할 수 없는 허상이었을까? 그렇치는 않다. “군신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라는 우왕의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요동정벌이 우왕과 최영의 작전대로 이행 되었다면 분명 성취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결과물은 이성계을 비롯한 장수들의 목적의식이 없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대군이 장도에 올라 행군에만 한 달을 끌게 된다면 군사 작전이 성공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습니다.”라는 최영의 말과 “저희들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비로 물이 불어나 큰 내가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첫 번째 여울에서 수백 명이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했으며 두 번째 여울은 더욱 깊은지라 강 중간의 모래톱 가운데 머문 채 군량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요동성에 이르기까지는 군데군데 큰 내가 있어 쉽게 건너기가 어려울 듯합니다.”라는 좌우도통사의 건의문을 비교하면 그 증거를 삼을수가 있겠다. 좌우도통사의 말은 변명이라는 것이 “우왕이 각 도 병사들의 징집을 독려해 압록강에 부교를 놓게 하면서 대호군 배구에게 감독을 맡겼다.”라는 기록에서 드러난다.

 

또한 “억지로 몰아서 진격시킬 경우 방비태세가 굳건한 성을 아무리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이러한 때 군량의 보급이 끊어져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라는 기록도 “성계는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에 주둔하도록 했으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습니다.”라는 명사 조선열전의 내용과 비교해도 요동정벌군의 건의문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일지라도 우왕의 요동정벌을 이렇게까지 폄하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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