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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중득활死中得活
사중득활이란 죽어야 산다는 말이다.
과연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살린단 말인가?
혹자或者는 견성성불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해야 된다는 뜻으로 크게 한 번 죽은 후에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는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을 인용引用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중득활과 대사일번 절후소생”의 진정한 의미는 일체의 사량계교와 분별망상을 완전히 끊어버려 번뇌를 조복調伏 받음으로써 마음의 작용을 소멸시켜 모든 생각이 끊어지고 그 끊어진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의작용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죽는다 고 말할 때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상을 없애서 적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량분별思量分別과 시비장단是非長短등 마음의 작용이 단절되어 토목와석土木瓦石과 같이 일체一切를 모르는 상태를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하는 데,
그렇게 되면 의식의 신경이 모두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의식의 신경이 끊어진 정신 상태를 사중死中이라 말한다.
그리고 끊어진 의식의 신경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득활得活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의식이 끊어진 상태를 적멸이라고 말하고 그 끊어진 신경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러한 지혜를 부처의 4가지 지혜라고 하는데,
5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 : 만물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혜
6識은 묘관찰지妙觀察智 : 온갖 법의 차별상을 잘 관찰하는 지혜.
7識은 평등성지平等性智 :일체의 법과 만물의 성품이 평등하게 보는 지혜.
8識은 대원경지大圓鏡智: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이와 같이, 수행을 하여 중생의 업식業識이 맑아지면 성인聖人의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그래서 도를 이룬 성인은 적멸과 지혜를 동시에 갖추게 되는 것이다.
범부는 눈으로 보이는 현상세계만 보지만 성인聖人은 현상세계와 진리의 세계인 실상의 세계를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조주화상과 투자선사 사이의 대화 내용을 보기로 하자.
“크게 죽은 사람이 갑자기 살아난다면 어찌하겠소?"
"밤길을 허락치 않으니 반드시 밝음을 쫓아서 이르러야 한다."
이 짧은 대화 속에 <사중득활>의 뜻이 함축되어 있으니 누구든지 수행의 결과로써 이 도리를 체득體得하여 이 뜻을 알았다면 부처의 지음자知音者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수행을 어느 정도 수행을 해야 의식의 신경이 끊어져 적멸에 이룰 수 있을까?
특이할만한 것은 의식의 신경이 끊어지려면 수행 방법 중에 반드시 화두에 의한 참선법에서만 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화두를 들고 얼마나 수행을 해야 의식의 신경이 끊어 질수가 있을까?
물론 조사선법에 의한 선지식의 말 한마디에 몰록 깨치는 경우도 있다.
몰록 깨치는 경우는 수행의 정도가 깊은 대근기의 수도인修道人이지만 그래도 신체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오게 되는데 외부로 나타나는 현상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위로 향하여 날듯 펄쩍 뛰어오르거나 심지어는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비록 대근기의 수행자 일지라도 범부의 몸에서 부처의 몸으로 순식간에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몰록 깨치더라도 부처의 정신에 근접한 상당히 무르익은 상태에서 몰록 깨치는 경우에는 그동안 몸과 마음이 부처의 몸으로 준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신체적인 커다란 변화는 오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가정假定을 해보기로 하자.
태어나서 나쁜 업만을 짓고, 살면서 전혀 수행과 선행이 없는 아주 두터운 업장業障에 쌓인 중생의 몸에다가 부처의 청정하고 신령스런 정신을 순간적으로 주입한다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날까?
아마 그렇게 되면 바로 죽거나 생명에 심각한 위험한 상태가 벌어질 것이다.
몸이 정신을 쫓아가지 못하여 육신과 신체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부처의 몸과 중생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 차이는 천양지차天壤之差 이다.
우리의 주변에 보면 선천적으로 지능이 발달되지 않은 지적장애(정신박약 또는 정신지체)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심하면 신체적으로 팔 다리가 비틀어지고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왜 생기는 것일까?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뇌의 이상異常과 중추신경계의 장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과법因果法으로 본다면 업장이 두터운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올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몸을 잘못 받아 태어난 것이다.
중생들은 자신들이 지어놓은 업에 따라 돌고 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등 의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잘못 입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체와 정신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 몸을 받고 태어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애인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공개적으로는 개진開陳시킬수는 없으니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의 신경 끊어지는가 알아보자.
화두를 들고 정진할 때 의심을 간절하게 거듭하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두의 기운이 머리에 생기게 된다.
물론 정진을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화두의 기운이 생성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생겼다가도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 화두의 기운이 상기병이라고 하여 화두의 기운을 단전으로 내리거나 호흡을 병행하여 화두를 들거나 또는 공부를 놓아버리고 만행한다고 돌아다니게 되면 여기서부터 공부는 정법하고 멀어지는 것이다.
특히 달마 태식법胎息法이니 호흡법이니 하는 것은 참다운 참선법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는 올라가겠지만 단전에 의한 수행은 중도에 신통神通이 나기 쉽다. 신통이라 함은 번뇌 망상이 모두 제거된 상태 즉 업장이 모두 녹은 상태에서 신통이 나와야 참다운 신통인데 업장이 모두 녹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통이 나와 버리면 공부는 중간에 망亡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사도邪道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이 할만 한 것은 단전 수행을 하게 되면 신체를 투시透視하는 신통이 나오기도 하는 데 이것은 부처의 육신통에 비하면 지말적인 신통이며 이러한 신통은 <어른이 어린아이들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저급低級하고 유치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신통이 나오는 사람은 그것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절대로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만 열심히 들어 잡념과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의심에 의심을 거듭 해야 된다.
꾸준히 화두에 대한 의심을 몸과 마음이 사무치도록 들게 되면 어느새 인가 화두의 기운이 앞으로 밀려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공부의 경계가 바뀌었다 하여 정진을 느슨하게 하거나 돌아다니면 안 된다.
쉬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잘나가던 화두의 기운이 더 이상 밀려 나갈 수 없는 절벽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머무르지 말고 계속 온 힘을 다하여 밀다보면 의심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스스로 자동으로 들어지니,
화두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비유를 들고자 한다.
손수레에다가 짐을 가득 싣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 가고자한다.
혼자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자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렇다고 한참 오르다가 힘이 든다고 중도中途에서 경사진 언덕에 멈추게 되면 수레의 무게로 인하여 뒷걸음쳐 뒤로 물러나는 순간 엄청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이때는 한 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다.
오로지 아무생각 하지 말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자신의 갖고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언덕의 정상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수밖에 없다.
무거운 수레를 끌고 높은 고지를 향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가는 그 순간에는 오직 올라가려는 그 생각뿐이지 잡다한 생각 즉 잡념 망상은 일어 날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언덕의 정상에 오르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언덕을 내려갈 때는 누워서 떡 먹기다.
몸의 힘을 빼고 쉬면서 손수레의 손잡이만 잡고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언덕 아래까지 내려 갈수가 있는 것이다.
몸의 힘을 빼고 수레의 손잡이만 잡고 있으면 자동으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데
<이 때를 화두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화두의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 구태여 의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자동으로 들리니 힘들이지 않고 정진 할 수가 있다.
이 때 부터는 척추를 세우고 가부좌 틀고 정진을 해보면 화두의 기운이 머리에 들러붙게 되는데 이 기운을 진리의 기틀 이라고 해서 이기理機라고 하는 것이다.
화두의 기운은 너무 힘을 쓰면 머리에 들러붙고 너무 힘을 빼도 역시 들러붙으니 이 상태는 정진하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고로 화두의 기운이 들러붙지 않도록 애를 써야 된다.
화두의 기운이 들러붙으면 머리가 도도하여 뻑뻑해지고 정진이 안 되고 있다는 증거이니 화두의 기운이 순일하도록 노력해야 된다.
그러나 공부가 진척 될수록 화두의 기운은 더 들러붙게 되어있다.
이때부터가 진짜 공부의 시작이니 이제까지 공부한 것은 준비운동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부터는 쉬는 공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공부 경계에서는 사람 따라 다르지만 척추를 세우고 정진하면 착력이 되어서 화두의 기운이 자꾸 머리에 들러붙어서 자세를 느슨하게 앉거나 벽에 기대어 정진해야 되기 때문에 이 공부 경계에서는 대중선방에서는 공부할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니 이때는 정진할 때 자세에 구애받지 않는 처소를 마련하여 될 수 있으면 혼자 정진하는 것이 좋다.
이때 화두의 기운이 머리에 들러붙든 말든 머리가 불편하든 말든 꼿꼿이 척추를 세우고 고집 부려 정진하게 되면 더 이상 공부의 진척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진하는 것 같지만 정진의 소득은 전혀 없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고로 마음이 해탈하려면 반드시 몸도 해탈하여야 된다,
즉 정진의 진척이 된다는 것은 잡념 망상이 소멸되는 것이고 이것은 의식의 정화淨化이고 의식의 신경이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공부 처에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이 서로 상응해서 의식이 정화된 만큼 몸 역시 정화되어 따라 주어야한다.
정신이 진척된 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로 번뇌 망상이 소멸消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몸이 정신에 상응하지 못하고 따라주지 않으면 공부의 진척이 되지 않아 의식의 신경이 끊어 질 수 없으니 그때는 정진이 중지된 상태이다.
반드시 정신과 신체가 함께 상응相應하며 균형을 맞추어 나가야 번뇌 망상 잡념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 경계에서는 정진할 때 몸의 자세에 따라 즉 착력이 되고 안 되고 따라 공부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좌우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산승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척추를 세우고 가부좌 틀고 정진하다가 그 후에는 벽에 기대서 정진하다가 점점 기울어지더니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와선臥禪을 했다.
와선을 하는데 정진이 그렇게 잘될 수가 없었다.
또한 벽에 기대서 정진하던, 자리에 누워서 정진하던, 정진이 잘되는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맑게 하고 정진하느냐 정신을 흐리게 하고 하는 것에 따라 정진이 잘 나가고, 또는 잘 나가지 않고를 한다.
그래서 이때는 정신을 맑게 갖고 가든 흐리게 갖고 가든 가 에 관계없이 화두의 기운이 순일 하게 나가도록 만 애를 써야 된다.
정진을 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공부 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신을 일부러 흐리게 갖도록 유도를 해야 된다.
여러 차례 언급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이고 아주 민감한 것이다.
정신을 맑게 가지면 육신은 긴장하여 근육과 몸이 뭉치게 되며 또 정신을 혼혼昏昏하고 흐리게 하면 몸이 이완弛緩되어 풀어지게 되는데 이 원리를 본인이 잘 알아서 정진해야 된다.
더욱 민감한 것은 날씨가 추우면 몸이 움추러 들어 긴장되고 따뜻하면 몸이 풀어져 이완 되므로 화두의 기운도 몸의 상태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앉아서 정진 하던, 벽에 기대서 정진 하던, 누워서 정진 하던, 처음에는 정신을 맑게 갖고 정진하다가 화두의 기운이 들러붙어 머리가 뻑뻑해 지면 살짝 눈을 감고 의식을 흐린(寂寂) 쪽으로 유도해야 된다. 이렇게 정진하다 보면 정신이 혼혼해 지고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 화두의 기운이 순일 하게 앞으로 밀려 나가게 되는데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화두의 기운이 심하게 달러 붙으면 가수면假睡眠상태까지 유도해야 된다.
여기서 잘못하면 잠을 자게 되는 데 잠이 오면 살짝 정신을 차리어 맑은(惺惺)의식으로 유도 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이 되어도 심하게 몸이 경직硬直되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정진을 유지 할 수가 있다.
이것을 수래수거睡來睡去(졸면서 오고가며)그리고 농래농거濃來濃去(흐리게 오고가며)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긴緊(성성惺惺)과 완緩(적적寂寂)을 적당히 혼용混用하여 망상 잡념도 없으면서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득중得中을 취取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서산대사는 <긴완緊緩의 용지用之 득중得中>이라했다.
물론 공부는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게 해야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 할 수도 있지만 이 법문은 쉬는 공부처인 이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계속 쉬는 공부를 하다보면 몸에 힘이 서서히 빠지게 되는데 점점 힘을 더는 곳이 점점 힘을 얻는 곳이며 극히 힘을 던 곳이 문득 힘을 얻는 곳이다.
대근기의 수행자는 이 공부 경계에서 몰록 깨닫기도 한다.
혹자는 이 공부 경계에 대해서 말하기를 정진할 때 중도를 잘 지켜서 힘들이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절대 그런 것 이 아니다.
대혜선선사의 서장을 보게 되면 종직각(宗直閣)에게 보낸 답장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어 참고가 될 것 같아 소개한다.
日用四威儀中(일용사위의중) 涉差別境界(섭차별경계)
일용 행주좌와 가운데 차별한 경계에 이르러서
覺得省力時(각득생력시) 便是得力處也(변시득력처야)
(몸의)힘이 덜 들인 것 을 느낄 때가 몰록 힘을 얻은 곳이다.
得力處(득력처) 極省力(극생력)
힘을 얻은 곳에서는 극히 힘을 덜어서
若用一毫毛(약호일호모) 氣力支撑(기력지탱)
만약 털끝만치라도 기력으로 지탱하면
定是邪法(정시사법) 非佛法也(비불법야)
결정코 삿된 법이 되고 불법이 아니다.
이때가 되면 비교 할 수 없이 몸의 힘이 크게 떨어져 산송장이 된다고 하여 무비저대사無比低大死 라고 한다.
철저한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완전히 적멸이 되어 마음작용이 끊어지게 되면 의식의 신경이 끊어지게 되는데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고로 몸의 기력역시 완전히 소진消盡 되어 탈진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가 끊어진 일념불생一念不生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되어 의식의 신경이 끊어지게 되면 심행처멸이 되고 토목와석土木瓦石같이 일체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적멸의 상태를 이루면서 수행의 궁극적窮極的인 경지境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신경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데 그것을 절후소생絶後蘇生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지혜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쓸수있게된다.
그리고 의식의 신경이 끊어짐의 정도에 따라 즉 적멸을 이룬 정도의 차이 따라 신경이 소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준으로, 부처,보살, 연각, 성문,이 구분되고 공부가 미진하거나 공空에 빠지게 되면 신경이 살아나지 못한다.
그래서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을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하며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문염송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한다.
노파소암老婆燒庵
과거에 어느 불심 깊은 노파가 20여 년 동안 참선 공부를 하는 스님 한 분을 암자를 지어서 뒷바라지 하였다.
20여년을 시봉 했으니 스님의 공부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노파는 스님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딸을 색동저고리로 곱게 단장시키고 먹을 것 과 옷을 준비해서 암자로 보냈다.
암자에 도착한 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방에 들어가 옷과 음식을 드리고 시중을 드는 척하며 갖은 애교를 부리며 스님의 품에 살며시 파고들어 무릎에 앉으면서 입술을 맞추었다.
이 때 딸이 스님을 쓰다듬으며
"스님, 이럴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스님은 아무런 변화 없이 태연하게 말하기를
“마른 고목나무가 차가운 바위에 기대니 엄동설한 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
나는 수도인修道人이니 여자는 마구니 일뿐이다. 어서 썩 물러 나거라!“
딸은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스님이 한 말을 자초지종을 그대로 전하며 정말 훌륭하신 스님이라며 공부의 경계가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었다고 말하자.
딸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노파는 "내가 20년 동안 이런 사마외도邪魔外道인 속물俗物을 공양했구나" 하며 스님을 쫒아버리고 암자를 불살라 버렸다.
스님은 20여년을 도를 닦았지만 신경을 죽일 줄만 알았지 살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생사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노파는 그 스님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타난 보살 화현化現이라고 봐야 된다.
부처도 먹지 않으면 배가고프고, 목마르면 물을 먹어야 된다.
또한 졸리면 잠을 자야 되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어야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이 道이다.
그러나 중생은 매사에 집착하고 희로애락에 기복起伏이 심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게 되어 가슴에 사무쳐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처해진 환경이나 당면한 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마음속에 각인刻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생과 다른 것이다.
처음 화두를 들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러나 한참 정진을 하여 무르익으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마침내 공부를 마치고 보니 도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
---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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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과분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큰스님께서 몸소 체득하시고 설하신 법문.
몸과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실참하신 고귀한 법문 ~~~!
감히 ~
최고로 멋집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스님 간만에 수행처 본분을 올려셔습니다
스님 글 이해하기는 아직 부족하지만 다른 어디에 어록보다 느낌이 와 닿습니다
언제 시간내어 문수사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항상 여여 하십십시오
반갑습니다.
시간나시면 차 한잔 합시다.
스님 고맙습니다 _()()()_
티끌하나 없이 완벽하게
죽어버려야 살수 있는데..
벼랑끝에 매달려 잡고 있는
나무가지를 미련없이 놔버리고
죽어버리자.
참으로 어렵다.
가지를 탁 놓고 싶어도
놓아지지를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