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1장 6.25 한국전쟁 그 무렵
15. 가짜 영웅 심일 소령 이야기
해방 전 일제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육탄3용사(肉彈三勇士)’의 영웅담이 게재돼 있었다. 육탄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장렬히 목숨을 던졌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청소년들은 그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혈서까지 쓰며 그들의 천황(天皇)에 충성을 다짐했다. 일본의 패전 후 그 글 내용이 조작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우리 육군에서도 육탄10용사니, 육탄5용사니 하며 일본군의 육탄3용사와 비슷한 영웅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조작되거나 과장된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런 가짜 소동은 주로 일본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하의 죽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얄팍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 가짜 소동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1981년 초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있을 때 희한한 진정서를 받고 그 사연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심일 소령이 인민군의 전차를 육탄으로 파괴하여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는데 가짜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시 육군의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즉시 조사에 착수하였다. 당시는 관련자가 생존해 있었기에 반론의 여지 없이 가짜로 확인이 끝났다.
1981년 초라면 어수선할 때였다. 전두환 정권 출범 초기라 광주 문제 등으로 육군본부는 경황이 없었다. 나는 정식 과정을 밟아 보고했지만 상부는 관심 밖이었다.
전역 후 나는 군사평론가협회와 한국군사학회를 창립하면서 전쟁기념관 4층에 사무실을 냈다. 이 무렵 도미유학 동기인 손희선 예비역 소장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의 말인 즉 ‘월남전 영웅으로 강재구 소령이 있는데 6·25전쟁 영웅이 없으니 함께 신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인 심일 소령을 호국영웅으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단칼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내 사무실 건너편 백선엽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로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백선엽 예비역 장군은 반갑게 나를 맞았으나 그의 입에서 ‘손 장군과 함께 6·25전쟁 호국영웅을 만들어달라’는 말이 떨어지자 ‘본인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3년 후, 육사에는 심일 동상이 세워지고 심일상이 제정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 장군에게 어찌된 경우인가 문의하니 ‘백선엽 장군이 육군에 압력을 넣어 해결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육군본부는 심일상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회의조차 열지 않고 밀실에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가 지난해 6월 심일 소령의 공적이 허위라고 다시 밝혔는데도, 자문위원장인 백선엽 장군을 업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진실을 외면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방장관의 이름을 앞세우고 심일 소령 호국영웅 정착화 ‘알박기’에 광분하며 육군에 계속 압력을 넣었다. 그러면서 국방부가 만든 심일소령공적확인위원회는 36년 전에 심일 소령 공적 내용을 먼저 확인한 공적심사위원장이었던 나에게 사실 여부를 문의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혀내려 홀로 국방부의 압력을 막고 불의와 싸우는 현대판 ‘조선명사관(朝鮮名史官)’이 육군군사연구소장 한설 장군이다. 역사학 박사인 그는 국방부로부터 ‘심일 소령의 전과는 사실’이라고 발표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심일 소령의 공적이 허위라고 반박했다. 나는 군 후배지만 한설 장군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새 정부는 심일 소령의 허위 공적뿐만 아니라 가짜 호국영웅으로 만들어진 배경과 과정에 대한 진상조사도 해야 한다. 결론이 뒤집힐까 우려해 박근혜 정부가 끝나기 전에 심일 소령의 전과가 사실이라고 ‘알박기’했던 국방부 정책부서 장군들과 실무자들이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경향신문 박경석 칼럼-만들어진 호국영웅 진실은 숨길수 없다.2017.7.31)
심일 소령에 대한 숨겨진 자세한 사연을 그 시발점에서부터 공개해 본다. 이 이야기는 현장 목격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십년 간 관련자와 함께 구성한 내용의 일부분이다. 특히 이대용 장군(당시 1대대 1중대장,대위)은 현장 목격자로 사실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먾은 증빈 자료를 남겼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춘천 주둔 6사단 7연대 정면 38선의 방어 병력을 뚫은 북한군 2사단은 북한강을 따라 남하해왔다. 침공 첫 날인 6월 25일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날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서울에 있었다. 그 전날 육군회관 파티에 참석하라는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초청을 받고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로 가기 전 북한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대대장급 이상은 영내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던 터라 영내 대기하던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비상을 걸고 출동 준비를 했으나 간부들 소집에 긴 시간이 걸렸다. 급해진 임부택 연대장은 연대 본부 바로 앞에서 하숙을 하던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 중위를 불러 57mm대전차포를 끌고 옥산포 북쪽 한개울로 먼저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옥산포는 현재 춘천시의 일부가 되어서 완전 도시가 되었으나 그 때는 북한강 옆에 작은 강변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강을 건너거나 오가는 배들이 들리는 작은 포구였다. 이곳은 북한강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이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요지였다. 명령을 받은 심일 중위는 57m대전차 포 두 문을 끌고 즉각 출동하였다. 대전차포 5문중 3 문은 소양강 건너 전 일본인 소유 생사 공장에 주둔하던 16 포병대대와 같이 있었다. 춘천역 앞에 있던 7연대 본부에는 57mm대전차포 단 두 문만이 있었다.
1 대대 1 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춘천도서관에 가다가 연락병의 전달을 받고 대대로 달려갔다. 춘천 대첩의 주인공이었던 1대대가 출동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두 대의 쓰리쿼터가 57mm대전차포를 견인하고 소양교를 건너 북상한 심일 중위는 포 두 문을 옥산포 북방 1 km 북방 솔밭에 포 진지를 잡았다. 솔밭이라도 약간 높이가 있는 곳인데도 지금은 개간되어 없어졌다. 이곳은 북쪽으로 훤하게 시야가 트인 곳으로서 접근하는 북한군을 포격하기가 좋은 곳이었다. 빗속에서 적을 기다리던 심일 중위는 정오 조금 전 먼 북방에서 국군 38선 경비선을 뚫고 남하하는 북한군 보병을 발견하고 57mm대전차포문을 열었다. 포 사격을 하며 전투를 한참 하던 그가 적의 기세에 놀라 갑자기 포 한 문만 끌고 옥산포 남쪽으로 도주했다. 그는 첫 교전에서 포 한문을 잃었다.
그후 다시 옥산포 남방에 포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니까 심일 중위의 포 1문을 버리고 남하한 철수는 지금처럼 단순한 시각으로 볼 수가 없다. 6.25 전 장비 망실은 군법에서도 엄중히 처벌하는 중범죄였다. 어느 군 원로는 장비 망실자는 잘못하면 총살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 때 총살형이 선고되던 적전 비겁 행동과 형량이 비슷했었다. 대전차포 중대장 송모 대위는 심일 중위가 포 한문을 망실하고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해서 심일 중위를 구타하고 소양강변 우두산에 7연대 CP를 설치한 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달려가 무릅을 꿇고 57mm 대전차포 망실을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에 누구를 처벌하는 것도 문제가 되기에 임부택 중령은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전투나 잘하게나!” 하고 포 망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57mm대전차포 중대는 그날 25일 오후 16 포병대대와 함께 소양교을 넘어 소양강 남쪽 강안에 포들을 방열하였다. 다음 날 26일 심일 중위는 16포병대대와 같이 밀려오는 북한군에 포사격을 하며 전투를 했었다. 이날 26일 포병이 사농동 일대에 몰려오는 적군에게 전개한 포격전은 그날 오전 6사단 7연대 1대대가 옥산포를 향하여 대돌격으로 거둔 승리와 함께 춘천 대첩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춘천에서 버티던 6사단 7연대는 전선의 정돈을 위해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싸워야 했다. 낙동강으로 후퇴하던 중에 대전차포 중대는 전원 포병으로 전과를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보병이 아니라 포병이 된 것이다. 심일 중위는 대전차포 중대장 송모 대위와 영 맞지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불화를 버티다 못하고 춘천에서 잘 싸웠던 김 성 소령의 16 포병대대로 전속했다. 그러나 그가 옮겨간 16 포병대대에는 계급이 대위로 진급한 심일에게 마땅한 보직이 없었다.그는 할 수없이 사단 사령부로 다시 전속을 갔다. 북진할 때는 사단이 그에게 부여한 보직은 7연대 파견 사단 포병 연락 장교였다.
7연대는 육군의 최선두에서 북진하다가 춘천에서 잘 싸운 휘하 김용배 중령의 1 대대가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대규모로 참전한 중공군의 공세로 급히 철수해야 했다. 철수하던 7연대는 10월 31일 자정 초산군 풍장면에서 철수로를 차단하고 맹공을 가하는 대병력의 중공군에게 붕괴당했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실종자들도 부지기수로 발생하였다. 국군 전사는 6사단 7연대는 이 전투에서 75%의 병력을 잃었다고 쓰고 있다. 6.25 초전때 가장 잘 싸웠던 최강 7연대는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짓거나 분대나 소대 단위로 중공군들과 북한군 내무서원들이 살기 띄게 처 놓은 포위망을 뚫으며 탈출해야 했다. 고행이 이어지는 동안 열흘 만에 20여 명의 생존 중대원을 이끌고 제일 먼저 탈출해 나온 1대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 같은 지휘관이 있는가 하면 무려 3개월 후에야 단독으로 강화도를 거쳐 탈출해온 3대대 인성훈 소령같은 경우도 있었다. 7연대 본부에서 근무하던 심일 대위는 안태석 소위와 팀을 이루어서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탈출 도중 두 장교에게 두 사람의 사병이 합세해서 네 명이 된 그들은 무턱대고 남으로 향했다. 그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열흘간 걷던 그들은 11월 10일 경 묘향산 부근 동창이라는 곳에서 한 화전민 외딴집을 발견하고 찾아 들어갔다. 이들은 화전민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저녁에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는 그래도 그 쪽 북한 주민은 국군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고 상황이 바뀌자 그들 북한 주민들은 180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심일 대위가 묵었던 집주인 화전민도 불쑥 찾아온 심일 일행에게 밥을 해주고 잘 대해주는 척 했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심일 일행이 잠드는 것을 본 그는 몰래 산밑으로 내려가 그곳에 온 중공군에게 국군 출현 밀고를 하였다. 새벽 무렵 심일 일행이 아직도 곤히 잠자고 있을 때 중공군 1개 소대가 나타나서 집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외쳤다. 안태석 소위와 사병 한 명은 앞 문을 열고 손을 들고 나가서 포로가 되었지만 심일 대위와 다른 사병은 화전민 가옥의 뒷문으로 탈출하다가 매복한 중공군에게 사격을 당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전사가 확인된 후 고 육군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심일 소령 집안에 대해서 7연대 간부들이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심일 아버지 심기연씨는 함경북도에 살다가 월남해 원주에서 살고 있었다. 그에게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막내만 빼고 3명의 아들이 호국의 전장에서 모두 산화 하였다. 이 딱한 사정을 알고 있을 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국군 소령 급 이상에는 일본군 근무 경험자들이 많았었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할만한 전투와 대상자를 찾다 보니 심일 소령에게 적용할 만한 전사가 발견되었다. 6.25 초전에 대전차전에서 적 전차를 파괴한 것으로 상정하자는 의견이 간부회의에서 합의되어 상부에 건의 마침내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당시 6.25전쟁 초기에는 무공훈장이 난발되는 경향이 있었던 시기었으므로 뒷말은 늘 따라다녔으나 별 문제가 없다가 즐기차게 그 부당성을 지적해 왔던 당시 목격자 이대용 장군에 의해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