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진 향토문학 완성본입니다.
*워낙 대용량이라 파일이 올라가지 않아 복사해 붙입니다.
*대용량이라 행, 배치, 틀이 깨어지고 사진이 생략 됩니다. 원본은 나름대로 짜임새있고
그럴듯합니다.
* 1부는 광진문학18호에 실린 내용과 일치합니다.
* 2부 문학과 함께하는 광진의 명소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하시고 각분야에 작품을 추가로 실으실 분은
10.31일까지 게시판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주초에 출판사로 넘깁니다. 수정사항 있으시면 연락바랍니다.
* 필진 약력은 간단히하였습니다.
* 그동안 도움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연수 배상.
* 원본 파일 보실분은 댓글에 이메일 주소 적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16 광진구청 지원 주민제안사업 탐사활동 발표 자료집
광진 향토 문학
광진 향토문학 사랑회
= 목 차 =
♠ 광진의 향토문학 원용우 3
♠ 광진의 노래, 그 노래여 장은수 6
♠ 아라와 한울이의 어린이대공원 탐사기 신이림 21
♠ 문학과 함께하는 광진의 명소
1 광진 예찬 김종균 40
2 광진의 시향, 아차산 이종수 42
3 뚝섬유원지, 생태원 유옥경 50
4 구의동 시의 거리 정선영 52
5 어린이 대공원 유강원 이규원 55
6 광나루 수변공원, 한강, 정보도서관 안춘윤 60
7 용마봉과 아기장수 강효정 63
8 자양동과 낙천정 김연수 68
9 화양정과 느티나무 이선열 71
광진의 향토문학
원용우 / 문학 평론가, 시인
1. 향토문학의 개념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문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적인 특징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 세계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세계의 큰 문학은 향토문학이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러한 향토문학은 거의가 작가의 고향이 배경을 이룬다. 또한 향토문학에는 향토적 소재가 등장한다. 향토적 소재란 각 지방의 특유한 자연이나 지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풍물, 또는 습속을 제시함으로써 그 지방의 분위기나 특성을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향토문학은 일반적으로 각 지방의 풍물, 습속, 사상, 감정 등을 표현하려는 문학을 말한다. 특히 19세기 말 독일, 덴마크 등에서 일어난 외국문학, 도시 편중주의 문학에 대항하여 일어난 문학을 가리킨다. (윤수천, 향토문학의 개념 참조)
우리나라의 경우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통해 조선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했다.
그들은 ‘근대의 종언’이라는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고 변화된 시대에 조응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계몽의 기획과 이성의 추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 동아시아 지역구도의 재편 움직임 속에서 조선의 지방성(향토성)을 새롭게 자각하고,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데 적극 활용,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문학작품 속에 조선적인 것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향토’를 재현하기에 이른 것이다.(서태수, 향토문학론 참조)
그리고 향토성이란 단지 출생지의 개념뿐만이 아니라, 자연 집단을 형성하는 지역적 공통성을 지닌 환경과 전통 속에서, 정서적·문화적 연대성을 형성할 수 있는 무대를 뜻한다. 이러한 향토성이 짙은 문학을 향토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달리 지역문학이라 일컬을 수도 있다.
① 지역성은 곧 향토성이다.
② 우리의 서정과 꿈을 키우던 문학작품은 향토성이 가미되지 않은 것이 없다.
③ 소월의 ‘진달래꽃’은 북한이 고향이며, 신동엽이 부여에서 태어나 ‘금강’이란 서사시를 쓴 것도 우연이 아닌 짙은 향토성의 결과물이다.(출전 미상)
이런 의미에서 향토문학은 그 지방의 독특한 자연, 인물, 풍물, 풍속, 사상, 방언 따위를 표현한 문학이라 정의할 수 있다.
2. 향토문학의 사례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유산이고 향토문학은 그 지역을 대변해 준다. 향토문학은 고향이나 지방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힘들다. 때문에 고향을 주제로 다룬 작품일수록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크게 사랑 받아 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 때문에 지방의 문학단체, 지역문화단체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지방문학의 발전 방향이 모색되고 있다. 서울이나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단체들은 그 지역 향토문학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문학지 발간, 시낭송 행사, 시화전, 문학특강, 문학기행 등 여러 가지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를 주기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역사와 전통이 쌓여 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향토문학의 사례를 열거해 보자.
① 독일의 향토문학 : 지방문학의 융성은 독일문학의 하나의 특징이며, 예로부터 발전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향토문학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문학운동으로서 ‘문학과 향토와의 긴밀한 결합’을 주장하여 대도시의 퇴폐적인 국제적 문학에 반대하여 건전한 전원생활을 노래하며, 독일 국민의 자연력과 문화력과의 융합을 그 이상으로 삼았다. 이 운동의 이론적·정치적 지도자는 문학사가 바르텔스와 린하르트이며 그 대표적 작가는 프렌센, 시인 렌스, 헤세, 소설가 시트라우스 등이다. 묘사의 수법을 교묘히 살려서 순박한 농촌 청년의 생활을 그려낸 르렌센의 소설 「예른 울」은 이 운동의 최고의 성과로 평가된다.(문덕수 편저, 세계문예대사전, 성문각, 1978)
② 대만의 향토문학 : 향토문학이라는 명칭은 대만의 신문화운동 과정에서 제기되었으며 처음에는 백화문을 제창하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1920년대 대만신문학의 주요기지는 「臺灣民報」, 「臺灣文學」, 「福爾摩沙」, 「臺灣文藝」, 「臺灣新文學」 등의 문예지였으며, 모두 반제반봉건의 사상의식을 기초로 인생을 위한 문학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민의 고달픈 생활을 반영할 것을 강조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대중화와 향토풍격을 추구하였다. 황석휘(黃石輝)는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대만어로 시를 쓰고, 소설을 적고, 가요를 적어서 대만의 사물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의 주장을 반대하여 ‘鄕土文學’과 ‘臺灣話文’의 유명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1960년대 초 서방 현대문학이 대만 문단을 휩쓸 때 향토문학 작품의 출현은 혼탁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작가 미상)
③ 김포의 향토문학 : 김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비해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미약하다. 문자가 기초라 할 수 있는 문학이 모든 분야에서 우선적으로 꽃피워져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보여 주기에 급급한 겉돌기 식의 문화예술 행사가 아닌 지역 특성을 살린 향토문학으로 뿌리를 내려야 당당하게 중앙무대에 도전할 수 있다. 김포를 대변할 수 있는 향토문학은 이 지역 문학인들의 개인의식에 따라 각자 창출하고 있는 성향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포의 정서나 짙은 향토성이 담겨 있고, 그것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향토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李明眞, 열린문학회 회장)
④ 낙동강문학의 향토성 : 낙동강문학은 낙동강의 지정학적 요소를 제재나 배경으로 해야 한다. 낙동강의 역사적 요소를 제재로 한 작품, 낙동강 주변 민중의 삶을 수용한 작품, 낙동강 주변 동식물 등 생명체의 생태를 수용한 작품, 낙동강의 문화를 폭넓게 수용, 변용한 작품, 낙동강의 흐름을 확산하여 다른 강, 혹은 사물에 변주한 작품, 강의 흐름과 동행하는 만상의 원리를 작가가 개성적으로 변주한 작품, 작가의 개성에 따라 형상화 기법은 다양하겠지만 어떤 경우든 강 혹은 물의 이미지가 작품 속에 스며 있어야 한다.(서태수, 향토문학론 참조)
⑤ 영월문학의 향토성 : 고장의 문학은 곧 역사라는 인식으로 문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도 내면의 세계인 철학과 확고한 사고가 정립된 상태가 아니라면 없는 것보다도 못한 헛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세계를 충족시켜 주어야 할 분야가 문학이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문화관광과에서는 문화예술의 고장을 목표로 묻혀 있는 역사를 찾아내는 데 노력하고 있다. 도시개발과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할 정도로 경관도시 건설에 힘을 기울인다. 영월의 문학인들은 영월군이 마련해 준 ‘2007 대한민국 시인대회’에서 전국의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사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영월문학의 당면과제는 김어수 시조시인 발굴 작업이다. 그의 탄생 백주년이 되는 2009년 ‘김어수 문학축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문학행사를 진행하였다.(작가 미상)
3. 광진향토문학의 범위
향토문학이라 하면 고향이니 지방이니 지역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다 알겠지만 광진구는 서울시의 일부다. 그러니까 고향이나 지방이란 말을 사용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지역이란 말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광진문학은 광진 지역의 문학인 것이다.
향토문학에는 향토성이 있어야 한다. 향토성이란 그 지방의 독특한 자연, 풍물, 풍속, 생활, 감정, 사상 따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 지역에서 발생한 민요, 전설, 설화 등도 향토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광진문학에도 이러한 향토성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광진구는 성동구에서 분구되었다. 1995년 3월 1일 성동구에서 분리되어 광진구가 신설되었다. 이 광진구에는 조선시대, 일제시대 때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시대 때의 문인, 일제 때의 광진구 문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광진구가 개발되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광진향토문학사’를 써도 1970년대 이후 이 고장에 살았던 문인들을 중심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광진향토문학의 범위를 정하는 작업도 쉽지 않다.
광진향토문학의 대상은 다른 지역의 문인이라도 광진구의 자연, 사찰, 풍속, 인물, 전설 등에 대하여 작품을 썼으면 광진향토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광진구 문인으로 그러한 대상을 제재나 소재로 해서 작품을 썼어도 광진향토문학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서거정의 「광나루 시」, 이병기의 「대성암」, 원용우의 「아차산 연가」, 장은수의 「아차산 주먹바위」, 신민숙의 「아차산」, 조은미의 「아차산의 봄」, 이종수의 「정겨운 아차산」, 김연수의 「아차산 시랑」, 정선영의 「구삼 마을」 등은 광진향토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광진의 노래, 그 노래여
장은수 / 광진문인협회장, 시인
광나루 위로는 아차산이 병풍처럼 지키고 있다. 오늘날 워커힐 호텔이 자리 잡은 광나루 북쪽 언덕에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숙박을 도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오르면 한눈에 한강의 흐름이 다 보이고 백제시대 토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게 전망이 좋으니 광나루는 군사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 광나루 옛 전경(출처 광진구청 홈페이지)
1. 광진구의 역사
광진구 지역에 사람이 정착했던 때는 신석기시대다. 우리 광진구와 마주한 한강 건너에 암사동 선사유적은 6,000여 년 전 신석기 유적으로 그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집터 유적이다.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 배수지 운동장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이 출토되었다. 이후 광진구 지역은 마한·진한·변한의 삼국시대에서는 그 맹주국인 마한의 터전이었다. 마한 내의 작은 나라였던 백제가 성장하면서 그 도읍 하남위례성(현재 풍납토성)을 지키기 위해 한강 북안에 쌓은 성이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대적으로 수리한 백계의 책계왕 원년(AD 268)부터 역사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고대의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로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아차산성을 함락시킨 이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장악한 553년(진흥왕 14년)까지 삼국이 국운을 걸고 싸웠던 고대사의 현장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정종 때까지는 양주로,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부라고 불렸다. 당시 각 지방은 호족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양주지방에서는 뚜렷한 호족세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에 의해 이 지역이 점령된 후 고려왕조의 직할지가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는데 이곳은 국가의 군사용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마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어 임금이 수시로 나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에 속하였으며 해방 후 1949년 8월 13일 뚝도 출장소를 설치, 서울특별시에 편입하였다.
1968년 1월 11일에 뚝도 출장소를 폐지하고 관할 구역을 성동구 직할로 편입하였다가 1995년 3월 1일 성동구를 중랑천과 동이로를 경계로 하여 성동구와 광진구로 분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동 15개(중곡1, 2, 3, 4동, 능동, 구의1, 2, 3동, 광장동, 자양1, 2, 3, 4동, 화양동, 군자동), 면적 17.04km2, 인구 39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아차산성 - - 온달과 평강공주 동상 -
2. 광나루는 정치적·군사적 요충지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강을 가장 오랫동안 차지한 국가는 단연 백제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475년 수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되면서 개로왕도 전사한다.
그 후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진흥왕의 배반으로 도로 신라에 빼앗기고 만다.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이 아내 평강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땅을 찾으러 전투에 자원했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극을 낳은 곳도 이곳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한강을 차지한 국가는 한반도의 패권국이 되었기 때문에 광나루는 늘 군사적·정치적 요충지였다.
3.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던 곳
아차산 주변과 광나루 근처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아차산에는 푸른 초원이 곱게 펼쳐져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성 외곽을 대단위 목장 지역으로 활용했을 정도로 말 사육을 중시하는 국가였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도 나타나듯 국운이 융성하는 기운은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노는’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조선의 말은 명나라가 선호하는 주요 무역 물품이기도 해서 특히 태종 시절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서 사육된 말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말 1만 마리를 조공으로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광진을 소재로 글을 쓴 시인은 삼봉 정도전으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 「진신도팔경시」에 비록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될 전망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수도 있다.
다음의 그림이 그때 모습 그대로일 듯하다.
- 겸재 정선 ‘광진(1741) -
- 정도전 시비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2011년 종묘) -
일본소재- 14-15세기 조선 방목도- 현재 아차산근처의 조선왕실 목마장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1410년 5월 10일, 금주(衿州, 지금의 시흥)를 목장에서 해제해 백성들이 농사를 경작케 하고, 1413년 3월 18일에는 민가의 땅 5백 결을 전관(箭串) 목장으로 흡수하였다고 한다. 땅 한 결은 요즘 단위로 보면 9,900m2(3천 평)이니, 오늘날 495만m2(150만 평)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국가 전략 차원에서 한강 남쪽 땅은 민가의 농경 생활을 위해 전답으로 활용하고, 한강 동쪽 광나루 쪽은 국가 기간산업인 목축을 발전시키기 위해 목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4. 시인 묵객들의 서정이 있던 곳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으며, 은석사(銀石寺)·범굴사(梵窟寺)·영화사(永華寺)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 이 무렵 나타난 시인은 양성지(1415~1482)다. 비슷한 시기에 서거정(1420~1488)도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광진을 노래한 서거정 시는 광진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일부 공개되고 있다.
- 양성지의 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3 한성부 누정 조) 김민수 사학자 제공 -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아차산 주변인 한양 동쪽 근교는 임금의 사냥터로도 애용되던 곳이다. 그런데 중종 이후에는 아차산에서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사라졌다.
『중종실록』 1541년 10월 11일 기록은 벌채가 심하니 이를 엄히 금하게 해달라는 상소 내용이다. 실록을 보면 문무를 겸비했던 조선의 국력이 이미 16세기 중반에는 급격히 쇠약해져 문에 치중하는 국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그 넓은 말 사육장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민가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이용하다 보니 짐승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양의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차츰 목장은 사라지고 많은 땅들이 전답으로 전환됐다. 말 사육을 국가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생각했던 조선 사회가 점차 농경 사회로 발전해 가면서 유목민의 삶은 토착민의 삶으로 변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경민들 다수가 정착하면서 강가 풍경도 많이 변화했다. 강가에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이 풍경과 어울린 고즈넉한 모습이었다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민가들이 많이 들어섰다.
광나루는 세종 때 삼전도가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물류 창고로 이용되던 뚝섬도 비만 오면 잠기는 바람에 지방에서 올라온 산물을 적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대신할 나루터가 필요했다.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는 광진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한강에서 광주·이천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이용하는 송파나루와 삼전나루 일대는 용산이나 서강, 마포처럼 도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물건들을 바로바로 하역해 적재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 상설 시장이 들어서면서 결국 광진나루 기능을 대부분 흡수하게 된다.
5. 아차산은 역사를 말한다
- 아차산 입구 사진작가 유승률 -
아차산은 높이가 287m다.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두 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 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룬다.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짜리 공기돌 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근대 이후 산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세워졌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일대에 아차산공원, 용마공원, 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고, 산자락에 주택가와 쉐라톤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아차산성(사적 234), 고구려가 한강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아차산 일대 보루군(사적455), 아차산 봉수대지(서울기념물 15),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화사(永華寺) 등이 있다.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 그 외에 석곽분, 다비터, 석탑 등 유적들이 많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해마다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6. 뚝섬나루터, 만남과 이별의 전설
내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뚝섬유원지는 정말 젊은들에게 추억이 많은 곳이다. 허허벌판에 미루나무가 무성했고 모래사장에서 수영을 즐기던 곳이다. 또한 나룻배로 강남 쪽으로 건너가면 뽕밭에 돗자리 하나 들고 자리 잡으려는 아주머니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은 현대화된 공원으로 바뀌어 흔적도 없지만 내 키의 몇 배는 넘어 보이는 미루나무와 수양버들 그리고 종달새와 산비둘기, 이름 모를 새들이 바람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는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 한강 뚝섬의 옛 사진 (사진제공-광진구청) ©디지털광진 ◀
7. 고려 명장 강감찬 장군과 뚝도 호랑이 설화
고려 왕이 강감찬을 한양판관으로 임명하고 한양 부근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서 짐과 백성이 크게 근심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고 하인을 불러 서신을 주면서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가서 불러오너라” 했다.
하인이 이른 아침에 북동에 가니 역시 그곳에 한 늙은 중이 초라한 옷을 입고 흰 도포 쓰고 바위에 앉아 있었다. 서신을 받은 그 늙은 중이 하인을 따라와서 강감찬을 보고 큰절을 하고 엎드리니 강감찬이 큰 소리로 “네가 동물 중에 가장 뛰어나며 용감한데 왜 그렇게 사람을 해치느냐? 너에게 며칠의 기한을 줄 테니 네 가족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 만일 내 명을 어기고 계속 이곳에 머무르면 내가 친히 너희를 몰살할 것이니 명심하여라!” 하자 그 늙은 중이 두 손을 빌며 사죄하므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강감찬이 미쳤는가? 어찌 중을 보고 고함을 치며 혼을 내며 호랑이라 하는가? 그러자 강감찬이 그 중에게 잠깐 본 모습을 나타내라고 했다.
그러자 중이 호랑이로 변하여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니 많은 사람이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니, 강감찬이 “조용히 해!” 소리치자 호랑이는 사라지고 다음 날 하인에게 동교(고려시대 뚝섬의 지명)에 가 보아라 하니 그곳에서는 대장 호랑이가 수십 마리의 호랑이 가족을 이끌고 한강 넘어 도망갔다. 그 다음부터 호랑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8. 이성계와 이방원
이방원의 왕자의 난 이후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명해진 그 시대에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청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오는데 이방원이 마중을 나온 곳이 지금의 뚝섬지역이었다. 이곳에 다다른 이성계는 깃발로 앞을 가리고 이방원이 자신을 못 보게 하여 화살을 이방원에게 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방원은 간신히 화살을 피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곳은 살곶이벌이라 부르게 된다. 뚝섬의 지명은 고려시대 동교 또는 동도라 불리다 조선에 이르러 군사열을 위해 말뚝을 많이 박아 놓아서(이 부근 지명에는 군마와 관계되는 지명들이 많다) 뚝도, 뚝섬이라 했다는 설과 이성계가 이방원을 죽이려고 독기(깃발)을 꽂았다 하여 독도, 뚝도, 둑섬, 둑도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뚝을 쌓아 섬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강 하구에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삼각주가 형성되면서 마포나루와 함께 뚝섬나루는 물류의 중심지가 된다. 동남쪽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세곡, 목재(땔감)가 거래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수세소를 설치하고 세금을 걷기도 하였다 한다. 지금도 이곳을 지나는 도로와 다리가 많이 놓여 있다. 청담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용비교 등 동부간선도로, 강변북로로 서울의 동서간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로 변모해 있다
9. 모윤숙毛允淑이 화양동 느티나무 근처에서 살았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쳐 서울 화양동의 저택에 모윤숙(1909년 4월 24일~1990년 6월 7일) 시인이 살았다. 호는 영운(嶺雲). 화양동 느티나무 거목 세 그루가 버티어선 넓은 땅 단층가옥에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문학은 물론 정치·외교·여성운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국 문단에서 모윤숙 시인만큼 파란 많고 굴곡 심한 인생을 살다 간 문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1910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이화여전 졸업 후 몇몇 여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시 동인에 참여하는 한편,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내고 문단에 데뷔했다. 광복 후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얼마간 기여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제펜클럽에 한국이 가입해 한국본부를 창설할 수 있었던 것도 모윤숙이 홀로 이룩한 성과였다. 모윤숙은 이화여전 재학 시절만 해도 애국시를 발표했다가 일경에 체포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으나 40년을 전후해 신문·방송 기자 일을 하면서 몇몇 친일단체에 가담해 활동한 것이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 국제 펜클럽 집행위원들과
함께한 모윤숙(앞줄 오른쪽 끝). 그는 펜클럽 한국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1970년 서울 국제펜클럽회를 유치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10. 묵객의 은거와 풍류
기름지고 풍요로운 천리의 경기 땅/안팎의 산하는 천하의 요새지로다.
덕교에다 형세마저 아울렀으니/왕업은 천 세기를 길이길이 누리리라.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성이고/구름에 둘러싸인 궁궐 오색 찬연해.
연년이 어원에는 봄 경치가 좋은데/해마다 도성 사람 즐겁게 노네.
관청은 우뚝우뚝 서로 맞서서/뭇 별이 북두성에 읍하고 있는 듯.
달 밝은 새벽 한길 물 같이 맑아/귀인의 수레에는 먼지 하나 일지 않네.
저택은 구름 위로 우뚝 솟았고/민가는 땅에 가득 서로 닿았네.
아침저녁 연화는 끊이지 않아/한 시대는 영화롭고 태평하다네.
북소리 둥둥 땅을 흔들고/깃발은 펄럭펄럭 하늘 덮었네.
만마가 한결같이 굽을 맞추니/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네.
사해 선박 물밀듯이 서강에 와서/용처럼 재빠르게 만 섬 곡식 풀어놓네.
창고에 가득한 저 곡식 보소/정치란 의식의 넉넉함에 있다네.
남쪽 나루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나그네들 사방에서 줄지어 오네.
젊은이는 짐 지고 늙은이는 쉬고/앞뒤로 화답하며 송덕가 부르네.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봄 오자 풀 성하고 물맛도 좋아.
만마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고/목자는 마음대로 여기저기 서성이네.
- 정도전의 「진신도팔경시」 전문 -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건국의 주역으로 도성을 설계하고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궁궐 이름과 문루 이름까지 결정한 명실상부 개국의 핵심이었다. 「진신도팔경시」는 정도전이 새로 건설된 수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찬양한 시다.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굳건한 도성과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들을 묘사하였으며, 이곳에서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아차산 주변과 광나루에 푸른 초원이 곱게 펼쳐진 말을 기르는 목장이기도 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성 외곽을 대단위 목장 지역으로 활용했을 정도로 말 사육을 중시하는 국가였다. 국운이 융성하는 기운은 ‘만마가 구름처럼 모여 뛰노는’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조선의 말은 명나라가 선호하는 주요 무역 물품이기도 해서 특히 태종 시절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서 사육된 말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말 1만 마리를 조공으로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른 요를 깔았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말들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늦은데,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네.
- 양성지의 시(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
양성지(1415~1482)는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는 때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했으니, 확실히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아주 한가날 말이 가는 데로 가다 보니 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비온 뒤라서 들판에는 초록의 물결이 출렁이는 사이로 목장에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같이 아름답다고 했다. 자유분방한 새들이 하늘을 날고 목장에 소 말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가슴이 탁 트였을 것이다. 호루병 옆구리에 차고 늦은 봄 눈부신 햇살이 양성지의 답답한 가슴을 따뜻하게 씻어 주었을 것이다.
다음은 서거정의 시를 살펴보자. 광진구청 홈페이지를 근거했음을 밝힌다. 서거정(1420~1488)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서거정은 그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점복, 성명, 풍수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여 명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었다. 그는 70여 년의 생애 동안 거의 관직에 나아가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관직 생활을 하던 도중 공무로든 사적인 관계로든 자주 광나루를 오가게 되었다. 당시 광나루가 갖고 있는 풍경이란 그가 항상 꿈꾸던 강호(江湖)의 세계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가 해질녘에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본 강 풍경에 대한 소감을 읊은 시에서 알 수 있다.
날 저물게 광나루에 와서 말 세우고 배를 부른다.
물은 푸른 벼랑 아래로 감돌고 흰 갈매기 앞을 지나누나
강가 갈밭에는 흰 눈이 날리고,
사당 앞 잣나무에 맑은 연기가 흔들린다.
해질녘 배 위에 앉으니 시심(詩心)이 가볍게 떠오르누나.
서거정은 이렇게 틈을 내서 광나루의 한적한 풍경을 시로 읊으면서 그는 당시 아차산에 있던 백중사(伯仲寺)에 찾아가 노닐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그 중 광나루를 건너면서 저 멀리 이는 범굴사를 바라보며 지은 시에서는 부근의 아름다운 정경을 잘 그리고 있다.
범굴사는 현재는 대성암으로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에 있는 절이다. 670년(문무왕 10) 의상이 창건하여 ‘범굴사’라 하였고, 1375년(우왕 1) 나옹이 중창한 뒤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대성전과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절간이 어디인가 저 멀리 흰구름 속에 보인다.
산 그림자 지는 곳에 객은 말을 타고 가고
가을소리 들려오는 곳에 중이 종을 두드린다.
단풍숲은 붉기만 하고 강물은 푸르게도 흐른다.
언덕 저 쪽에 촌가 조용하니 돌아갈 마음이 죽처럼 진하다.
자주 광진을 지나며 지날 때마다 이렇게 주위의 산수풍경을 사랑하고, 은퇴하여 한적한 생활을 생각하던 서거정은 만년에 결국 그의 숙원을 이루어 이 광나루 마을 조용한 곳에 집을 마련하고 농노(農老) 어옹(漁翁)들과 이웃하여 세정(世情)을 멀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릉촌야시(廣陵村野詩)」로 그의 편안하고 한가로운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광릉의 가을 물색이 장강에 잇달았는데
문에는 띠풀 가리우고 늙은 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뱃사람 다투어가며 그물에 큰고기 들었다 자랑하고
마을 아이들 와서 항아리 가득 술 익었다고 알린다.
강호만리(江湖萬里) 넓은 하늘에 아득히 새가 날아가고,
울타리가 어스름에 개가 홀로 짖는다.
흙 방바닥 등상(藤床)자리에 베개 기대고 누우니
한밤중 떠오르는 달이 창가로 비쳐 든다.
이렇게 그는 만년에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광나루 부근의 쌍수정(雙樹亭)에 자리잡고 강호 생활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호 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했던 그는 성종 18년(1487년) 68세로 왕세자인 연산군을 위해 『논어』를 강하였지만 이듬해인 1488년 6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광나루의 아름다움과 정취에 취하여 홀로 오가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 서거정의 시(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楊州牧조)
광나루를 흐르는 푸른 한강물은 뱃머리에서 내려다봐도 거울처럼 맑아 얼굴을 비춰도 어릴 것 같았으리라. 50년 전만 해도 뚝섬유원지는 미루나무가 울창했고 백사장에 몸을 던지고 해수욕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한강 위에서 아차산을 바라보는 경관은 마치 범굴사가 허공에 떠서 저녁놀이 휘감긴 듯 눈부신 자연에 취한 시인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아마도 장군바위를 올라 범굴사에 도착한다. 불전에 엄숙하게 두 손 모은 뒤 스님과 만났을 것이다. 속세를 벗어난 듯 이곳이 극락이란 생각이 들었나보다. 아름다운 비경에 혼자서 자연과 벗을 삼는 시인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물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供養米)를
이제도 의상(義湘)을 더불어 신라시절(新羅時節) 말한다
별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 가람 이병기 「대성암」 전문
이병기는 시조시인, 국문학자(1891∼1968)다.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국문학개론』, 『가람문선』 외 다수가 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시조부흥운동에 앞장섰고 시조뿐만 아니라 국문학, 서지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교편생활을 하면서 고문헌 수집, 시조연구 및 창작을 시작했다.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 연구운동에 앞장섰고, 1926년 시조문학의 구심점이 된 ‘시조회’를 창립해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장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1년 가까이 복역하고 1943년 출감 후 낙향하여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아차산을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고 했다. 아차산성에 고인 돌에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드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리는 날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경치에 가람은 잠시 땀을 훔치며 광나루를 건넜으리라.
조개는 천천히 말을 삼키고
젖가슴인 모래 속으로 든다.
따뜻한 물살이 사르르 오면
입을 열어 또 한 모금 목을 축인다
저절로 나왔다가 저절로 오무라지는
아기 조개는 바다의 귀염둥이
해가 저물면 어디로 갈까
눈도 없는 조개는 어디로 갈까.
*보통학교 5학년 시절
- 모윤숙 「참조개」 전문
모윤숙 시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시 「참조개」는 그가 문학적으로 끼 많은 소녀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참조개」는 ‘조개는 천천히 말을 삼키고 젖가슴인 모래 속으로’ 드는 것을 어린이의 눈으로 본 것이다.
‘따뜻한 물살이 사르르 오면 입을 열어 또 한 모금 목을 축’이는 파도에 쓸려 다니는 모습을 보고 바다의 귀염둥이로 표현했다. ‘해가 저물면 어디로 갈까, 눈도 없는 조개는 어디로 갈까’하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이의 눈빛이 참 예쁘다.
가슴에 새긴 사연 묵언으로 버틴 生涯
그리움과 외로움을 밥알 씹듯 곰삭이며
아리고 쓰린 역사를 간직해 온 아차산성
바라보면 의젓하고 늠름한 푸른 기상
무수한 세월 가도 변함없는 온달 사랑
불타는 진달래꽃은 누굴 위해 타는 건가
무너진 하늘 한켠 붙잡고 울던 평강
그 자리엔 이름 없는 풀들만 웃자랐다
켜켜이 쌓인 적막 속 성돌 하나 뒹군다.
- 원용우 「아차산 연가」 전문
이리 가면 광나루
저리 가면 자양동 길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들의 시위 현장
아무리 모의를 해도
시위는 시위일 뿐이다.
웃자란 건물 들이
하늘 향해 시위하고
백성은 허구한 날
임금 향해 시위하고
한 치 앞 알 수가 없는
안개 속에 싸인 강변
어디로 굴러가는지
세상은 굴러가고
도시의 하루 저무는
민초들의 고달픈 삶
주거니 받거니 하는
포장마차가 즐겁다.
- 원용우 「강변역 일기」 전문
한 마리 새가 되어 둥지 튼 지 40성상
건강에 주신 행복 느꺼운 나달이다
눈물로 삼킨 세월을 꽃으로 피워낸 삶
자고 나면 보던 친구 먼 나라 날아가고
아쉽고 그리운 노래 부르다가 목 메인다
뿌리는 깊이 내려도 心地 자꾸 흔들리네.
외길 걸은 한 평생 정상 저기 뵈는가
우듬지 걸린 새집 빈 바람 들고 나도
쌓아온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211번지
- 원용우 「구의동 211번지」 전문
원용우 시인은 1975년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광진문인협회 제2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등 문단 요소요소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아차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하루 이틀이겠는가. ‘그리움과 외로움을 밥알 씹듯 곰삭이며 아리고 쓰린 역사를 간직해 온 아차산성’에서 고구려의 온달과 평강의 애틋한 사랑을 가슴에 불타는 진달래를 보며 풀들만 웃자란 산성에 ‘켜켜이 쌓인 적막 속 성돌 하나 뒹’굴어 시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광나루와 자양동 길은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들’의 모습이 시인의 눈에는 ‘시위 현장’으로 보인다. ‘웃자란 건물들이 하늘 향해’ 백성은 임금 향해 시위하고 세상이 안개 속에 싸여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강변역 모습이 현실을 사는 우리들 모습이다. 도시 생활을 하는 ‘민초들의 고달픈 삶’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해가 저물면 ‘주거니 받거니 하는 포장마차가 즐겁다.’
‘구의동 211번지’란 제목은 현재 원용우 시인의 주소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둥지 튼 지 40성상을 ‘눈물로 삼킨 세월을 꽃으로 피워 낸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누구든 어찌 세상을 행복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그에게도 한구석 아픔은 있는 것이다. 때로는 지난날을 생각하면 목 메인 노래를 포장마차에서 흥얼거리는지 모른다. 오로지 외길을 걸어온 시인에게 이제 정상이 저만큼 보이는 것이다.
대륙의 지령원기 곤륜산에서 발원한 땅 기운
흙내는 백두대간 관류하여
남녘 하늘 아래
소나무 청청한 ‘아차산’은 잠들지 않는다.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나뭇잎들도
두물머리 함수하는 한강물 바라보며
아차산은 고구려 역사 생각 키운다.
새로운 서울의 하늘 꿈을 그린다.
마음은 빨강 노랑 파랑 등 불로초 꽃잎
영겁을 영원토록 회귀하지 않듯이
하여 한강물은 제 곬으로 흐른다.
- 오덕교 「아차산은 잠들지 않는다」 전문
뱃길로 춘천까지 물길로 충주까지
강 건너면 광주까지 눈앞에 와 닿은
광나루 넓은 물길이 굽이굽이 흐른다
수려한 아차산성 한양의 으뜸 요새
패전한 개군 왕이 치욕 받고 전사한 곳
온달의 애국 충절이 강물 속에 흐른다
춤추며 노래하며 북적됐던 광나루 터
찬란한 조명들이 강물 위로 춤을 추고
줄 이은 차량 행렬이 강물처럼 흐른다.
- 박철구 「광나루의 정취」 전문
바위도 눈을 뜬다, 햇빛 저리 눈부신 날
숲 속을 빠져나온 머리맡 낮달 한 채
고구려 바보 장수의 이마 위에 걸려 있다
돌팔매도 감싸안은 아리수 물길 트고
산벚나무 지는 꽃잎 평강공주 눈물 같다
불현듯 말발굽소리 아차산을 휘감는다
말갈기 휘날리며 낙랑벌에 당긴 화살
타는 노을 졸본 땅도 손아귀에 녹아들고
무거운 갑옷을 벗자 돌거북이 깨어난다
소슬산문 한 허리를 돌아드는 산 그림자
선잠 깬 어머니는 별 하나 품고 와서
피 닳는 결기의 지문, 화석처럼 찍고 있다
칼끝으로 새겨가는 검은 눈의 동북공정
사직(社稷)의 심장부에 사초(史草) 다시 쓰는 건지
서늘한 아차산성에서 불끈 쥐는 돌주먹
- 장은수 「아차산 주먹바위」 전문
오덕교 시인은 광진문인협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시인은 유명을 달리했어도 ‘아차산은 잠들지 않는다.’ 시인이 남기고 간 주옥같은 글은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선다. 또한 박철구(자문위원) 시인도 아차산과 광나루 일대의 눈부신 발전상은 천년을 말없이 흘러가는 한강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장은수 시인도 ‘아차산 주먹바위’를 들고 ‘피 닳는 결기의 지문, 화석처럼 찍고 있다.’ 시인의 눈은 예리하다.
세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아차산성은 삼국시대에 서로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격전지인데, 한강과 아차산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경관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역사성에 관하여 우렁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때 참여한 이들 중에는 ‘바보 온달’로 알려진 온달장군은 광개토대왕이 점령했지만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을 찾아오겠다며 출정을 하여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때 온달이 주먹을 쥔 채 죽었고 그의 주먹을 닮은 ‘주먹바위’가 아직도 아차산에 남아 온달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온달의 주먹을 닮은 ‘주먹바위’ 맞은편에는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형상을 한 ‘통곡바위’가 남아서, 죽음을 넘어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그러니 이곳을 찾는 시인으로서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아차산을 찾아 바위가 눈을 뜨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겠는가.
남북 분단으로 허리가 잘린 한반도를 생각하면 저 옛날 고구려의 기상이 듬뿍 담긴 주먹바위를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한 번 찾고 싶다는 마음이다. 광활한 대륙에 다시 태극기를 휘날릴 수는 없는 건지. 또한 우리 역사를 동북공정으로 말살하려는 중국 저자들의 행동을 주먹바위를 보면서 전쟁터에 나간 온달의 승리를 위해 날마다 새벽이면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드렸을 온달 어머니를 생각해 내고, 돌주먹을 움켜쥐고 큰 결기를 새겨 놓는다.
광진향토문학사란 거창한 주제로 첫걸음을 내딛는다. 어설픈 시작단계지만 한 걸음씩 보완해 나가 후진들에게 광진향토문학에 관한 역사를 남겨주고 싶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광진구 홈페이지, 두산백과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8>펜클럽과 모윤숙, 다음백과
아라와 한울이의 어린이대공원 탐사기
신이림 (아동문학가)
- 어린이 대공원 박정희 대통령 친필 -
10시 10분.
아라가 핸드폰을 열고 시간을 확인했다. 한울이도 목을 길게 빼고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 아냐?”
“아냐, 분명 여기야. 정문 들어와서 왼쪽. 여기 ‘대통령 박정희’라고 쓰여 있잖아.”
“근데 삼촌은 왜 안 와?”
한울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라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삼촌이었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가지러 가고 있다고 했다.
“이그! 덜렁이. 이런다니까.”
아라가 투덜대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울이 얼른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라 너, 여기 몇 번째야?”
“음, 일곱 번쯤?”
“우와! 그렇게나 많이? 근데 왜 또 와?”
“내가 문자 보냈잖아. 방학 숙제 땜에 삼촌이랑 가는 거라고. 오늘은 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는 동상이나 비석 같은 거 돌아볼 거야.”
“여기에 그런 것도 있어?”
“응. 나도 잘 몰랐는데 삼촌이 많이 있대.”
“그래? 나도 여기 사촌형이랑 두 번쯤 왔는데, 놀이기구만 타고 동물원이랑 식물원 구경만 했어.”
“나도 그랬어.”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아라가 발길을 뚝 멈췄다. 카페와 관리사무실이 있는 꿈마루 건물 화단 팻말 앞이었다.
“한울아, 이거 읽어 봐. 어린이대공원 역사야.”
뒤따라온 한울도 아라 옆에 나란히 섰다.
“능이 뭐야?”
“능? 무덤 아니야? 왕릉 할 때도 능이라고 하잖아.”
“그럼 여기가 무덤이 있던 곳이란 말이야?”
“그런가 봐. 여기 그렇게 쓰여 있잖아. 어린이대공원 자리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비, 순명효왕후 민씨의 능이 있던 곳이라고.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6년,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일본관리와 사업가들을 위한 골프장을 만들었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어린이대공원이 되었고.”
“나쁜 일본 놈들!”
한울이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라가 까르르 웃었다.
- 꿈마루 안내판 -
“야, 장한울. 너 애국심 진짜 장난 아니다.”
“열 받잖아. 지들 마음대로 우리 왕비 무덤을 막 옮기고.”
“하긴.”
아라가 어린이대공원안내도를 펼쳤다. 한울이도 아라 어깨 너머로 안내도를 보았다.
“어, 여기 순명비… 유강원 석물원? 유강원 석물원이 뭐야?”
“나도 모르겠는데.”
한울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저기니까 가보면 되겠다. 가자.”
아라가 안내도를 접었다. 그때 한울이 정문 오른쪽 길에 있는 석물들을 가리켰다.
“저긴가 봐. 이상한 돌조각들이 있잖아.”
한울이 뛰어갔다. 아라도 뒤처질세라 덩달아 뛰어갔다.
- 순명비 유강원 석물 -
한울이 도착하자마자 순명비유강원석물 설명서부터 읽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읽던 한울이 한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순종이 승하하자 순명효왕후 능도 이장하여 순종이 있는 곳으로 함께 모셨다는 대목이었다.
“아라야, 일본 사람들이 억지로 옮긴 게 아닌가 봐. 여기 그런 말 없잖아.”
“그럼 우리가 그냥 옮겼나? 부부니까 같이 있게 해 주려고.”
한울과 아라가 설명서를 읽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삼촌이었다.
“늦어서 미안! 네가 우리 아라 남자 친구 장한울?”
“네. 안녕하세요?”
한울이 꾸벅 인사를 했다. 시간을 보던 아라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삼촌! 지금 몇 신지 알아?”
“미안, 미안. 그래서 삼촌이 짠!”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걸로는 안 돼. 나중 피자도 사줘.”
“알았습니다, 공주님. 분부만 내리시지요.”
삼촌이 허리를 구십 도가 되도록 굽혔다. 세 사람은 나란히 길가 나무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삼촌, 어린이대공원이 원래는 왕비 능이 있는 곳이었나 봐요. 그런데 순종 황제가 돌아가시면서 여기 있던 왕비 능을 옮겼대요.”
“삼촌, 부부니까 같이 있게 해 주려고 옮긴 거 맞지?”
“아, 아라공주님. 그건 아니지요. 그 일을 꾸민 게 일본 총독부인데.”
“일본 총독부요? 그럼 정말 일본 사람들이 억지로 옮기게 했어요?”
한울이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으려다 말고 눈을 홉떴다.
“그래. 골프장 조성에 나선 일본 총독부가 영친왕을 협박해서 이곳을 빼앗은 거야. 저기 있는 석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골프장 조경석으로 쓰였는데, 다행히 광진구 문화재 지킴이인 한 주민의 노력으로 석물들이 현재 이 자리에 다 모일 수 있었대.”
“나쁜 일본!”
한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고만 있었어?”
“분했지만 힘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
삼촌이 일어섰다. 빨리 움직여야 피자도 빨리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 저기 들렀다 가면 안 돼요?”
한울이 유강원 바로 옆에 있는 전래동화마을을 가리켰다. 삼촌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획대로 움직여도 점심 시간 안에 끝내기가 빠듯하다고 했다.
“한울, 전래동화마을 안 가봤어?”
“아니.”
“그래도 오늘은 안 돼. 다음에 가 봐.”
삼촌이 눈을 찡긋하며 안내도를 펼쳤다.
“우선 이승훈 선생 동상부터 가보자. 거기 보고 나서 백마고지 삼용사, 그 다음 조만식 선생 동상 보고 쭉~”
삼촌이 손가락으로 갈 길을 짚었다.
이승훈 선생 동상이 있는 곳은 순명비 유강원 석물원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있는데 축구장 부근이었다.
- 남강 이승훈(1864~1930) 한국의 교육자·독립운동가. 신민회 발기에 참여했고, 오산학교를 세웠다. 105인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한다지만 이승훈 선생은 교육자로서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야.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 지배를 받는 걸 원통해했던 이승훈 선생이었거든. 그러던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면서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길러내는 데 온 힘을 쏟았지. 선생이 얼마나 학생들 교육에 열정을 쏟았는지는 선생의 유언만 봐도 알 수 있어.”
“유언이 뭔데요?”
한울이 눈을 반짝이며 삼촌을 빤히 보았다.
“선생이 죽고 나면 시신을 학생들 연구용으로 쓰게 해 달라 했으니까.”
“삼촌, 그래서 정말 썼어?”
아라 말에 삼촌이 고개를 저었다.
“일본 방해로 쓰지 못했지.”
“일본이 왜 방해해요?”
한울이 따지듯이 물었다.
“두려워서겠지. 그 일로 우리 학생들은 더 똑똑해지고 하나가 될 테니까. 자, 이제 그만 가자, 백마고지 삼용사상으로.”
삼촌이 두 팔을 벌려 아라와 한울이 등을 감쌌다.
백마고지 삼용사상은 구의문 가까이 있었다. 강승우 소위와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 동상으로 우뚝 선 삼용사의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였다.
“들고 있는 게 수류탄이에요?”
“슈류탄과 박격포 같은데.”
“저걸 멀리서 던진 거예요?”
“그랬다면 특별할 게 없겠지? 삼용사는 육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거야.”
“육탄? 몸으로요?”
“응. 저기 봐. 동상에도 수류탄과 박격포 같은 게 들려 있잖아.”
“아하, 그래서구나.”
“6·25때 백마고지는 아주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는데 삼용사가
지켜냈지. 물론 다른 병사들의 희생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삼용사 정말 멋있어요. 빨리 커서 나도 군인이 되고 싶어요.”
한울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역시. 한울이 넌 전생에 온달장군이었을 거야.”
“온달장군? 어디 보자.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아라는 뭐냐? 평강공주? 하하하하.”
삼촌이 한울과 아라를 번갈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삼촌!”
아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 백마고지 삼용사 상 -
조만식 선생의 동상은 동물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상 옆 잔디밭에 세워져 있는 설명서부터 읽었다.
“왜 오른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지?”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아라다웠다.
“글쎄. 한울인 무슨 뜻일 것 같애?”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뭐 이런 뜻 아닐까요? 일본이 나쁜 짓을 하니까.”
“오호! 듣고 보니 그럴 듯하네. 아라도 그렇게 생각해?”
“응.”
아라가 엄지를 추켜세우자 한울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우쭐했다.
- 조만식(1883-1950)일제 강점기 이후 독립을 위하여 노력했고, 교육계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민족언론을 육성하기도 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1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고, 이때 김성수·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귀국후 오산학교 교장을 여러 번 역임했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했으며, 조선일보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했으며,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
삼촌이 안내도를 꺼냈다. 위치가 애매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하다 ‘통일과 번영의 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꿈속도서관과 명상정원 혜윰이 보였다. 아라와 한울이 가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삼촌은 배가 고파 안 되겠다며 다음에 또 오자고 달랬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전부 다섯 명이네.”
아라가 조각을 둘러보고 난 뒤 말했다.
“태극기, 망치, 나팔, 저건 곡식인가?”
한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볏단 같애. 아이가 들고 있는 건 나뭇가지고. 그렇지?”
“응.”
“다들 나름대로 상징이 있는 걸 거야. 비둘기도 있잖아, 평화를 상징하는. 이때만도 우리나라가 가난했으니까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서 평화롭게 통일을 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담겨 있었을지도 몰라.”
삼촌이 다시 통일과 번영의 상을 한 바퀴 빙 돌았다.
- 통일과 번영의 상 -
“이제 그만 보고 가자. 여기서 조금만 가면 비석 두 개와 동상도 있어.”
삼촌이 재촉했다. 표정으로 보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혼자 원룸에서 사는 삼촌이 아침밥을 제대로 챙겨먹었을 리가 만무했다.
윤극영 선생의 노래비에는 ‘반달’ 동요가 새겨져 있었다. 노랫말 위에는 반달 조각도 새겨 놓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반달 노래를 부르던 아라가 갑자기 한울이에게 불쑥 손바닥을 내보였다. 한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라를 보았다.
“나 따라 해 봐.”
아라는 노래에 맞춰 신나게 손동작을 했다. 한울은 아라를 따라하려 했지만 도무지 할 수가 없어 그냥 픽 웃고 말았다.
“맞아. 우리 어릴 때도 있었어. 손을 올렸다 내렸다 마주쳤다 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빨리 잘 하든지. 흐흐.”
삼촌은 어릴 때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당시 반달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윤극영 선생님에 대한 일화를 봐도 알 수 있어. 6·25 피난 시절, 윤극영 선생이 피골이 상접한 구부정한 모습으로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갔대. 그런 모습을 한 사람한테 지점장이 뭐라고 했겠어?”
“안 된다고 했겠죠?”
“그래. 한마디로 딱 거절했지. 그래서 빈손으로 은행 문을 나서는데 선생 머리에 반짝 생각 하나가 떠오른 거야. 선생은 도로 지점장에게 가서 말했대. 내가 ‘반달’ 노래를 지은 사람이니 ‘반달’을 담보로 돈을 빌려 달라고.”
“와! 짱이다! 그래서 빌렸어요?”
“당근이지. 지점장이 몰라 뵈어 죄송하다며 당장 돈을 빌려 주었지.”
“정말 대단하다. 난 반달 노래가 그렇게 유명한 노래인지 몰랐어.”
아라는 다시 반달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랫말을 보고 또 보았다.
- 윤극영(1903~1988) 동요작가. 동요작곡가. 아동문화운동가.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조선 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 동요 창작을 시도했다. ‘반달’을
비롯해 설날’‘까치까치 설날’‘할미꽃’‘고기잡이’‘꾀꼬리’‘옥토끼노래’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했다.-
윤석중 선생의 비석은 윤극영 선생 비석과 함께 유엔평화동산 안에 조성되어 있었다. 사각기둥에 둥근 해를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윤석중 선생의 비석에는 「새나라의 어린이」 노랫말이 4절까지 새겨져 있었다. 삼촌은 비석을 돌며 4절 노랫말 사진을 찍었다.
- 윤석중(1911~2003) 아동문학가. 13세에<신소년>에 동요 ‘봄’이 입선되고,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현재 새싹회에서 「윤석중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
“너희 둘 중 「새나라의 어린이」 5절 아는 사람?”
“5절도 있어? 여긴 4절뿐이잖아.”
“있어요, 공주님.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세요.”
삼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라와 한울은 핸드폰을 열었다. 아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딩동댕~”
삼촌을 따라 한울도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야, 한울아. 저기 이상하게 생긴 사람 동상이 있어.”
아라가 앞서 뛰어갔다. 삼촌도 한울도 할 수 없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아라가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네델란드 사람이었다.
“한울아, 이것 좀 봐. 한쪽 발은 자동차고, 한 쪽 발은 배야. 웃기지?”
“어디? 어, 정말 그러네. 왜 이렇게 만들었지?”
아라와 한울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삼촌은 동상 뒷면을 살폈다.
“우리나라 이름으로 박연상이에요?”
“박연상? 하하하하. 아니, 아니. 이름은 박연이고 상은 동상이란 뜻이야.”
“아! 맞다. ‘통일과 번영의 상’할 때도 상이 들어갔지.”
한울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선시대에 어떻게 네델란드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어요?”
“어?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아라가 맞장구를 쳤다. 삼촌은 미리 자료를 찾아보고 온 듯 술술 이야기를 했다.
- 박연 동상 -
“일본으로 가던 중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 물을 구하러 제주도에 들렀는데 관헌에게 그만 붙잡혔대.”
“그 사람들 엄청 놀랐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놀랐을 걸. 우리랑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하하하. 아마도 그랬을 거야. 다행히 박연은 조선생활에 잘 적응을 해서 동료 두 사람과 같이 총포 제작도 하고, 병자호란 때는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도 하고. 하멜 일행이 표류했을 때는 제주도에 가서 통역도 했어. 3년 동안 그들과 지내면서 우리 풍속과 말도 가르쳤다니 완전 조선 사람인 거지.”
“그래서 옷도 우리 한복을 입혔나 봐요. 갓도 씌우고.”
“그렇지. 한울이 눈썰미도 제법인데.”
삼촌이 한울이 어깨를 툭 쳤다.
박연 동상 맞은편에는 국민교육헌장 비석이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1968년 12월 5일에 만들었으니 오십 년이 다 되어 간다.
- 국민교육헌장 비석 -
“아참! 우리 조금만 되돌아가야겠다. 송진우 선생 동상을 보고 와야 하는데 노래비에 빠져서 깜빡했네.”
삼촌이 안내도를 꺼내어 송진우 선생 동상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휴우, 많이 안 멀어서 다행이다.”
아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하 송진우 선생은 한 손엔 모자를 치켜들고 한 손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너희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할아버지 알지?”
“네.”
“응. 알아.”
“그때 손기정 할아버지가 입었던 옷에 그려진 일장기를 싹 지우고 신문기사가 나갔던 이야기 혹시 들어봤어?”
“봤어요, 책에서! 정말 감동이었어요.”
한울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진을 내보냈던 게 동아일보였는데, 송진우 선생이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였어.”
“아, 그랬구나.”
아라와 한울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빼앗겼을 때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 지금 또 갈 곳도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야. 누군지 알겠어?”
“유관순 누나?”
“딩동댕!”
삼촌이 아라를 향해 엄지를 세웠다.
- 송진우(1890-1945)교육가. 언론인. 정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의 운동복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꿈마루 건물 뒤편에 있었다. 치마저고리 차림에 태극기로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관순 누나가 잡혀갔을 때 부모님 마음이 무척 아팠겠죠?”
“부모님도 아우내 장터에서 일본군에 의해 돌아가셨으니….”
“그럼 슬퍼하지도 못하셨겠네?”
“그렇지.” “아, 정말! 나쁜 일본!”
- 유관순(1902~1920)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아우내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함. -
한울이 불끈 쥔 주먹을 허공을 향해 날렸다.
“그래서 나라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지.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맞아요.” 한울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얘들아, 너희 강소천 선생의 「닭」 들어본 적 있어?”
“닭?”
아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있잖아.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아! 알아.”
“꿈마루 맞은편 조금 위에 강소천 선생 노래비가 있는데 거기 「닭」 노랫말이 새겨져 있어. 가보자.”
삼촌 말에 아라와 한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갔다.
♥ 닭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아라가 비석에 새겨진 동시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강소천(1915~1963) 본명은 용률.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신. 1930년 고원보통학교, 1937년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원중학교, 1946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1948년 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월남하였다. 1951년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1959∼1963년 한국보육대학·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의 강사로서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노래비에 새겨진 ‘닭’은 <소년> 창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그 시대의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밥 한 숟갈 먹고 나서 천장 한번 쳐다보고, 또 한 숟갈 먹고 나서 전등 한번 쳐다보고. 어때? 삼촌.”
“히야, 우리 아라 대단하다.”
“금방 잘도 지어내네.”
한울이까지 칭찬을 하고 나섰다. 아라가 어깨를 으쓱 하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방정환 선생과 김동인 소설가를 보러 가는 길에 어린이 헌장 비석이 있었다. 특이한 모양의 돌조각 안에 비석을 넣고 거기에 글을 새겨놓았다.
-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비석 -
“삼촌, 어린이 헌장이 뭐예요?”
“어린이 헌장은 나약한 어린이들이 사회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어른들의 서약 같은 거야.”
♥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은 어린이날의 참뜻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는다.
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
2.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3. 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4.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 널리 펴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6.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한겨례로서 서로 돕고, 스스로를 이기며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7.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8.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0.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1957. 5. 5. 제정 선포
1988. 5. 5. 개정 선포
“저기 맞은편에 있는 건 처음 만든 거고, 이건 개정판이야.”
“삼촌, 난 어린이 헌장이 있는 줄도 몰랐어.”
“나도.”
“너희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잘 모를 거다.”
“그런 것 같아요.”
“이 헌장을 어른들이 잘 알고 있어야 학대받는 어린이가 줄어들 텐데.”
삼촌 말에 아라와 한울이 고개를 끄떡였다.
“아, 빠뜨릴 뻔했다. 저기 양 끝이 뾰족한 탑 같은 게 보이지?”
“응, 삼촌. 무슨 미술조각 같은데 가 볼 거야?”
“가야지. 저기 가면 너희만한 아이들 동상이 있으니까.”
“정말? 아이들 동상도 있어?”
“응. ‘공산당은 싫어요!’하고 외치다 죽임을 당한 아이와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혹한 속에서도 자기 옷을 벗어 아버지를 덮어 드렸던 효자 어린이 정재이 동상.”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죽었어요?”
“당연하지. 추위 속에서 아버지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대.”
“아! 빨리 가 보자.”
아라가 뛰어갔다.
“같이 가.”
한울도 덩달아 아라 뒤를 쫓아갔다.
- 이승복 동상 - - 정재이 동상 -
“난 이해가 잘 안 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한다고 어떻게 어린애까지 다 죽여? 정말 잔인해.”
“난 어린애가 어떻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요.”
“아 그건, 옛날에는 반공 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그래. 그리고 그때만 해도 간첩이 자주 북에서 넘어오기도 했다니까. 자, 이제 또 이동!”
삼촌이 아라와 한울이 손을 잡아끌었다.
야외공연장으로 올라가는 길머리에 소설가 김동인 선생의 동상이 있었다. 다른 동상과는 달리 흉상이었다. 삼촌이 배낭을 추스르고 사진을 찍었다.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유명한 소설가야.”
“삼촌, 이 선생님은 혹시 다리가…?”
“하하하하.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다른 동상들은 다 몸 전체를 다 만들었는데… 으으, 아냐, 아냐. 이 상상력이 문제라니까.”
- 김동인 (1900∼1951). 소설가. 평양 출신. 1919년<창조>에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배따라기’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문학에 있어 교훈주의의 청산과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문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아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삼촌과 한울은 그런 아라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방정환 선생 동상은 야외공연장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동상과는 달리 어린이와 함께여서 한눈에 봐도 방정환 선생임을 알 수 있다.
“방정환 선생님에 대해선 삼촌이 말 안 해줘도 잘 알지?”
“당근.”
아라와 한울은 동상 주변에 있는 작은 비석에 새겨진 글을 진지한 표정으로 읽어 나갔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들에게.”
“어린 동무들에게, 글 내용이 참 재밌어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글을 읽던 한울이 갑자기 큭큭거렸다.
“옛날 말은 웃겨. 어린이한테 당신들끼리도….”
“난 뒷간이나 담벽에 낙서하지 말란 게 더 웃겼어.”
“입을 꼭 다물고도 웃겨.”
“그때 애들은 되게 말이 많았나 봐.”
“그게 아니지.”
삼촌이 불쑥 끼어들었다.
“입을 다물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거지. 입을 헤에 벌리고 있지 말고 이렇게.”
삼촌이 입을 꼭 다물고 단정히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한울이 동상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방정환 선생님, 고맙습니다.”
느닷없는 한울이 행동에 아라와 삼촌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픽 웃었다.
- 방정환(1899~1931) 호는 소파(小波), 필명은 잔물·금파리·북극성·몽중인.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세계명작동화집〈사랑의 선물〉발간. 1923년 순수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윤극영·진장섭·고한승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새싹회에서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아, 배고프다. 안 되겠다, 빨리 을지문덕 장군 만나러 가자.”
삼촌이 벌떡 일어섰다.
한울이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한울이 넌 전생에 장군이었던 것 같아.”
“아라 넌?”
“아라는 평강 공주지. 한울이는 온달 장군이고.”
삼촌이 또 불쑥 끼어들었다.
- 을지문덕(?~?) 침착하고 대담하며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612(영양왕23)년, 중국 수나라 양제가 수륙 113만의 대군을 직접 인솔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살수에서 수나라의 후군을 무찔러 대승하였다. 살수대첩에서 적장 우중문을 희롱하는 시 <유우중문시(遺于仲文詩)>를 보냈으며 지금까지 전해진다.-
“삼촌! 가만 안 둘 거야.”
아라가 씩씩거리며 소릴 질렀다. 한울이는 쑥스러운지 슬그머니 뒤돌아섰다.
“이렇게 훌륭한 장군이 계셔야 나라가 든든할 텐데. 쩝.”
삼촌이 동상을 올려다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걱정 마. 한울이가 나중 군인 되면 을지문덕 장군처럼 훌륭한 장군 된댔어.”
“그래? 오우! 한울 장군.”
삼촌이 한울이 어깨를 툭툭 쳤다.
“빨리 존 비 코털 장군 동상 가요. 나도 이제 배고파요.”
“뭐 코털? 으하하하하.”
한울이 말에 삼촌이 박장대소를 했다. 한울이 코올터를 말한다는 게 코털이라고 한 것이다. 뒤늦게 삼촌이 웃는 이유를 알게 된 아라도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었다.
“그래, 존 비 코털 장군한테 가자.”
존 비 코올터 동상을 올려다보던 한울이 또‘고맙습니다!’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라 넌 안 해?”
인사한 것이 멋쩍었는지 한울이 괜스레 아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런 분들의 은혜를 갚으려면 우리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라들을 많이 도와 줘야 해.”
“네. 당연 그래야죠. 근데 우리 피자는 언제 먹어요?”
“아, 그래. 나도 배가 고파 돌아가시기 직전이다. 가자, 피자 먹으러.”
“난 피자 곱빼기 먹을 거야.”
“피자도 곱빼기가 있나? 하하하. 자, 출발!”
- 죤.비.코올터((1891~?) 대한민국 국민은 죤.비.코올터 장군의 자유에 대한 백절불굴한 헌신과 또한 전시와 평화시를 통하여 한국에 끼친 공적이 거대함을 느꺼이 생각하여 여기 이 동상을 세워 길이 기념하는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 중 위기일발의 포한전투에서 미국 육군 제7군단을 지휘하여 공산침략군을 격파 승리하였고 이어 미국 제8군 부사령관으로서 공훈을 세웠으며 다시 1952년부터 1958년까지는 국제연합 한국재건단 단장으로 재직하여 초토화된 한국의 재건과 한국인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는 이같이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정신으로써 마침내 이름을 떨치었고 오늘의 역사상에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삼촌이 팔을 힘차게 올렸다.
한울이도 아라도 덩달아 팔을 힘차게 뻗었다. -끝-
♥ 제2회 광진 향토문학 탐사 활동 – 어린이 대공원
1. 탐사지 : 능동 어린이 대공원
2. 일시 : 2016. 06. 25(토) 오후 3시
3. 모임 장소 : 능동 어린이 대공원 정문 옆 벤취
4. 참여 대상 : 광나루 향토문학 사랑회 회원 및 주민
5. 탐사 내용 : 공원내 아동문학가 동상 및 문학비(방정환, 윤극영, 강소천, 이원수), 위인(김동인, 송진우, 조만식, 박연, 백마고지 3용사상, 을지문덕 장군, 정재이 어린이 등 기타 호국인상), 숲속 도서관과 시비, 순명비 유강원 석물 전래동화마을 상상마을 등
6. 일정
3시모임 – 탐사 및 견학 – 6시 : 인근 식당에서 석식 –
7시 00분 공원 숲속의 무대 ‘초록마을 재즈 파티’ 재즈 앙상블 공연 관람
- 9시 마침
● 저녁식사비는 본회 예산에서 지급할 예정입니다. 부담 없이 참여하시길.
- 어린이 대공원 탐사 기념사진 -
문학과 함께하는 광진의 명소
1. 광진 예찬 ( 김종균 : 수필가 )
♠ 광진구 소개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구. 경성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었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지역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75년 한강이남지역이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1995년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 등 8개 동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북동부에 용마봉·아차산 등이 솟아 있다. 중앙선 개통과 청평댐 건설 전까지는 광나루와 뚝섬나루가 서울 동부지역의 주요하항으로 이용되었다. 건국대학교·세종대학교가 있는 화양동 일대에는 상업·서비스업이 발달했다. 아차산성·어린이대공원·뚝섬유원지 등이 있다. 중곡·능·구의·광장·자양·화양·군자 등 7개 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자양로 117이다. 면적 17.06㎢, 인구 360,132명(2015).
♠ 광진의 상징물
상징마크 상단 녹색 삼각형 형태는 광진구의 대표적 명소이며 고구려 문화의 중심 유적지인 아차산을 상징하며, 그와 대칭을 이루는 역삼각형은 한강에 비친 아차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며 중앙에 위치한 돛단배 형태는 "광진"이라는 구명의 어원이 되는 "광진나루"를 상징함. 30도 각도로 기울어진 역동적인 타원은 광진구의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과 구민의 화합을 의미하며. 녹색은 광진구의 풍부한 녹지공간과 여유로운 문화, 백색은 광진구의 유구한 역사와 미래, 청색은 한강의 맑은 물과 깨끗한 환경을 상징함.
캐릭터-광이진이
신라군과 전투 중 아차산성에서 전사한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캐릭터화하여 광진구민의 단결과 화합, 사랑, 진취적 기상을 형상화함.
광진의 나무-느티나무
느티나무는 모양이 단정하고 수명이 길어 정자목으로서 우리겨레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특히 화양동 소재 느티나무는 수령 700년 가량의 노거수로 서울특별시 지방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그 상징성이 높으며 우리구의 무궁한 역사와 늠름한 기상을 상징함.
광진의 새-까치
까치는 예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로 알려져 있고, 아차산 어린이대공원 등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친근한 텃새로 우리구의 밝은 미래를 상징함.
광진의 꽃-진달래
진달래는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어 이른 봄에 화사하게 피어나 모든 사람의 사랑 을 받는 꽃으로 아차산일대에 많이 분포되어 있고 우리구의 번영과 구민의 단결을 상징함.
♠구민의 노래
♠ 광나루/ 황금찬 (원로시인)
- 군자역 광장에 소재한 황금찬 시비 -
♠ 광진구(廣津區) 예찬 / 김종균
하늘에서 내려다보라
남북한을 굽이쳐 온 한강이
서로 만나 서울로 입성하는
교향곡 서너 악장쯤은
은은하게 울려 퍼질 듯한
전설의 요충지를 품에 안고
오늘도 아차산은
고단한 역사를 보고 있네.
해맞이 백성들의 염원을
넉넉한 가슴으로 달래주며
오고 가는 생명의 노래를
한 가슴 안고 들려주네
옛날에는 개선 행진을 했을
동네 앞 큰 길을 다듬어
전봇대가 모두 땅 속으로 숨어든
디자인 도로를 펼친 곳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동량들의 꿈과 사랑이 넘쳐나고
능동 벌 아늑한 동산엔
어여쁜 참새 떼의 지저귐
늘 푸른 하늘에 가득 차오르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사람들
한 여름 밤엔 강변에 나와
유유히 마당을 차리고
광나루 긴 강을 건너던 길손들
다섯 개의 큰 다리를 제가끔 오가며
장사를 나가는지 놀이를 나가는지
동부 정거장에는 고속버스 줄줄이
들고 나기 좋은 동네.
입술이 마르고
남북의 좋은 소식
강물 따라 들려오면
승전보를 안고 뛸
개선의 용사 같이
여기는 서울의 기수, 낭보의 출발지
2. 광진의 시향, 아차산 ( 이종수 : 시인 )
♠ 아차산의 유래
* 제1설
고구려 온달장군에 관한 이야기 인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이 지역을 지한 후 고구려 영양왕 때 평강공주의 남편이며 돌아간 평강왕(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을 비롯한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곳 아차산의 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 군이 온달장군의 시신을 평양으로 옮겨가려 하였으나 장군의 한이 맺혔음인지 영구가 움직이지를 안았다 이에 아내인 평강공주가 평양으로 터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이 이미 결정 되었으니 아아 돌아 갑시다 하자 관이 움직여 돌아가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 주민들은 아차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그만 죽고말았구나 라는 의미로 이곳을 아차산이라 불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온달장군이 전사한 이야기와 공주가 와서 달래어 돌아갔다는 것은 역사기록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그 소는 아차산이 아니라 훨씬 남쪽인 충북 단양의 온달 산성이라는 것이 현재로써 설들력 있는 학설이기 때문이다
* 제2설
세조 임금 때 유명한 판수(점쟁이)가 있었다. 판수는 너무 유명해서 당시 백성들의 길흉화복이나 개인 운수까지 못 맞추는 게 없었고 더구나 점보는 신기한 비전(비급)이 있어 뭇사람의 찬탄과 함께 신비로움을 더했다. 하지만 세조임금이 누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과 나라를 얻은 당대의 인군이요 영웅 아닌가? 더욱이 이씨조선은 미신을 타파하고 유교를 신봉하는 나라가 아닌가? 혹세무민하는 점쟁이를 철퇴를 가하리라 마음먹고 분노한 세조는 판수와 비급을 대령하라 엄명을 내렸다. 판수와 비급이 상감 앞에 대령되었다. “네가 백성의 길흉화복과 신수를 맞춘다는 그 유명한 판수더냐?” “그렇사옵니다”
판수는 담담히 아뢰었다. “그렇다면 이상자안의 물건이 무엇인지 맞추어라!” 판수 앞에 밀봉된 미지의 상자하나가 놓였다. 판수가 점을 치더니... “여기 상자안에는 네발 달린 검정색의 쥐가 들어있사옵니다” 과연 세조가 은밀히 쥐를 넣어놨는지라 내심 놀라며 “그럼 몇 마리나 들어있느냐? 다시 점통을 흔드는 판수.
“쥐는 세 마리 들어 있나이다” 세조는 쥐 한 마리를 넣어놨는지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너 이놈! 상자를 열어보아라!”
상자를 열어보니 쥐가 한 마리 들어있는지라 세조는 불같이 노하며.. “여봐라! 혹세무민하는 이놈을 당장 목을 치렸다! 그리고 그 비급인가 뭔가 요사한 책도 함께 불태워라!” 판수는 형장(지금의 아차산)으로 끌려갔고 비급은 한줌 재로 변했다. 그런데 잠시후 상자속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나 열어보니 쥐가 새끼를 두 마리를 낳아 세 마리가 들어있지 않은가! 판수의 점이 정확하게 맞은 것이다. 놀란 세조는 급히 파발마를 보내 판수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파발마가 도착하니 판수의 목은 방금 망나니의 칼에 잘리고 난후였다. 아차~~그래서 그 산이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이란다. 물론 이 설화는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는 후 산 이름과 연관하여 점쟁이의 일화를 끌어 들어 이야기 일 것이다 일설에는 이 아차산 고개가 지금은 노량진동 사육신묘가 있는 마루턱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의 이름은 원래 아단산으로 생각되는 바 삼국시대에 이미 이곳에 아단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이름이며 그뜻을 보면 아단의 아는 한강의 옛이름인 아리수의 준말이요 단은 돈탄과 같이 고구려의 지명 끝에 흔히 붙이는 곡 (골짜기)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또는 아차산 아차성이란 말이 나의 산 나의 성이라는 말의 고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아단이 아차로 바뀌게 된것은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임금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글자인 차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도 근거가 확실치 않다는 반론도 있다. 오히려 옛 기록에서 단자와 차자가 함께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단산과 아차산이 다른 산이거나 단자를 차자로 잘못 판각한 것이라 여러 견해가 있는 실정이다.(애천 이종수 편)
♠ 황금찬 시비
♠아차산성에서/장은수
누군지 나는 안다, 아차산성 쌓은 이들
바람결에 들려오는 그들의 진한 숨결
억새는 억새의 등에 제 등을 맞비빈다
문득 그때 나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
어디론가 떠나버린 태곳적 짐승처럼
성벽 돌 틈새에 스민 옛 냄새 맡으라 한다
돌꽃 핀 길을 따라 한 비사秘史 펼쳐 놓고
바보 사내 고함소리 우렁우렁 울리는 산
아차차, 내 젊은 시간은 그예 어딜 갔을까
♠한강이 아차산을 휘두르고/이선열
사랑하는 이여,
우리 5월 숲이 되세,
숲속 나무가 되세
한강이 널다이 널다이
내 아버지의
아버지 땅 아차산 휘두르고
청청 산허리 숲속
저 궁창까지 이르렀다네
그대 사랑이여 .
우리 아차산 무성한 숲속
건강한 나무 한그루가 되어보세
수천년 켜켜히
흐르고 흘러
한강물 옆구리에 끼고
빛으로 눈부시게 뿌려오는
숲속 햇살무리가 되어보세
동서남북
고을고을
사람사람 모두 여기 모이고
오,한강은 날마다 한웅큼씩
수천장 잔잔한 유리물결로 내꿈 실어오고
날마다 사람들은
우리의 꿈 아차산에
품어올려 가득합니다.
그대 사랑이여,
우리 살같은 광진땅 사람사람
서로 힘되는 나무들이여 빛이여 숲이여
함께 걷는 동행길
넉넉한 그대 사랑의 합창이여.
아차산은 광진구의 명소 중의 명소다. 산세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수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과 서울과 한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은 과히 일품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으며 매년마다 다양한 문화 행사와 시화전이 열리는 곳이다,
♠아차산에서 시를 읽다 / 예당 조선윤
나무 건반을 밟으면서 오르다보면 하늘과 점점 가까워질 때 가슴에 안기는 희열
산문에서 꽃대를 밀어 올린 야생화와 속삭이며 온달장군 전설을 간직한 아차산에서
저마다의 향기를 품은 시를 읽는다 삼국시대로 역사여행을 떠나며 가장 먼저 만나는 온달 샘 약수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바위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요새지인 보루성 골짜기가 품어내는 신선한 향기 속 정상 주요 부분에 산재해 있다.
화강암으로 뒤덮인 바위산에 올라가면 최고봉인 용마산을 끼고 용마폭포공원 백제
시대에 건축된 아차산성은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백제의 유산 대성암 뒤 의상
대사가 수련 했던 눈길 끄는 천연 암굴 석곽분, 다비터, 봉수대, 강신샘 저마다
사연을 가득 담고 있는 아차산 생태공원 자생식물원 삼림욕을 즐기고 조용히 사색을 즐기는 소나무 숲 힐링 공간 고구려 정을 둘러보며 내려와 영혼의 시를 읽는다.
- 아차산에서 시를 읽다 기념사진 -
♠아차산의 봄 / 조은미
아차!
산에 가야지
아차산엘 가야지
내 사랑 내 추억 있을 법 한
그 산엘 가야지
파릇파릇 바람도 달콤하고
수줍게 숨어 속살 드러낸
젖가슴 타고 내린 약수가
혀끝에 녹는 봄날
아지랑이 봄볕 걸린 바위 틈에
진달래 흐드러진 꼬부랑 비탈길
초록 꿈 잡으러 한 땀 한 땀
오르는 가풀막 산길
상큼한 바람 깊은 숨 토해내면
파란 하늘 위엔 바람 따라
하얀 미소 한 아름 둥실 떠가네.
♠아차산/ 신민숙
바위 굴곡 아픔보며
소나무는 떠나지 못한 채
바위를 끌어안고
거룩한 매듭으로 남았으니
장하다
온달장군을 향한
평강공주의 사랑
♠정겨운 아차산 / 애천 이종수
서울의 젖줄 한강이 굽어 보이고
아름다운 삶의 터가 한눈에 보이는
웅장하고 아담한 정겨운 산
옛 삼국시대가 숨 쉬던 곳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의 용강로
청춘을 나라에 바친 아픔의 사랑
연못에 갇혀 버린 인어 공주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하는 산
너와 나의 아름다운 사랑 이어
오늘도 오르고 내리는 쉼터의 산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이라오.
♠아차산 시랑詩郞 / 김연수
시랑 너랑 나랑
모두가 사랑같이 모여
아차산을 오른다.
소담스런 전설이 누워있는
바위틈을 지나
비단 꽃뱀 꿈틀대는
능선 길을 걸으면
실바람 불어와 솔향기 은은하고
동토에 묻힌 사랑의 밀어들이
연분홍 꽃잎으로 휘날린다.
순정의 울보가 피눈물로
큰 바위 얼굴을 어루던 곳
용마 탄 아기장수의 슬픔이
진달래로 환생하는 자리.
도도한 아리수는
천년을 가슴에 품어
푸르게 흐르는데
우리 한 세월 모여
연리지로 뻗어보나
연리근 엮어 시詩로나 피어보나.
♠아차산 까치집에 까치가 없다 / 김현덕
한강의 노대바람 광나루에 숨 돌리고
아차산 성벽 넘어 일순간 휘몰아칠 때
둥지에 깃털 남기고
어디로 날아갔나.
옹기종기 몸 부비던 풋풋한 살냄새가
물안개에 떠밀려서 흩어진 그 흔적들
얼마나 가슴에 품어야
작은 날개 돋아날까.
먼하늘 훠이훠이 돌아온 보금자리
저녁놀이 졸고있는 스산한 빈집에서
한 사내 탈각脫却의 허물을
깃발처럼 털고 싶다.
♠아차산은 잠들지 않는다 / 오덕교
대륙의 지령 원기 곤륜산에서 발원한 땅기운
흙-내는 백두대간 관류하여
남녘 하늘 아래
소나무 청청한 ‘아차산’ 잠들지 않는다
구름따라 바람따라 나뭇잎들도
두물머리 합수하는 한강물 바라보며
아차산은 ‘고구려’역사 생각키운다
새로운 서울의 하늘 꿈을 그린다
마음은 빨강 노랑 파랑 등 불로초 꽃잎
영겁을 영원토록 회귀하지 않듯이-
하여 한강물은 제 곬으로 흐른다.
♠ 2016 주민과 함께 하는
제1차 ‘광진 향토문학 탐사 활동’
1. 탐사지 : 아차산 유적지
2. 일시 : 2016. 05. 29(일) 오전 10시(시간 엄수) - 오후 2시
3. 모임 장소 : 아차산 등산로 입구 생태공원위 온달장군 동상 앞
4. 대상 : 광진 향토문학 사랑 모임 및 주민
5. 준비물 : 식수, 개인 간단한 간식
6. 일정 : 김민수 향토문화 해설사님 인솔 및 해설
* 필수 주요 탐사로
온달장군동상 (출발점) – 아차산성 - 고구려정 – 온달 평강 전설바위
- 워커힐길 - 수변길 – 광나루터(광진정보도서관앞 도착점)
7. 점심 식사는 편성예산에서 지원합니다.
8. 해산
- 아차산 탐사 기념사진 -
3. 뚝섬유원지, 생태원 ( 유옥경 : 시인 )
광진구 자양동과 성동구 성수동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독기를 세운 곳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전곶교, 성동교가 놓여있는 동남쪽 일대에 해당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은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은 중랑천이 서쪽에서 흐르는 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평야로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고, 또는 군대의 열무장이 되었다. 임금이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이때 임금의 깃발인 纛旗를 세웠다고 한다. 한자명으로 독도・둑도・뚝도라고 하였는데, 둑섬・살꽂이・살곶이들・살꽂이벌・전곶・전곶동・전곶평・전교・동교로도 불렸다.
뚝섬은 실제로 섬은 아니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이 뚝섬 지역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흐르는 중랑천은 한강 본류와 뚝섬 서쪽에서 만난다. 지역 전체가 낮고 평탄하며, 한강에 의해서 형성된 범람원으로 홍수 때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현재는 뚝섬한강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한강르네상스 계획의 일환으로 한강공원을 중심, 강동, 강서 대권역으로 크게 구분하고, 배후지의 토지이용, 경제·문화적 가치와 잠재력을 고려한 개발계획 중에 있다. 뚝섬 한강공원은 옛 추억의 유원지 성격을 담아 어뮤즈먼트 공원으로 조성하고, 지하철역이 공원 내에 위치한 뛰어난 접근성을 활용하여 가족들이 즐기는 공간으로 특화한다. 둔치에 완만한 경사를 두어 침수성을 높이고 청담대교 하부공간은 새로운 예술 공간인 갤러리로 조성할 계획에 있다. 뚝섬한강공원은 영동대교∼잠실대교 구간에 뚝섬 자벌레, 암벽장, 생태원, 수영장 등의 여가활동 공간, 자연형 호안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주변에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 한양대학교, 어린이대공원 등이 있어 서울특별시 교외의 주택지, 학원 지구 및 녹지대를 이루고 있다. 한양대학교 동쪽 중랑천에는 동부간선도로와 광나룻길을 연결하는 살곶이다리가 있다.
♥꽃물나비 / 장은수
봉숭아꽃 뼘을 재는 뚝섬 바람의 집
누군가 감쪽같이 그 꽃잎 훑어갔다
허기진 비둘기 떼가
종종대는 오후에
푸성귀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속손톱 물어뜯던 서른 즈음 처녀였을까
남몰래 강 둔치 여자들
손끝만 훔쳐본다.
그 결에 백발 노파 사뿐사뿐 걸어온다
파랗게 벗갠 하늘로 웃으며 흔드는 손
발 묶인 고치를 벗고
날아가는
나비
떼.
♥뚝섬 자벌레 / 김연수
한강 어디쯤에
거대한 자벌레가 만삭의 몸통으로
갖가지 알들을 품고 꿈틀댄다.
쏟아지는 폭염에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포근한 품안에 알로 안겼다가
벌레 안의 푸르른 벌레가 된다.
지식에 목마른 눈빛들은
책벌레 되어 글밭 속을 거닐고
외로웠던 작은 울음들은
무지개빛 놀이벌레가 되어
버들치 송사리 참게들과 웃음짓고
주름진 얼굴들은 이야기벌레가 되더니
서로 손을 잡고 바닥에 편히 눕는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꿈틀대는 것
때때로 벌레만도 못한 듯한 나도
그 속에 들어 한나절을 꿈틀거린다.
예전엔 은빛 말갈기 휘날리던
섬 아닌 환상의 섬에
꿈과 사랑의 알을 품은 자벌레가
밤마다 시원한 강바람타고
별빛무늬 나방이 되어 반짝 날아오른다.
4. 구의동 시의 거리 ( 정선영 : 시낭송가 )
이 시의 거리는 2008년부터 2015년까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울시로부터 3억 5천의 예산을 들여 조성 된 곳이라 한다. 해서 이날 마지막으로 완성 되어 시의 거리 선포식이 있다. 강변테크노마트 옆 광진문화원 현대프라임 아파트부터(건너 편은 구의현대 2단지 아파트) 올림픽대로가 지나가는 광남중교고입구 사거리 까지 약 300M의 좌, 우 대로 아파트 담 벽에
영구히 게시되는 175명의 대한민국의 유명 시인들의 대표시가 멋지게 잘 게시 되어 있다.
♥구삼 마을 / 정선영
날마다 마음 장 서는
구의공원에 가면
기쁨과 슬픔 나눌 수 있는
따듯한 이웃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은 서로에게 행복한 버팀목이 된다
살면서 생긴 가슴앓이
묵묵히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멈출 줄 모르는 바람의 다독임과
반사 빛으로 더 아름다워진 거울을 보며
얼룩진 연들 강으로 흐른다
용맹한 온달이 지키는 아차산에서
도전과 용기를 키우고
평강의 지극한 정성처럼
사랑과 믿음으로 자란 손들은
옛부터 살아온 이곳을
부모같이 연인처럼 사랑한다
장미꽃 길 따라
공감하는 시인의 마음 걸어 두고
삶의 여유를 지혜롭게 즐기는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인이 사는 곳
그곳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오고
앞으로도 살아갈
광진의 수도
바로 이곳 구삼 마을이다
* (구삼마을은 구의3동입니다)
♥구의동 시(詩)의 거리 /은석 김영제어떻게 알았을까?누구에게 들었을까? 아무 준비함 없는 나에게 길가의 가로수들 양쪽에 나란히 서 에스코트 하며 나를 맞는다 바람에게 들었나?새들에게 들었나? 내가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구의동 시의 거리에는 꽃비까지 내린다.영화배우라면 누구나가꼭 한번은 걷고 싶은 레드카펫처럼 난 오늘 구의동 시의 거리를 자랑스럽게 걷고 있네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기에 나를 있게 해 준 그 님과 돌아오는 꿈의 계절에 베르디의 리골레토에 맞추어 함께 걸었으면 정말 좋겠네.
5. 어린이 대공원 유강원 ( 이규원 : 아동문학가 )
♥유강원(순명효황후의 릉)
종 목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34호
지정일 : 2001.07.16
소재지 : 서울 광진구 능동 18(어린이대공원 내)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제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의 황후 순명효황후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 터에 남아 있는 왕릉 석조각들이다. 순명효황후는 민태호의 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 1904년에 사망하여 유강원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에 지금의 유릉에 옮겨와 함께 모셔졌다. 그 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사망하자 이 또한 함께 모셔져 있다. 순명효황후의 능을 마련하였던 유강원 터에는 능 주위에 세웠던 20여 기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석등을 비롯하여 문인석과 말, 양, 호랑이 등 동물을 조각한 것 등 매우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 말 왕실의 석조각으로 중요하다.
♠능동의 유래(역사 이야기) / 이규원
이조 말 고종 때 일이에요.
한양의 계동은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어요.
그곳에는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며 밝은 의리로 공을 세운 민씨 가문이 있었지요.
민태호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은 영의정이며 대제학으로 충문공 이라는 시호를 받고 나라 일을 하고 있었어요.
충문공은 결혼을 하여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 저녁,
계동 양덕방 주위에 뽀오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더니 뭉글뭉글 오색 구름이 되어 그 집을 휘황히 둘러싸는 거예요.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어요.
“저기 좀 보세요! 이상한 구름이에요!”
“참 신기하네. 영롱한 채색 옷을 입은 사람 모양이네.”
“내 생전 저런 구름은 처음 보아요.”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응애- 응애-’
양덕방에서 아기울음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 아들이 아니고 딸 이라고?”
“보통 딸은 아니겠구먼.”
충문공의 딸은 무럭무럭 자랐어요. 빙그레 웃기를 잘하고 성격이 유순했지요.
눈이 빛나며 용모가 덕스러워 보는 사람들마다 범상치 않음을 느꼈어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여 소학이나 여칙을 즐겨 읽었지요.
고종의 태자 순종이 아홉 살이 되자 세자빈을 택하게 되었는데 많은 내신들이 충문공의 딸을 추천하여 열한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어요.
“어쩌면 저렇게 천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우실까?”
“나이는 어리지만 어찌 저리 부지런 하실까? 전하들을 받들어 모시는 효심과 공경의 도리는
우리가 배워야 해.”
“아름답고 덕스러운 용모는 하늘에서 내린 복이야.”
대궐 안에서는 칭찬이 자자했어요.
스무 여섯 살에 황태자비가 되어 순명황후가 되었지만 그 시대는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들의 극성으로 왕권이 무너져가고 있었어요.
“이럴 때일수록 궁 안에서는 사치를 멀리하고 정신을 차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순명황후는 순종과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덕혜옹주 등 왕계의 가족들에게 효를 다하며 밤늦도록 수고를 했어요. 그러면서도 밤이면 늘 책을 읽었지요.
순종이 물었어요.
“이렇게 쉬지 않고 곤 하지 않으시오?”
“좋아서 하는 일은 피곤한줄 모르는 법입니다.”
순명황후의 말에 순종은 두 손을 꼭 잡고 마음 든든해했어요.
하지만 일본의 침략 하에 아버지 충문공이 살해를 당하고 시어머니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은 큰 충격이 되었지요.
1895년 을미년 흉악한 일본의 과한들이 대궐에 침입 해 칼을 휘두르며 명성황후를 향해 달릴 때 그들의 다리를 잡고 순명황후가 소리쳤어요.
“안됩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오!”
그러자 일본의 괴한들은 세찬 발길질로 순명황후를 계단 아래로 차 버렸어요.
‘아이고, 음…음….’
순명황후는 그만 허리뼈가 부러지고 기절하고 말았어요.
흉악한 일본의 괴한들은 명성황후를 살해 후 불로 태워버렸지요.
다음날 겨우 정신이든 순명황후는 그 소식을 듣고 흐느끼며 넋을 잃은 것 같았어요.
목이 메 이고 슬픔에 겨워 음식을 먹을 수 없었지요.
그 뒤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04년 33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오, 짐의 침통한 심정을 누르기 어렵구나. 바르고 정하며 밝은 빛을 보여준 순명황후의 안식처를 가장 편한 곳에 모시도록 하라.”
풍수지관들이 입을 모아 말했어요.
“수목이 울창하고 경관이 수려하며 오백년 이상의 느티나무와 향나무들이 많아 맑은 기가 가득하며 살고 있는 백성이 온유하고 평안한 곳이 있사옵니다.”
“그곳이 어디요?”
“마장에 안쪽에 있는 장안 말, 장내리옵니다.”
이렇게 하여 순명황후는 지금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묻히게 되고 그 무덤을 유강원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그 뒤 능이 있는 동네 라 하여 능말, 능리라 부르다가 1950년, 능동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1926년 순종이 돌아가자 순명황후의 묘는 남양주시 금곡리 유능으로 이장을 하게 되었고 순명황후가 묻혔던 유강원의 석물들은 지금 어린이 대공원 전래마을 앞에 남아있지요.
지금도 능동에서는 500년 된 향나무 옆 치성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위하여 봄, 가을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
- 이규원회장님의 명상의 정원에서의 강의 -
♠ 명상의 정원/김연수
은은한 문자향文字香 풍기고
그윽한 서권기書卷氣 서리는
작은 숲 오솔길을 헤쳐가면
지친 발걸음 감싸드는
비밀의 정원이 열린다.
순결한 사유의 바람을 안고
번잡스런 삶의 자욱들을 씻어내며
묵직하게 자리한 반석 위에 앉아
잠시나마
구도자의 몸짓으로 눈을 감으면
자유로이 뻗쳐가는 헤윰의 가지들.
가슴을 풀어 헤쳐라
가뿐 숨결을 고르라
불멸의 시비詩碑들이 내밀한 울림으로
야윈 손을 내밀어 반기고
힘 없는 어깨에
불현듯 나래가 돋아
창천을 날으는 명상의 새가 된다.
끝없는 하늘 아래
산자와 죽은 자의 구별이 있으랴
모두가 마음으로 통하면
순간은 영원 속에 깃들고
영겁은 찰나에 회귀하여
삶이란 결국 일체 유심조가 아니런가.
6. 광나루 수변공원, 한강, 정보도서관 ( 안춘윤 : 수필가 )
현재 워커힐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이다. 이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함께 생겨났을 듯하다. 더구나 이 나루 건너편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임에랴! 요즘 학계에서는 그 토성을 발굴하여 그 곳이 하남위례성인지 여부를 밝히려는 노력이 한창 진행중이다. 이 곳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다면 백제 시조 온조(溫祚·서기전 18∼서기 27)왕이 백제를 건국하면서부터 이 광나루는 한강나루 중 가장 큰 나루가 되었을 것이다.그래서 큰 나루 또는 너른 나루라는 뜻으로 광나루라 부르지 않았나 한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고구려 장수왕(413∼491)이 하남위례성을 함락하여 백제가 도읍을 공주로 옮겨간 뒤에도 이 나루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광주(廣州)라는 지명도 백제 때 수도가 있던 큰 고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광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뜻도 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 광나루의 기능은 되살아나게 되었으니 광주를 거쳐 충청좌도(左道·남쪽을 바라보고 앉는 임금을 기준으로 할 때 좌도라는 의미로 지도상에서는 동쪽 부분임)와 강원도 경상도를잇는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 곳은 별장지대로 각광을 받게 되어 권문세가들이 다투어 아차산 기슭에 별장을 지었다. 특히 겸재가 살던 진경시대는 평화와 안락이 절정에 이르러 상류층들이 이런 아취있는 풍류생활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겸재는 그런 그 시대 상황을 이 광나루 진경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보거나 천호동 쪽에서 바라다보면 아차산의 층진 모습이 꼭 이와 같이 보인다. 다만 이 그림에서처럼 한식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숲속에 배치되는 운치가 사라지고 살벌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산 아래 나루터에는 두어 척 나룻배가 묶여있는데 강 한가운데로는 돛단배들이 쉴 새없이 오르내린다. 그 안에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있으니 아마 여행이나 풍류를 즐기는 유람선인 모양이다.지금 이 곳에는 천호대교(千戶大橋)가 지나고 있다. 천호대교는 1974년8월에 착공하여 1976년 7월에 준공하였다. 그 위로 차량 행렬이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나룻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겸재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하겠다. 어디 그뿐이랴! 다시 지하철 5호선이 이 곳 광나루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그림은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광나루에 얽힌 슬픈 역사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광진교에서 찍은 한강 상류의 모습을 휘 둘러가며 찍은 사진입니다. 너무 이쁘지요? 이곳 광나루는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바로 이곳 광나루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한데 잠실대교, 올림픽대교와 광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 척 나룻배에 의지해 건널 수밖에 없는 넓은 강폭을 가진 곳이었습니다만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기도 하지요. = 양녕대군은 태종4년(1404) 9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거나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차례 꾸지람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가도 잠시 후에 다시 향락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우 충녕대군의 인품과 독서, 그리고 학식과 군사에 대한 지식은 그를 뛰어넘어 여러 신하들과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곧잘 하여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태종에게 문책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태종과 세자 양녕대군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자 태종 18년 (1418) 6월, 황희(黃喜), 이직(李稷)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그리고 유정현(柳廷顯) 등 여러 신하들은 태종의 뜻대로 충녕을 새로이 세자로 정하는데 찬의를 표하였다. 태종은 이와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곧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올라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강물이 줄어들 동안까지 사제(私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정현 등이 "서울에 머무는 일은 불가하옵니다."하고 우겼기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곧 양녕대군을 광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비자(婢子) 열 세사람과 노자(奴子) 몇 사람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고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이렇게 양녕대군의 눈물이 서려 있는 광나루는 지금은 흔적없고 다만 하나의 표석(標石)만이 이곳이 광나루였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며 쉐라톤 워커힐호텔 정문 쪽 아래 생도량이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광나루 혹은 버드나무 나루인 것이다.
♠아름다운 한강/애천 이종수
한겨레의 혼과 기를 싣고 흐른다
은빛 금빛을 받아 삼강을 이루고
서울의 젖줄이 되어 생명수가 되고
너와 나를 살리는 숨결이 된다
깊은 곳에는 잉어떼가 뛰어 놀고
강가에는 온갖 식물들이 숨쉬고
휘영청 밝은 달밤 오색의 물결은
여행객이 웃음 꽃을 피운다
세계의 자랑 아리수와 더불어
백의 민족의 순결과 꿈이 서린곳
아름다운 한강변을 걸으며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해 본다
♠광나루의 정취 / 박철구
뱃길로 춘천까지 물길로 청주까지
강 건너면 광주까지 눈 앞에 와 닿으니
광나루 넓은 물길이 굽이굽이 흐른다.
수려한 아차산성 한양의 으뜸 요새
패전한 개로왕이 치욕 받고 전사한 곳
온달의 애국충정이 강물 속에 흐른다
춤추며 노래하며 북적됐던 광나루터
찬란한 조명들이 강물 위로 춤을 추고
줄 이은 차량 행렬이 강물처럼 흐른다
♠ 재회 / 김연수
인적도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으며
어제의 길을 걷는다.
슬픈 영혼이 깃들인 듯
바람은 가벼이 차가웁고
마음은 오랜 습관처럼 쓰라리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찾아야하고
찾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돌아선 모퉁이
호프집 구석에 앉아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메마른 사막을 적시는
낙타의 눈물,
바닷가 모래사장을 울리는
소라의 빈 고동 소리,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하얀 손
떨리는 숨결을 타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갈대가 되어
*그녀의 고향으로 갔다
수변공원 벤치에 연인처럼 앉아
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검은 눈망울에 물의 그림자가 서렸다.
자맥질하고 싶어
물속에서 살고 싶어
아니 물처럼 살고 싶어
무심한 강물에 뛰어들지도 모를 그녀
조바심으로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 아차산 시화전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하는 중에 정보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시집을
분실하였는데 다행히도 다음날 찾아 광나루 수변공원에서 종일 시집을 읽어보았습니다.
불행중다행이라 할까요? 전화위복이라 할까요?
7. 용마봉과 아기장수 ( 강효정 : 시낭송가 )
아차산과 마주한 용마산(348m) 정상 용마봉은 바위능선이 말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말마봉 또는 말마산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 남서쪽에 있던 북바위산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산에 있던 용마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포효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면목동 동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우리공원, 광진구 중곡동 간의 산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 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면적 2,800,619㎡) * 용마폭포공원 면목동 산 1-4번지에 위치한 용마폭포는 세갈래의 폭포 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의 폭포는 용마폭포, 좌측이 청룡폭포, 우측이 백마폭포이다. 용마폭포는 폭 3~10m, 2단으로 이루어진 51.4m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으며, 청룡폭포는 21m, 백마폭포는 21.4m로 이루어져 있다. * 용마산 사가정 공원2005년 4월 13일 개장한 사가정공원은 면목동 산 50번지 일대의 면목약수터지구 입구에 약 3만 3천2백여 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공원의 명칭은 용마산 부근에서 거주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 선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그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시비를 만들어 설치함으로써 공원이용객들이 산책과 함께 명시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명품 소나무 제 1호
♠ 용마봉의 아기장수 설화
이 용마산에는 아기장수 전설도 전해진다. 삼국시대에 장수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수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다. 민담에 따르면 아기 엄마가 잠시 나갔다 들어와 보니 아기가 보이질 않았다. 방안을 둘러보니, 아기가 무슨 수로 올라갔는지 선반 위에 올라가 있었고, 자세히 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있었다. 이를 본 부모는 아이로 인해 집안이 패가망신할 것이라 여기고, 논의 끝에 아기를 맷돌로 눌러서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아기를 죽이고 나니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날아갔다고 한다.
‘ 아기장수 설화’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수집되는 이야기로, 민중의 비극적인 좌절이 담겨 있는 전설이다. 이와 관련된 유형은 100가지가 넘지만 미천한 혈통의 인물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는 모두 동일하다. 이처럼 좌절과 파국으로 끝나는 이 비극적 설화는 기존 질서의 장벽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기장수는 미래의 가능성을 가진 민중의 영웅을 상징한다. 이러한 아기장수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 이유는 바로 평민이 주도한 민란이 모두 패배로 귀결되었다는 역사적 체험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실패가 민중으로 하여금 기존 체제에 안주하려는 현실 추구 성향을 갖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기장수 설화’는 아기장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살아야만 했던 민중의 역설적인 심리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 용마 폭포/강태공
서울의 용마산
봄날의 용마폭포
힘차게 떨어져 세차게 흐른다.
참고 참았던 한 많은 여인네가
쉬--- 하듯이.
물꽃이 솟아 핀다. 물안개 떠오른다.
출발하는 기차의 기적소리 물안개 꽃
용마산 초목으로 구름 되어 날아간다.
봄 무지개 피어난다, 일곱 빛 갈 꿈 무지개.
활짝 핀 꽃들은 활짝 웃는 봄의 얼굴,
꽃구름으로 피어나고,
폭포수바람에 봄바람에,
꽃잎들은 나비되어 꿈을 찾아 날아간다.
떨어진 꽃잎들은 봄이 가는 발자국.
참았던 여인이여, 한 많은 여인이여!
우리의 삶속에 우리맘속에,
미움과 원망도 위선과 가식도,
덧없는 미련과 부질없는 애착도.
여운 없이 미련 없이 씻어 보내 버려라.
아니, 이것들도 보내라
사치스런 미사여구(美辭麗句)
강으로 바다로 흘러 보내 버려라.
사랑과 진리(眞理), 그리고 그리움만 남기고.
중생들은 폭포를 보고 꽃을 보고 자연을 보고,
순화되고 깨닫고 득도(得道)할 수도 있거늘...*
<중랑문학.2014.19호 게재>
♠ 슬픈 용마의 전설/이원석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화살과의 스피드 싸움
어느 순간 먼저 사위를 떠난 화살을 넘어섰다.
주인님이 기뻐하시겠지
구경나온 백성들도 나의 위용에 놀라겠지
드디어 결승점에 도착했다.
근데 뭐지? 주인님이 노하셨네
화살을 못찾아서 내가 졌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칼날이 번쩍, 내목이 떨어졌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용마의 운명
사태를 파악한 성주가 탄식하네
아~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다음 세대를 기약하자
♠ 무지개빛 여인 / 김연수
-용마봉 암벽장에서-
신전처럼
우뚝 솟은 용마의 벽
가픈 숨 몰아쉬며
암벽을 타는 여인.
타오르는 노을빛
붉은 구름 드리운
널다란 바위 위에
나신의 둥그런 몸뚱아리, 태고의 알
수줍은 듯 꽃처럼 눕는다.
맴돌던 수상한 기운들
붉은 입술 사이로 은밀히 스며들고
말초의 혈관들이 꿈틀대며 토해내는
탄성의 신음소리.
프테로사우로스
거대한 날개를 휘저어
수천 길 수직으로 솟구치듯 피어나는
무지개빛 익룡의 비상.
지상에는 선홍빛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황홀한 기상예보.
8. 자양동과 낙천정 ( 김연수 : 시인 )
광진구 자양동(紫陽洞)의 옛 지명은 '자마장(雌馬場)'이다. 암말을 뜻하는 자마(雌馬)를 많이 길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국가에서 말 1000마리를 기르면 그 중 신령스러운 전설의 짐승인 '용마(龍馬)'가 난다고 해서 말 확보에 관심이 많았다. 이곳은 한강에서 흘러온 비옥한 퇴적물이 쌓이고 말들이 뛰어놀기 좋은 자연 벌판이 많아 말들을 방목해 길렀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자가 변해 지금의 자양동(紫陽洞)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자양동 673번지에는 조선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다는 낙천정(樂天亭)이 있다. '하늘의 뜻을 알아 즐겨노니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원래 위치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 1991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자양동에는 달리는 말도 멈춰 세운 장군당(堂)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조선 세종 때 한 장군이 자마장을 시찰하고 돌아가는데 작은 신당(神堂) 앞에서 말이 꿈쩍하지 않았다. 장군은 말 고삐를 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자 홧김에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신당에서 "감히 어느 앞에서 칼을 휘두르느냐"라는 호통이 들렸고, 장군은 말에서 내려 신당에 예를 갖춘 후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최영 장군 신당으로 알려진 이곳은 3년 전 철거됐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 일대는 뚝섬의 평원이어서 조선조 태조 때부터 마장동, 장한벌(장안동), 면목동과 함께 군용 말을 방목 또는 사육하던 자리. 특히 암말을 길렀던 자양동은 ‘자색빛깔의 말’이라는 뜻으로 자마장(雌馬場 또는 紫馬場)이라고 불렀다. 자마장이라는 땅이름이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자양동(紫陽洞)으로 불린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자양동 동남쪽 오늘날 현대아파트 부근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높이 42.8m의 언덕이 있었다. 산의 모양새가 시루를 엎어 놓은 높은 언덕과 같다 하여 ‘대산(臺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벌판에 산이 있어 ‘벌뫼-발뫼’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발(벌)뫼를 한자로 옮긴 것이 발산(鉢山)이다. 비록 높이는 얼마 안되지만 발산(대산) 아래로 푸른 한강이 감돌아 흐르고, 강 가운데는 하중도(河中島)라는 섬이 떠 있었다.(지금은 개발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게다가 강 건너 남한산(南漢山)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있고, 남쪽에 청계산(淸溪山), 관악(冠岳), 서쪽으로 남산, 매봉, 북쪽에 도봉(道峯), 삼각산(三角山), 수락산(水落山), 아차산(娥嵯山)의 기이한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와 경치가 천하의 제일경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가까이는 잠실벌의 백사장이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데다가 푸른 강심 위로 계절 따라 백로, 갈매기, 기러기 등 온갖 철새들이 무리 지어 노닐었으니 이런 곳에 정자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은 1418년에 왕위를 그의 아들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같은 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세종 원년(1419) 2월에 준공했다. 당시 좌의정인 박은에게 건물 이름을 짓도록 하니, 주역계사(周易鷄捨)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뜻을 따서 낙천정(樂天亭)이라고 불렀다. 당시 문인 변계량이 낙천정기를 짓고 한성부윤 권흥이 글을 쓰고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고 한다. 태종은 수시로 이곳에 머물며 더러는 풍양궁(豊陽宮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과 연희궁(延禧宮 : 무악 아래 연희동)에 번갈아 가며 거동, 만년을 즐겼으나 특히 낙천정에 많이 머물며 자연과 벗했다고 한다.
이 낙천정에서 세종은 상왕인 태종을 자주 찾아 뵙고 왜구(倭寇)를 치기 위한 작전회의를 거듭하며 군함 삼판선(三板船)을 짓고, 1419년 6월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 중군원수(中軍元帥) 유정현(柳廷顯), 좌군원수(左軍元帥) 최윤덕(崔潤德), 우군원수(右軍元帥) 유습(柳濕) 등 삼도 수군으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에 나섰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낙천정에서 상왕인 태종과 세종, 그리고 문무잭관들의 영접을 받으며 출발한 삼도 수군은 황해 연안을 따라 남해의 다도해를 빠져나가 대마도를 쑥밭으로 만들고 무사히 돌아오니, 세종은 상왕인 태종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환영연을 베풀고 상을 내린 역사의 장이 바로 이 낙천정이다. 세종 4년(1422)에 상왕인 태종이 승하한 이후로는 이곳을 찾는 이 없이 건물은 점점 퇴락, 사라졌던 것을 1987년 역사의 고증을 거쳐 1991년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저녁 노을이 한강 위로 물들면서 온통 자색(紫色)으로 변하건만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 樂天亭(낙천정) / 春亭 卞季良
樂天亭上又淸秋-낙천정에 쾌청한 가을이 또 오고
낙천정상우청추
地戴明君佳氣淨-성군이 계신 곳에 좋은 기운이 떠오르네
지재명군가기정
疎雨白鷗痲浦曲-부슬비 속 갈매기는 마포어귀를 날고
소우백구마포곡
落霞孤鶩漢山頭-지는 노을 기러기는 한산 위로 날아가네
낙하고목한산두
仁風浩蕩草從偃-호탕하고 자애로운 기풍 사람들이 휩쓸리고
인풍호탕초종언
聖澤瀰慢水共流-뻗어가는 성산 은택 홍수처럼 질펀하지
성택미만수공류
霄旰餘閒觀物象-정자 보고난 여가에 사물을 감상하니
소간여한관불상
人間仙境更何求-인간의 그 선경을 어디서구하랴
인간선경갱하구
♠ 낙천정을 찾아 / 김연수
청청한 가을 하늘 아래
실구름으로 떠돌다가
문득 옛 벗을 사모하듯
물어물어 찾아간 미로 끝.
아파트 숲 그늘 삯월의 구석에
철책과 어둠에 묻혀
삼천三天의 하늘이
숨죽이고 갇혀 있었다.
예전에 절색의 풍광風光을 뽐내며,
천하를 호령하던 호천虎天의 하늘과
사랑을 잃어버린 낙천落薦의 하늘과
만민을 기쁘게 한 낙천樂天의 하늘이
혈육의 정을 오붓이 나누던 곳.
무심한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탓이랴
인적도 없이 매연만 가득한 정자에
자색紫色의 복된 기운들은 어디가고
적소謫所의 담벽을 파고드는
노을빛만 홀로이 외로와라.
9. 화양정과 느티나무 ( 이선열 : 시인 )
♠ 화양정의 역사
화양정(華陽亭)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는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牧場)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전하께서 사복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 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나에게 말하였다.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와 정사(亭榭)는 모두 그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 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 하였다.○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 하였다.
- 화양동 느티나무(華陽洞 느티나무)는 서울특별시광진구 화양동 110-34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1973년1월 26일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
♠화양동 느티나무 관찰 小考 / 이선열
화양동 느티나무를 올해 두 번째 찾았다. 나는 질문을 한번 던져본다, 나의 화두(話頭).
- 느티나무, 너는 저 먼 우주 공간의 새로운 별이지 않을까? 그 별의 이름이나 그 풀과 그 바람의 이름으로 느티나무는 지금 내 안에서 무슨 힘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광대한 저 우주 속에서 세상 풍파 이겨내는 너른 아버지 거친 가슴 같은 남성의 저 야성. 그리고 어머니의 전체를 품어내는 가슴 품성을 지닌 저 모태성. 저 볼품없던 관목상태의 느티나무가 이토록 거대한 교목으로 우뚝 섬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우리나라도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이 세월호의 비극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는 꿈도 느티나무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오늘 방문한 서울 기념물 제2호 화양동 느티나무 아래 무성한 700년의 역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전국적으로 느티나무 13그루, 은행나무는 19건, 소나무는 17건에 이어 세 번째로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한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세종은 1432년(세종 14) 이곳 조정 목장의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는 화양리 느티나무는 아직도 그 때의 속속 깊고 너른 느티나무 등골을 파내어 온갖 새들이 드나들고 티티새와 다람쥐와 온갖 벌레들의 집으로 내어주던 자기희생의 어머니 같은 포근한 방 문풍지에 이는 그때 바람소리 되어 어쩌면 700년 전 세종이 자주 놀러 와서 화양동 언덕 아래 지금의 건대역 근처 star city 아파트 群과 건대 광활한 캠퍼스와 자양초등학교 근처 자마장리(雌馬場里)로 호칭 되다가 자양동(紫陽洞)으로 된 동네로서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고양주면(古楊州面) 자마장리(雌馬場里)율동(栗洞)와 화양동 모진동 능동의 옛날 이름 그대로의 너른 말 농장을 굽어보던 그 때 불던 바람과 그 햇살, 그 새들과 햇살들이 혹시는 오늘도 화양 느티나무에서 서성이다가 내게 그 때 안부를 전하고 있지 않나 나무그늘에 않아서 조선의 시대를 섭렵해본다,
화양느티나무 터는 세종 때 조정에서 건립된 화양정(華陽亭) 터이자, 세종 임금의 태평성대와 단종 곧 노산군(魯山君) 그리고 명성황후(明星皇后) 민씨에 얽힌 사연이 얽혀있어 역사는 아이러니한 것인가?
금석일반(金石一斑) 기록에 의하면 화양정을 세운지 불과 24년만인 1455년에 삼촌 세조(世祖)에게 쫓겨난 단종이 영월 땅으로 귀양 갈 때 내시 안로(安璐)의 전송을 받으며 하룻밤을 지새운 곳이 바로 이 화양정이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통에 장호원(長湖院)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명성황후는 피난길에 이곳 화양정에서 쉬어 갔었다고 한다. 이때 몰려든 인근 자마장(지금의 자양동)과 화양리에 민초로 사는 백합화같이 순수한 동네 여인들이 가마 문을 열고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저토록 젊은 여자가 장안에 제 집 두고 민비라는 못된 왕비 북새통에 피난 가나본데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니 언제 다시 돌아올 날 있을라구” 하였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찐한 커피향에 젖어 나무그늘아래 나도 이조의 선비가 되어본다.
문득 고등학교때 배운 훈민정음의 뿌리깊은 나무를 떠올린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오늘도 화양리 느티나무는 실하게 깊이깊이 뿌리를 박아 바람에 아니 뭘쌔 강하고도 강하다. 전 국토에 걸쳐서 고을고을 마을 어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나무 느티나무.
사방으로 비스듬히 뻗어 역 3각형으로 키높이 30m. 억센 줄기는 강인한 남성의 의지이자 고루 퍼진 가지는 고을의 상부상조와 조화된 질서를 표상하는 것일까?
- 잎잎 무성한 잎들은 질서와 예의를 나타내는 마을의 수호신 느티나무.
- 왜란과 호란과 일제와 민족상잔의 아픈 역사의 휘오리 속에서 이 땅을 지켜본 화양동 느 티나무여.
국내 1000년 이상의 나무 60여 그루 중 25그루가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데 화양동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서 잠시 눈 감으면 바람결에 흐르는 매미소리와 함께 금시 낮잠에 빠진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는 대부분이 느티나무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의 휴식처로 느티나무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문집(異聞集)》과 산림경제 (山林經經濟)》,퇴계(退溪) 이황( 李滉) 과 을사사화(乙巳士禍),성현(成俔)의 이화에 월백(月白)하고 언제나 편안한 쉼터의 용재총화(?齋叢話)》 고서에서
“담장 위의 연초록 느티나무 세 그루/좋을시고 가지에 꾀꼬리 와서 우네(墻頭嫩綠三槐樹 好箇黃?一兩聲)”라고 노래했다.
그 유명한 유득공(柳得恭) 의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4월 초파일 풍습에 느티떡을 해 먹고,전주성 주위 많은 느티나무에서 (石北) 신광수(申光洙)의 시 〈전주 남문루(全州南門樓)〉에서 전주 풍남문 성을 끼고 선 느티와 버들에 보슬비 내리고,성 위 높다란 누각으로 제비가 날아든다.(來城槐柳雨微微 城上高樓燕子飛).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붉고 흰 것(꽃)이 사라지자/느티나무잎 그늘 더욱 짙어져 여름경이 되었네.(紅嬌白轉頭空 언=諺+嬪 槐葉陰濃夏景中)”라 읊었다.
고려시대 최자의 <보한집>에 나오는 임실 오수의 지팡이 전설도 느티나무와 관계되고 우리나라 고목 13,000그루 중 7,100 느티나무가 모두 동일성과 우주성,모태성,휴식과 민초들의 삶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오늘 나의 문화기행 화양동 느티나무는 700년 역사의 느티나무로 지구 생명체 나무중 이처럼 질기고 철학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꽉 내안을 휘감고 있다.
믿음을 주는 나무 느티나무, 생산과 휴식을 아낌없이 주는 느티나무, 민초들의 휴식처 느티나무, 조화와 군형을 주는 나무 느티나무...
박경리 문학관을 찾아 원주에 갔을 때 보았던 그 느티나무와, 1600년대 인조시대 600년 된 문정동 느티나무, 젊은 시절 소설가 강신재의 문학작품 젊은 느티나무가 상징하는 모두가 허구 아닌 현실에 깊이 뿌리를 박고 오늘의 우리 민족성의 강인함과 뿌리 깊음과 인내성으로 조화와 균형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다. 어느 곳 어느 마을 어귀마다 수호신처럼 서있는 아낌없이 안정을 주고 고향을 주는 지천에 깔려있는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가 대표주자로서 화양동에 오늘도 우뚝 서서 빛나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700년 이조의 바람과 역사와 햇살과 그 때의 아픔과 애환을 바람으로 우리를 흔들면서 말이다.
느티나무, 아 성스러운 느티나무여.
♠ 거대한 여인 / 김연수
상큼한 바람 일어나는
몽마르뜨 언덕의 오르막을
은륜을 타는 여인과 오르다가
푸르른 잎새들을 치렁치렁 감아올린
또 한 여인을 만났다.
세상을 은빛 날개로 떠도는 것과
거대한 뿌리로 한자리를 지키는 것
그 틈새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열린 마음의 길을 가면
동動과 정靜은
한 가지에서 돋아나는 새싹과
탐스런 열매처럼 향기로운 것.
바람의 꼬리를 붙잡고
세상의 끝을 바라보며
떠도는 하얀 구름이 되어
하늘의 끝에 서성이다가
늦여름 소낙비로 쏟아져
나래처럼 펼친 가지를 타고
꿋꿋한 뿌리에 몇 방울 물로 스민다면
그때는 행복의 꿈도 꾸리라
변치 않는 시도 쓰리라
긴 잠에 빠져도 좋으리.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던 화양정에
수많은 탯줄을 지닌 성스런 여인이
무성한 느티나무가 되어
생명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주민과 함께 하는
제 3차 광진 향토문학 탐사 활동
1. 탐사지 : 세종대 박물관 - 화양동 느티나무(화양정)
- 황금찬 시비 - 건국대 박물관 - 문화의 거리·맛의 거리 등
2. 일시 : 2016. 08. 26(금) 오후 2시 30분(시간 엄수) -오후 6시 석식
3. 모임 장소 : 세종대학교 박물관 앞 그늘 (정문 들어와서 오른편)
4. 대상 : 광진 향토문학 사랑 모임 및 주민
5. 준비물 : 식수, 양산 (약간의 걷는 거리가 있습니다)
6. 석식은 편성 예산에서 제공합니다.
- 화양정 느티나무에서 기념사진 -
- 화양정 일대 탐사 기념사진 (세종대에서) -
광진구청 지원 주민제안사업
광진 향토문학 탐사활동 발표 자료집
-------------------------------
초판 인쇄 / 2016. 11.
초판 발행 / 2016. 11.
편집 / 김연수
펴낸 곳 / 광진향토문학사랑회
(대표 제안자 김연수 정선영 강효정)
전화 / 02-514-5436, 010-7697-5436
--------------------------------
♠ 이 책자는 광진구청 지원 주민제안사업의 일환으로
발행된 것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 수록 작품은 작자의 사전 동의하에 수록하였으며
부득이하게 허락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어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
|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