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龍珠寺)는 1790년(정조 14)에 "현륭원"(顯隆園)의 "능침수호 사찰"(陵寢守護 寺刹)로 건설된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願刹)이다.
이곳은 원래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인데,
고려(高麗) 광종(光宗) 때 전란(戰亂)으로 불타고 폐허(廢墟)가 되어 버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용주사(龍珠寺)는 산속이 아니고 평지에 있기 때문에 산문(山門)의 첫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일주문(一柱門) 대신 제일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사천왕문"(四天王門)에 용주사(龍珠寺) 라는 현판이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옆에 있는 "용주사" 안내도.
"매표소"를 지나면 특이하게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세워 놓은 "선돌"들이 길을 따라 좌우로 늘어서 있다.
가장 앞자리에는 "도차문래"(到此門來)와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새겨놓은 화강암이 양쪽에 서 있다.
"이 앞에 이르러서는 서뿔리 아는 지식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존지해"(莫存知解)가 아니고 "막존지선"(莫存知鮮)으로 써 있는데 같이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른 돌에도 새긴 글자들이 있는데 낮은 지식으로는 알기 어려운 글자들이라 그냥 지나친다.
절 앞에 "홍살문"이 있는 것은 "용주사"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호성전"(護聖殿)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절집에는 삼문(三門)이 없다고 한다.
이 삼문(三門)역시 이곳이 "능침수호 사찰"(陵寢守護 寺刹)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
문 입구 양쪽에는 작은 "해치"(獬豸)도 있다.
이 삼문(三門)에 주련(柱聯)이 있는데 머리글자가 "용", "주", "사", "불"("龍","珠","寺","佛)이다.
龍蟠華雲(용반화운) 용이 영롱한 구름 속에 서려 있다가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는구나.
寺門法禪(사문법선) 이 절의 법은 선법이니
佛下濟衆(불하제중) 부처님 오셔서 중생을 제도하시네.
이 주련(柱聯)은 구한말(舊韓末)에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 1881~1950)의 글이라고 하는데,
가로로 읽어도 훌륭한 문장이 된다.
龍珠寺佛(용주사불) 용주사 부처님께서
蟠得門下(반득문하) 문 아래 감도시고
華造法濟(화조법제) 중생 제도하는 법 아름답게 만드시니
雲化禪衆(운화선중) 참선하는 중생 구름같이 모여드네.
오른쪽 끝에는 금연(禁煙)이라고 쓴 표석이 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왼쪽 끝에는 금주(禁酒)라고 쓴 표석도 있다는 데 못보고 말았다.
이 현판도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다.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가운데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고 그 뒤로 "천보루"(天保樓)라는 큰 건물이 출입구 역할을 한다.
용주사에 "오층석탑"이 둘이 있는데 그 탑 중 하나에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다고 한다.
여기 있는 탑의 경계돌에 "봉안보탑"(奉安寶塔)이라고 써 놨는데 여기에 "진신사리"가 있다는 걸까?
이곳은 안내문이 없는 곳이 너무 많다.
"천보루"(天保樓)는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도편수(都邊首)는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 스님이,
단청(丹靑)은 삼척 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 스님이 하였다고 한다.
아래층은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향하는 통로로 여섯 개의 돌기둥이 건물을 받들고 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 위층 기둥에도 주련(柱聯)이 있고, 돌기둥에도 글이 써 있다.
돌기둥에 있는 글.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 : 스스로 웃는 소리에 천지가 놀라고,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 : 외로은 달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네.
心得同時祖宗旨(심득동시조종지) : 조사의 종지 마음으로 깨달으니
傳持祖印壬午歲(전지조인임오세) : 조사의 인가 전하고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叢木房中待釋迦(총목방중대석가) : 숲속에서 석가부처 기다리니
眞歸祖師在雪山(진귀조사재설산) : 진귀조사(문수) 설산에 계시네.
"천보루"(天保樓) 주련(柱聯).
空看江山一樣秋(공간강산일양추)
母年一百歲(모년일백세)
常憂八十兒(상우팔십아)
欲知恩愛斷(욕지은애단)
命盡始分離(명진시분리)
不待東風自由春(부대동풍자유춘)
이는 마치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그리워 하는 시일듯하다.
오른쪽의 돌기둥은 새로 교체를 했다고 하는데 원래의 기둥은 뒤쪽에 유리로 보호를 하고있다.
"천보루"(天保樓)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서 넓은 마당에 정면으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보인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친필이라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주련(柱聯).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료망연)
보신과 화신은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고,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법신은 청정하여 광대무변 하구나.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천 개의 강물에 달그림자도 천 개있고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넓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으니 만리가 맑은 하늘이로다.
왼쪽 아래에는 돌을 통으로 파서 만들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나란히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위쪽 양쪽으로 용도를 모르는 돌기둥이 서 있다.
정료대(庭燎臺)?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것은 "노주석"(露柱石)또는 "화광대"(火光臺)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도 한다.
야간에 이 위에 불을 켜거나 숯불을 담아 주위를 밝히고 따듯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듯하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大雄寶殿) 내의 삼불상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존"(主尊)으로 동쪽에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과 서쪽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협시(挾侍)하는 삼세불로 이루어져 있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內藏寺)의 "계초"(戒初)스님이 만들었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의 "봉현"(奉絃)스님이,
약사여래(藥師如來)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의 "상식"(尙植)스님이 만들었다고 한다.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은 목조(木造)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改金)하였다.
그 뒤에 있는 탱화(幀畵)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金弘道)의 옛그림과 달리 서양화처럼 음양(陰陽)이 있어 논란이 있었지만
김홍도가 당시에 청나라로 가서 성당(聖堂)의 그림을 보고 와 그린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좌측으로는 "천불전"(千佛殿)이 자리하고 있다.
"천불전"(千佛殿)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어 "천불전"(千佛殿)의 현판이 꺼꾸로 비친다.
"천불전"(千佛殿)은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하고,
좌우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삼존불"(三尊佛)이 모셔져 있다.
"지권인"(智拳印)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 쥔 모습을 말한다.
"천불전"(千佛殿) 외벽에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이 "오조 홍인"(五祖 弘忍)과 부엌에서 만남을 그려넣었다.
"천불전"(千佛殿) 위쪽에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이 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은 "칠성각"(七星閣)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안의 모습.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을 지나 "호성전"(護聖殿)으로 가는 중간 담장아래 "평화의 불"이란 글이 있다.
이 "평화의 불"은 어느 절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난다.
"호성전"(護聖殿)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호성전"(護聖殿)은 1950년 6•25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988년 복원되었으나, 2020년 또 불이나서 전소(全燒)되어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때 위패(位牌)도 함께 불에 탔으나 이는 복제품(複製品)이고 진품(眞品)은 "효행박물관"(孝行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호성전"(護聖殿) 안의 모습.
좌측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패(位牌)이고, 우측이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위패(位牌)다.
"호성전"(護聖殿)뒤쪽으로 만든지 얼마 안되는듯한 탑(塔)이 보인다.
탑이 아주 크고 무척 화려하다.
"전강영신대종사사리탑"(田岡永信大宗師舍利塔)이란다.
전강(田岡)스님(1898~1974)은 경허(鏡虛)스님의 법맥(法脈)을 이은 만공(滿空)스님의 법제자(法弟子)로
평생 참선수행(參禪修行)하며 후학을 지도한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고승"이라고 한다.
돌아내려오며 범종각(梵鐘閣)을 찾아본다.
범종각의 주련(柱聯)
"聞鐘聲煩惱斷" (문종성번뇌단)
이 종소리 듣고 모든 번뇌를 끊고,
"智慧長菩提生" (지혜장보리생)
지혜를 키워 자비심을 발하소서.
종을 만든 후에 음각(陰刻)한 글자가 있는데 빛의 명암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맞은쪽에는 법고각(法鼓閣)이 있다.
보통은 절집에 법고(法鼓)와 범종(梵鐘), 그리고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곳에는 법고(法鼓)와 범종(梵鐘)만 있는듯 했다.
법고각(法鼓閣)의 주련(柱聯)
"離地獄出三界" (이지옥출삼계)
지옥에서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
"願成佛度衆生" (원성불도중생)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소서.
그 아래에 새로운 "범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대웅보전"앞에 "당간지주"가 있는데 그 앞쪽으로 또 다른 "당간지주"가 있다.
앞에 있는 건물을 수리하느라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는데 이 통행금지 줄을 "당간지주"에 쳐 놓았다.
일하는 사람들이 불교신자가 아니어서 그리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스님들도 무심한듯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을 보게 되었다.
당간지주 옆에 있는 배수로(排水路) 덮개로 쓰인 석물에 "대한민국"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이 절의 주지(住持)와 많은 신도들의 무심함이 정말 개탄스럽다.
곧바로 "전통문화교육원"에 이 사실을 알리고 개선해주기를 부탁했다.
"천보루"(天保樓)의 뒤쪽은 "홍제루"(弘濟樓)라고 되어 있다.
"홍제루"(弘濟樓) 왼쪽 벽면에는 특이한 물건이 있다.
당시의 강대련(姜大連, 1875~1942)주지(住持)를 위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이름 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 묵객"(文人 墨客)들이 "기념 휘호"(記念 揮毫) 한 글들을 모아 판각(板刻)해 놓은 목판(木板)이 걸려있다.
마지막에는 "강대련 법사 사행기"(姜大連 法師事行記)가 씌어 있다.
"강대련"(姜大連)주지(住持)가 어떤 위인이길레 이런 물건이 벽면에 붙어 있을까?
이 주지에 대해 옛 글을 찾아 보았다.
종헌과 교헌 제정은 1922년 3월 26일 "명고축출사건"(鳴鼓逐出事件)이 발생하여
불교유신회의 핵심 인물들이 수난을 당하게 됨으로써 성립되지 못하였다.
"명고축출사건"은 불교유신회원들이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을 단죄한 사건이다.
이들은 강대련에게 작은 북을 등에 메게 하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남대문에서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까지 행진하였다.
이 행진에는 유신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까지 올라 온 회원 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급보를 접한 종로경찰서는 10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5명을 연행하였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던 강대련을 뜻을 같이한 도반들과 ‘대망신’ 시켰던 것이다.
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려는 강대련을 체포해 종로거리를 돌면서 북을 치고 ‘불교의 악마’라며 각성과 참회를 촉구했다.
당시 문성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강대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소임을 보고, 일본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조선불교를 왜국에 넘기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불교를 망치려는 ‘불교의 악마’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바로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스님들은 전원 연행했고,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문성스님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문성스님은 1922년 33본산 주지연합의 주요 인물이자 친일승려인 강대련을 쫓아내는 ‘명고축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기까지 했지만,
주지 강대련(姜大蓮)은 일제에
“나는 이 정도 일로 겁을 먹을 인물이 아니오.
내가 이처럼 철저하게 뼛속까지 친일(親日)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시오!”라고 하며
오히려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교육·포교사업과 교계의 운영을 민주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불교유신회의 개혁요구 사안에 대하여 강대련이 번번히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 권력과 타협한 용주사 주지의 전횡을 단죄한 이 사건은 일제시대 불교계에 길이 남는 사건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지 강대련(姜大蓮)친일파 명단에 오른 인물인것이다.
그렇다면 저기에 글을 써 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굼하다.
입구에 기와를 쌓아 둔 곳 옆에는 "용주사 사적비"가 있다.
그 위치나 주변을 봐서는 그리 대접을 받지 못하는듯하다.
이곳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곳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은 두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