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모의 ‘許黃玉 루트’ , 인도에서 가야까지|자유시간 -->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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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황옥이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로도 - |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 김병모(金秉模) 교수 |
뿌리 다른 한쪽을 찾아서…
법정 스님 말씀 가운데 ‘수본진심제일정진 · 守本眞心第一精眞’ 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 · 父母未生前本來面目’ 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수본진심제일정진’ : 으뜸가는 정진은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참마음자리.
‘부모미생전본래면목’: 이 말씀은 선가 화두 가운데 하나로 ‘부모 몸 받기 전 본디 모습은 무엇인가’, 이 화두 역시 뿌리 찾기, 제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평생을 바쳐서 뿌리를 찾기 위해 몸소 퍼즐을 맞춰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며 40여년을 바쳐온 고고학자. 김병모(金秉模) 박사가 평생 연구를 집대성해 책 한 권을 엮어 작년 봄에 내놨습니다. <허황옥 루트 · 인도에서 가야까지>가 그것입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나온 金海 金氏 김병모 박사는 대학생 시절, 김해 김씨 시조 수로왕릉을 찾았다가 수로왕비 허황후릉에서 파사석탑 (婆娑石塔) 이야기를 듣고 수로왕비는 과연 인도 여자인가 궁금해 하면서 본인 얼굴이 까맣다는 것과 연결시켜 ‘임금님 국제결혼’을 캐기 시작합니다. 그러기를 40년. 평생을 그 뿌리 ‘쌍어(雙魚)’ 사상에 얽힌 퍼즐을 목숨 걸고 발로 뛰면서 찾아 맞춰왔습니다.
결국 그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아유타국이 어디인지, 끊임없는 역사로 대탐험을 펼쳐 끈질기게 추적, 인도 옛 지도를 살펴 아유타국이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요디아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봤습니다. 더구나 허황후 능비에 ‘보주태후 (普州太后) 허씨릉’ 이라 쓰인 데서 허황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그 행적을 따라가, 보주가 사천성 안악현 (安岳縣)임을 알아냈습니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해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그 반란을 주모한 이들 가성 (家姓)이 허씨라는 것도 후대 기록에서 확인합니다. 이렇게 역사궤적을 확인하는 연구결과를 보고받은 한국 유전체학회는 허황후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북방계가 아닌 인도 남방계 DNA를 추출해 냅니다.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 허황옥 · 許黃玉 !
오빠와 더불어 장강 (長江)을 타고 삼협 (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보트 피플이었습니다. 이들이 옮겨 다닌 지역을 꿰는 문화 공통분모로 김박사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 (雙魚)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MBC 주말극 '김수로' 에서 허황옥 역을 맡은 서지혜
이 책을 권해드리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0여 년 짧지 않은 세월을 뿌리 찾아 전세계를 돌며 퍼즐을 맞춰낸 김병모박사처럼 ‘어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정견 (正見 · 바르고 능숙한 이해)을 얻어야 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퍼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에 들어왔다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3백여 년이나 앞선 48년. 또 다른 길.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를 통해서도 들어왔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허황후 오라버니 장유화상 (長遊和尙)이 은하사 (銀河寺)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그 은하사에는 쌍어 (雙魚) 두 쌍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물고기 한쌍, 쌍어(雙魚).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물고기 한쌍 쌍어 (雙魚) 아직까지 우리나라 절에서는 김해 은하사를 비롯한 울산 개운사, 양산 통도사, 양산 개원사에서만 발견되어 주로 가야 고지에 퍼져있습니다.
언어학자 강길운 교수는 ‘가야말과 드라비다말 비교’라는 논문에서 가락 · Karak은 구 · 舊드라비아말로 물고기를 뜻하고, 가야 · Kaya는 신 · 新드라비아말로 물고기라고 밝혔답니다. ‘가야’ 나 ‘가락국’은 ‘물고기나라’라는 말이죠.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두 마리 물고기 쌍어.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두 마리 물고기 쌍어. 부처님을 외호하는 나라 가야국, 물고기나라.
왜 물고기가 생명나무, 부처님을 지키는 것일까요?
불교에는 풍경(風磬), 목어(木魚), 목탁(木鐸)이 다 물고기입니다. 물고기에 담긴 뜻이 단지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눈을 부릅뜨고 정진하라는 뜻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식물. 나무는 우리 사람들 어머니, 뿌리입니다. 식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올 수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식물이 우리 목숨 근원인 것처럼 물 또한 우리 목숨 뿌리라는 이야기도 담겨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보고, 우리가 본디 해양, 물에서 왔으니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해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답을 찾는 것은 아마도 우리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 박사는 마치는 글에서 이런 말을 올렸습니다.
쌍어신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은 지중해로부터 한반도까지 넓은 지역에 살았다. 대강 기원전 7세기부터 쌍어를 신앙의 상징으로 형상화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스키타이, 간다라, 마가다, 운남, 가락국, 야마다이 등지에 걸치는 광범한 내륙지방을 오가면서 교역했다.
쌍어 (雙魚)는 사원 대문에서 군왕이나 신을 지켰고, 신령스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막이나, 때로는 물속에서 버텨 서 있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는 말 이마나 안장에도 쌍어는 수호신으로 매달려 있었고, 굴러다니는 자동차나 인력거에도 수호신으로 장식되었다. 중국에서는 여행자들 숙소나 식당, 돈을 지키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한국에서는 왕릉 대문과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에 장식되었고, 왜국에서는 여왕 옷을 장식하는 무늬로, 후세에는 재물신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한국 민속에도 오래 남아서 가게나 식당입구 안쪽에 매달린 북어 두 마리로 끈질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과 풍속이 다른 지구상 여러 민족들이 공통으로 믿고 있던 쌍어신앙은 경전이 남아 있지 않아서 민속신앙으로 취급되어왔다. 경전이 없기 때문에 학문으로 연구하기 힘들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병이어五餠二魚로 남아있고,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물고기로 종교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로마 박해 시절 예수 그리스도교도들 사이 암호인 IXθYΣ 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는 내 주님’ 이라는 말의 약자다. 그 낱말들 머릿글자를 조합한 말이 물고기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기간 중에 습득한 쌍어신앙이 전승과정에서 지역화된 암호다. (글 source : 변택주 · 맑고 향기롭게 4월호)
불국사 다보탑 옆 귀퉁이에 있는 뿔난 물고기 (목어, 木魚)
김병모 · 金秉模 Profile 1940년 9월 21일 서울 출생 1978년 영국 옥스포드대 대학원 문학 박사 (St, John College, University of Oxford; D. Phil degree) 영국 런던대 고고학연구소 수학(1년) 외교통상부 문화외교 자문위원(문화재부문) 국제박물관위원회(ICOM) 명예평생회원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사적 제74호, 가야 시대의 수로왕비의 능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다.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무덤으로, 커다란 원형 토분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라고 새긴 능비가 서 있다.
윗 사진은 제4제국 캡처한 수로왕비릉.
<許氏族의 源流를 밝혀 주는 後漢 때의 金石文「神井記」.
神井記
普州東里鐘地靈出奇氣振人傑出英聲. 許族早居于斯, 長傳 佳話, 其宅後山如獅, 前原似錦, 崖下井水淸冽旋汲旋盈, 大旱 不竭, 東漢初, 許女黃玉姿容秀麗, 智勇過人. 兒時喜聆先輩逸事, 嘗聞, 祖云, 丁卯饑饉, 人多逃荒, 適母臨 , 遂絶流離出念賴父行乞, 度日. 余呱呱墜地. 無哺乳爾, 曾祖虔禱于井冀獲天賜, 移時, 中有魚躍, 折枝垂釣, 日得二尾, 烹爲羹作乳汁. 如是經年. 汝祖因以存活, 家人感其靈異, 尊爲神井, 而許氏亦由此繁衍昌盛. 成望族焉 - 乙酉春三月上浣毅旦立-
普州 땅 동쪽 마을 鐘地란 곳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솟아 인걸이 떨치고 영명한 역사가 있다. 許氏族은 일찍부터 이곳에 살았는데 훌륭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진다. 그 집 뒷산은 사자와 같고 앞뜰은 비단과 같았다. 바위 아래 우물이 있어 맑은 물이 넘쳐 흘러 긷는 즉시 가득 차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東漢 초에 許黃玉이라는 소녀가 있어 용모가 수려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정묘년에 기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침 어머니(증조모)가 産氣가 있어 떠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남게 되었다. 아버지(증조부)가 구걸을 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때 내(조부)가 이 땅에 태어났으나, 먹을 젖이 없었다. 증조부가 우물가에서 경건히 하늘의 도움을 빌자, 이윽고 우물 속에 물고기가 뛰어 올랐다. 나뭇가지를 꺾어 낚시를 드리워 하루에 두 마리씩 낚았다. (물고기를) 쪄서 죽을 만들고 유즙을 만들어서 여러 해를 지낼 수 있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이리하여 살아남았다, 후손들이 그 (우물의) 신령스러움에 감복하여 神井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래서 許氏族이 오늘날과 같이 번창하고 위대한 씨족이 되었느니라』
을유년 춘삼월 상순 의단 세움. 神井記 원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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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의 고향은 어디인가?
북방계 유목민 길쭉한 얼굴 과 남방계 농경민의 네모형 얼굴. 한반도 최초의 한국인은 농경민으로서 벼농사. 고인돌 유적을 남겼다. 황석리 고인돌 13호 두개골지수 100 : 66.3 (한국인 평균 두개(장폭)지수 100 : 80) 75이하는 장두형(유럽인 형) / 81이상은 단두형 (아시아인 형) 남아시아계의 농경민족 : 벼농사, 고인돌, 난생신화(卵生神話) 북방계 유목민 : 3천년전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뀔 때 한반도로 이민 온 사람들 (유목민)이 진시황을 도왔다가 한반도로 이민왔다. 진한(辰韓:三韓 中 하나), 진(秦)나라 시대 북방 유목민이 도래해 세운 나라. 알타이(北의 긴산맥이름)語가 신라어, 현대국어의 뿌리. 솟대신앙. 천손신화.
남아시아계의 농경민족 : 난생신화(卵生神話) 최경주 스타일. 알타이계 북방 유목민족 : 천손신화(天孫神話) 위성미 스타일. 솟대 : 인간의 염원을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새, 죽은자의 안내자역활(항해사). 금관을 장식한 새. 솟대등에 보임.) 새가 왔다가면 기도드리던 여인 (그 당시 정치적인 리더는 무당)이 잉태하여 태어난 자가 칸, 이사금, 마립간등의 유목민족의 지도자가 됨 솟대신앙 - 2차이주 알타이어 계통의 북방유목민. 즉 천손신화. 쿠르칸(적석총). 반면 농경민족의 무덤은 고인돌. 즉 난생신화(卵生神話).
1973년 발굴된 고분인 경주 대릉원, 천마총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다
천손민족의 무덤인 신라 천마총은 스키타이 쿠르간형. 알타이 민족에만 있음. 즉 적석총은 북아시아에 쫙 깔려있음. 우크라이나에서 부터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알타이, 몽고, 한국까지임. 즉 천손신화(天孫神話)를 믿는 지역에 적석총(쿠르간)형태의 무덤이 있음. 쿠르간 : 통나무 집을 짓고 그것을 막돌로 덮은 형태의 무덤. 예 스키타이 쿠르간(카자흐스탄에 있음) 신라의 천마총과 같고, 크기는 크다. 우리 것보다 800년이 빠르다. 800년의 시간차가 있어도 그 무덤들에서 새가 나옴. 유전인자가 같다. 지배계급인 유목민과 생산계급인 농경민. 그 두 유전인자가 혼혈되어 섞임.
김수로왕릉에 있는 두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가락국에 소개된 쌍어신앙.
옛 가야국에만 있고, 인도와 네팔의 쌍어문이 있고, 아프칸, 파키스탄과 스키타이의 쌍어신앙. 또 중국 운남지방, 사천지방의 사원의 벽돌에 새겨진 쌍어문양. 레바논, 시리아, 예루살렘까지도 쌍어문양(물고기)이 퍼져있음.
일본의 후루호모도 이나리 신사의 쌍어를 통해,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현에는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옮겨와 살았음. 일본의 여자 단군(즉 무당)의 이름이 히미코(卑彌呼) (히미코 : 왜국최초통일국가인 야마다국의 여왕으로 알려짐.) 왜국여왕 히미코(卑彌呼)의 쌍어신앙 증거. 야마다국의 히미코(卑彌呼) 여왕과 그를 보좌한 남자가 수로왕의 역사에서 사라진 아들 딸인 신녀(神女) 공주와 선견(仙見) 왕자 오누이였음의 증거로 삼는다.
인도의 공주인 허황후. 중국에서도 허씨가 나오는데 지도를 보면, 쌍어신앙 집단의 이민으로서 허씨는 성(姓)이 아니고 세습되는 무당 즉 종교지도자이다.
돌하르방(돌 할아버지, 수호신) : 4차 이주 해양민족. 돌하르방관련 문화가 남미 페루에서의 적도해류와 흑조(黑潮)해류를 타고 제주도로 유입. 지구의 자전으로 생긴 해류를 타고 프랭크톤이 이동. 돌하르방 = 발리의 하르방 = 필립핀의 하르방(목이 없음) =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석상들.
쌍어문에 숨은 뜻은?
우리나라 의식주에 사용된 전통문양에는 다산, 수복, 공명, 길상, 부귀를 상징하는 여러 종류의 문양이 있는데 그중 부부화합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원앙, 기러기, 쌍어, 오리, 연꽃등이 있다.
김해시의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 대문은 2층 누각의 모습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면 수로왕의 신위를 모시고 봄 · 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숭선전이 보인다. 마당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막아선다. 지붕 하나에 문 세 개가 나란히 달려 있다. 가운데 문 위에 納陵正門 (납릉정문)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납릉정문의 문설주 위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코끼리의 긴 코와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며 그 사이에 있는 탑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許왕후에 의해 가야에 전해졌다는 유명한 쌍어문(雙魚文)이다. 이러한 연유로 쌍어문은 김해시의 상징물로 되여있다.
| - 수로왕릉의 쌍어문과 인도의 태양문 비교 |
쌍어문(雙魚紋)은 무엇을 나타내며 어떻게 전래되었을까?
쌍어는 허황옥이 한국에 시집 오기 천년 전인,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로부터 시작된다. 쌍어는 어떤 신을 보호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는 신어(神魚) 들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물고기는 두 마리, 즉 쌍어라야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쌍어는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중앙에 있는 어떤 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신어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났고, 이 사상은 히말라야와 인도,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들어왔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라크(메소포타미아, 아수르) 와 한국(가락국)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가까워진다.
쌍어문을 어느 신앙의 상징으로 삼기 시작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2,800여년 전 '바빌로니아인'들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그들은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생각 하였고, 신전 앞에 대문을 세울 때 대문 머리에다 쌍어를 그렸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인'에게 퍼져 결국은 인도에까지 스며들어 힌두교의 여러 신상 (神像) 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신앙은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동방전파와 함께 북으로는 네팔, 티벳, 몽고로 퍼졌고, 동으로는 남중국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황해를 건너서 한국 땅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한반도에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왕비인 허씨의 고향은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라는 지역으로 이곳은 힌두교의 성지로서 현재 힌두교 사원이 1천개 이상이 있는 종교의 도시이다. 앞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아요디아에 있는 힌두교사원 정문위에는 좌. 우로 두 마리의 물고기의 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이 쌍어문양은 주정부의 문장, 박물관 정문, 자동차 번호판, 공무원들의 제복, 제모, 단추에까지도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아요디아 주정부의 경찰제모의 쌍어문
납릉정문에 그려진 쌍어는 지금도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쌍어의 문양과 같은 것으로 위의 추정 경로도처럼 인도 아유타국에서 출발하여 가야로 전래됨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반도에 전래된 쌍어문의 물고기는 한번에 수많은 알을 낳듯이 자손의 번영을 기원을 담았다고해서 회화, 도자기, 별전등으로 우리의 생활에 적용되어 오고있다.
아요디아에 있는 힌두사원 정문에 있는 쌍어문
중국 북경시의 밀교사원에서는 8가지 보배중 하나로 귀중하게 삼고 있다. 양자강 상류에 있는 사천성 지방에서는 서기 1세기 때부터 물고기를 숭배 하는 신앙집단이 있었다.
또한 일본의 구마모토현에 있는 야쓰시로 신전에도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방에서 타고 다니는 반 트럭의 덮개 천막에도 물고기 문양이 있다. 이와같이 물고기 문양은 세계도처에서 거의 신성시하고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이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양大 김병모 · 金秉模 교수가 허황옥이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로도.
물고기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면…
분청조화쌍어 문병편 도자기에 새긴 쌍어로 쏘가리가 그려져있다.
고려청자 쌍어문(雙魚紋) 대접 회색의 은은한 유약과 네개의 원안에 돋을 무늬로 두 마리의 물고기를 넣은 큰 대접이다. 물이나 차를 담으면 선회하는 물고기가 실물처럼 보일듯 하다.
청화백자 쌍어문 호
쌍어별전 부부화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혼례때 혼수품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배면의 길상(吉祥)어로 수복강녕 부귀다남(壽福康寧 富貴多男)이 적혀있다.
전각에 새겨진 '쌍어' (전각 작가 고암 정병례 작품)
그래픽 디자인된 '쌍어' (고강철 작품)
도자기등에 나타난 물고기 문양은 쌍을 이루는 것이 특히 많다. 쌍은 음과 양을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쌍어무늬는 조화 또는 부부의 화합을 상징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반려가 됨을 상징하는 쌍어무늬를 좋아했다.
물고기 무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잉어이다.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되는 모습을 그린 어변성룡도나 힘차게 차오르는 잉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출세의 염원을 담고 있는데 등용문(登龍門)이라하여 연적을 비롯하여 선비가 많이 쓰는 문방구나 기타 공예품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민화의 "효자도"에 나타나는 잉어는 효행설화에 관련지어 효행의 상징물로 나타낸다. 또한 잉어는 자손 번창을 의미하기도 한다.
잉어의 머리 모양이 남근 모양으로 묘사한 무늬를 보아도 짐작하거니와 알을 한번에 수천이상을 낳는 것을 보아 자손의 번창을 의미함을 알수 있다. 민화나 도자기, 나전칠기 등에 가끔 등장하는 물고기로 쏘가리와 메기가 있다. 쏘가리는 한자의 쏘가리 궐자의 발음이 궁궐의 궐(闕)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에서, 메기는 미끄러운 몸체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물을 훌쩍 뛰어넘어 대나무 꼭대기에 잘 올라간다는 설화의 내용과 관련하여 등용과 출세를 상징한다.
한편 수로왕릉의 쌍어와 떡 그릇은 오병이어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부 기독교의 견해도 있기도하다.
요즘같이 가정이 부부의 화합이 요구되는 시대가없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연예인들의 이혼사례는 제쳐 놓고라서도 평소 잉꼬부부라고 부르던 우리의 이웃들이 짧고, 긴 결혼생활에 관계없이 어느 날 아침에 남남으로 갈라서는 사례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쌍어가 있는 도자기나 그림을 보며 따뜻한 부부애를 가꿔나가며 부부화합을 실천한 자랑스런 조상의 지혜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쌍어가 상징하는 음과 양의 조화속에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부부화합의 꽃을 아름답게 피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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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문양 | 다른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사람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집회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경우에 그들은 안전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신분의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에 내일 저녁 7시에 ○○지하동굴에서 집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구전으로 전했다고하면 그 동굴의 입구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파수꾼이 있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파수꾼 앞에 도착하여 발로 물고기모양의 그림을 그려 보이든지,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물고기 모양을 그려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켜 동료임을 확인한 후에 입장할 수 있었다. 물고기 문양은 일종의 암호였다.
이 지하묘지를 <카타콤베>라 하며, 현재 남아있는 이 카타콤베에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려놓은 당시의 물고기문양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21세기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이 물고기 문양은 발견되고 있다. 자신이 크리스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차량에 물고기 문양의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물고기 문양을 사용했을까? 그들은 물고기 문양을 누구로부터 배웠을까? 단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까? 고기를 낚는 어부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사용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안전만을 위해서 암호의 기능만으로 사용하였을까?
기호는 그 기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실체를 가리키고 있다. 상징은 기호를 영속적인 것이 되게 하면서 상징이 주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상징의 의사소통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으로는 가장 짧은 시간으로 가능하다.
고대의 사고 방식에는 실체와 상징이 공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물고기 문양을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물고기 자체를 숭배한 것은 아니고 물고기 문양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 메시지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죽을 수 있는 극단의 상황에서 그것을 통하여 구명될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라는 의사표시를 상징하는 물고기 문양이 아닌가!
만약에 상대방이 유대교나 로마병사라면 생명을 내어주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물고기 문양>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박해라는 가중적 심리적 환경에서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신념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였던 자들로써 자신들도 믿음을 지켜 나간다면 예수와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과 사명감으로 채워진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여건들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이미 예고된 메시지가 자기로 인하여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예수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 내리라.』라는 말로 강조하였다. 이 구절의 내용은 인류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류의 기원, 현재, 미래에 관한 내용과 인간이 살아가야할 본질적인 내용을 설파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창세부터 공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내용을 상세히 가르쳤다.
인류의 구체적인 기원, 신과 인간의 관계, 자신의 사명, 이스라엘과 신과의 관계, 이스라엘의 장래, 인류문명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때」, 「그날이 오면」등의 표현으로 어느 시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고, 「지구」라는 행성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였다는 것은 천문학인 우주의 체계, 천국과 지구, 태양계와 지구 등 고대선조들이 사용한 세차운동상의 우주적 시간계념도 설명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창세부터 숨겨진 비밀을 예수로부터 정보를 듣게 되었으니 죽음을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원시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물고기 문양은 편의적으로 사용한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예수를 이해하고 기독교가 하늘의 복음을 전해야하는 우주적 시간개념과 중요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생존해 있을 그 당시에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AD연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예수의 시간관념은 은하계 운동법칙에 의한 우주적 시간이었다. 예수가 「그때」, 「그날이 오면」이라고 추상적 시간을 사용한 것은 고대부터 지상에서 사용되었던 세차운동상의 시간인 12궁의 별자리에 의한 시간인 것이다. 「그때」라는 의미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때」는 우주적인 시간인 물고기시대임을 제자들에게 밝혔을 것이다. 자신이 쌍어궁시대의 메신저로서 「이때」에 온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고한 시대가 되었고, 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 시대에 해당되는『이때』에 온 것을 밝히면서 요한이 미래를 환상 (환상이 아니고 오늘날 영화스크린과 같은 것)으로 본 아포칼립스(Apocalipse)=과학시대=의 도래와 쌍어궁 다음시대인 보병궁시대를 “그때”라는 시대로 표현하면서 보병궁시대에 대해서도 설파하였을 것이다.
“그때”라는 시간개념은 은하계운동법칙에 의한 황도12궁도상의 시간이지 로마교황청이 만든 AD년대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자신이 전파한 복음이 2천년동안 지속될 것도 이해시켰을 것이다. 자신의 메시지가 지구에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메시지전파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천국에서 자신과 같은 영원한 삶을 약속하였다.
제자들은 지구의 기원과 미래, 천국에 대한 예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목숨을 능히 버릴 수가 있었다. 마가의 다락방의 최후의 만찬에서 더 은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예수는 기도하기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지구)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가 「하늘」을 지칭한 것은 지구외 다른 행성을 말한 것이다. <지구>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물고기문양을 사용하였다. 물고기 문양은 구약성서에서 오래전에 예고된 것으로 세차운동상의 쌍어궁시대에 메신저로서 나타난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 멜로빙그 왕조의 물고기
파리를 건설한 프랑스의 멜로빙그 왕조는 물고기 문양을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멜로빙그 왕조의 초대 왕인 메로벵의 어머니는 물고기를 통해서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멜로빙그의 왕조는 예수와 결혼한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를 물고기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멜로빙그 왕조의 계보는 예수의 후손인 것 같다.
물고기 문양의 세계성
과연 이 물고기 문양은 기독교에만 있었을까? 물고기 문양은 기원전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에서도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재 건축한 제 2 신전의 북쪽문을 물고기문이라 칭하여 건축하기도 했다. 이것은 이란의 신전에도, 네팔 카트만두의 불교사원뿐 아니라 몽골의 국가상징으로 물고기의 문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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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 는 삼국 시대 정사(正史) 인 『삼국사기』 에서 빠진 전설, 풍속, 기담(奇譚) 등이 수록되어 있다. 김부식은 < 삼국사기 > 에서 가야를 체계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신라와 관계있는 2 ~ 3 곳만 간략히 기술하였다.
고려 시대 일연(一然)이 지은 『 삼국유사 』 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시대인 1512년 (중종초) 재간된 것이 도쿄대와 교토대에서 영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책 속에 「가락국기」 라는 부분이 있다. 편년(編年) 「가락국기」 는 서기 1076년에 금관주, 즉 오늘날 김해 땅의 행정관인 지주사(知州事) 가 편수한 책이다. 그 책 내용의 일부를 후에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금관 지주사였던 사람의 저술 내용 일부만이 일연 때문에 살아남아 오늘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수로왕은 서기 42 년 알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 6년 후인 48년, 즉 여섯 살에 열여섯 살의 아리안계 인도인인 ‘ 아유타국 ’ 공주 허황옥(許黃玉) 과 결혼했다. 아요디아<래ㅜㅅ ㄻㅊㄷ=ㅎ댁햠>(Ayodhia) 는 인도 전체로 보면 동북쪽에 있었고, 갠지스 강의 한 지류에 걸쳐 있는 땅이었다. 아요디아라는 말은 ‘ 정복할 수 없는 땅 ’ 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락으로 올 때 인도 아요디아지방의 종교인 힌두교에서 사용하던 쌍어문 문양이 함께 따라 와서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이 문양을 사용하게 되었다. 가락국의 본거지였던 현재 경남 김해에 소재하고 있는 가락국 김수로왕릉의 정문에 이 쌍어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쌍어문이 있는 가락국(김해)김수로 왕릉 잎의 납릉정문(納陵正門)에 그려진 '쌍어문(雙魚紋)'
사실 조선의 역대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쌍어문양이 김수로왕릉에서 조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김해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와 경남 양산에 있는 계운사에서도 이 문양이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락 <가야>라는 말은 인도 고어인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 왜 그들은 그것을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을까?
김해 신어산 은하사의 쌍어문
아요디아(코살라 Khosala 國) 출신 공주와의 국제결혼은 곧 한국과 인도가 불교로 관계를 맺는 첫 번째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전진(前秦) 의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도착한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 년이 아니라 허황옥이 가락국에 온 서기 48 년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불교는 남방불교(南方佛敎) 라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허황옥의 도래와 불교 전래 관계와 더불어, 가락(가라, 가야) 라는 이름과 불교와의 관련성 여부에 대해, 언어학자 강길운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여, 가락과 가야는 모두 물고기라는 뜻의 드라비다 계통의 말이라는 것이다. (드라비다어 Dravidian 는 고대 인도인의 토착어) 가락(Karak) 은 舊 드라비다 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고, 가야(Kaya) 는 新 드라비다 어로 물고기라는 것이다. 인도인에게 있어 물고기는 매우 신성한 동물이다. 또한, 불교적 의미에서 쌍어(물고기 두 마리) 는 부다의 눈(雙魚) 을 의미한다.
가락국 왕비 허황옥(許后 · 黃玉) 의 오라버니의 이름은 기록과 논문에 등장하지 않으나 이 책에서는 두 가지 이름의 사료(史料) 를 제시한다. 장유화상(長遊和尙) : 김해 은하사의 한 건물인 취운루(翠雲樓) 의 중수기(重修記) 와 보옥선사(寶玉禪師) : 경남 하동 쌍계사(雙磎寺) 의 칠불암 유사(七佛庵遺事) - 칠불암 현판기에서 나옴.
장식으로서의 물고기는 한국 땅에서는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著者는 신라와 가야가 형성될 때 사회의 상류 계층을 구성한 사람들이 물고기 숭배 신앙이 퍼져 있던 곳에서 이민해 온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쌍어(雙魚) : 쌍어 신앙은 가야인들의 신앙. 단어(單魚) : 신라 - 유목민들의 물고기 토템, 몽골인의 물고기 숭배사상.
고고학자인 著者 김병모 박사는 쌍어문(雙魚紋)의 분포 를 통해, 역사의 퍼즐을 아래와 같이 나름대로 완성한다.
허황옥은 서기 32 년에 태어났다. 기원전 165 년경, 지금으로부터 약 2000 년 전에 허황옥의 6 ~ 7 대 선조들은 2 세기에 걸친 < 마우리아 - 숭가 왕조 교체기 > 의 혼란을 피해 고향인 아요디아, 즉 아유타국을 떠났다. 이들은 사라유 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가 갠지스 강 본류에 도달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벵골 지방을 거쳐 아삼 지방을 통과해서 당시의 대리국(大理國 : 현재 중국의 운남성) 에 도달한다.
수로왕비릉의 비문(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 왕후의 시호인‘ 보주 태후 ’ 의 보주가 관향(貫鄕) 일지도 모른다 ?
이 곳은 중국 사천성의 안악(安岳) 이며, 당시로서는 촉(蜀) 땅이다. 한(漢) 나라 때 양자강 유역에는 쌍어문을 사용한 신앙 집단(허성 許聖 집단) 이 살았다. 허성(許聖) 의 ‘ 허 ’ 는 성(姓) 이 아니라 세습되는 직업 무사(巫師) 즉, 이교도의 신앙 지도자로서 신분이 세습되는 사람을 종교적 칭호로 ‘ 허 ’(許:브라만) 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邊疆民族史, 대만)
그들은 한(漢) 나라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에 불만으로 충돌이 생겼고, 그 결과 반란에 실패한 토착민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사천 지방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이주해 살았다. (광무 23 년, 서기 47 년 ; 후한서) 이 곳은 오늘날 무창(武昌) 지방이다.
허황옥은 그들의 정착지인 양자강 중류의 무창 지방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 하게 된다.
- 김수로왕비 허황옥(쌍어의 비밀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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