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퇴수정 |
|
|
조선후기 박치기, 벼슬 물러나 자신을 수양코자 정자 지어
훼손 없이 자연과 하나 되는 아름다운 풍경 자아내
지리산 운봉의 바래봉을 끼고 흐르는 람천은 인월을 거쳐 실상사방면인 남쪽으로 흘러가다 기암 괴석이 있는 대정리 827번지에 도착하면 신선이 놀았던 퇴수정이 나온다.
퇴수정을 가기 위해서는 좁다란 송림길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데 주변에 다양한 야생화와 잡초가 어우러져 있다.
이 퇴수정은 조선후기에 선공감 가감역관을 지내다가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오른 박치기가 1870년 벼슬에서 물러나 자신을 수양하고자 퇴수정(退修亭)을 지었다.
정자 옆에는 넓은 바위에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암석이 높이 솟아 있으며, 또 자연경관이 빼어나 사시사철 송림이 어우러지고, 시냇물과 암석이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
|
|
|
▲ 퇴수정 주련 |
|
|
퇴수정은 산자락을 훼손하지 않고 축대를 쌓아 터를 만들고 사각주초를 놓은 후 기둥을 세웠으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보편적인 계자각난간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둘렀고 천장은 소박한 우물천장이며 중앙에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환도실을 만들었다.
정자에 앉으면 암반위로 흐르는 물이 정자 앞에서 큰 못을 이루고, 못 가운데는 “야박담(夜泊潭)”이란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있다.
또 정자 옆 깎아지른 바위에는 박치기의 별장이란 의미의 매천별업(梅川別業)과, 신선과 서로 어울려 놀았다는 반선대(伴仙臺)가 있다.
|
|
|
|
▲ 야박담 |
|
|
즉 정자를 만들면서 자연경관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의미부여를 하고자 자연과 일치되고 명문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암각서는 주변의 영역을 별장 주인의 영역 안으로 끌어 들임과 동시에 다양한 의미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편액과 주련인데, 이 속에는 집주인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이 글씨는 국중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이 편액과 주련을 모두 행기를 넣어 유려한 서체로 썼다.
해강 김규진은 본관이 남평(南平)으로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또는 백운(白雲居士, 醉翁) 등이 있다. 평안남도 중화 출생으로 8세부터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하여, 오체에 두루 능하였고 산수화와 화조화도 잘 그렸으며 난죽을 비롯한 사군자에 뛰어났다.
그는 영친왕 이은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여 어전사진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유명한 안중식, 조석진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
|
|
|
▲ 퇴수정으로 가는 송림길 |
|
|
해강의 글씨는 일제시대 33본사였던 각 사찰에 사찰명을 써 주었기 때문에 완주 위봉사와 장성 백양사 금산의 보석사 등에서 그의 아름다운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매천 박치기는 아주 특별한 자기만의 별장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자 안에는 퇴수정을 지은 조성배경 등에 관한 글이 있는데, 바로 퇴수정기(退修亭記), 반선대기(伴仙臺記), 반선대10영(伴仙臺十詠), 퇴수정상량문(退修亭上樑文), 퇴수정원운병소서(退修亭原韻幷小序) 그리고 기타 현판과 주련 등의 기문에서 그의 자연친화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봄이 가는 길목에서 바래봉의 철쭉꽃을 감상하고 람천의 물길을 따라 실상사의 석등과 수철화상비와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좋은 볼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정리 퇴수정인 만큼 이곳에서 벼슬길에서 물러난 선비의 정신과 자연경관을 크게 손상하지 않고 지리산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를 감상한다면 큰 안복(顔福)일 것이다.
김진돈(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