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겉보다는 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바꿔 얘기하면 장(醬)맛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용서가 된다는 뜻도 된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장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 손맛 다음으로 중요한 맛이 장맛이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 들이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쓰였다. 근대 이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서양식 조미료, 소스들이 들어오면서 의존도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음식에서 장을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장이 만들어 내는 맛은 깊고 풍부하다. 혀에 묵직하게 내려앉으면서 여러 가지 풍부한 느낌의 맛을 선물해 주고, 먹고 난 이후에도 여운을 길게 남긴다. 입에 들어오기 무섭게 싹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맛과는 차원이 다른 ‘진국’의 맛이다. 발효의 ‘마술’과 슬기로운 기다림이 만들어낸 고급스러운 맛의 세계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 일본 그리고 다른 몇몇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맛인데 이제는 서양 사람들도 그 맛에 눈을 떴다.

최근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밍글스(Mingles)’는 장맛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한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창작 요리들을 만들고 있다. 세계적인 일식당 ‘노부(Nobu)’의 바하마 지점에서 총주방장까지 지낸 강민구(30) 오너셰프가 운영한다. ‘노부’는 일본의 장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추장을 포함한 다양한 장 류를 사용하는 곳이다.
강 쉐프는 우리나라 대학 조리학과를 졸업했지만 차근차근 국제적인 내공을 쌓아서 외국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노력파이자 실력파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의 식당을 갖겠다는 꿈을 갖고 이름까지 미리 지어놨을 정도였는데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밍글스’는 그때 자신의 이름인 민구를 영어식 발음으로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영어로는 Mingles, 즉, ‘서로 다른 것끼리 조화롭게 어우르다’는 뜻이어서 한식과 장류를 바탕으로 창작요리들을 만드는 식당의 이름으로 썩 그럴듯하다. 이래저래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장을 이용한 이곳의 요리 중에서는 양고기 요리가 가장 인상적이다. 보통 서양 요리에서 양고기를 구울 때는 후추, 허브, 오일 등을 이용해서 미리 재우는데 이곳에서는 된장을 쓴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맛을 가미해서 만든 된장에 양 갈비를 24시간 동안 재우고, 야채를 구워서 만든 가루를 발라서 풍미를 더한다. 그리고 향과 화력이 좋은 고급 숯인 비장탄을 이용해서 구워낸다.
이렇게 요리한 양 갈비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이 난다. 된장이 냄새를 잡아줘서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고, 숯불과 된장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향이 전체를 감싸면서 입맛을 끌어당긴다. 깊게 밴 구수한 장맛 때문에 고기가 감칠맛 있게 씹히면서 양고기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으로 술술 넘어가는 것이 일품이다.
또 하나 독특한 것은 디저트다. ‘크렘블레와 위스키 카푸치노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는 세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장 트리오로 불리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모두 이용해서 풍미를 더한 이색적인 음식이다. 서양식 디저트와 장 트리오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데 막상 먹어보면 아주 맛이 독특하면서도 새롭다. ‘밍글스’라는 이름에 매우 잘 어울리는 창작 디저트 메뉴이다.
음식에는 원래 국경이 없다. 서로 다른 문화권, 다른 국가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섞이며 발전해왔다. 동양의 깊고 풍부한 맛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醬)과 서양의 요리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일 수 밖에 없다. 맛객은 이 새로운 진화가 그저 반가울 뿐이고 과연 어디까지 진행이 되어갈지 설레는 마음이다.
주영욱
**밍글스(Mingles):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23 청담돈가 건물 지하 1층. 전화 02-515-7306. 점심, 저녁 세트 메뉴만 있다. 제철 재료에 따라 메뉴와 음식이 계속 바뀐다. 점심 3만5000원 저녁 8만원. 예약을 반드시 해야 한다. 일요일은 쉰다.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 전문가이자 여행전문가.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