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
훅
김화영
태양이 서향으로 꼴가닥 자맥질을 하는 것과 동시에
집안은 어둠으로 훅 들어찬다
밝음과 어둠은 경계가 분명하다
우리네 인생 가을에 접어들다 보면
오색 창연한 낙엽들처럼
훅! 지나 왔구나 서글픔으로 몰아친다
매순간 사랑과 배려 가득 품어주고
고왔던 눈매 살가웠던 몸매 소환하여
거침없고 두려움 없던 욕망들에게
힘들었지 수고했어
다독여주자
꽃잎이 피는 것도 소명이 주어지듯이
바람이 스러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
아쉬움보다는 대견함의 오솔길을
속닥속닥 걸어가 보자
* 김화영 : 산청 출신. 2015년 부산에서 산청읍으로 귀촌(귀향). 현, 필봉 문학회 회원.
유희의 남편과 그 일행들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내 가을이 왔다. 지리산의 가을은 여름과 또 다른 멋과 맛이 있었다. 지천으로 깔린 밤과 감 그리고 도토리로 나는 양식 걱정 없이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펜션에는 주말에 가끔 들르는 손님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조용했다. 그런 날이면 봄에 심어 둔 작물을 수확하고 텃밭을 정리하며 보냈다.
풍성하고 풍요로운 가을이었지만, 나는 내내 그녀 생각으로 가슴이 시렸지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그녀 또한 그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그날 내게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녀의 존재조차 잊으려고 했으나, 다시 불붙은 사랑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설령, 그의 말대로 그때 그녀가 세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패륜을 저질렀다 한들, 인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이며, 원망한단 말인가. 다 지나간 일이었다. 하물며 내 마음속에 재차 들어온 그녀였기에 나는 그녀가 못내 그립고 아쉬웠다.
조용하다 못해 절간 같은 펜션을 지키며 사는 일은 마치 수도승이 수도하기 위해 적막강산인 암자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수 밥을 짓고, 오후에는 겨울을 대비해서 땔감을 준비하고, 해거름에는 텃밭에서 작물을 수확하는 등 일상을 이어갔다.
그러던 한날이었다. 그날도 아침을 먹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데,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아침에 까치가 울어 오늘은 손님이 오려나 하고 기대했는데 차가 올라오니 반가운 마음에 하던 일을 멈추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손님은 놀랍게도 유희와 그녀의 친구,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광양에 산다는 미란이었다. 조수석에서 먼저 내린 친구는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시인 아저씨!”
예전에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뒤이어 유희가 차를 주차하고 내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얇은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도시풍의 매력 있는 여성처럼 보였다.
“잘 계셨죠?”
나는 그녀를 보자 반가움보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나올뻔했다.
“…….”
“얘, 유희야 어색하게 그러지 말고 한 번 안아드려. 그래도 한때 둘이 연인 아니었어?”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발랄하고 튀었다.
“그럴까?”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예상을 뛰어넘어 내게 꼭 안겼다. 그 예전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재스민 향이 내 코를 자극하면서 나는 전율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안긴 상태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당황하여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잘 왔어.”
“아저씨는요?”
“뭐가?”
“보고 싶지 않았냐는 말이에요.”
나는 문득 사랑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물론 보고 싶었다. 텅 빈 펜션에서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렸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보자, 그녀의 남편이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하였다.
“영화 그만 찍어! 아저씨! 차 안에 짐 좀 꺼내줘요.”
친구는 자신이 말해놓고선 막상 우리 둘이 안고 있으니 못 볼 것을 보는 양 앙탈을 부렸다.
“참! 내 정신 좀 봐. 차에 아저씨가 좋아하는 회가 있거든요. 얼른 꺼내서 냉장고에 넣어야 해요.”
그녀가 살포시 떨어지면서 급히 차 쪽으로 뛰어갔다.
“회?”
“유희가 남편도 아닌 외간남자를 위해 광어랑 숭어랑 엄청나게 많이 샀데요. 이런 산골에서는 장작불에 고기 구워 먹는 게 좋은데, 계집애가 말을 안 들어요. 내 참!”
나는 그녀의 말에 웃음으로 화답하고 유희를 도와 짐을 옮겼다.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회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나는 그녀들은 안내하여 1층에서 가장 깨끗한 방으로 갔다. 창문을 열면 개울 너머가 가장 잘 보이는 방이었다. 그때 유희의 친구 미란이 물었다.
“왜 방이 하나죠?”
나와 유희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아니, 친구끼리 방 2개가 왜 필요하죠?”
내가 그렇게 반문하자 그녀는 정색하며 내게 말했다.
“내가 쓰는 방 하나와 유희랑 아저씨가 쓰는 방 이렇게 둘!”
농담이었지만 나는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당연히 유희가 그녀를 제지했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년아! 이 기회에 옛 애인과 바람피워도 돼! 너의 돼먹지 않은 남편이라는 작자도 그러는데, 네가 못할 게 뭐가 있어?”
그 말에 유희가 화를 냈다.
“너 정말? 왜 남의 사생활을 들추니? 꼭 그렇게 해야 해?”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야 했다.
“미란 씨.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우리는 이런 농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방 2개일 필요 없답니다. 이 펜션이 내 건데, 필요하면 어느 방이라도 이용하면 되지요. 그러니 얼른 들어가서 짐 푸세요. 제가 점심은 회와 별도로 불 피워서 고기 구워드릴게요.”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아하. 필요하면 아무 방이나 사용하시겠다? 그것 좋네요. 오늘 밤 그런 일이 꼭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저야 뭐, 신혼이라 너무 많이 해서 오늘은 혼자 편히 자고 싶거든요. 알았어요. 얼른 불이나 피워주세요.”
표정을 보니 유희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듯 보였다.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장작불에 고기를 굽고 그녀가 사온 광어와 숭어회 그리고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와 고추, 깻잎을 상에 내놓았다. 산골에서 모처럼의 진수성찬이었다. 유희는 친구가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추쌈에 회를 잔뜩 넣어 내 입에 넣어주는 등 살갑게 굴었다. 마치, 이곳에 오면 이렇게 하겠다고 친구와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술을 안 줘요?”
미란이 대뜸, 술을 주문했다.
“아니, 아직 대낮이라서.”
“무슨 시인이 술 마시는데 밤낮을 가려요? 운치 없게 시리. 있으면 빨리 갖다 주세요. 오랜만에 남편도 없는데 낮술 한잔해야죠.”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하긴, 예전 그녀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다짜고짜 유희와 헤어지라고 했다. 나는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헤어지세요.’
‘네?’
‘아니, 말귀가 어두워요? 이봐요. 유부남 아저씨! 지금 제정신이에요? 유희가 지금 몇 살인지나 알고 덤비는 거예요? 더군다나 유희는 곧 결혼을 앞둔 아이예요. 만약 오늘 이 순간 바로 헤어지지 않으면, 전 당신을 고소할 뿐만 아니라, 직장과 가정에 이 사실을 알리겠어요.’
나는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안내실로 갔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소주 2병을 상 위에 올려놓자 그녀는 입이 귀에 걸렸다.
“자! 두 번째 불륜을 위해!”
그녀의 건배사가 왠지 께름칙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여기는 지리산이고, 이곳은 자유가 있고 한낱 인간의 도덕, 상식을 깨드릴 수 있는 대자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희야. 불륜의 상대가 내가 되면 안 되겠지? 오늘 보니 이 시인 아저씨가 너무 멋져 보인다.”
그 말에 우리는 마음껏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오늘 웬일이야? 여기까지 다 올 생각을 하고.”
“어제 미란이네에서 서울 친구들 집들이가 있었어요. 거리가 멀다 보니 간다, 하고선 미루다 어제 내려왔죠. 오늘 저 혼자 오려 했는데, 미란이가 신랑이 오늘부터 출장이라고 극구 따라왔어요.”
유희가 수줍게 말했다. 그런데 미란이 반박했다.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하냐? 아저씨! 아닙니다. 유희가 혼자 가기 뭐하다고 꼭 같이 가자 해서 온 거예요. 혼자 가면 아저씨가 무슨 짓을 할까 싶어 보디가드로 날 데리고 왔다구요.”
“정말이야?”
나는 유희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돼요. 어쨌든 이곳에 왔으니까. 정말 이곳에 오고 싶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을 따뜻하면서 온기가 있었다.
“그래, 상관없어. 그대 혼자 오든, 친구와 오든, 난 이 자체로 감사해.”
“둘이 벌써, 불붙기 시작하나 봐.”
미란은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어제 너무 무리했나 봐. 이봐요. 불륜 아저씨와 아줌마! 난 이만 들어가서 낮잠이나 잘게요. 나 없는 데서 무슨 짓 해도 좋으니까, 오늘은 마음껏 즐기세요. 나중에 결과만 보고하면 됩니다. 그럼 난 이만.”
미란은 크게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자리 위에 나무에 걸린 잎들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속에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은 나까지 덩달아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긴, 딱히 먼저 꺼낼 말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별 뒤에 우리는 너무 먼 세월을 보낸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작심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여름 끝에 남편이 다녀갔죠?”
“그가 말하던가?”
“아뇨. 우연히 남편의 휴대전화를 봤는데 이곳 장면이 담긴 사진이 여럿 있었어요. 그래서 알았죠.”
“다녀갔어. 친구들이랑 왔더군.”
그녀는 잠시 인상을 구겼다.
“그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않던가요?”
그녀의 표정은 불안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보다,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
“뭘요?”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우리 예전에 만날 때, 그대는 지금의 남편 그리고 나. 하긴 여기까지는 내가 알았던 사실이지만, 또 한 명, 소설가란 친구를 동시에 만난 거였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내가 그대를 다그치는 게 아니야. 사실대로만 말해주면 좋겠어.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동시에 만났다는 말은 사실과 달라요. 소설가라는 분은 지금의 남편과 아저씨 앞에 만난 사람이었어요. 그때 저는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계속 절 추근대었죠. 그러다 남편을 만났어요. 좋은 사람이라 생각되어 만나다 아저씨처럼, 그도 아내가 있었죠. 그 때문에 한동안 그와 전 소원한 상태에서 제가 무산 시로 오게 된 거예요. 물론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어요. 간간이 통화했고, 서울에 올라가면 만난 건 사실이에요. 그 와중에 아저씨를 만난 것뿐이에요. 그러다 남편이 마침내 이혼한 거예요. 그때부터 그와의 결혼을 서두르면서 아저씨와 멀어졌죠.”
나는 그녀의 입으로 사실을 듣게 되니 한결 마음이 개운했다. 역시 그녀의 남편이 부풀려 말한 거였다.
“어쨌든 아저씨에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사모님과 이혼하고 아이들도 다 뺏기게 되었잖아요. 제 행복을 위해 아저씨를 그리했다는 것 때문에 결혼하고도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사랑은 그런 거였다. 소유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오직 존재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랑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파도 같은 거였다.
“내 눈을 똑바로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