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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1938),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273
제9장, 존 로크와 영국철학 – IX. John Locke et la philosophie anglaise 240-260
1절 로크의 생애와 작품들 I. Vie et Oeuvre de Locke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상인 가계 출신으로 브리스톨 가까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16살에 청교도 혁명(1649년)이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회군의 속했다. 1652년에서 1658년에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는 성직자의 직위들에 이르는 길을 정상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1658년에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박사학위를 얻지 않고서 공부했다. 1666년에 그는 아쉬레이(Anthony Ashley Cooper, 1621–1683)경과 관계맺었다. 아쉬레이는 나중에 샤프츠버리 1세(Shaftesbury) 백작이 되었으며, 그는 심하게 변동하는 정치운동의 삶을 살았다. 로크는 이 운동의 반대급부를 감당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두 번 체류했다. 한번은 1672년이고, 다른 한번은 1675년에서 1679년이다. 이 둘째시기에 그는 일 년을 자기 건강을 돌보기 위해 몽펠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둘째 시기는 샤프츠버리의 실총의 시기까지 이어졌다. 1684년에 그는 새로이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 백작은 혁명을 진작시키기 위한 그의 시도에 좌절을 겪은 후에, 홀란드로 망명을 가야만 했으며, 거기서 곧장 세상을 떴다. 로크는 [백작의] 권력에 회의를 느꼈으며, 그가 홀란드에 있을 것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했다. 그런데 그는 1688년 명예혁명이 이르기까지 거기에 머물러야 했다. 1689년에 영국으로 되돌아왔으나, 그는 특히 자신의 건강상의 이류로, 새로운 왕이 그에게 제시한, 선거후인 브란데부르크(1620-1688)에게 가는 대사직을 거절했다. 그 대신 법무 고문관 직위를 수락했다. 그는 특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또한 경제적인 문제들에(그는 그 당시 「이익의 축소와 화폐가치의 증가의 귀결들에 관한 고찰, 1691」을 썼다.) 전념하였으며, 또한 그는 수많은 논쟁들에 응답해야만 했다. 이 당시 그는 그의 친구인 마샴 부부(Masham)(마담 마샴은 성공회 신부이며 철학자인 커드워드(Ralph Cudworth, 1617–1688)의 딸이다)의 집과 멀지 않은 오에이트(Oates, High Laver, Essex)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을 뜰 때까지 머물렀다. (241)
1670년에 서른여덟 나이에 로크는 1677년 이래로 샤프츠버리 백작의 의사였다. 그리고 철학적 소명을 알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외과 의사인 시댄햄(Thomas Sydenham, 1624–1689)과 연결이 되어, 그와 함께 그는 1668년에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의학의 작은 논문들, 「해부학(Anatomca, 1668)」과 「의술론(De Arte medica, 1669)」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선언했다. “새롭고 유용한 어떤 발명을 인도하는 인식들만이 이 이름을 감당할 진실한 인식들이다. 전체 다른 사색은 할 일 없는 무기력한 일거리이다.” 일반적 이론들은 해롭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과학을 멈추게 하고 고정하기 때문이다. 단지 특별한 가설은 다음 원인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유용하다. 이것을 넘어, 그는 자기 나라를 흔들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들에 관해 반성했다. 그리고 그는 사제/신부(Sacerdos, 1698)와 로마 공화국에 관한 반성들(Réflexions sur la République romaine)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시민권력에 대한 성직자의 잠식에 반대하여 항의하였다. 그리고 「무오류의 경전 해석가가 필요하지 않다(Infaillibilis scripturae interpres non necessarius)」를 썼는데, 이 글의 원칙은 경전으로 구원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챨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제정한 통일령(Act of Uniformity 1662)을 받아들이지 않았던비국교주의자들에게도 청교도들에게도 마땅한 관용에 관하여 관용론(Essai sur la tolerance, 1666)을 썼다 (241)
1670년에서 1671년 겨울에, 친구들과 토론의 연속에서, 그 중에는 변호사인 띠렐(James Tyrrell, 1642–1718)과 의사인 토마스(David Thomas, 1634경-1694)도 있다. 띠렐은 나중에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를 전복하는 [명예]혁명에 기여할 것이고, 오렌지공(William of Orange, 1650-1702) 즉 윌리엄 3세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이 만남들로 그의 사유는 예기치 않은 과정을 걷는다. 그는 띠렐의 증거에 따라서 “도덕론과 계시된 종교의 원리들은 우리의 고유한 소질[능력]을 검토하기 이전에 또한 어떤 대상들이 우리의 범위에 또는 우리 이해를 넘어서는가를 알기 이전에” 견고하게 확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인간 오성에 관한 시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의 착상이 생겨난다. 이 책은 도덕적 진리들의 확실성에 관하여(IV, 4, 7) 그리고 신앙과 이법의 연관에 관하여 고찰하는 것으로 끝난다(IV, 18). 게다가 오성론은 1690년에야 나타났다. 1671년부터 로크는 인간 지성론(De intellectu humano)을 썼다. 여기서 우리의 모든 관념들로부터 단순 관념들로 환원은 오성론에서처럼 소개되어 있다. 오성론 자체는 19년 동안에 충분하게 쌓인 그의 경력으로 남겨진, 드물게 보는 취미활동의 작품이다. 1688년부터 그의 관념들은 르클레끄(Jean Le Clerc, 1657–1736)가 출판한 오성론/시론의 요약본 덕분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재판본(1694)은 몇 부분의 첨가(II, 27; II, 9, 8: II, 33; IV, 19)와 변경들(II, 21; II, 28)을 포함하고 있다. 꼬스뜨(Pierre Coste, 1668-1747)의 번역(1700)은, 로크에 의해 검토되었으며, 또한 여러 첨가들 또는 수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242) (57MKH)
2절 정치적 관념들 II. Les Idées politiques 242
따라서 오성론은 사색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로크가 정치적 관념들을 간단하게 분석한 것은 그가 이미 글로 썼던 조건들을 더 잘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242)
로크는 전 생애동안에 영국교회의 신정정치에 반대하여, 다시 말하면 연계되어있는 두 주제에 반대하여 투쟁했다. 왕권은 절대적 권력이며 신권의 권력이다. 왕권은 세속적 권력이상으로 정신적[종교적] 권력이다. 그리고 왕권은 국민에게 신앙과 숭배형식을 강요하는 권리이다. 이런 학설에서 왕정의 권리는 마치 분석에서 침투할 수 없는 자료처럼, 즉 불가사의처럼 나타난다. 이 불가사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로크는 오성의 연구에서 마치 미래에 그가 진행할 것처럼 순서를 밟아간다. 우리가 복잡한 관념들을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하는 오성론 속에서 그러한 것을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그는 왕정 권력이 무엇으로 조성[혼성]되어 있는지 분석함에 의해서, 단순한 요소들을 찾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생성에서 이 경우도 다른 경우도 문제가 아니다. (242)
이런 분석은 유리하며 또한 심지어는 그 당시에 잘 통용되는 생각을 통하여 가능하게 한다. 그 통용되는 생각이란, 사회 상태가 인류에게 자연적이 아니고 오히려 협약(un pacte)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추상에 의해서 자연 상태에서 협약에 앞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연구해야만 한다. 자연 상태는, 마치 홉스가 원했던 대로, 정의와 불의의 모든 관념을 관습에 관련시키는 모든 규칙의 부재인가? 또는 마치 스토아학자들 이후로 평민들의 권리의 학파가 그것을 주장하듯이,이법에 속하는 태생적 법(lex insita rationi)이, 즉 협약에 앞서서 부여된 자연적 도덕법이 있는가? 이 후자의 주제가 로크의 주제이며, 로크는 자연권이란 자격으로, 노동에 근거한 재산권, 따라서 인간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의 넓이에서 제한된 재산권을 인정한다. 그리고 부권을, 그리고 자연적이며 정치적이지 않은 제도로서 가족을 인정한다. 단지 로크에게 영감을 준 학파는, 그가 인정하지 않는 타고난 성품의 독단에 결부되어 있다. 그는 정의의 규칙들이 증명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증한다. 이런 증명은 신의 명령[명법]에 기초되어 있고, 신의 명령은 규칙들에 상벌들을 결합시키면서 규칙들을 확립한다. 따라서 증명은 종교적 관점과는 독립적이다. (243)
사회적 협약은 어떠한 새로운 권리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 협약은 개인들 사이의 합의이며, 개인들은 자연적 법칙들을 집행하는데, 자신들의 고유한 힘에 의해 자연적 법칙들을 행사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사용하기 위하여 서로 통합된다. 순수하게 유명론적이고 공리적인 이 개념작업은 권리의 침범사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단지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안정된 권력만을 사회 속에서 본다. 이런 목적은 정확한 방법으로 이 권력을 제한한다. 시민은, 그날그날의 임기응변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만일 영속적인 법률들에 따라 그가 행동하는 경우에만, 권력에 복종해야한다. 입법적 권력이 있다. 그러나 입법적 권력은 그 권력이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히 [시민의] 동의 없는 세법에 의해 주체[신하]들의 재산들에 임의적으로 부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하는 법의 위반 전체에 반대하여 스스로 봉기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한 것이 왕정 권력의 기원과 자연이다. 왕정권력은 법률로부터 태어나며, 법률에 대항하여 스스로 행사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정확하게 홉스(1588-1679) 이론의 반대이다. 로크는 영국에서 1688년 혁명에 우호적인 이론가들 중의 하나였다. (243)
이로부터 관용이 연역된다. 영국에서 마치 교황주의에서처럼, 시대적 권력과 구별하는 영적인 권력을 가로 막는 것도, 인간들의 영원한 구원의 이름으로 시대적 권력을 잠식하는 것도,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반대로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이래로 “주체[신하]의 종교가, 행정수반들이나 관료들이 다수의 세속인들로 혼성되어 있었던, 의회에서 규칙적으로 토론되는 법에 의하여 고착되었던” 나라에서, 문제는 협약에 의해 태어난 시민 권력이 영적 삶을 규제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다.이런 조건들에서 로크가 인정한 것은 절대적 관용이 아니었다. 주권[절대권]은 주권의 주체들의 믿음들에 무차별적이다. 이 믿음들이 정치적 사회의 목표에 반대하는 행동강령들(des actes)에서 표현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주권은 이국 정부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교황주의”를 금지할 것이다. 그리고 주권은 무신론을 억누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믿음은 자연적 법칙들의 확신성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244) (57MKI)
3절 오성론의 학설: 태생적 관념들에 대한 비판.
- III. La doctrine de l’Essai: critique des idees innees 244.
따라서 오성론은 인간 오성의 자연과 한계들을 제시하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용을 기초해야 한다는 학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학설을 제시하기에 앞서, 오성론은 그것의 의도들을 우리에게 더 잘 침투시키려고 하는 기회(une circonstance)이다. 1678년에 로크가 자기 작품을 깊이 사유하였을 때, 커드워드(Ralph Cudworth, 1617–1688)가 우주에 대한 진실한 지적 체계(The True Intellectual System of the Universe, 1678)를 출판했다. 이 저자는 이시기에 캠브리지 플라톤주의 학파의 주장자들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그 책에서 신의 현존은 타고난 관념들의 주제와 연대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경험론적 격언, “감관 속에서 먼저 있지 않다면 예지 속에 어떠한 것도 없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prius fuerit in sensu)”이 무신론으로 바로 이끈다는 것도 주장했다. 그가 말했는데, 왜냐하면 마치 법률편 10권에서 플라톤처럼 추리하면서, 만일 모든 과학 또는 인식이 우리 바깥에 위치한 사물들의 의해서 주어진 우리 영혼들의 정보일 뿐이라면, 세계는 그것의 용어와 인식이 현존하기에 앞서 현존한다고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식과 지성은 더 이상 세계를 마치 그것의 원인으로서 앞서 갈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덧붙이기를, 이런 주제는 만일 그 주제가 귀결이 있기를 원했다면, 주제는 이법과 지성뿐만이 아니라 느낀다는 능력 자체도 현존으로부터 배제되었을 정도로 너무나 거짓이라는 것이다. 만일 커드워드의 주제가 진실이라면, 그 주제는 로크의 체계 전체를 뒤엎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크가 오성의 현존과 오성의 자연을 제시하고자 원했던 것은 감각론의 가설에서였기 때문이다. 왜 경험론적 가설이 유일한 가능성인가? “사물들에 대해 정당한 관념들을 가지기 위하여, 정신을 그것들의 완고한 자연으로, 그리고 그것들의 변할 수 없는 관계들로 다가가야만 하고, 사물들을 우리의 편견들로 다가가지 않게 해야한다.”그런데 태생주의는 소위말하는 무매개적이고 내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개인적 편견들에 분명하게 여지를 남긴다. 이리하여 정신적 평화를 보증해야 하는 주요한 주제들, 즉 오성의 이론과 신의 현존은 우리의 편견들과 연대적이다. (245)
오성론의 내적 구조를 대부분 설명하는 것이, 비록 그가 자기의 반대자들을 지명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캠브리지 학파에게 대답할 고민이었다. 태생주의의 비판을 포함하는 책의 1권에서 신의 현존에 관한 긴 장(章)과 열정주의에 관한 장은 서로 상응하며, 서로 응답한다. (245)
제1권에서 그는 자기의 의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태생주의는 편견의 학설이라고 한다. 만일 그가 편견 없이 독자들을 상대했다면, 그는 태생주의를 그 자체로서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인간들이 모든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타고난 어떠한 인상의 도움 없이도, 자신들의 자연적 능력들의 단순한 용도에 의해 인식들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들은 타고난 용어들 또는 원리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서 여러 사물들의 완전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많이 위험한 학설들 중의 한 학설이며, 이런 점에서 이 학설이 오류불가능성을(I, 2, 20; I, 3, 24), 다시 말하면 개체의 긍정작업과는 다른 토대작업 없이 환원할 수 없는 확실성을, 선언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그는 태생주의에서 동기 없이 주장하는 개별적 영감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독단을 본다. 결과적으로 만일 사람들이 말하는 원리들이 진실로 태생적이라면, 원리들은 모든 인간들에게 현존해야 하며, 한결같으며 보편적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원리들을 즉 우선 사변적 원리들을(동일성의 원리와 모순의 원리) 그다음에 실천적 원리들을(마치 “사람들이 너에게 행하기를 너가 바라는 대로 타인에게 행하라” 같은) 하나하나 검토한다면, 우리는 매우 극소수의 인격들이, 심지어 교육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 원리들을 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원리들은 어떠한 사용법도 없다. 달다는 것이 쓰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는 단맛과 쓴맛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한 불균형을 즉시 안다. 하나의 사물이 그 자체와 다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원리에 전혀 도움을 청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245)
태생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에 대해 4권 10장에서 응답한다. 거기서 신의 현존은 타고난 관념들 없이 자연적 능력들의 단순한 사용에 의해서 증거된다. 존재론적 증거들과 달리, 신에 대해 미리 생각된 용어를 가정하지 않는 것은 세계의 우연에 의한(a contingentia mundi)증거의 다양성에 의해서이다. 이런 용어는 증거 그 자체와 함께 구축된다. 그런 이유로 로크에 따르면, 내가 있다는 우연적 존재의 현존은 영원하고 전능하고 또한 지성적인 존재를 가정한다. 왜냐하면 그가[영원한 존재가] 내 속에서 인식하는 능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의 창조자를 가정하는데,왜냐하면 그가 나의 정신을 창조했기 때문이고, 또한 물질을 창조하는 것이 그에게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다.이런 증거만이 신성(神性)의 정확하고 한결같은 용어로 우리를 이끈다. 반대로 사람들이 증거 없이 신성에 대해 갖는 용어는 혼란과 비정합으로 가득 차 있다. 신적인 관념으로부터 박탈되어 있는 야생적인 주민들도 그리고 세속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신의 관념은 인간형태주의에 물들어 있다. (246)
마지막으로 열정(l’enthousiasme, 신들림)의 장은 오성론의 제2판에서 도입되었는데, 신적인 영감들처럼 종교를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공상들(les fantaisie individuelle)에 대한 비판이다. 거기에 로크에게서 강한 상상작용들에 관한 말브랑쉬의 상대가 있고,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의 상대가 있다. 덧붙인다면, 앵글로 색스 나라에서 셀수없이 많은 종파들이 생겨나는 전염병같은 악(잘못)이 문제거리이다. 로크는 어느 누구보다더 잘 이 악에 대한 위험을 느꼈다. 그는 이런 상상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에 크리스트교의 추론적 특성을 대립시켰다. 그는 이런 크리스트교의 본질적인 독단[교리]를 이법(la raison)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종교에서 이런 신들림(l’enthousiasme, 열정)을 단죄하는 것이 철학적 태생주의의 단죄에 응답하는 것이 분명하다. (246) (57MKI)
4절 단순 관념들과 복합관념들 – Idees simples et idees complexes 246
그러면 어떻게 “정신을 사물들의 굽힐 수 없는 자연에게로 그리고 사물들 사이에 변질하지 않는 관계들에로 이끌 것인가?” 만일 사람들이 그가 데카르트주의 학설에 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크의 체계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그의 반대자들이 그에게 그러한 것을 비난했던 것처럼, 그의 체계는 “이신론(déisme)”이다. 관념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246)
인식 전체는 관념들 사이에서 적절(une convenance)한지 또는 부적절(un inconvenance)한지에 대한 지각작용 속에 있다. 마치 이와 같다: 즉, 노랑은 빨강이 아니며, 각각의 3변이 동일한 두 삼각형은 동일하다 등등. 이런 지각작용은 첫째 경우에서처럼 무매개적이든지, 둘째 경우에서처럼 증명에 의해 무매개적 지각작용에 환원할 수 있던지 이다. 따라서 관념은, 논리학에서 항이 명제에 속한다는 것과 거의 가까운 인식에 속한다. 관념들 그 자체는 [한편] 복합관념으로,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그 관념들을 분석할 수 있는 단순관념들로 형성된 복합관념으로 되어있거나, 또는 [다른 한편] 단순하고 환원할 수 없는 관념들로 되어 있다. 게다가 로크의 진술은 우리가 막 지적했던 질서와 반대이다. 그는 우선 단순한 관념이 무엇인지를, 그러고 어떻게 관념들이 복합관념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조합되는지를(2권), 마지막으로 어떻게 사람들이 관념들 사이에 적절과 부적절을 지각하는지를(4권) 찾는다. 우리가 지금 따라갈 것은 이런 진술의 순서이다. (247)
실재로 이런 종류의 심정적 원자론은 인식의 내용을 관념들로 해체하고 난 뒤, 사람들이 요소들(단순관념들)을 고려하는 것으로, 또는 사람들이 관념들의 조합하는 양식[양태]을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다. 우선 관념의 단순성(la simplicité)은 관념의 내부에 어떠한 특성과 관련하지 않는다. 우리와 소통될 수 없는 관념들은 단순하다. 만일 우리가, 마치 차거움과 쓴맛의 관념과 같은, 관념들을 경험으로 유지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단순 관념도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 불가능성은 우리 인식의 한계들을 표시한다. 우리의 단순한 관념들은 세가지 범주들을 서로 나누어가지고 있다. [한] 감각작용의 단순 관념들로서, 뜨거움, 굳음, 매끈함, 단단함, 씀[쓴맛], 너비[길이], 도형, 운동 등이다. [둘] 반성작용(reflexion)의 단순 관념들로서, 즉 우리가 우리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능력들의 단순관념들로서, 기억, 주의, 의지 등이다(반성작용이란 단어는 이런 능력의 내적 지각작용만을 지칭한다). [셋] 감각작용과 반성작용으로부터 동시에 이루어진 단순 관념들로서 현존, 지속, 수와 같은 관념들이다. (247)
이제 여기서 복잡한 것이 시작된다. 데카르트에게서 관념은 대리[표상]적이다. 관념은 사물의 이미지이다. 로크에서는 관념은 이미지로 남을까? 확실히 그렇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곧 보게 될 것인데, 그는 표상작용의 가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적어도 감각작용의 단순한 관념들의 주제에서 이 관념 중에 어떤 것[관념]이 외적 세계를 효과적으로 대리[표상]하는지를 자문한다.그러나 사정이 그렇다면, 그에게서 감각작용의 관념들은 두가 지 작중인물들로서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이것[관념]들은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 놓았던 지나간 요소들이며, 출발점들이다. 그리고 이런 자격으로 이것들은 모두 동등하다. [다른한편] 이것들은 물질적 사물들을 대리[표상]한다. 그리고 우리와 사물들 사이에 매개자들로서, 그것들은 매우 동등하지 못한 가치를 갖는다. 이런 이유로 로크는 물리학자인 한에서 보일(Boyle, 1627-1691)의 기계론의 결론들을 채택한다. 현존, 지속, 수 같은 관념들과 더불어 너비, 도형, 견고함, 운동 같은 관념들은 “제1성질들”이며, 이 제1성질들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표상된다. 색깔들, 소리들, 맛들에 관하여, 이것들은 “제2성질들”이며, 이 제2성질들은 우리 감관들 위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작은 물체들의 다양한 운동들을 만드는 인상에 의해서 우리 속에서 생산된다. 덧보태면, 심지어 제1성질들에 관해서도, 로크는 이것들의 가치에 관해서 데카르트의 보증보다 훨씬 멀리 간다. 이런 관념들은 물리학자가 외적 대상의 표상 속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관념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과 다른 것[관념]들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일 우리가 충력작용으로 운동의 원인을 만든다면, 단지 왜냐하면 “우리가 한 물체를 다른 물체에 작용하는 것을 생각하기에 불가능하기때문에, 그 물체가 접촉하지 않거나 이고, 또는 만일 접촉한다면 그것이 운동에 의해서와 달리 작용하는 것이다.”(제1판 II, 8, 11.) 이런 “생각 불가능성”은 중심 힘들의 물리학에 대해, 즉 인력을 운동의 원인으로서 인정하는 물리학에 대해 환원할 수 없는 반대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로크에게서 너비의 관념은 명석한 것과 거리가 멀다. 물체들의 응집은 그 관념에 의해서 설명할 수 없고, 무한 분할성은 모순이다. 그리고 그가 다음처럼 선언한 것은 거의 데카르트주의가 아니다(II, 23, 16). “너비, 도형, 색깔, 및 물체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인식이 환원된다고 하는 모든 다른 감각적 성질들과 같은 복합 관념에 의해서, 우리는 물체들의 실체 관념이라는 어떤 관념을 갖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그 관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만큼이나 멀어져 있다.” 따라서 단순 관념들은, 심지어 제1성질들의 관념들은 사물들의 실재적 요소들로서 파악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248)
감각작용이란 관념에 대한 이 이중적 측면은, 즉 인식의 지나간 요소와 실재적인 것의 대리[재현]는 로크가 추종하는 “이신론자들”에게서는 고수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버클리(Berkeley, 1685-1753)는 이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이다. 그리고 첫째 측면에서만 관념을 허용하면서 그는 대리로서 관념을 포기했다. (248)
감각작용의 단순한 관념들 이외에도 반성의 단순한 관념들을 인정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 영혼의 능력으로부터 갖는 인식이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갖는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허용하면서, 로크는 경험주의와 감작주의 사이의 전통적 연결을(예를 들어 홉스) 제거했다. 그에게서 외적 경험만큼 독창적인 내적 반성이 지시하는 이런 종류의 내적 경험에 의하여, 그는 경험주의자들의 무신론에 대항하여 캠브리지학자들의 매우 강한 반대들에 응답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가 태생주의와 독립적으로 신의 현존의 증명에서 이런 내적 경험을 사용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았다. (249)
복합관념들에 관한 로크의 사변(la spéculation, 鑑)의 귀결은, 철학적 토론들이 문제 삼은 관념들의 진실한 기원을 제시하면서, 헛된 철학적 토론들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단순관념들”이 전통적 철학이 인식의 대상들로 분배해 놓았던 범주들 속에 배열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단순관념들은 실체들도 아니고 실체들의 양태들도 아니다. 로크에게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혁신들 중의 하나는 확실하게 이런 범주들을 원초적 관념들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오히려 단순 관념들의 조합작업들로서 고려했다는 것이다. (249)
복합관념들은 두 묶음으로 분배되어 있다. 하나는 단순관념들이 유일한 사물의 관념으로(황금의 관념 또는 인간의 관념) 조합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조합된 관념들이 통합된 어떤 것과 구별된 사물들을 연속적으로 표상한다(아들과 아버지의 관념을 통합하는 부자관계의 관념, 그리고 일반적으로 관계의 모든 관념들). 첫째 묶음은 그 자체로 두 분류로 나누어진다. 양태의 관념이며, 삼각형이나 수처럼 그 자체로 존속할 수 없는 사물의 관념들이다. [둘째로] 실체들의 관념들인데, 인간처럼 그 자체로서 존속하는 사물들의 관념이다. 양태들 자체는 단순 양태들과 복합양태 즉 혼합양태들로 나누어진다. 단순양태들에서 동일한 단순관념은 그 자체로 조합된다(예를들어 수는 단위들의 조합이며, 공간 또는 지속은 등질적 부분들의 조함이다). 복합양태들에서는 이질적 단순 관념들로 조성되어 있으며, [예를 들어] 아름다움 또는 살해의 관념과 같은 것이다.
범주들의 이런 조성작업(연역이 아니다)은 많은 논쟁적인 문제들을, 특히 태생주의 이론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무한, 역능[잠재력], 실체와 같은 세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 준다.
로크는 무한을 마치 단순 양태처럼 고려했다. 왜냐하면 무한은 수, 지속, 공간과 같은 등질적 단위의 반복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한은 어떠한 한계도 이 반복에 할당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한으로부터 구별된다. 따라서 무한이 유한에 앞선다는 것, 유한은 무한의 제한작업이라는 것, 우리가 좀전에 묘사했던 양의 무한과 다른 완전한 무한을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특히 신의 무한성은 마치 수처럼, 또는 세계에 상대적인 신의 작동들로부터 마치 제한없는 너비처럼 단지 우리에 의해 생각된다. 실현된 현실적 무한은 끊임없이 진행하는 무한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전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원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끝없는 이런 지속이 아니다. “그러나 무한에 비추어서 우리의 긍정적 관념을 넘어서 있늠 모든 것은 어둠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신 속에서 부정적인 관념으로 규정되지 않은 혼동만을 자극한다. 부정적 관념에서 나는 다른 것[사물]을 볼 수 없는데, 만일 내가 거기서 생각하고자 원했을 모든 것을,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왜냐하면 나 자신의 능력처럼 연약하고 제한된 능력으로서는 너무나 넓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II, XVII) (250)
능력(pouvoir)관념의 분석과 능력에 의존하는 자유 관념의 분석은 로크의 사유에서 이런 문제에 관한 끝없는 논쟁들에 끝을 낸다. 능력 관념은 단순 양태이다. 이 단순 양태는 감각적 사물들과 우리 자신들 자체 속에서 확정된 몇 가지 변화들로부터 반복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우리 관념들이 감관들의 인상의 영향 하에서 또는 우리 의지의 선택의 영향 하에서 변한다는 것을 터득했을 때, 더군다나 우리가 미래에서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변화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능동적 역능의 관념을, 변화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역능의 관념을 얻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능동적 역능의 관념은 반성의 관념이며, 우리 의지가 물체들에서 생산하는 변화로부터 온다. 따라서 의지는 능동적 역능이다. 또한 자유는 능동적 역능이나, 그러나 다른 종류의 역능이다. 우리 의지가 선택했던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또는 행동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리하여 자기 다리들을 움직이기를 원하는 [신체] 마비자는 그것을 행할 자유가 없다.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운 지를 묻는 것은 부조리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 능력이 다른 능력으로부터 부여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어떤 의미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은 행위자에만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의지를, 즉 원인을 인식하면서 행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자가, 그리고 자유를, 즉 그가 그것을 원하거나 않거나에 따라서 행동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자가, 자기의 역능에 속하는 것을 원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거나 하는 자유를 가졌는지를 물을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동기들을 분석하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를 원하는 것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잘하다[선]로부터 모자람에 의해 생겨난 불안정 또는 불만족(dissatisfaction, uneasiness, 불편)이다.그러나 깊이 느껴진 불안은 선의 탁월성의 비례가 아니다.그런데 인간은 잘하는 것들 그것들 사이에 비교할 역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검토에 의해서, 불안을 생산할 지도 모를 행동을 중단할 역능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는 무차별의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에 의해, 그런데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를 규정하는데 있다(II, XXI). (251)
실체의 자연(la nature)에 대한 문제는(II, XXIII) 보다 논쟁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어째거나 실체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마치 원초적 실재성의 전형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떠한 철학자도, 자신이 모든 속설들의 기저(le substratum)에 의해 무엇을 이해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로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생각하면서, 실체란 거짓 단순 관념이라고, 즉 단순 관념으로 간주된 복합관념이라고 제시했다. 여기서 로크의 사유는 꿰뚫기가 쉽지 않았고, 그의 단순성은 겉보기였다. 경험이 우리에게 줄곧 묶음들로 제시한 단순 관념들 (예를 들어 노란, 가용성의, 전도성의, 강한 농도를 지닌 등등), 그리고 굳건한 묶음으로 주어진 단일한 명사, 그러한 것은 처음으로 금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건 실체는, 또한 단일한 이름으로 지명된 단순 관념의 한결같은 묶음으로 있는, 혼합된 양태와 구별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로크는 사물들의 실재적 요소들을 단순 관념들이라 간주하는 비난에 대항하여 항의했다. 이런 이유로, 단순 관념들이 그 속에 내속하는 실체 없이, 단순관념 그 자체들에 의해서 현존하는 단순 관념들을 상상하는 것은 정신에게는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묶음을 유일한 이름으로 지명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단순관념들이 단지 하나의 사물에 속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황금의 내밀한 구성방식이, 즉 그것의 성질들의 연결을 설명하게 이미 알려진 실재적 본질이 확실하게 있다. 이리하여 실체의 현존은 원기왕성하게 주장되었다. “사람들이 어떤 단순관념 또는 감각적 성질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오래 동안, 실체는 거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실체로부터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작지 않은 에너지로 주장되었다. 단순관념들의 연결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quiddité)이라 불렀던 것, 그러한 것은 우리들의 오성 그 위에 있다. 오성은 우리가 감각작용과 반성에 의해 발견하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관념들에게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다. 따라서 로크에게서 실체는 마치 현실적 무한과 같은 어떤 것이다. 실체는 현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서 유일하게 가능한 탐구는 공현존하는 성질들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이다. 그 탐구는 감각작용의 단순한 관념들 덩어리인 물체와 그리고 반성의 단수한 관념들의 덩어리인 정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충분하다. 그러나 탐구는, 물질이 사유할 수 있는지 또는 사유할 수 없는지를 아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우리에게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물질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우리는 사유의 능력이 그것의 자연[본성]과 양립할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사물들의 실체적 형상들과 더불어 스콜라학자들 만큼이나 사물들의 내밀한 기계주의의 인식을 인간에게 부여하면서, 신 또는 천사들에 속하는 인식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252)
로크에게서 모든 관념은 표상적이다. 그러한 것은 단순관념들 만큼이나 복합관념들에 대해 진실이다. 따라서 그 관념들의 실재성의 가치는 어떤 것인가? 항상 불완전한 관념들도 있다. 이것들도 실체들의 관념인데, 사람들은 이 관념들에 대해 어떤 알려지지 않는 능력이 우리에게 경험을 폭로하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 거꾸로 다른 관념들도 있다. 이 관념들은 항상 완전하다. 이것들은 혼합된 또는 복합적 관념들이며, 이런 저런 단순관념들을 임의적으로 재통합하면서 우리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관념들이다. 재인식, 정의, 모든 도덕적 관념들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런 개념작용에 의해서만 현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달리 고려해보면, 만일 우리가 관념들을 지칭하는 단어들, 그 단어들에게 만장 일치하는 합의가 부여한 기호작용[의미작용]을 가지고 다룬다면, 실체들의 관념들은 완전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우리가 사물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 모두를 생각할 때이며, 그리고 복합 양태들의 관념들이 불완전할 수 있는데, 그 경우에는 우리가 그것들에게 알맞은 어떤 요소들을 거기에서 빠뜨린 경우이다. 동일한 방식으로부터 사람들은 한 관념이 진리라고 말하고, 그때 한 관념은 실재성을 표상할 때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특성들의 합이라고 생각할 때인데, 그 특성들은 합의가 한 관념에게 부여하는 기호[의미]작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첫째의 의미에서, 복합양태의 관념은 항상 진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제조한 용어 이외 다른 실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체의 관념은 항상 거짓인데, 그 관념은 실재적인 본질들을 결코 표현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다. 그런데 복합양태의 관념은 가끔 진리이며, 그 때는 그 관념이, 경험으로 보여준 분리된 단순관념들을 재통합할 때, 또는 관념들을 재통합된 실재성으로 분리할 때이다. 둘째 의미에서 실체들의 관념들은 거의 항상 진리이며, 혼합 양태들의 관념들은 거짓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단어들에게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때이다. (253)
결국 관념들에 대한 분석은, 그 유명한 보편자들의 문제에 결정적인 해결책을 준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은, 이것이 납(鈉)이다 또는 이것이 말[馬]이다라는 것을 합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보편적 항이 실재적 본질을 지칭한다면, 응답은 단순하다. 결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재적 본질들이 문제거리가 된다면, “한 사물이 일종의 말 또는 일종의 납이기를 정확하게 끝낸다면, 사람들은 결코 인식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반대로 그 보편적 항이, 한 단어[명사]에 결부되어 있는 단순관념들의 집합으로 형성된 유명론적 본질을 지칭한다면, 사람들은 이런 류의 명제가 합법적일 때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협약이 보다 잘 고착되는 만큼이나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253)
그러나 이런 유명론적 본질은 자기 차례가 되어, 정신에 의하여 임의적으로 구성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로크에게서 일반 관념은 다른 모든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표상적이다. 그리고 상상작용에 관한 말브랑쉬의 책에 대한 응답으로 「관념들의 연합」에 관한 장에서(II, XXXIII), 로크는 자신의 관점에서서, 개별적 환상의 결과로 나온 일반관념들과 진실한 가치를 지니는 관념들을 구별할 줄 안다. 여기서 경험과 관례가 우리의 스승들이다. 만일 우리의 도덕적이고 법률적인 관념들과 같은, 예를 들어 살해의 관념과 같은, 혼합된 양태가 문제거리라면, 이 관념들은 보다 더 큰 자유와 더불어 형성된 것이지, 우연으로(au hasard) 형성된 것은 아니다. 주어진 사회적 조건들, 즉 몇몇 법칙들의 또는 몇몇 풍습들의 현존이 있으며, 이 조건들은 우리에게 이런 저런 조합들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실체들의 일반관념들의 형성작용에서, 사람들은 동등하게 관례에 순응한다. 그러나 이보다 자연을 따라야 하고, 경험에서 확고하게 연결된 단순 관념들을 함께 연결해야 한다. 이 마지막 조건은 가능하지 않고, 우리의 일반 관념은, 만일 자연 속에서 어떤 영속성을 갖는 다면, 단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따라서 실체의 일반관념은 “인간의 작품이며, 그러나 사물들의 자연에 근거하여 형성된 작품이다” 사람들은 버클리와 흄에게서, 우리의 관념들과 자연의 상응이 일으킬 모든 문제들을 보게될 것이다. (253) (57MLB)
5절 인식 – La connaissance 254
인식은 판단에 의해 표현된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 적합(une convenance)와 부적합의 지각작용이다. 우리 관념들 사이의 연관들은 세 가지 종류로 있을 수 있다. 동일성(l’identité)또는 다면성(la diversité), 관계(la relation)(아버지와 아들, 보다 크다와 보다 작다, 동등과 비동등, 비슷함과 비슷하지 않음 등등, 무한한 관계들이 있다), 공현존(la coexistence). 그러나 동일성과 공현존는 관계의 특이한 경우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식은 관계의 지각작용이다. 이런 인식은 정의 상으로 확실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앙, 믿음, 개연성이라 부르는 것은 인식의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러나 인식은 무매개적일 수 있는데, 그때는 우리가 예를 들어 동등성 또는 매개라는 직관적 지각작용을 가질 때이며, 또한 우리가 직관적 지각작용에서 좀 더 가까이 끌어온 증명에 의해서만 이런 관계를 파악할 때이다. (254)
그러나 인식은 로크에게서는 여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적합의 넷째종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정신 속에 관념으로 갖는 어떤 것에 알 맞는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현존의 인식이다.” 현존의 지각작용이 두 관념들 사이의 관계의 지각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존은, 마치 단맛 또는 쓴맛의 관념처럼, 하나의 관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크는 우리가 사물들의 현존으로부터 갖는 확실성 속에서 종류들을 (판단들 속에 관계를 이루지 않는 것) 구별한다(IV, chap. 9, 10, 11). 우리 자체의 현존으로부터, 우리는 반성에 의해서 직관적 확신을 갖는다. 신의 현존으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았듯이, 우리 자신의 확신에게도 되돌려지는 증명적인 확신을 갖는다. 그러나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우리는 “감각작용에 의한 확신”만을 갖는다. 확실히 우리들 속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생산할 수 있는 대상들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의 인상에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의 관념들을 빚지고 있어서, 미리 가로 막을 수 없을 인상들을 의심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리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확인되는 감관들의 증거에 대해 의심하는 것도 부조리하다. 그러나 로크는 이런 확실성이, 보다 더 큰 확실성의 정도를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삶의 일상사들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254) 관계와 현존이라는 두 판단들의 이원성은 진리의 문제의 입장에서 깔끔하게 변역된다. 거짓 판단의 두 범주들이 있다. 한 범주에서, 명제 속에서 입말에 의해 표현된 관계는 관념들 사이에서 직관적으로 지각된 관계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관으로 되돌아가면 되기에 그것을 고치는 것은 쉽다. 다른 범주에서, 오류는 관계를 잘못 지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떠한 실재성에도 응답하지 않는 관념들 사이에서 지각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실한 관념들 사이만큼이나 분명하게 공상적 관념들(예를 들어 히포그라프는 켄타우로스가 아니다)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의 경우에서만이 실재적 인식은 갖는다. 따라서 실재적 인식은 우리가 구별했던 두 요소들을 재통합한 것으로 가정한다. 즉 관념들 사이에서 관계의 현존에 대한 지각작용이 있고, 관념이 원형(un archétype)의 표상이 된 그 원형의 실재적 현존이 있다. (255)
이런 귀결로서 인식의 실재성에 대한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사람들이 혼합된 양태들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것들의 관념들은 사람들이 아는 조건들 속에서 정신에 주조된[벼려진]어 있어서, 그 자체 이외 다른 원형을 갖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이 실체들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실체들의 원형은 우리 밖에 있는데 말이다. 첫째의 경우에 우리는 완전히 분명한 과학[지식]들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정신에 의해 제기된 용어들 사이의 관계들에서 과학[지식]들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즉 수학적 과학들과 수학만큼이나 동일 확실성을 갖는 도덕적(특히 법학적) 과학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또한 한결같이 보증된 용어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용어들에서 출발하여, 예를 들어 수학적 공리를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굳건하게, 살해는 벌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둘째 경우에서 우리의 판단들 속에 관념들이 공현존은 실재성에 해당하는지를 [아제에] 결정할 것은 경험 뿐이다. (255)
이렇게 인식의 요소로서 관념과 실재성의 표상으로서 관념 사이에 우리가 로크에게서 영속적으로 맞주쳤던 이원론은 결국에는 이상적 과학들과 경험적 과학들 사이의 근본적 구별에 의해 번역된다. (255)
“현자 로크”는 철학을, 즉 정의된 단순 요소들과 함께 모든 가능한 인식들을 조성[혼성]할 조합하는 기술(un art combinatoire)과 경험과 관례에 따라서 요소들 중의 요소들과 가치를 지니는 조합들 중의 조합들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경험주의(un empirisme) 사이에서 일종의 타협안으로서 철학을,오랫동안 지배할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첫째 저자이다. 이런 분석은 두 가지 국면에서 오성의 한계들 보게 해준다. 우선, 현 조합에 의해 얻어질 것을 허용하지 않는 모든 인식들을, 즉 실적 무한, 실체, 실재적 본질, 임의 자유 같은 인식들 전체를,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지우면서, 그러고 나서, 경험에 의해 정당화될 수 모든 인식들을 지운다. 이러한 한계들 속에 인식을 포함하는 것, 그것은 관용과 사회적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다. (256) (57MLC)
6절 17세기 말 영국 철학– La philosophie a la fin du XVIIe siècle
17세기에서 18세기로 전환점에서 영국에서는 종교철학의 새로움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 로크는 첫째 증인이다. 거기서 그 전환점에서 18세기에 전개될 사상의 발효작업이 생산되었다. 여러 사조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1)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 2)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의 방식에 따른 자연 종교, 3) 톨랜드(John Toland, 1670–1722)와 콜린스(Anthony Collins, 1676–1729)에서처럼 실증종교의 비판이 있다.
캠브리지 대학의 플라톤주의는 이런 사상적 조류들 중에 가장 오래된 철학 사조이다. 플라톤주의는 17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르네상스의 전문적인 플라톤주의의 유산이다. 캠브리지의 목사들은 세기 동안 내내 그리스 문화의 전통을 간직하고 스콜라철학을 경멸했다. 이들의 작품은 [오라트와르] 신부 토마쌩(Thomassin, 1619-1695)처럼 프랑스 오라트와르 학자들이 추구했던 작품과 평행을 이룬다. 오라트와르 학자처럼 그들은 플라톤주의에서 신비주의가 아니라 합리주의를 본다.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어(Henry More, 1614-1687)는, 당시 뵈메의 사상이 영국에 도입되었는데, 1670년에 그 뵈메에 대한 반박 글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토마쌩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이법(la raison)을 자연적 빛으로 생각했다. 그 빛은 낙하에 의해서도 모호해지지[어두워지지] 않고, 종교의 필수적인 토대이다. 종교의 본질적인 교리[독단]들은, 그들에 따르면, 만인에게 거의 숫적으로 적으며,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합리주의는 신비적이 아니기에, 로크 같은 이의 합리주의에 비해 건조하지 않았다. 플로티노스(205-270)를 따랐던 존 스미스(John Smith, 1616-1652)는 공통 용어들을 가지고 추론하는 자 그 위에, 열정주의자(enthousiaste)를, 한 번 더 그 위에 관조하는 자(le contemplatif)와 직관하는 자(l’intuitif)를,즉 논리적으로 자기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할 수 없지만 불멸성을 상위 빛에서 본다는 ㅇ인간을 둔다. 로크는 캠브리지 학파의 자유정신에 스며들어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그 자유 정신이 신적 계시를 가지고 판관으로서 이법[이성]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다시피, 그는 자신이 커드워드(Cudworth, 1617–1688)에게서 이것들을 발견했던 대로, 태생주의와 열정주의를 단죄하였다. 커드워드와 헨리 모어는, 여전히 플로티노스를 따르면서, 기계주의에 대한 이들의 비판에서, 모든 물체들을 마치 다양한 정도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라이프니츠 또한 모든 사물들을 생기했게 하면서(animer), 커드워드의 “가소성적인 자연들(natures plastiques)”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끌려갔다. 커드위드는 자연들 속에서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진실한 힘들을, 그리고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과는 아주 다른 유기체를 구축하는 진실한 힘들을 보았다. (257)
둘째 사조는 자연종교에 관한 사조로서, 바로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에 의해 대표된다. 그는 런던에서 목사였으며, 열렬한 뉴턴 지지자이다. 그는 물리학자 보일(1627-1691)의 유언에 의해 교육받았던 무신론에 반대하여 강연들을 행했다. 이로부터 신의 현존과 속성들의 증명(A Demonstration of the Being and Attributes of God, 1705)이 나오는데, 그 책의 부제는 “홉스, 스피노자와 이들의 분파들에게 응답에 사용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자유의 용어가 확립되고, 그것의 가능성과 확실성이 필연성과 운명에 대립되어 증거되어 있다(1705)”고 한다. 그에게서 이법에 의한 불신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문제거리였다. 그는 계시를 젖혀두고 심지어는 신의 현존의 다양한 증거들 조차 젖혀두고서, “밀접하게 연결된 명제들을 이어가는 연쇄고리”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런 연쇄로부터 신의 현존과 속성들이 연속적으로 연역된다. 로크처럼 클라크는 “어떤 것이 영원성 전체로부터 현존했다”는 이 원리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이어서 신의 모든 속성들을 연역한 것은 이런 영원성으로부터 이다. 클라크는 뉴턴 주의 였으며, 그리고 클라크는 항상 발견했다. 뉴턴(1642–1726)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에서 유물론에 응답들 중에 최상을 발견한다. 그가 1715년에 긴 서신교환에서 라이프니츠에게 편지 쓰기를, “유물론자들은 가정하기를, 사물들의 구조는 모든 것이 물질과 운동의, 그리고 필연과 운명의 기계적 원리들로부터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반대로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은 사물들의 상태가(태양과 행성들의 구성이)가 자유롭고 지성적인 원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뉴턴과 자연 종교의 이런 연대성과 기계주의의 이런 대립은 중요성이 없지 않은 날자를 표시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기계주의가 자기에게 신학론과 자유를 인정한다고 헛되이 증명하고자 애쓴다. (258)
셋째는 자유 사유의 사조이다. 이 사조는 우선 그 세기의 초에 유물론자들과 사망론자둘의 종파들에서 다소 감추어져 있었으며, 1688년 명예혁명 후에 강력하게 발전되었다. 사람들은 톨랜드(1670-1722)에게서 18세기의 반크리스트교 논쟁을 생생하게 할 모든 주제들을 발견한다. 주제들 중에, 인민 대중을 오류 속에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시민 법조계와 동맹을 맺은, 그리고 자기들의 권력을 보증하기 위하여 영혼의 불멸성의 독단들과 같은 독단들을 발명하는, 교직자들에 반대하는 혹평(la diatribe)이 있다. 그는 그 교직자들의 종교를 초기 크리스트교와, 즉 나자렛파들과 에비오니트파들의 종교와 대립시켰는데, 초기 크리스트교는 전통도 교직자도 없이 오직 이법을 토대로 삼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범신론(pantheisticon, 1720)에서 순수 기계론의 찬성자이며, 우연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지 않는 자발적 운동을 소유하는 영원한 세계와 사유를 두뇌의 운동을 여기는 유물론의 찬성자이다. 콜린스(1676–1729)는 “자유로운 사상가들이라 불리는 종파의 탄생과 발전이 일어난 기회에 대해 쓴”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에 관한 담론(A Discourse of Freethinking, 1713)에서, 특히 유대경전의 기상천외한 생각들(les extravagances)과 이에 보태어 속임수들일뿐인 경전의 기적들에 반대하여 항의했다. 그리고 위험한 견해들을 멀리한다는 구실로 인간이 속직 않기 위해 스스로 자기 판단을 하는 것을 막는 유대 경전의 공식적 해석가들의 부조리와 불일치에 반대하여 항의했다. 그의 인간 영혼의 자연과 운명방향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nature et la destination de l'âme humaine)은 신학자인 돋웰(Henry Dodwell 1641–1711)에 반대하여 클라크가 썼던 편지에 대한 응답이다. 돋웰은 1706년에 “영혼은 자연적으로 사망하는 원리이며, 영혼은 신의 의지에 의해 불멸이 되고, [그러한 것은] 영혼에게 벌주거나 상을 주기 위해서이다.”그 편지 속에서 콜린스은 유물론을 인식의 감각론적 학설에 통합을 제시하였다: “사유는 우리의 감관들 위의 물질에 대한 일련의 작용이므로, 우리는 완전히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즉 그것은 물질의 작용에 의해 기회가 주어진 물질에 대한 성질과 감화작용이라는 것이다.” (258)
이러한 것이 합리주의의 세 가지 형식들이다. 이 형식들은 18세기 초에 서로 대치된다. 캠브리지학자들의 영감을 받은 합리주의, 즉 클라크의 합리주의는 비판적 합리주의이다. 샤프츠버리 3세(1671-1713), 즉 로크의 후원자(1세)의 손자는 독립적인 길을 찾는다. 그는 캠부리파의 교육에 영감을 받았을지라도, 플라톤주의 속에서 특히 자신의 감화적 측면, 즉 감정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을 보았다. 그는 로크와는 반대로 인간 안에는 질서와 미를 사랑하는 태생적인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질서는 우주 속에 그리고 사회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신 속에서 그것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보편적 선에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자연적 감화작용들은 이기적 감화작용들과 동반되기도 하고, 또는 자연의 전개에서 인간들의 모든 불행들을 만드는 그런 자연에 반대하는 감화작용들과 동반되기도 한다. 겉보기의 무질서들이 사라지는 이런 보편적 질서는 악[잘못]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원리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낙천주의와 유사성을 주목했다. 다른 한편 샤프츠버리 3세는 자신의 열정에 관한 편지에서 환상의 거짓 열정과 진실한 열정 사이의 차이를 표시하려 정성을 들였다. 전자의 환상에서 그의 시대의 영국 종파들을 속에서 작업중인 것을 보았으며, 후자의 환상에서는 예술가와 종교인에서 신적인 현전의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 편지에서 종교보다 도덕이 탁월함을 주장했다. 그가 독백(1710)속에서 쓰기를 “이 과학이 종교 그 자체를 판단하고, 영감을 시험하며, 예언들을 확인하며, 기적들을 분간한다. 유일한 규칙이 도덕적 올바름으로부터 나온다.”샤프츠버리의 사유는 총체적으로 플라톤의 심포지움에서 디오티메의 담론에 대한 일종의 주석인 셈이며, 그리고 그의 사유에는 그 만큼이나 매우 건조한 변증법적인 것 이후에 특이한 신선함이 있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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