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잘 알지만 삼위일체 이론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 만큼 삼위일체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는 증거인거 같습니다.
아타나시오는 정통교회가 삼위일체이론을 수용하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아타나시오는 기원 290년대에 고대 이집트의 중심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활동하던 교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수도자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킨 사람으로 성격이 무척 불같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데르의 심복이 되어 사목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기원 319년경에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아리우스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알렉산데르의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이 논쟁이란,
아리우스는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 으뜸 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하고, 반면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는 "성자는 신적인 것이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한 논쟁입니다.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며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비난합니다.
결국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 파문 통보를 받게 됩니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 대주교 에우세비우스를 찾아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고,에우세비우스가 지지 의사를 밝히자, 그는 알렉산데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만 알렉산드레아가 단호히 거부하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폭동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레반트 전역에서 거세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때 324년 로마 제국을 통합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알렉산데르파와 아리우스파에게 서한을 보내 니케아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하자고 권고했고, 두 세력 모두 받아들여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게됩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서방교회 인사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 때에서야 처음 접했는데,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말에 격분하여 연설 중이던 에우세비우스를 강제로 끌어냅니다. 그리하여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일당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체임을 규정하는 니케아 신경을 공표하게 됩니다.
그후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가 사망한 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새 대주교로 선출됩니다.
그는 대주교에 선임된 직후 이집트와 리비아 각지를 전전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이 기간 동안 콥트 수도자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성 파코미우스와 중요한 관계를 맺습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1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동의했지만, 주변의 친아리우스 성향의 측근들의 설득을 받아 점차 아리우스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칩니다.
특히, 334년 카이사레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난 아타나시오가 참석을 거부하는 바람에 취소되자, 황제는 에우세비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게 됩니다.
335년, 황제는 즉위 30주년 기념행사로 예루살렘에서 성묘 성당을 재건하여 봉헌하기로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대규모 주교회의를 개최하려 합니다. 그러나 먼저 교리를 통합시켜 분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오는 주교들에게 그 길목에 있는 티루스에서 먼저 종교회의를 열어 "불령스런 요소를 교회에서 제거하고 짐의 근심을 덜어달라"라고 명령합니다.
이번에는 아타나시오도 참석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이 대부분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온갖 모독을 당합니다. 급기야 6명의 주교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가 사람을 이집트로 보내 아타나시우스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려 하자, 아타나시오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콘스탄티노플리스로 달아납니다.
그는 궐석 상태에서 해임됩니다.
아타나시오는 황제를 접견하려 하지만 황제가 거부하자, 그는 황제가 말을 타고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그의 말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게 됩니다. 그러자 6명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와서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노동자들을 부추겨 파업을 획책하려 한다고 고발하자 황제는 분노하게 됩니다. 아타나시오는 부인했지만, 결국 아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유배됩니다.
그후에도 유배 생활을 하던 아타나시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직후인 337년 11월이 되어서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338년 아리우스파 신도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를 다시 추방합니다. 아타나시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에게 호소를 하게되고 교황은 몇 달간의 조사를 거친 후 아타나시오가 결백하는 결론을 내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추방령을 취소해 달라고 호소하지만 받아 들여지지않습니다.
345년 6월 그레고리오 대주교가 피살되자, 세르디카 공의회에 참석했던 주교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아타나시오를 복귀시켜 달라고 청원합니다. 게다가 동생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아타나시오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사산왕조가 갈수록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동생과 싸울 수 없어서 아타나시오를 불러 대화를 나눈 후 추방령을 철회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351년 9월 28일 무르사 전투에서 승리로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타나시오를 이단으로 판정하고 교황 리베리오에게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리베리오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유배당하게 되고 결국에는 일시적으로 아타나시오를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하게됩니다. 아타나시오는 미사 도중 자신을 잡으려는 병사들을 피해 이집트로 달아납니다.
361년 11월 4일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하고, 율리아누스가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합니다.
당시 아리우스파 성향의 대주교 게오르기오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인사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하자 폭동을 일으키고 게오르기오스를 살해합니다.
율리아누스는 추방된 주교들이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고, 아타나시오는 362년 2월 22일 알렉산드리아 주교청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는 복귀 하자마자 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를 한 마음으로 통합되어 교리의 일치를 봐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결국, 이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아타나시오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이집트 총독 엑디시우스에게 아타나시오를 다시 추방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추방 되었다가 363년 6월 26일 율리아누스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로 비밀리에 돌아옵니다.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는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임명하는 것을 동의합니다.
364년 2월 요비아누스가 돌연사하고 366년, 친아리우스 성향의 동방 황제 발렌시는 아타나시오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림리게 되고 그는 다시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머물며 조용히 지내다가 황제가 몇달만에 명령을 철회하면서 주교청으로 다시 돌아 오게 됩니다.
이처럼 아타나시오는 총 5차례에 걸쳐 추방과 복귀를 반복 할 만큼 삼위일체이론은 그 당시에도 논란이 많은 이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국 이 삼위일체 이론은 이제 기독교와 카톨릭에서는 논란이 없이 다 받아 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뱀 뒤의 은밀한 존재가 오늘 날도 종교라는 배후에 숨어서 거짓말로 사람들을 은밀하게 속이는 일에 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거짓말은 이제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는 이론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대단합니다. 거짓이 이렇게 성공을 거두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한지, "셋인데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 말을 이해 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성서 전체를 보면, 그리고 성서 구절에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수 없이 알려줘도 하나님은 셋인데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장난 같은 말을 대부분이 믿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