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시대 때 가난한 안씨부부에게 풍수승이 하회 땅에는 풍수명당 2개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하나는 당대에 천석지기가 되는 명당, 또 하나는 후손을 삼정승 배출시키는
명당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회마을 입향사 2대 명당전설은 오늘날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믿지는 말자.
그런데 짜고 치는 고스톱일지는 몰라도 하회마을 사람들은 이를 믿고 있다.
하회마을에는 천석지기 안씨 무덤인 피천석묘가 버젓이 있고, 이곳 버들 류씨 집안에서는
삼정승이 배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2대명당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피천석묘는 야사에 해당되기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삼정승 배출은 역사에서 보았기에
이것만은 우리도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삼정승 배출과 하회풍수 명당설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회마을을 들어서려할 때 병산서원으로 빠지는 갈림길 하가가 있다.
그 지점에서 적당한 각도를 잡고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쳐다보면 사친처럼 예사롭지 않은
봉우리 2개가 눈에 들어온다. 옥녀봉형상으로 보이는 봉우리들, 인물을 배출한다는 풍수설이 옥녀에는 있다.
더 접근하여 이리저리 살펴보면 2개의 옥녀봉이 아닌 3개임은 곧 알게 된다.
이제부터는 옥녀봉이 아닌 삼태봉(三台峯)으로 분류된다.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삼정승이라 하듯
풍수 삼태봉은 이러한 삼정승 배출을 기약한다. 이것만은 풍수로 보았으니 믿을 수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에 이르다. 하회마을 입향사를 들춰보면 가장 먼저 김해 허씨가 그 뒤 광주 안씨,
그 다음에 풍산 류씨들이 입향 하였다고 나와있다.
하회마을이 삼태봉 정기를 받는다면 같은 삼태봉아래에 살았던 허씨, 안씨도 정승 배출이
있었어야 하는데 유독 류씨들에게만 해당 되었던가. 그래서 삼태봉 풍수 배출설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래, 이정도만 생각하고서 하회마을로 들어가 보자.
3. 하회마을에 들어서서
(1)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
양진당에 가면 신발벗고 공손하게 양진당 툇마루에 올라 양진당 대문 지붕위를 바라 볼 것.
사진처럼 봉긋한 봉우리가 얼굴을 살짝 내민다. 우연일까. 아님 필연일까.
풍수명당으로 알려진 나주향교도, 지네혈의 명당인 김동수집 고가도, 관가정도 경주 최부자집도 하나 같이
지붕위로 산봉우리가 두둥실 떠오른다.
필연이다! 양진당도 어김없이 마늘봉(사진의 봉우리)에 맞추어 좌향을 잡았던 것이다. 먼저 마늘봉에 걸린
풍수의미를 살펴보자. 등고선 지도에서 살펴보아도 앞에 펼쳐진 산줄기 광경을 보아도, 마늘봉은 동쪽편에 있는
산줄기를 타고서 뻗어왔는데 그곳에는 하회마을 들머리에서 보았던 삼태봉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삼태봉과 마늘봉은 다음과 같은 풍수형국을 성립시키고 있다.
삼태봉은 삼정승이며, 마늘봉은 삼정승들이 어전에서 들고 서 있은 홀(笏)에 해당된다.
홀은 일품에서 사품까지만 상아로 만들었고 그 이하는 나무로 만들었던 엄격한 제도에서 볼 때
일종의 신분증 역할도 하였다.
삼태봉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3개의 산봉우리지만, 삼정승 신분증은 오직하나 마늘봉 뿐이다.
그렇다면 홀 하나를 집안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집은 삼정승 신분을 모두 끌고 오는 것이나 같다.
그래서 양진당은 마늘봉을 향해서 좌향을 잡았고 이때 대문은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처럼
삼정승 발복래 풍수문 역할을 하게 된다.
도대체 양진당이 무엇이길래 풍산류씨들은 이곳에다 삼태봉 풍수를 걸어 두었던 것일까.
풍산 유씨들은 원래 풍산(하회에서 이십 리쯤 되는 풍산읍)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하회로 이주할 때
첫 입향조인 전서공이 처음 자리 잡은 집이 양진당이다.
그렇다면 하회마을 삼정승 풍수설은 전설 따라 삼천리식의 아니면 말고 풍수만은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해 장영훈님은 다음과 같은 하회풍수시각을 갖고 있다고 김교수가 전한다.
...풍산류씨들이 원래 살았던 풍산에서 유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곳은 풍산들이지요,
풍산들녘에서 보면 화산 너머로 삼태봉이 선명히 보여요. 그러니 풍산에 살았던 류씨들도 매일 보았을 거예요.
그런 광경을 보고서 노승의 삼정승 발복 전설은 단지 ‘카더라 풍수’ 일 뿐이라는
하회마을 재조명 시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보이는 것만으로 추론하자는 하회마을 풍수설은 이랬다. 풍산에 살았던 류씨들은 기름진 풍산들 덕택에
먹고사는 데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벼슬은 미관말직이나 다름없었다.
신분사회에서의 벼슬은 가문 전체 신분에 영향을 준다. 배부르면 출세하고 싶다는 인지상정에서
화산 너머로 보이는 삼태봉은 가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풍수광경과 풍산류씨 가문의 정서가 동하자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 하회마을 양진당 택지였다.
장영훈님의 풍수해석에는 2개의 이유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 양진당(14C 택지 창건) → 충효당 (16C 중엽택지) → 병산서원(16C말 창건)으로 이어지는
하회마을 역사를 땅 읽기로 살펴보면 모두 일관되게 닮은꼴 풍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류씨 가문이 풍수에 밝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학을 강론하는 양반체면상 어느 천하디 천한 무덤풍수 같은 것을 내색할 수 있었겠는가는
주유야풍에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주유야풍 체면은 두 번째 입증 이유도 된다.
둘째. 어느 노승이 일러 주었다는 삼태봉설은 조선시대 정서에서는 뻥을 친 뻥 수일 확률이 높다.
서울풍수 책에서도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듯 정도전과 대립한 인왕산 동향설, 태조의 망우리 유래설,
동구릉 신후지지 택지설은 한결같이 뻥수 일 뿐이며, 이러한 3대 뻥수에는 하나같이 무학이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
승려를 풍수탄핵한 잘못이 후일 들통 나더라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빠져나가는 면책특권 때문이였다.
승려의 후손은 끊어졌기에 윗대에 있었던 가문의 치욕을 갚으려는 이해관계인의 고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피삼천석, 삼정승발복설에 노승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 장영훈님의 두 번째 이유다.
양진당은 풍수에 밝은 풍산류씨들이 직접 택지했고 좌향까지 매김시켜 놓았다.
그렇다면 양진당처럼 앞쪽 향(向)만 잘 맞추어 놓으면 그대로 명당집이 되는가?
이는 반풍수가 남의 집 망치는 질문과도 같다.
이기의 대가라고 설치는 역풍수들이 자주 빠지는 병통과도 같다.
역풍수들의 주요무기인 패철은 향(向)만 논할 수 있지 가장 중요한 좌(坐)에는 멍텅구리이기 때문이다.
패철로는 혈자리를 식별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명당혈이 아닌 흉당혈에서 패철로 향을 잡았을 적 어찌 되겠는가.
그야말로 흉당발복으로 멀쩡한 삼정승 목까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진당 역시 가장 먼저 혈을 잡고 그곳을 좌(坐)로 삼아 마늘봉을 향(向)으로 삼았던 진행과정이 있었다.
양진당이 혈자리 라는 것은 뒷녘에 있는 삼신당 나무가 증혈(證穴)한다.
삼신당은 풍수 잉(孕)이다. 그것도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잉이기에 여러 곳에서 공동우물처럼
풍수기운을 배급받아 고택들이 좌혈(坐穴)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양진당. 원지정사. 북촌댁에서 살필 수 있는 풍수현상들이다.
(2) 충효당 풍수
충효당의 일반적 내력은 생략한다. (이런 것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도 상세히 나오는 내용이기에
테마풍수 경우에는 사족이다.)
충효당에도 잉이 있다. 충효당 안채 뒤뜰에 도뚜락하게 올라온 부분이 잉이다.
현재는 꽃밭 망가진다고 출입을 금지 시키고 있어 접근하기 곤란하나 학문욕에 분발심이 돈독하신
선비라면 통사정을 하건 아님 슬쩍 보시건 그건 자유다.
(하회마을에서는 기왕 문화 지식인들을 위해 화단일정부분에 개방통로를 내어 주시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닐까.
그래도 보겠다는 사람은 본다. 그래서 화단은 더 망가진다.)
충효당의 잉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저걸 잉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들어온 잉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지맥선(地脈線)을 찾는 다음 단계 풍수공부로 연결된다.
안채 뒷마당 뒷담을 살펴볼 것. 같은 담이라도 그 중에서 높은 곳이 있고, 바로 그 아래 지표면도 살짝 올라와 있다.
그 지점에서 흘러들어 온 것이다.
뒷담지맥은 화산(花山)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대나무 숲이 있으며, 하회마을의 길들이 걸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회마을에서 품게 되는 하나의 의문을 풀게 된다.
국보급들에 해당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하회마을 인데 정작 뒷길들은 고작
산동네 골목길을 연상케한다.
이는 지맥선 보호를 위해 통행량을 최소화하려는 풍수목적에서 그랬다.
화산(花山)은 하회마을의 풍수진산(鎭山)이다.
이제부터는 화산에 눈길을 주고서 하회마을의 풍수를 살펴보아야 한다.
4. 하회마을의 풍수론
(1) 형세론
이는 하회마을의 풍수족보를 살피는 것과 같다. 화산은 학가산과 연결되어 있다. 학가산은 세산(勢山)에 속하며, 화산은 형산(形山)이다. 혈(穴)은 하회마을에 있는데 정확한 지점은 삼신당이 된다. 하회의 풍수족보는 낙동정맥이 아닌 백두대간에서 직접 뻗어온 것이다.
이는 대동여지지도를 한번만 보아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중에 나도는 풍수책 중에는 엉뚱하게 영양군 일월산에다 하회마을 족보를 붙여놓고 있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식민지리 산맥도만 알고 있었기에 이를 국정교과서에 집어넣은 친일학자들의 잘못이다.
식민지리의 폐해는 아직까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친일파 정치 집단의 횡포와도 같은 것이다.
장영훈님은 이를 서울풍수에 이렇게 써 놓았다.
「…치산치수, 음양조화, 산수회포와 산자분수령을 한목에 담고 있는 산경표의 산수지리는 우리민족의 인문지리 족보항렬인 동시에 이땅의 문화재 지도였다. 오늘날 우리 땅에 존재하고 있는 문화와 문화재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 것은 태백산맥, 소백산맥, 광주산맥이라는 식민지리들 때문이다. 현장답사 발목마저 잡고 있는 식민지리를 두고 욕설처럼 튀어나온 것이 ‘그놈의 돌판지리 때문에…’였다.........」
- 서울풍수 260쪽 ~ 261쪽 中에서 -
근래에 『태백산맥』이라는 베스트셀러 책이 있었다. 주무대는 보성벌교 지방이 되는데, 그곳과 책 내용마저 태백산맥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친일식민지리일 뿐이다. 차라리 『백두대간』이라 했으면 정답이 된다. 백두대간에서 빠져나온 호남정맥은 보성 벌교에 지맥을 넣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의 산줄기 족보도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정확한 지점은 태백산과 소백산 중간녘인 경복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있든 옥돌봉(1242m)에서 뻗어 내린다.
(2) 형국론
대명당에 가까울수록 형국 명칭들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조선왕릉 중 최대 명당왕릉은 세종대왕릉이다. 그래서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양봉상락형(兩鳳相樂形), 군신조회격(君臣朝會格), 기치창검형(旗幟槍劍形)등등의 형국들이 세종대왕릉에는 난무하고 있다. 장영훈님은 그 중에서도 왕릉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임을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저서에다 사진과 함께 밝히고 있다.
하회마을 형국 또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다리미형, 행주형(行舟形),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등등이 있다. 어떤 것이 하회마을의 진짜 형국일까.
하회마을 풍수 강의를 정말 감명 깊게 들었다는 김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하회마을을 놓고 관산점 여기저기서 마치 풍수 엑스레이 사진 찍듯 보여주었던 장교수님 강의는 하회형국을 확실히 잡아버렸어요, 풍수는 책과 말로서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그날 강의 중 다리미형국은 전통풍수형국 목록에도 없는 것이기에 당연히 제외 되었고, 산태극수태극은 역풍수 음양 관념론에 연류 되어 토종풍수에도 없으므로 탈락. 그럴싸한 것인 행주형이나 이를 하나씩 체크해나가니까 결국에는 반풍수 안목에 불과 했어요, 그런데 연화부수형은 버들류씨들이 성씨와 양진당, 북촌댁, 원지정사, 충효당 입지에서부터 게다가 화산에 하회지명까지 신기하게 맞아 떨어지닌 형국론 이거 잘만 잡으면 과학이고 학문이겠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제공받은 자료만 보더라도 ‘형국 하나로도 박사논문은 충분히 쓸 수 있겠구나’라는 분량이었으나 ... 단지 아주 간략하게 맛배기만 보인다면 이런 것이다.
하회(河回)마을의 풍수진산은 화산(花山)이며, 이곳의 땅기운은 버들 류(柳)들에게만 삼정승을 배출시켰다. 여기에 연화부수(蓮花浮水)를 대입하면 연화(蓮花)는 화산(花山)에 부수(浮水)는 하회(河回)와 통한다. 하회를 감싸고도는 낙동강을 이곳 사람들은 화천(花川)이라 부른다. 연화(花)부수(川)에 한 발짝 더 접근한 지명이다. 게다가 물과 인연 있는 식물들은 연꽃과 버드나무인데 이는 이곳 전설로도 엿볼 수 있다.
원래 하회에는 허씨와 안씨들이 먼저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 도인이 있어 운명하기 직전 ‘하회 땅에는 절대 버드나무가 발붙여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 온다. 유언에 따라 허씨 안씨들은 절대 버드나무만은 심지 않았단다. 땅기운 빼앗길까봐 말이다.
이후 풍산유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을 때도 서로 버드나무만은 심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버들 류씨인데도 말이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을 두고 이런 말이 생겨났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杯盤)”이 그것으로 허씨 안씨가 살던 땅에서 류씨들이 잔치판을 벌렸다는 것은 날아온 돌이 박힌돌을 빼 버렸다는 풍자와도 통한다.
이를 풍수로서 조명하면 또 이렇다.
허씨들은 안방을 차지했고(화산발치에 배산임수 택지), 안씨들은 사랑채를 차지했는데(들머리 피천석 택지) 류씨들은 들어갈 방이 없어 마당에 살았으나 마당이 잔치판을 벌린 풍수명당이었다는 것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발복 특징은 수면 선상에서 터진다는 법칙에서 볼 때. 이는 댓돌 윗녘에 있는 안방, 사랑방보다 댓돌아래 인 마당입지와 위치가 화천이 휘돌아 감는 하회마을에서는 수면선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회마을 풍수형국은 연화부수형이며, 그것은 하회마을과 우리 전통문화를 푸는 풍수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