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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격려-이케다 SGI회장과 서원(誓願)의 동지<5>
그대에게 인생의 금메달을!
끝까지 살아라! 법화경보다 뛰어난 병법은 없다
<효고>
탁! 탁!
체육관에 탁구공을 받아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켜보는 관중들은 득점을 할 때마다 “와” 하고 환호했다. 그러나 이케다 SGI 회장과 탁구대 앞에 선 가미카와 도시코(본성 니시구치, 아마가사키왕자현 지부부부인부장)는 관중의 환호 소리와 존재 마저 잊었다.
1973년 4월 13일, 이곳은 고베시립중앙체육관이었다.
11일과 12일, 이케다 SGI 회장은 소카(創價)여자학원(현 간사이소카학원)에서 열린 첫 입학식에 참석했고, 이 13일에는 효고의 대표 6000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짧은 여가에 짬을 내 탁구대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미카와는 탁구대 옆에서 이케다 SGI 회장과 선발된 학생들의 시합을 바라보았다. 당시 단기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학회활동을 시작한 시기였다.
“주위 사람들이 ‘이케다 선생님, 이케다 선생님’ 하는데 나도 그것을 느끼고 싶다.”
오로지 이 마음으로 거듭 창제하며 소설 ‘인간혁명’을 숙독했다.
시합 중인 것도 잊은 채 소리쳤다.
“선생님! 저와도 탁구를 해 주세요!”
가미카와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돌한 행동이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예상대로 이케다 SGI 회장이 왼손으로 가미카와의 목소리를 제지했다.
그러나 예정된 시합을 모두 마친 후였다.
이케다 SGI 회장이 “다음 사람!” 하고 말했다. 이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계신다.
‘내 차례다!’
가미카와는 서둘러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진지하게 받아쳤다. 시합을 하는 내내 “정말 잘 한다”며 가미카와를 계속 칭찬했다.
시합은 11대5로 이케다 SGI 회장이 이겼다. 다가가 악수를 나눴을 때의 따스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어서 표창식을 가졌다. 불쑥 끼어든 가미카와는 상을 받지 못했다. 이케다 SGI 회장은 가미카와를 발견하고 “당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나요? 이것을 줄게요.” 하며 소카여자학원의 개교를 기념하는 금메달을 건넸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케다 SGI 회장은 가미카와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쓴 글을 읽고 이런 전언을 보냈다.
“언젠가 또 시합합시다.”
그 후로 39년이 흘렀다.
가미카와는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었다. 가족의 병고를 모두 극복했고, 현재 특별지원학교에서 근무하는 남편 요조(부지부장)는 교육본부의 고베교육상담실 부실장이다. 큰딸 다에코(화양리더)는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며 소카대학교 통신교육부를 졸업했다. 아들 다다아키(뉴리더)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광포를 위한 일가화락의 인생을 걸었다.
가미카와는 이렇게 말한다.
“해가 갈수록 ‘언젠가 또’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다시 올 만큼 행복해지세요’라는 의미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려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뵌 한 사람으로서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하야시 기쿠에(본성 나카야, 고시엔대승현, 현부부인부장)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7년 3월 29일 봄, 이케다 SGI 회장과 잊을 수 없는 만남을 새겼다.
이케다 SGI 회장이 자동차로 롯코 아리마를 방문했다. 이 날은 ‘고베북총구 원점의 날’이 되었다.
같은 날, 고베시 스마구에서 열린 고등부원회에 참석한 하야시 는 우연히 ‘선생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북구(당시 효고구) 아리마구치에 자택이 있던 하야시는 고등부 친구 세명과 함께 “틀림없이 이곳을 지나실 거야” 하고 교복차림으로 아시야에서 아리마로 이어지는 ‘로유드라이브웨이’ 출구로 향했다.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자동차 한대가 속도를 늦추며 고등부원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창문이 열리자 차 안에는 이케다 SGI 회장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등부원들은 감격스럽고 흥분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케다 SGI 회장은 온화하게 각자의 근황을 물었다.
“지난해 1월 3일, 전국고등부원회에 참석했습니다. 가족들 모두 열심히 신심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야시가 정신없이 보고했다.
1959년, 부모님과 함께 입회했다. 1월 3일에 열린 부원회는 이케다 SGI 회장이 참석해 인재그룹 ‘오년회(五年會)’를 처음 결성한 모임이다.
“기쁘군요. 기뻐요.”
이케다 SGI 회장은 그렇게 몇 번이고 다기진 구도심을 칭찬하며 하야시에게 악수를 청했다.
“인생은 깁니다. 여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 신심을 했다고 해서 바로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행복해지는 신심이니 열심히 노력하세요. 나를 따라오세요.”
하야시는 1966년 9월,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비의 간사이문화제’를 비롯해 몇번이나 이케다 SGI 회장과 추억을 새겼다.
1980년, 결혼을 계기로 니시노미야시에 왔다.
남편 도요시게는 지부장이다.(부본부장 겸임)
간호사인 큰딸 기요코(여자부부장)는 간사이소카초등학교부터 소카여자단기대학교까지 일관 교육을 받았고, 둘째 딸 에이미(여자지구리더)는 소카대학교를 졸업한 후 청년해외협력대의 일원으로 필리핀 루손 섬에 가 있다. 10월에 귀국할 예정이다.
기요코는 단대 입학식에서 선서하고 창립자 이케다 SGI 회장과 악수했다. 에이미도 재학 중, 중앙도서관을 방문한 창립자와 만남을 새겼다.
“힘들 때나 도망치고 싶을 때, 늘 그날 따스했던 선생님의 손이 떠오릅니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만남을 새긴 일이 가장 기쁩니다.
지역에 행복의 스크럼을 넓혀 선생님께 ‘승리’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하야시는 이렇게 말한다.
모자가 함께 배운 여름
‘통신교육부 모집 중’
1976년 3월, 가토 세쓰코(고베중앙총구, 부인부부본부장)는 세이쿄신문에 실린 소카대학교 광고를 보았다.
“이것 보세요! 나도 입학하고 싶어요!” 남편 겐지(부본부장)에게 말하자 “굉장한데. 내가 응원할 테니 다녀와요.”
스물셋에 결혼해 스물넷에 큰아들을 출산하고, 나날이 육아와 생활에 쫓겼다. 그래도 고등부 시절 몇 번이나 읽은 이케다 SGI 회장의 지도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0대, 20대에 얼마나 노력하고 정진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된다.”
법학부에 입학한 가토는 그 해 8월, 도쿄 캠퍼스에서 열린 제1회 하계대학강좌에 참석했다. 남편 겐지가 휴가를 얻어 한 살 반인 큰아들 이치로(다르미총구 男지구리더)를 돌봤다. 뱃속에는 둘째 아들 히로아키(시마네이케다현, 男지구리더)가 있었다.
첫 수업을 시작한 8월 18일, 갑자기 교실문이 조용히 열렸다.
“수업 중에 실례합니다.”
창립자 이케다 SGI 회장이었다.
수업을 중단시킨 점을 사과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 또한 전쟁과 폐병으로 배우고 싶어도 마음껏 배울 수 없는 청춘 시절을 보냈다. 스승인 도다(戶田) 제2대 회장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야학도 단념해야 했다.
가토는 어려운 환경에서 배우려는 사람을 격려하겠다는 창립자의 마음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내년, 내후년에도 오세요. 해마다 오세요.”
‘내년은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가토는 그 한마디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해 8월 14일부터 열린 제2회 하계대학강좌에는 생후 5개월인 히로아키를 등에 업고 참석했다. “현재 소카대학교에서 어린이를 동반한 참석자는 자숙을 부탁드립니다.”
젖먹이를 데리고 분발하며 수강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었다.
14일, 히로아키를 등에 업고 교과서를 넣은 가방과 기저귀 등 갈아입힐 옷을 넣은 가방 두개를 짊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옆을 지나치던 자동차 한대가 갑자기 멈춰섰다. 문이 열리자 한 남성이 가토 쪽으로 달려왔다.
“선생님께서 ‘고생이 많습니다’라는 전언을 주셨습니다. 불단에 공양한 과자를 주셨습니다.”
가토는 이케다 SGI 회장과 만남에서 새긴 감동을 가슴에 품고 하계대학강좌를 열심히 수강했다.
그후 셋째 도모아키(히로시마이케다총현, 남자부)가 태어나 아들 셋을 기르며 4년만에 졸업했다. 삼형제는 현재 사회인으로 성장했고, 그날 등에 업었던 히로아키는 국립대학교 의학부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다.
가토는 또다시 소카대학교 통신교육에 도전해 2005년 수료했다.
가토는 “이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10대, 20대를 열심히 살아 인생을 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 응원해 준 남편에게도 감사합니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
“‘임종이 지금’이라는 마음으로 투쟁하도록.” 이케다 SGI 회장은 1978년 11월, 간사이를 방문한 만감이 서린 마음을 나중에 이렇게 썼다.
간사이를 방문한 258회 중 ‘3대회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최전선의 동지와 만났다. 사임하기 5개월 전이었다.
오사카 센슈에 있는 센슈문화회관을 21년만에 찾았고 잇달아 미나미오사카(14년만, 미나미오사카문화회관), 효고 하리마(첫 방문, 가코문화회관) 그리고 히메지(11년만, 히메지문화회관)를 방문했다.
사제를 갈라놓으려는 악승과 반역자가 점점 강하게 움직이는 속에 격려의 손길은 오사카의 사카이 이후, 오랜만에 방문하거나 처음 방문하는 지역으로 넓혀졌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동지와 만나기 위해.
“일은 다른 사람의 세 배” 입니다
“가코카와, 가코가와 하는 소리가 내 생명에까지 들려서 왔어요.” 이케다 SGI 회장은 유머를 섞어 방문한 이유를 말했다.
“오늘은 모두 함께 메밀국수라도 먹는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합시다!”
1978년 11월 13일 저녁, 가코가와문화회관을 가득 메운 하리마 동지의 기쁨이 폭발했다.
당시 효고 하리마 방면은 간사이 중에서도 반역한 무리가 유난히 격렬하게 움직였다. 동지는 분한 눈물을 흘리며 이케다 SGI 회장의 첫 방문을 기원하고 기다렸다.
“제가 왔으니 안심하세요.”
“어서에 ‘어떠한 병법보다 법화경의 병법’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아무리 삼장사마와 삼류강적이 다투어 일어나도 ‘법화경보다 뛰어난 병법은 없다’는 신심이 있으면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혼신을 다한 격려는 회장 사임으로 이어지는 폭풍우 속에 동지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오후 4시쯤 도착한 이케다 SGI 회장은 가네코 부인과 함께 회관 안팎을 한차례 돌았다.
청년부 진행 요원에게 “잘 부탁합니다. 학회를 지켜주세요.” 관리자에게 “감사합니다.” 일찍 도착한 동지에게 “건강하신가요?” “몸을 소중히 하세요” 하고 잇달아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가네코 부인은 2층에서 연습하고 있던 부인부 합창단의 발랄한 모습에 “마치 여자부 같네요” 하고 말했다.
회합이 끝난 뒤에도 출발하는 순간까지 계속 격려했다.
그 속에는 당시 스물다섯살의 마츠모토 요시히로가 창가반대학교생으로서 진행 요원을 하고 있었다.
2년 동안 강하게 거부하다 3년 전에 입회했다. 이왕에 할 거라면 열심히 하자고 힘차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도 몹시 바빴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수력발전시설을 보수하고 점검하는 전문기술자다. 몇개월 동안 출장을 간적도 있었다. 일과 활동을 병행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
회관을 나오기 바로 전, 이케다 SGI 회장이 회관 밖에 있는 창가반 진행 요원을 불렀다.
한사람 한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마츠모토도 이케다 SGI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모두를 감싸안는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엄연히 말했다. “일은 다른 사람의 3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완수하고 학회활동은 다른 사람의 2배를 해야 합니다. 약속할 수 있나요?”
“네!” 청년들이 굳게 다짐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마츠모토는 자신에게 말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좋아, 일도 활동도 끝까지 해내겠다! 나는 평생 선생님을 따라가겠다.”
이렇게 결의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원점을 새긴 날에서 정확히 30년이 흐른 뒤에 일이다.
2008년 11월 13일, 마츠모토는 일에서 실적을 인정받아 효고현 지사에게 ‘기능현공상(技能顯功賞)’을 받았다.
학회에서 하리마창가현의 현장을 맡은지 만 5년이 되었다.
“청년을 육성하고 미래부를 육성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은사를 향한 보은이라 마음먹고 하리마 천지를 달렸다.
◇
다음날 14일, 이케다 SGI 회장은 아시야시의 옛 간사이도다기념관 근처에 사는 동지를 격려한 뒤 히메지문화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분도 저 히메지성처럼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닌 불법자가 되기 바랍니다.”
회관에서 바라본 히메지성은 저녁놀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15일, ‘회장으로서 마지막 격려’가 된 날에는 도다기념관에서 고베 니시노미야 지부장과 지부부인부장과 하는 간담회에 참석했다.
“남편이 허약하신 분!”
“이 중에 자녀가 다섯명 이상인 분!”
손을 들 때마다 격려했다.
어느 부인부원이 지나칠 정도로 격려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 너무 배려하지 말아 주세요.”
이케다 SGI 회장은 “그렇지요” 하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지도자는 배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회관 마모루회 책임자였던 모리모토 고키치(고인)도 마침 그곳에 있었다.
자수성가한 목수로 1960년에 입회했다. 1978년 당시, 악승은 니시노미야에서도 격렬히 꿈틀거렸고 본부장 등을 맡고 있던 모리모토도 동지를 지키기 위해 분주했다.
1975년 10월, 이케다 SGI 회장이 기념관을 처음 방문했다.
모리모토 씨는 ‘사제의 생명이 새겨진 기념관이니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키겠다’며 예순아홉살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위원장을 맡았고, 관리자 그리고 많은 동지와 함께 기념관을 소중히 했다.
아내 와미가 회상한다.
“늘 마음 한가운데 선생님이 있었어요. 눈을 감기 직전에 ‘금세는 만족이다!’라고 웃으며 말했지요.”
기념관은 동지가 자부하는 지역 공헌의 성(城)이 되었고, 이케다 SGI 회장은 기념관을 격려의 무대로 삼으며, 인도 카란 싱 박사와 ‘법화경’을 영어로 직접 번역한 콜롬비아대학교 왓슨 교수를 비롯해 세계 지성인과 대화했다.
1995년에 한신아와지대지진으로 건물이 파손되어 폐관했다. 2004년에는 인접한 곳에 전통을 계승하는 ‘효고도다평화회관’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소중히
“상승의 하늘이다. 간사이 하늘이다. 영원히 계승할 5월 3일이로구나.”
이케다 SGI 회장은 간사이문화회관(오사카)에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1980년 5월, 동지는 완성한지 얼마 안 된 간사이 본진에서 이케다 SGI 회장을 맞이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기뻐했다.
“선생님 곁으로!”
간사이문화회관에 파도처럼 밀려든 동지를 전 혼을 다해 계속 격려했고, 5월 2일부터 8일까지 7일간 머무르며 5만명이 넘는 벗과 만났다.
그 속에 만남을 새긴 여자부원이 있다.
백련그룹이었던 오쿠무라 마유미(고베 북상승구 부부인부장)는 주차장과 이어지는 경사진 곳에서 혼자 임무를 수행했다. 오쿠무라는 5월 3일 오후였다고 기억한다.
임무를 서는데 갑자기 이케다 SGI 회장 부부가 계단으로 내려왔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계속 격려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쿠무라는 가슴에서 심장이 튀어 나올듯했지만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이쪽으로 오세요” 하며 이케다 SGI 회장이 온화한 얼굴로 손짓하며 불렀다.
오쿠무라는 초등학교 시절, 오사카에서 어머니인 고이즈미 유키코(히가시요도가와총구 지구부부인부장) 그리고 오빠 겐이치(부본부장)와 함께 신심을 시작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급식비가 부족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녀를 열심히 길렀다.
스무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진 것을 계기로 ‘어머니 몫까지’ 하고 발심해 활동을 시작했다. 여자부장과 백련그룹 부원으로 홍교에 도전하는 속에서 이케다 SGI 회장과 만났다.
이케다 SGI 회장은 오쿠무라 의 보고에 “그렇군요” 하며 곰곰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소중히 하세요.”
그림이 담긴 기념 엽서를 전하고 악수를 나눈 손은 감싸안는듯이 부드러웠다.
오쿠무라는 1982년 제1회 간사이청년평화문화제와 1984년 제4회 세계평화문화제에서도 여자부 진행요원으로서 스승과 원점을 새겼다.
결혼하고 고베시 북구로 이사한 지 20년이 흘렀다. 지난해 1월, 가족이 함께 남편 히데요의 신장암 수술을 대성공으로 극복했다.
여든 여섯인 어머니 유키코는 오빠 겐이치 가족과 히가시요도가와에서 정정하게 광포를 달린다.
‘한 사람’과 만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인생의 이정표를 남겨주신 인생의 스승. 2013년에 ‘어떻게든 보은하고 싶다’는 마음이 모자에게 점점 더해진다.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을 위해.
이것이 간사이 동지가 품은 깊고 깊은 결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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