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19구간(비조령-문장대)
1. 산이름 : 속리산(1,058m)
2.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화남면,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3. 산행 코스 : 비조령(비재) → 3.8km → 갈령삼거리(02:00)→ 0.65km→ 형제봉(02:20)→ 1.44km→ 피앗재
(03:00)→ 5.23km → 천왕봉(05:30)→ 2.4km→ 신선대휴게소(06:30)→ 1.32km → 문장대
(07:20)→ 3.59km → 화북탐방지원센터(08:20)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20km, 8시간 20분
5. 산행 인증 : 갈령삼거리 표지목(700m) 인증형제봉 정상석(832m), 피앗재 표지목(639m),
속리산 천왕봉 정상석(1058m), 신선대 휴게소(1026m), 문장대 정상석(1054m)
6.산행 안내 : 화령 문화식당 숙박-산행-문장대-법주사-동서울 도착
비조령-문장대 구간
화령 문화식당에서 택시를 타고 비조령에 도착하여 비재(330m)는 날아가는 새의 형국과 같다 하여 비조령이라 불렸다는 고개다. 비재에서 데크를 따라 한참 올라와 세상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퍼질러 앉아 만만한 물을 화풀이 하듯 들이킨다. 바야흐로 속리산에 진입을 했지만 데크를 따라 올라야 할 무명봉의 된비알이 나를 두렵게 한다.
비재에 닿기 위해 그동안 고도를 낮춘 만큼 고도를 다시 올려야 한다.
그 오름이 된비알이라 나의 기를 한순간에 팍 꺾는다. 속리산 권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순하디 순했던 중화지구의 편안했던 산행이 끝나고,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길은 처음부터 매운 맛을 보여준다.
가야할 길은 멀고, 바람 한 점 없어 어렵게 첫 번째 봉우리를 오르니 앞에 봉우리 한 개가 또다시 나타난다. 다시 힘내어 오르니 어설프게 석축을 쌓은 묘가 나타나고, 곧이어 510m봉이다. 안부로 내려와 작은 봉우리를 만나고 큰 봉우리 오르기 직전에 어마 무시한 전망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로프를 잡고 우측으로 돌아 오르니 조망바위에서의 일망무제를 자랑하는 전망을 보여준다. 봉황산은 물론 비재를 출발하자마자 괴롭혔던 510m봉이 발아래 보이고, 구병산 줄기를 비롯해서 충북 알프스라 부르는 봉우리들이 대간 방향에서 분리되어 장대하게 뻗어 있다. 조망바위를 벗어나 뒤쪽 봉우리에 오르며 바위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바위산 암릉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속리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듯하다. 능선 너머 갈령 고갯길과 억시기마을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이루지 못했던 전설이 깃든 대궐터산이 빤히 바라보인다.
울창한 송림을 지나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암릉미를 과시하며 길을 막고 우회를 시키다.
속리산 구간이 힘든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수한 무명봉들의 오르내림과 암릉으로 인해 우회를 시키는 등 힘들게 한다. 힘이 들지 않는다면 수석 같은 멋진 바위들이 자태를 감상하는 맛도 있으련만 오늘은 힘들어 그렇지가 않다.
내가 산행하고 있는 위치를 어디인지 궁금할 즈음에 묘 1기가 있는 곳에 모처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 삼거리를 만난다. 갈령 삼거리까지 1.7km가 남았단다. 계속되는 오름이 힘이 들었는데, 퍼질러 앉는다.
1시간 10여 분 동안 빠르지는 않지만 크게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었다. 계속되는 오르막 앞에 높은 봉은 다행스럽게 우회를 한다. 우회 끝 지점에 '충북 알프스' 팻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충북 알프스 능선으로 뻗어가는 봉우리다. 능선 바로 아래에는 비가 오면 물이 빠져나갈 수 없는 움푹 파인 분지인 해발 655m의 못제다.
대간 마루금에 유일한 못이라는 못제는 약 오륙백 평 정도 넓고,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에얽힌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대궐터산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과 함께 못제는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못다 이룬 꿈들이 녹아있음을 보여준다.
역사는 흘러가고, 영웅호걸들은 사라졌건만 그들이 꿈을 키웠던 산정에 있는 소형 못의 존재만이라도 자연의 조화 속에 신기하기까지 하다. 비록 가뭄으로 물이 말라 볼품은 없지만 비가 오고 못제에 물이 차면 견훤의 호령이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못제를 지나 봉우리에 오르자 넓은 헬기장으로 갈령삼거리 건너 형제봉이 가깝게 보인다. 헬기장에서 갈령삼거리까지짧은 구간은 암릉으로 그야말로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몇 개의 봉우리와 씨름해야 한다.
높지 않지만 높게만 느껴지고 힘이 더 드는 것 같다. 한 개를 넘으면 또 한 개의 봉우리가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바위가 막고 있는 '급경사 위험'지역에서는 로프 잡고 아래까지 내려갔다
능선으로 다시 올라오는 등 현기증이 날 만큼 어렵게 산행을 이어간 끝에 드디어 대간과 갈령으로 분리되는 분기점이자 작약지맥(芍藥枝脈)의 분기봉인 해발 721m의 갈령삼거리에 내려선다. 봉황산의 정상처럼 둥그런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중앙에 '천왕봉 6.6km, 비재 3.6km, 갈령재 1.3km, 형제봉 0.7km'의 이정표가 있다.
속리산(俗離山)은 766년 김제 금산사에 머물던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옛 이름)에 미륵불을 건립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구봉산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낫으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을 떠나'(俗離)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俗) 떠나(離) 이곳(山)으로 들어오니 그 후로 사람들이 이 산을 속리산(俗離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지금부터는 속국립공원인 속리산으로 들어간다. 갈령 삼거리에서 형제봉과 피앗재를 거쳐 천왕봉으로 들어가 문장대에서부터 비법정탐방로인 밤티재를 지나 늘재까지 가야한다.
이 땅을 있게 한 백두대간 우리 땅을 걸으면서 남의 눈을 피해 산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방향을 잃어 반대 방향으로 산행을 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국공에 단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갈령에서의 적막감을 뒤로 하고 산행을 시작하면서 여린 매미울음이 들린다.
기온이 부쩍 떨어져 그도 이제 힘이 떨어졌는지 그 울음이 슬퍼보였다. '알-애벌레-성충'의 단계로 3~7년을 보낸 뒤에 여름이 되면 비로소 땅위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우화) 성충이 되었지만 2주간의 바깥 생활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들의 일생이 우리들의 일생과 많이 닮아 보였다.
제멋에 살면서 거들먹거리지만 종국에는 슬픔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던가? 힘들었던 구간, 갈령삼거리로 힘겹게 오를 때 시끄러운 매미들의 울음에 신경질 낸 내 자신이 미안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 몸짓이었는데....... 갈령에서 10여 분 오르며 세찬 바람소리에 묻혀 매미들은 이후 산행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청명한 하늘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컨디션 역시나 좋아 땀이 나지만 산행 속도는 매우 빠르다. 고도를 조금 높이니 바람소리가 온 산을 울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 흘린 땀을 모두 가져간다.고도를 잠시 높이며 경북도계갈림길에 도착했다. 숨 가쁘게 이어갔던 경북도계는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로 빠지고 대간은 형제봉을 지나 문장대로 향한다. 문장대까지는 경북도계와 대간이 같이 간다.
형제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주능선의 멋에 정신을 잃고 만다.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 솟아난 봉우리와 이어진 능선들은 어느 한 봉우리에 속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하나의 봉우리, 하나의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사람들이 속리산을 구봉산(九峰山)이라고 즐겨 부른 이유는그것은 단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늘어서 있는 정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어선 아홉 개의 봉우리가 절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산이 되었다는 감탄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속리산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각각의 봉우리와 능선은 굽이치고 불러 세워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피앗재를 지나 천왕봉에 닿고, 그 천왕봉은 또 비로봉과 신선봉을 잉태하여 문장대로 간다. 그리고 난 문장대에서 가슴 졸이며 비탐 구역인 밤티재를 지나 늘재로 간다.
우리 산하의 등줄기를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이 현실 .......갑자기 홍길동의 생각이 머리를 흔든다. 아버님을 아버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 호형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막힌 산줄기는 분명 우리 것인데 가지 말란다. 방향을 돌리면 화북의 조용한 아침이 정적 속에 묻혀있고, 견훤의 못다 이룬 꿈이 현실이 되어버린 작약지맥의 대권터산이 신선한 바람을 타고 흐른다. 속리산에 대한 내 기억의 편린들이 점차 쌓여 감을 느끼며 천왕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형제봉에서 편안하게 내려서서 피앗재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대체로 고도를 높여야하기 때문에 힘든 여정이나 산행하기에는 기온이 적당하고, 때마다 바람이 계속 불고 있어 산행을 그지없이 즐겁게 한다.
667봉에서 본 형제봉이나 전망 좋은 곳에서 본 속리산의 마루금은 나의 감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멀리한다’(山不離俗 俗離山)는 최치원의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게 속리산은 이미 오래 전에 세속의 복판으로 끌려 나왔음을 진즉에 알았건만, 유독 비탐구역만은 성지처럼 세상을 등지고 묻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을 어이한다.
천왕봉 3km전 지점에서 조릿대와 낙엽송들의 군락지를 지나 대목리갈림길에서 600m의 된비알을 새롭게 경험하며 오르고 또 오르니 비로소 속리산 천왕봉이 외롭게 바람을 가르며 지키고 있다.
삼파수(三派水)의 산으로 알려진 곳인 속리산 천왕봉에 망무제의 조망을 자랑하는 정상에 섰다. 왔던 길과 갔었던 덕유산 그리고 대둔산, 구병산 방향으로 산그리메를 그리며 지금까지 힘들게 오른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비록 천왕봉 정상은 속리의 다른 봉우리에 비해 조금 옹색할 지라도 속리산의 힘찬 주능선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멀리 문장대로 달려가고 있는 풍광은 봉우리의 이름에 걸맞게 천군만마를 거느린 천왕의 기개를 느끼게 해 주는 곳으로 부족함이 없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문장대로 급히 간다. 법주사를 지을 때에 천왕봉에서 벤 소나무들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상고(上庫)]로 들어가는 돌문[석문(石門)]이라는 상고석문(上庫石門)을 지나고, 도룡용바위나 등산화를 올려놓은 것 같은 두꺼비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두껍등이라는 기묘한 바위를 지나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하는 말인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에서 유래된 비로봉(毘盧峰, 1032m)을 지난다.
어미고릴라와 앞에 작은 고릴라바위로 구성된 고릴라바위(상고외석문) 앞에는 공사를 한다고 자재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산객들을 편안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함은 좋은데 지금 보는 모습은 흉물스럽다.
데크를 편안하게 내려서다 보면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 한 후 신통력을 시험해 보고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웠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입석대(立石臺, 1033m)가 나무에 가려 왼쪽에 우람하게 서있다.
몇 번을 왔던 속리산이건만 절경은 볼수록 더욱 보고파진다. 오죽하면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어서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하는 신선대가 생겼을까?
신선대휴게소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 시원한 막걸리를 생각하며 왔건만 썰렁하였다. 50대 중반의 부부가 주는 간식을 같이 먹고 쉬다가 문장대로 곧장 간다. 신선대에서 바라 본 청법대와 칠형제봉 그리고 문수봉의 뒤태를 넘어 저 멀리 문장대가 손안에 잡힌다.
천왕봉과 입석대와 상고석문은 모두 8봉(峰), 8대(臺), 8석문(石門) 중 하나들이다. 속리산의 절경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된다. 8봉은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과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다. 그리고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등이다. 8봉, 8대, 8석문 등 모두 '8'자에 맞추어져 있다.
왜 속리산의 수많은 절경들 중 여덟 개만을 골라 이름 지었을까.
그것은 불교의 실천 수행인 8정도(八正道)에서 의미를 빌려 온 것이다. 8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에 들듯이 8석문을 지나 8대에 올랐다가 8봉의 너른 품에 안기면 그대로 부처님의 품에 안긴 듯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바램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 산과 맺은 불교의 오랜 인연이 남겨 놓은 가르침이리라.
잠시 후에 문장대(文藏臺, 1,054m)가 눈앞에 있었다. 늘 구름 속에 묻혀 있어 예전에는 운장대(雲藏臺)라고 불렸던 문장대 곁에는 여전히 구름이 머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월을 잊은 듯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다. 그러나 세속을 떠난 이 산에도 세속의 흔적은 그 이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을 다스리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문장대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어찌 세속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곳에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문장대에 올라 전망을 바라보며 늘재로 가는 구간을 대충 그리고 단속국공이 있는지를 살펴서 내려오다 보니 왼쪽에 출입금지의 금줄을 신속히 넘어 휄기장으로 들어 갔다. 휄기장 끝부분 왼쪽으로 가는 길이 보여 갔으나 대간길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법주사쪽으로 산행을 돌렸다.
오랫만에 내려오는 길이 멀기도 하다. 중간 매점ㅇ레서 시원한 맥주로 달래고 법주사까지 터덜터덜 걸어 와서 주자장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못제
비재와 갈령 삼서리 사이 백두대간 상에 있는 고원습지로, 넓이는 500∼600평 정도 되고, 장마철이 아니면 물이 거의 없다. 못제에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대궐터산에 성을 쌓고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황충 장군과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하자 황충 장군은 견훤이 이기는 비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부하를 염탐시켰다.
그 결과 견훤이 이곳 못제에서 목욕만 하면 없던 힘도 저절로 생겨 승승장구한다는 사실과 견훤이 지렁이 자손으로 지렁이는 소금물에 약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황충 장군은 부하를 시켜 못제에 소금 300석을 몰래 풀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견훤은 못제에서 목욕을 하고 난 뒤 힘을 잃고 말았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황충 장군이 견훤에게 공격을 퍼부은 결과 승리를 얻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한 전설로 보아 당시 물이 풍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갈령(葛嶺)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을 이어주는 49번 도로가 지난다.
칡葛, 재嶺 자를 쓴걸 봐서는 칡이 많아서 인지 칡넝쿨처럼 꼬불꼬불한 길이라 갈령이라 부르는지는 확실치 않고,고개 정상부에 '우복고을 관광화북' 이라는 흰색 글씨 푯말이 뚜렷하다.
괴산과 화령(화서) 경계에 있으나 화령재 밑에 터널이 뚫려서 이제 화령재는 드라이브 코스라 교통량은 거의 없다
갈령
상주시 화북면은 우리나라의 면 단위 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명산을 보유한 곳으로‘삼산(三山) 삼수(三水)의 고장’으로 불린다. 삼산(三山)은 화북면을 둘러싼 산줄기 속리산(1,057.7m), 청화산(984m), 도장산(827.9m)이고, 삼수(三水)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낙동강,금강,한강이 갈리는 것이다.
우복동이란...
소의 배(애기보, 자궁)처럼 안전하다는 뜻, 명당터를 일컫는 말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며 속리산 동쪽 화북면의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한다.
풍수지리에서 피난, 보신의 10가지 장소를 십승지(十勝地)라 하며 그 십승지 중의 하나인 소의 뱃속 모양의 명당터인 우복동이 바로 상주시 화북면 일원이다
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 대간 속리산군 형제봉 남동쪽 0.7km지점의 갈령삼거리(721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갈령(49번국지도),두루봉(대궐터산. 873m),동네실재, 국사봉(703.3m), 황령고개, 칠봉산(598m), 갈티재, 성재산(356m), 작약산(774m), 은점재, 수정봉(488m), 태봉산(106m) 을 거처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낙동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9m되는 산줄기로 이안천의 우측, 영강의 남쪽 분수령을 작약지맥(芍藥枝脈) 이라 칭한다.
형제봉
형제봉에 올라 속리산을 바라보면 저마다 솟은 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 혼자 지나치게 솟아난 봉우리도 없다.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 솟아난 봉우리와 이어진 능선들은 어느 한 봉우리에 속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하나의 봉우리, 하나의 능선을 이루고 있다.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옛사람들이 속리산을 구봉산(九峰山)이라고 즐겨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단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늘어서 있는 정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어선 아홉 개의 봉우리가 절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산이 되었다는 감탄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속리산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각각의 봉우리와 능선은 굽이치고 불러 세워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옮긴 글)
천왕봉
속리산은 한국팔경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기봉(奇峰)과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고, 산중에는 천년 고찰의 법주사가 있다.
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 겨울에는 설경으로 계절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백미는 역시 화강암이 만든 다양한 크기의 기암괴석들이다. 이들 기암괴석들은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덕유산을 지나온 육산 또는 토산의 백두대간 산줄기가 속리산에 이르러 석산으로 얼굴을 바꿔 솟구쳐 오른 것이다.
속리산은 처음에는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관음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묘봉 등 9개의 연속된 봉우리가 활처럼 휘어진 형상이라 하여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나라 팔경의 하나로 그 절경이 금강산과 맞먹을 만큼 뛰어나 소금강산(小金剛山) 또는 제2금강이라고도 했으며, 이밖에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지명산(智明山), 자하산(紫霞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신라시대부터 속리산이라 불렸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은 한강, 금강, 낙동강의 경계를 가르기 때문에 삼파수(三派水)로도 유명하며,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져 삼파맥의 지점이기도 하다.
속리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784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俗離)'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속리를 단순히 속세를 떠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시 말해 속세를 떠난다는 표현은 '이속(離俗)'이 더 옳은 표현이다. 속리를 우리 음으로 유추하면 '수리(首)'가 되는데, 여기서 수리는 꼭대기를 의미하는 옛말이다. 아마도 속리라는 지명은 우리음을 한자식으로 음역하다 보니 생겨난 이름인 것 같다.
속리산은 8이란 숫자와 인연이 깊은데, 산의 이름이 여덟 개이고, 8석문, 8대, 8봉이 있기 때문이다. 8개 봉우리에는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묘봉(妙峰), 수정봉(水晶峰) 등이 있다. 8대(臺)는 문장대(文藏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를 말하며, 내(內)석문, 외(外)석문, 상환(上歡)석문, 상고(上庫)석문, 상고외(上庫外)석문, 비로(毘盧)석문, 금강(金剛)석문, 추래(墜來)석문 등 8개 석문이 있다. 이밖에 수정교, 태평교 등 8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3개만 남아 있다. 이렇듯 여러 많은 봉우리와 대와 석문을 가진 속리산은 한마디로 오묘함에서 으뜸가는 산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산지이다.
문장대(1054m)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석대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다. 이곳 북서쪽 바위틈에는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이 있는데, 이를 감로천이라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명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천왕봉과 관음봉을 비롯해 속리산의 고봉들이 한눈에 보여, 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특히,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서면 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지며,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느낌이 절로 들게 한다.
속리산 제1경인 문장대(文藏臺)에 남겨진 세조의 전설은 속리산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이러니다. 세조가 법주사 언저리에서 요양하며 목욕소라는 지명을 낳고 복천암이라는 암자를 지으며 ‘열섬의 환약과 열두동이의 탕약’으로도 낳지 않는 괴질을 달래고 있을 때 꿈 속에서 월광태자라는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귀인이 알려주는 대로 오른 곳이 문장대이고 거기에 오르니 삼강오륜을 설파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는 감읍해 기도를 올리고 신하들과 그 책의 내용을 강론했다고 한다
속리산 법주사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절이름은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2018년 6월 30일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