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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건(蹇)
【傳】 蹇은 序卦에 睽者는 乖也니 乖必有難이라 故受之以蹇하니 蹇者는 難也라 하니라 睽乖之時엔 必有蹇難하니 蹇所以次睽也라 蹇은 險阻之義라 故爲蹇難이라 爲卦 坎上艮下하니 坎은 險也요 艮은 止也니 險在前而止하여 不能進也라 前有險陷하고 後有峻阻라 故爲蹇也라.
건괘(蹇卦)는 〈서괘전(序卦傳)〉에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건괘(蹇卦)로 받았으니, 건(蹇)은 어려움이다.” 하였다. 규괴(睽乖)의 때엔 반드시 어려움이 있으니, 건괘(蹇卦)가 이 때문에 규괘(睽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건(蹇)은 험조(險阻)의 뜻이므로 건난(蹇難)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감(坎)이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으니, 감(坎)은 험함이요 간(艮)은 그침이니, 험함이 앞에 있어 그쳐서 나아가지 못한다. 앞에 험함(險陷)이 있고 뒤에 높은 산이 막혀 있으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蹇은 利西南하고 不利東北하며 利見大人하니 貞이면 吉하리라.
건(蹇)은 서남(西南)은 이롭고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으며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우니, 정(貞)하면 길(吉)하리라.
【傳】 西南은 坤方이요 坤은 地也니 體順而易하고 東北은 艮方이요 艮은 山也니 體止而險하니 在蹇難之時하여 利於順處平易之地요 不利止於危險也라 處順易則難可紓어니와 止於險則難益甚矣라 蹇難之時에 必有聖賢之人이면 則能濟天下之難이라 故利見大人也요 濟難者는 必以大正之道而堅固其守라 故貞則吉也라 凡處難者는 必在乎[一无乎字]守貞正이니 設使難不解라도 不失正德이라 是以吉也라 若遇難而不能固其守하여 入於邪濫이면 雖使苟免이라도 亦惡德也니 知義命者는 不爲也니라.
서남(西南)은 곤방(坤方)이요 곤(坤)은 땅이니 체(體)가 순(順)하고 평이하며, 동북(東北)은 간방(艮方)이요 간(艮)은 산(山)이니 체(體)가 그치고 험하니, 건난(蹇難)의 때에 있어 평이한 땅에 순히 처함이 이롭고, 위험한 곳에 멈춤은 이롭지 않다. 순하고 평이함에 처하면 난(難)을 풀 수 있으나 험함에 멈추어 있으면 난(難)이 더욱 심해진다. 건난(蹇難)의 때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이 있으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운 것이요, 어려움을 구제하는 아는 반드시 대정(大正)의 도(道)로써 하고 그 지킴을 견고히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貞)하면 길(吉)한 것이다. 무릇 어려움에 처한 이는 반드시 정정(貞正)함을 지킴에 있으니, 가령 어려움이 풀리지 않더라도 바른 덕(德)을 잃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만일 어려움을 만나 그 지킴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사악함과 넘침으로 들어간다면 비록 구차히 어려움을 면하더라도 역시 악덕(惡德)이니, 의(義)와 명(命)을 아는 이는 하지 않는다.
【本義】 蹇은 難也니 足不能進하니 行之難也라 爲卦艮下坎上하여 見險而止라 故爲蹇이라 西南은 平易하고 東北은 險阻하며 又艮方也니 方在蹇中하여 不宜走險이며 又卦自小過而來하여 陽이 進則往居五而得中하고 退則入於艮而不進이라 故其占曰 利西南而不利東北이라 하니라 當蹇之時하여 必見大人然後可以濟難이요 又必守正然後得吉이어늘 而卦之九五剛健中正하여 有大人之象하고 自二以上五爻 皆得正位하니 則又貞之義也라 故其占이 又曰利見大人貞吉이라 하니라 蓋見險者는 貴於能止나 而又不可終於止요 處險者는 利於進이나 而不可失其正也니라.
건(蹇)은 어려움이니, 발이 나아가지 못하니 가기 어려운 것이다. 괘(卦)됨이 간(艮)이 아래에 있고 감(坎)이 위에 있어 험함을 보고 멈춘다. 그러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서남(西南)은 평이하고 동북(東北)은 험조(險阻)하며 또 간방(艮方)이니, 어려운 가운데에 있어 험한 곳으로 감이 마땅하지 않으며, 또 괘(卦)가 소과괘(小過卦)[ ]로부터 와서 양(陽)이 나아가면 가서 오(五)에 거하여 중(中)을 얻고, 물러가면 간(艮)에 들어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서남(西南)은 이롭고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다’ 한 것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반드시 대인(大人)을 만나본 뒤에야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정도(正道)를 지킨 뒤에야 길(吉)한데, 괘(卦)의 구오(九五)가 강건(剛健) 중정(中正)하여 대인(大人)의 상(象)이 있고 이효(二爻)로부터 이상(以上)의 다섯 효(爻)는 모두 바른 자리를 얻었으니, 또 정(貞)의 뜻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또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우니, 정(貞)하면 길(吉)하다’고 한 것이다. 험함을 당한 이는 멈춤을 귀하게 여기나 또 끝내 멈추어서는 안 되며, 험함에 처한 이는 나아감을 이롭게 여기나 그 바름을 잃어서는 안 된다.
彖曰 蹇은 難也니 險在前也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건(蹇)은 어려움이니, 험함이 앞에 있으니,
【傳】 蹇難也는 蹇之爲難이 如乾之爲健이니 若易之爲難이면 則義有未足[一作盡]하니 蹇有險阻之義라 屯亦難也요 困亦難也니 同爲難而義則異라 屯者는 始難而未得通이요 困者는 力之窮이요 蹇은 乃險阻艱難之義니 各不同也라 險在前也는 坎險在前하여 下止而不得進이라 故爲蹇이라.
‘건난야(蹇難也)’는 건(蹇)이 난(難)이 됨은 건(乾)이 건(健)이 됨과 같으니, 만일 바꾸어 난(難)이라고 하면 뜻에 부족함이 있으니, 건(蹇)은 험조(險阻)의 뜻이 있다. 둔(屯) 역시 어려움이요 곤(困) 역시 어려움이니, 똑같이 어려움이 되나 뜻은 다르다. 둔(屯)은 처음에 어려워서 통하지 못함이요, 곤(困)은 힘이 다함이요, 건(蹇)은 바로 험조(險阻) 간난(艱難)의 뜻이니, 각기 다르다. ‘험재전야(險在前也)’는 감험(坎險)이 앞에 있어 아래가 멈추어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건(蹇)이라 한 것이다.
見險而能止하니 知(智)矣哉라.
험함을 보고 멈추니 지혜롭다.
【傳】 以卦才로 言處蹇之道也니 上險而下止는 見險而能止也라 犯險而進則有悔咎[一作吝]라 故美其能止爲知也라 方蹇難之時하여 唯能止爲善이라 故諸爻除五與二外에 皆以往爲失, 來爲得也하니라.
괘재(卦才)로 건(蹇)에 처하는 방도를 말한 것이니, 위가 험하고 아래가 멈춤은 험함을 보고 멈춘 것이다. 험함을 범하고 나아가면 뉘우침과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능히 멈춤이 지혜롭다고 찬미한 것이다. 건난(蹇難)의 때를 당하여 오직 멈춤이 선(善)함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 효(爻)에 오(五)와 이(二)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는 것을 실(失)이라 하고 오는 것을 득(得)이라 하였다.
【本義】 以卦德으로 釋卦名義而贊其美라.
괘덕(卦德)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고 그 아름다움을 칭찬한 것이다.
蹇利西南은 往得中也요 不利東北은 其道窮也요,
건(蹇)이 서남(西南)이 이로움은 가서 중(中)을 얻기 때문이요,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음은 그 도(道)가 궁극하기 때문이요,
【傳】 蹇之時엔 利於處平易하니 西南은 坤方이라 爲順易요 東北은 艮方이라 爲險阻며 九上居五而得中正之位하니 是는 往而得平易之地라 故爲利也라 五居坎險之中而謂之平易者는 蓋卦本坤이어늘 由五往而成坎이라 故但取往而得中이요 不取成坎之義也라 方蹇而又止危險之地면 則蹇益甚矣라 故不利東北이라 其道窮也는 謂蹇之極也라.
건(蹇)의 때엔 평이(平易)함에 처함이 이로우니, 서남(西南)은 곤방(坤方)이라 순하고 평이함이 되고, 동북(東北)은 간방(艮方)이라 험조(險阻)함이 되며 구(九)가 위로 올라가서 오(五)에 거하여 중정(中正)의 자리를 얻었으니, 이는 가서 평이(平易)한 땅을 얻은 것이므로 이로운 것이다. 오(五)가 감험(坎險)의 가운데 처하였는데 평이(平易)하다고 이른 것은 괘(卦)가 본래 곤(坤)이었는데 오(五)가 감으로 말미암아 감(坎)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다만 가서 중(中)을 얻음을 취하였고 감(坎)을 이룬 뜻은 취하지 않은 것이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또 위험한 곳에 멈추면 어려움이 더욱 심해진다. 그러므로 동북(東北)은 이롭지 않은 것이다. ‘기도궁야(其道窮也)’는 건(蹇)이 궁극(窮極)함을 이른 것이다.
利見大人은 往有功也요 當位貞吉은 以正邦也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은 가서 공(功)이 있는 것이요 자리에 땅하여 정길(貞吉)함은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니,
【傳】 蹇難之時에 非聖賢[一有大人字]이면 不能濟天下之蹇이라 故利於見大人也라 大人當位면 則成濟蹇之功矣리니 往而有功也라 能濟天下之蹇者는 唯大正之道니 夫子又取卦才而言이라 蹇之諸爻 除初外에 餘皆當正位라 故爲貞正而吉也라 初六은 雖以陰居陽이나 而處下는 亦陰之正也라 以如[一作如以]此正道로 正其邦이면 可以濟於蹇矣리라.
건난(蹇難)의 때에 성현(聖賢)이 아니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운 것이다. 대인(大人)이 지위를 맡으면 어려움을 구제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으니, 가서 공(功)이 있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정(大正)의 도(道)이니, 부자(夫子)가 또 괘(卦)의 재질을 취하여 말씀하였다. 건(蹇)의 여러 효(爻) 중에 초(初)를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모두 정위(正位)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정(貞正)하여 길(吉)함이 되는 것이다. 초육(初六)은 비록 음(陰)이 양위(陽位)에 거하였으나 음(陰)이 아래에 처함은 또한 음(陰)의 바름이다. 이와 같은 정도(正道)로 나라를 바로잡는다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蹇之時用이 大矣哉라.
건(蹇)의 때와 용(用)이 크다.”
【傳】 處蹇之時하여 濟蹇之道 其用至大라 故云大矣哉라 天下之難을 豈易平也리오 非聖賢이면 不能이니 其用이 可謂大矣라 順時而處하고 量險而行하여 從平易之道하고 由至正之理 乃蹇之時用也라.
건(蹇)의 때에 처하여 건(蹇)을 구제(救濟)하는 도(道)가 그 쓰임이 지극히 크므로 ‘크다’고 말씀한 것이다. 천하(天下)의 난(難)을 어찌 쉽게 평(平)할 수 있겠는가. 성현(聖賢)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그 쓰임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때에 순응하여 처하고 험함을 헤아려 가서 평이(平易)한 도(道)를 따르고 지극히 바른 이치를 행하는 것이 바로 건(蹇)의 때와 용(用)이다.
【本義】 以卦變卦體로 釋卦辭하고 而贊其時用之大也라.
괘변(卦變)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고 때와 용(用)의 큼을 칭찬한 것이다.
象曰 山上有水蹇이니 君子以하여 反身修德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산(山) 위에 물이 있음이 건(蹇)이니, 군자가 이로써 자기 몸에 돌이켜 덕(德)을 닦는다.”
【傳】 山之峻阻에 上復有水하니 坎水爲險陷之象하여 上下險阻라 故爲蹇也라 君子觀蹇難之象하여 而以反身修德하나니 君子之遇艱阻에 必反求諸己而益自修라 孟子曰 行有不得者어든 皆反求諸己라 하시니 故遇艱蹇이면 必自省於身하여 有失而致之乎는 是反身也요 有所未善則改之하고 无歉於心則加勉은 乃自修其德也라 君子는 修德以俟時而已니라.
산(山)이 높이 막혀있는데 위에 다시 물이 있으니, 감(坎)의 물은 험함(險陷)의 상(象)이 되어 위와 아래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건(蹇)이 된 것이다. 군자가 건난(蹇難)의 상(象)을 보고서 자기 몸에 돌이켜 덕(德)을 닦으니, 군자가 어려움과 막힘을 만나면 반드시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여 더욱 스스로 닦는다.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행(行)하고도 얻지 못함이 있으면 모두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만나면 반드시 스스로 자기 몸에 살펴보아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되었는가 한다면 이는 몸에 돌이킴이요, 잘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고 마음에 부족(不足)함이 없으면 더욱 힘씀은 바로 덕(德)을 닦는 것이다. 군자는 덕(德)을 닦고 때를 기다릴 뿐이다.
初六은 往하면 蹇하고 來하면 譽리라.
초육(初六)은 가면 어렵고 오면 명예가 있으리라.
【傳】 六居蹇之初하여 往進則益入於蹇하니 往蹇也라 當蹇之時하여 以陰柔无援而進이면 其蹇可知라 來者는 對往之辭니 上進則爲往이요 不進則爲來라 止而不進은 是有見幾知時之美하니 來則有譽也라.
육(六)이 건(蹇)의 초기에 거하여 가서 나아가면 더욱 어려움에 들어가니, 가면 어려운 것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음유(陰柔)로서 응원(應援)이 없는데 나아가면 그 어려움을 알 만하다. 내(來)는 왕(往)과 상대되는 말이니, 위로 나아가면 왕(往)이 되고 나아가지 않으면 내(來)가 된다. 멈추고 나아가지 않으면 이는 기미를 보고 때를 아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니, 오면 명예가 있는 것이다.
【本義】 往遇險이요 來得譽라.
가면 험함을 만나고 오면 명예를 얻는 것이다.
象曰 往蹇來譽는 宜待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명예를 얻음은 마땅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傳】 方蹇之初하여 進則益蹇하니 時之未可進也라 故宜見幾而止하여 以待時可行而後行也라 諸爻皆蹇往而善來하니 然則无出蹇之義乎아 曰 在蹇而往則蹇也요 蹇終則變矣라 故上已[一作六]有碩義하니라.
건(蹇)의 초기를 당하여 나아가면 더욱 어려워지니, 때가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기미(幾微)를 보고 멈추어서 때가 행할 만하기를 기다린 뒤에 행해야 한다. 여러 효(爻)가 모두 가는 것은 어렵고 오는 것은 선(善)하니, 그렇다면 어려움을 벗어날 의(義)가 없는가? 건(蹇)에 있어서 가면 어렵고 건(蹇)이 끝나면 변하므로 상효(上爻)는 이미 너그러운 뜻이 있는 것이다.
六二는 王臣蹇蹇이 匪躬之故라.
육이(六二)는 왕(王)의 신하(臣下)가 어려움에 어렵게 함이 자신의 연고가 아니다.
【본의】 왕(王)의 신하가 어렵고 어려움이,
【傳】 二以中正之德으로 居艮體하니 止於中正者也요 與五相應하니 是中正之人이 爲中正之君所信任이라 故謂之王臣이라 雖上下同德이나 而五方在大蹇之中하여 致力於蹇難之時하니 其艱蹇至甚이라 故爲蹇於蹇也라 二雖中正이나 以陰柔之才로 豈易勝其任이리오 所以蹇於蹇也라 志在濟君於蹇[一作艱]難之中하니 其蹇蹇者는 非爲身之故也니 雖使不勝이라도 志義可嘉라 故稱其忠藎은 不爲己也라 然其才不足以濟蹇也니 小可濟면 則聖人當盛稱以爲勸矣시리라.
이(二)는 중정(中正)의 덕(德)으로 간(艮)의 체(體)에 거하였으니 중정(中正)에 멈추는 것이며, 오(五)와 서로 응(應)하니 이는 중정(中正)한 사람이 중정(中正)한 군주(君主)에게 신임(信任)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신(王臣)이라 이른 것이다. 비록 상(上)·하(下)가 덕(德)을 함께 하나 오(五)가 크게 어려운 가운데 있어 건난(蹇難)한 때에 힘을 다하니, 그 어려움이 지극히 심하다. 이 때문에 어렵고 어려움이 되는 것이다. 이(二)가 비록 중정(中正)이나 음유(陰柔)의 재질로 어찌 쉽게 그 임무(任務)를 감당하겠는가. 이 때문에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뜻이 군주(君主)를 건난(蹇難)의 가운데에서 구제함에 있으니, 그 어렵고 어려운 것은 자신을 위한 연고가 아니니, 비록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뜻과 의(義)가 가상(嘉賞)히 여길 만하다. 그러므로 그 충신(忠藎)함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주가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구제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마땅히 성(盛)하게 칭찬하여 권면(勸勉)하였을 것이다.
【本義】 柔順中正으로 正應在上而在險中이라 故蹇而又蹇하여 以求濟之하니 非以其身之故也라 不言吉凶者는 占者但當鞠躬盡力而已요 至於成敗利鈍하여는 則非所論也일새라.
유순중정(柔順中正)으로 정응(正應)이 위에 있으나 험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렵고 또 어려워 구제하기를 구하니, 그 자신의 연고 때문이 아니다. 길흉(吉凶)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점치는 이가 다만 마땅히 몸을 굽혀 힘을 다할 뿐이요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象曰 王臣蹇蹇은 終无尤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왕신건건(王臣蹇蹇)’은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
【傳】 雖艱[一作蹇]厄於蹇時나 然其志在濟君難하니 雖未成功이나 然[一无然字]終无過尤也라 聖人이 取其志義而謂其无尤라 하시니 所以勸忠藎也라.
비록 건(蹇)의 때에 어려움과 곤액(困厄)을 당하나 그 뜻이 군주(君主)의 어려움을 구제함에 있으니, 비록 성공(成功)하지 못하더라도 끝내 허물이 없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그 뜻과 의(義)를 취하여 허물이 없다고 말씀하였으니, 충신(忠藎)]을 권면한 것이다.
【本義】 事雖不濟나 亦无可尤라.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나 역시 허물할 것이 없다.
九三은 往하면 蹇하고 來하면 反이리라.
구삼(九三)은 가면 어렵고 오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傳】 九三은 以剛居正하고 處下體之上하니 當蹇之時하여 在下者皆柔하여 必依於三하리니 是爲下所附者也라 三은 與上爲正應이로되 上陰柔而无位하여 不足以爲援이라 故上往則蹇也라 來는 下來也요 反은 還歸也니 三爲下二陰所喜라 故來爲反其所也니 稍安之地也라.
구삼(九三)은 강(剛)으로서 정(正)에 거하고 하체(下體)의 위에 처하였으니, 건(蹇)의 때를 당하여 아래에 있는 이가 모두 유순(柔順)하여 반드시 삼(三)에게 의지할 것이니, 이는 아래에 있는 이의 귀부(歸附)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삼(三)은 상(上)과 정응(正應)이나 상(上)이 음유(陰柔)로서 지위가 없어 원조(援助)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위로 가면 어려운 것이다. 내(來)는 아래로 옴이요 반(反)은 돌아옴이니, 삼(三)이 아래 두 음(陰)의 좋아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와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니, 다소 편안한 곳이다.
【本義】 反就二陰이면 得其所安이라.
돌아와 두 음(陰)에게 나아가면 편안한 곳을 얻는다.
象曰 往蹇來反은 內喜之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제자리로 돌아옴은 안이 기뻐하기 때문이다.”
【傳】 內는 在下之陰也라 方蹇之時하여 陰柔不能自立이라 故皆附於九三之陽而喜愛之라 九之處三은 在蹇에 爲得其所也니 處蹇而得下之心이면 可以求安이라 故以來爲反이니 猶春秋之言歸也라.
내(內)는 아래에 있는 음(陰)이다. 건(蹇)의 때를 당하여 음유(陰柔)가 자립(自立)할 수 없으므로 모두 구삼(九三)의 양(陽)에게 붙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구(九)가 삼(三)에 처함은 건(蹇)에 있어 제자리를 얻음이 되니, 건(蹇)에 처하여 아래의 마음을 얻으면 편안함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는 것을 ‘반(反)’이라 하였으니, 《춘추(春秋)》에 ‘귀(歸)’라고 말한 것과 같다.
六四는 往하면 蹇하고 來하면 連이리라.
육사(六四)는 가면 어렵고 오면 연합(連合)하리라.
【傳】 往則益入於坎險之深하니 往蹇也라 居蹇難之時하여 同處艱厄者는 其志不謀而同也요 又四居上位而與在下者로 同有得位之正하며 又與三相比하니 相親者也요 二與初同類니 相與者也니 是與下同志하여 衆所從附也라 故曰來連이라 來則與在下之衆相連合也니 能與衆合은 得處蹇之道也라.
가면 더욱 감험(坎險)의 깊음에 들어가니, 가면 어려운 것이다. 건난(蹇難)의 때에 거하여 함께 어려움과 곤액에 처한 것은 그 뜻이 상의(相議)하지 않아도 같고, 또 사(四)가 상위(上位)에 거하여 아래에 있는 것과 똑같이 자리의 바름을 얻었으며, 또 삼(三)과 서로 가까우니 서로 친한 것이고 이(二)와 초(初)는 동류(同類)이니 서로 더부는 것이니, 이는 아래와 뜻을 함께 하여 무리가 따르고 붙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면 연합(連合)한다고 말한 것이다. 오면 아래에 있는 무리와 서로 연합(連合)하니, 무리와 연합(連合)함은 건(蹇)에 처하는 도리를 얻은 것이다.
【本義】 連於九三하여 合力以濟라.
구삼(九三)과 연합(連合)하여 힘을 합해 구제한다.
象曰 往蹇來連은 當位實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연합(連合)함은 당한 자리가 성실하기 때문이다.”
【傳】 四當蹇之時하여 居上位로되 不往而來하여 與下同志하니 固足以得衆矣요 又以陰居陰하여 爲得其實하니 以誠實與下라 故能連合이요 而下之二三이 亦各得其實이며 初以陰居下하니 亦其實也라 當同患之時하여 相交以實이면 其合可知라 故來而連者는 當位以實也라 處蹇難에 非誠實이면 何以濟리오 當位를 不曰正而曰實은 上下之交 主於誠實하니 用各有其所也라.
사(四)가 건(蹇)의 때를 당해서 상위(上位)에 처하였으나 가지 않고 와서 아래와 뜻을 함께 하니 진실로 무리를 얻을 수 있고, 또 음(陰)이 음위(陰位)에 거하여 그 성실함을 얻음이 되니, 성실함으로 아래와 더불기 때문에 연합(連合)하며, 아래의 이효(二爻)와 삼효(三爻) 또한 각각 그 실(實)[제자리]을 얻었고 초(初)가 음(陰)으로서 아래에 거하니, 또한 그 실(實)이다. 환난(患難)을 함께 하는 때를 당하여 서로 사귀기를 성실함으로써 하면 합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면 연합(連合)함은 당한 자리가 성실하기 때문인 것이다. 건난(蹇難)에 처함에 성실함이 아니면 어떻게 구제하겠는가. 당위(當位)를 정(正)이라고 말하지 않고 실(實)이라고 말한 것은 상(上)·하(下)의 사귐은 성실함을 위주로 하니, 쓰임이 각각 마땅한 자리가 있는 것이다.
九五는 大蹇에 朋來로다.
구오(九五)는 크게 어려움에 벗이 오도다.
【本義】 朋來리라.
【본의】 벗이 오리라.
【傳】 五居君位而在蹇難之中하니 是天下之大蹇也요 當蹇而又在險中하니 亦爲大蹇이라 大蹇之時而二在下하여 以中正相應하니 是其朋助之來也라 方天下之蹇而得中正之臣相輔면 其助豈小也리오 得朋來而无吉은 何也오 曰 未足以濟蹇也일새라 以剛陽中正之君으로 而方在大蹇之中하니 非得剛陽中正之臣相輔之면 不能濟天下之蹇也라 二之中正이 固有助矣나 欲以陰柔之助로 濟天下之難이면 非所能也라 自古聖王이 濟天下之蹇엔 未有不由賢聖之臣爲之助者하니 湯武得伊呂是也요 中常之君이 得剛明之臣而能濟大難者則有矣하니 劉禪之孔明과 唐肅宗之郭子儀와 德宗之李晟이 是也라 雖賢明之君이라도 苟无其臣이면 則不能濟於難也라 故凡六居五, 九居二者는 則多由助而有功하니 蒙, 泰之類 是也요 九居五, 六居二면 則其功[一作助]多不足하니 屯, 否之類 是也라 蓋臣賢於君이면 則輔君以君所不能이요 臣不及君이면 則贊助之而已라 故不能成大功也라.
오(五)가 군위(君位)에 거하여 건난(蹇難)의 가운데에 있으니 이는 천하(天下)가 크게 어려운 것이요, 건(蹇)을 당하고 또 험한 가운데 있으니 역시 큰 어려움이 된다. 크게 어려운 때에 이(二)가 아래에 있어 중정(中正)으로 서로 응(應)하니, 이는 그 벗의 도움이 오는 것이다. 천하(天下)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중정(中正)의 신하(臣下)의 보필(輔弼)을 얻는다면 그 도움이 어찌 작겠는가. 벗이 오는데도 길(吉)함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양중정(剛陽中正)의 군주(君主)로서 크게 어려운 가운데 있으니, 강양중정(剛陽中正)의 신하(臣下)가 서로 보필(輔弼)함이 아니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다. 이(二)의 중정(中正)은 진실로 도움이 있으나 음유(陰柔)의 도움으로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천하(天下)의 어려움을 구제함에는 현성(賢聖)의 신하(臣下)가 군주(君主)를 위하여 도와줌으로 말미암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을 얻음이 이것이요, 보통의 군주(君主)가 강명(剛明)한 신하(臣下)를 얻어 큰 어려움을 구제한 경우가 있으니, 유선(劉禪)의 공명(孔明)과 당(唐)나라 숙종(肅宗)의 곽자의(郭子儀)와 덕종(德宗)의 이성(李晟)이 이 경우이다. 비록 현명(賢明)한 군주(君主)라도 만일 그 신하(臣下)가 없으면 어려움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릇 육(六)이 오(五)에 거하고 구(九)가 이(二)에 거한 것은 아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공(功)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몽괘(蒙卦)와 태괘(泰卦)의 류(類)가 이것이요, 구(九)가 오(五)에 거하고 육(六)이 이(二)에 거한 것은 그 공(功)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둔괘(屯卦)와 비괘(否卦)의 류(類)가 이것이다. 신하(臣下)가 군주(君主)보다 어질면 군주(君主)를 보필(輔弼)할 적에 군주(君主)의 능하지 못한 것을 할 것이요, 신하(臣下)가 군주(君主)에게 미치지 못하면 찬조(贊助)할 뿐이다. 그러므로 대공(大功)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本義】 大蹇者는 非常之蹇也라 九五居尊而有剛健中正之德하여 必有朋來而助之者리니 占者有是德則有是助矣라.
대건(大蹇)은 보통이 아닌 어려움이다. 구오(九五)가 존위(尊位)에 거하고 강건중정(剛健中正)한 덕(德)이 있어 반드시 벗이 와서 도와줄 것이니, 점치는 이가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 이러한 도움이 있을 것이다.
象曰 大蹇朋來는 以中節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크게 어려움에 벗이 오는 것은 중정(中正)한 절도(節度)로써 하기 때문이다.”
【傳】 朋者는 其朋類也라 五有中正之德而二亦中正하니 雖大蹇之時나 不失其守하고 蹇於蹇하여 以相應助하니 是는 以其中正之節也라 上下中正而弗濟者는 臣之才不足也니 自古로 守節秉義而才不足以濟者豈少乎아 漢李固王允과 晉周顗王導之徒是也라.
붕(朋)은 그 붕류(朋類)이다. 오(五)가 중정(中正)의 덕(德)이 있는데 이(二) 역시 중정(中正)이니, 비록 크게 어려운 때이나 그 지킴을 잃지 않고, 어렵고 어려워 서로 응(應)하고 도와주니, 이는 그 중정(中正)한 절도(節度)로써 하는 것이다. 상(上)·하(下)가 중정(中正)하고도 구제하지 못하는 경우는 신하(臣下)의 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니, 예로부터 절개를 지키고 의(義)를 잡으나 재주가 구제할 수 없었던 이가 어찌 적었겠는가. 한(漢)나라의 이고(李固)·왕윤(王允)과 진(晉)나라의 주의(周顗)·왕도(王導)의 무리가 이 경우이다.
上六은 往하면 蹇하고 來하면 碩이라 吉하리니 利見大人하니라.
상육(上六)은 가면 어렵고 오면 여유로워 길(吉)하리니, 대인(大人)을 봄이 이롭다.
【본의】 오면 큰 공이 있을 것이다.
【傳】 六以陰柔居蹇之極하니 冒極險[一作蹇]而往이면 所以蹇也요 不往而來하여 從五求三하면 得剛陽之助리니 是以碩也라 蹇之道는 厄塞窮蹙하니 碩은 大也니 寬裕之稱이라 來則寬大하여 其蹇이 紓矣라 蹇之極은 有出蹇之道로되 上六이 以陰柔故로 不得出[一作能耳]이요 得剛陽之助면 可以紓蹇而已니 在蹇極之時하여 得紓則爲吉矣라 非剛陽中正이면 豈能出乎蹇也리오 利見大人은 蹇極之時에 見大德之人이면 則能[一作利]有濟於蹇也라 大人은 謂五니 以相比로 發此義라 五는 剛陽中正而居君位하니 大人也라 在五엔 不言其濟蹇之功하고 而上六에 利見之는 何也오 曰 在五不言은 以其居坎險之中하여 无剛陽之助라 故无能濟蹇之義요 在上六엔 蹇極而見大德之人이면 則能濟於蹇이라 故爲利也니 各爻取義不同이라 如屯은 初九之志正이나 而於六二則目之爲寇也라 諸爻皆不言吉이어늘 上獨言吉者는 諸爻皆得正하여 各有所善이나 然皆未能出於蹇이라 故未足爲吉이요 唯上은 處蹇極而得寬裕하니 乃爲吉也라.
육(六)은 음유(陰柔)로서 건(蹇)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지극히 험함을 무릅쓰고 가면 어렵고, 가지 않고 와서 오(五)를 따르고 삼(三)을 구하면 강양(剛陽)의 도움을 얻으리니 이 때문에 여유로운 것이다. 건(蹇)의 도(道)는 곤(困)하고 막히고 궁(窮)하고 위축되니, 석(碩)은 큼이니 관유(寬裕)를 일컫는다. 오면 관대(寬大)하여 그 어려움이 풀릴 것이다. 건(蹇)의 극(極)은 건(蹇)을 벗어날 길이 있으나 상육(上六)이 음유(陰柔)이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며, 강양(剛陽)의 도움을 얻으면 어려움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니, 어려움이 지극한 때에 있어 늦춤을 얻으면 길(吉)하다. 강양중정(剛陽中正)이 아니면 어찌 어려움에서 벗어나겠는가.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운 것은 어려움이 지극한 때에 대덕(大德)의 사람을 만나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대인(大人)은 오(五)를 이르니 서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 뜻을 말한 것이다. 오(五)는 양강중정(陽剛中正)으로 군위(君位)에 거하였으니, 대인(大人)이다. 오(五)에서는 어려움을 구제하는 공(功)을 말하지 않았는데, 상육(上六)에 만나봄이 이로움은 어째서인가? 오(五)에 말하지 않은 것은 감험(坎險)의 가운데 처하여 강양(剛陽)의 도움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구제(救濟)하는 뜻이 없고, 상육(上六)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지극하여 대덕(大德)의 사람을 만나면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로운 것이니, 각효(各爻)에서 뜻을 취함이 똑같지 않다. 둔괘(屯卦)는 초구(初九)의 뜻이 바르나 육이(六二)에 있어서는 지목하여 적(敵)이라 한 것과 같다. 여러 효(爻)에 다 길(吉)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상효(上爻)만이 홀로 길(吉)함을 말한 것은 여러 효(爻)가 모두 정(正)을 얻어 각각 선(善)한 바가 있으나 모두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길(吉)함이 될 수 없고, 오직 상효(上爻)는 건(蹇)의 극(極)에 처하여 관유(寬裕)함을 얻었으니, 이는 바로 길(吉)함이 되는 것이다.
【本義】 已在卦極하여 往无所之하니 益以蹇耳요 來就九五하여 與之濟蹇이면 則有碩大之功이라 大人은 指九五라 曉占者宜如是也라.
이미 괘(卦)의 극(極)에 있어 가면 갈 곳이 없으니 더욱 어려울 뿐이요, 와서 구오(九五)에 나아가 더불어 어려움을 구제하면 큰 공(功)이 있을 것이다. 대인(大人)은 구오(九五)를 가리킨다. 점치는 이에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함을 깨우친 것이다.
象曰 往蹇來碩은 志在內也요 利見大人은 以從貴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면 어렵고 오면 여유로움은 뜻이 안에 있는 것이요,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움은 귀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傳】 上六이 應三而從五하니 志在內也라 蹇旣極而有助라 是以碩而吉也라 六以陰柔로 當蹇之極하여 密近剛陽中正之君하니 自然其志從附하여 以求自濟라 故利見大人이니 謂從九五之貴也라 所以云從貴는 恐人不知大人爲指五也라.
상육(上六)이 삼(三)과 응(應)이고 오(五)를 따르니, 뜻이 안에 있는 것이다. 건(蹇)이 이미 지극한데 도와주는 이가 있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 길(吉)한 것이다. 육(六)이 음유(陰柔)로서 건(蹇)의 극(極)을 당하여 강양중정(剛陽中正)의 군주(君主)를 매우 가까이 하니, 자연 그 뜻이 따르고 붙어 스스로 구제(救濟)하기를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우니, 구오(九五)의 귀(貴)함을 따름을 이른다. 귀(貴)함을 따른다고 말한 까닭은 사람들이 대인(大人)이 오(五)를 가리킨 것임을 알지 못할까 저어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