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눈이 내려 답사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모둠장 태희가 불참인 관계로 부모둠장 영한이가 제 시간에 와야 하는데 늦게 왔다.
남한산성 코스를 뽑기로 결정하고 버스가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다.
버스에서 인미혜선생님의 남한산성 설명과 미션에 대한 공지를 하셨다.
수지청 2는 좌익문(동문)출발하여 지화문(남문)까지 와서 개원사을 보고 남한산초등학교에 2시까지 모이는 코스였다.
이쪽 코스는 초행이라 약간 걱정... 김미진선생님이 계셔 안심이 되었다.
수지청은 좌익문 주차장에 내려 수문을 함께 보고 각자 반대로 헤어졌다.
* 좌익문 (동문) - 수문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멀리서만 보았다.
{지화문(남문)과 함께 가장 사용빈도가 높았던 성문이다. 정조 3년에 성곽 보수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동쪽이 왼쪽이기 때문에 좌익문이라 하였다.} (서문 --- 우익문)
* 수문(수구문) -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 정도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고, 분지형태의 성내부는 서고동저의 지형에
가깝다. 산성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다.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흐른다.}
전에 왔을 때는 물이 약간 흘려 수문 밖으로 나가 보았는데 오늘은 두꺼운 얼음으로 인해 입구가 좁아져
수문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시구문 - {성안에서 사망한자의 시신은 사대문 통과를 할 수 없었고 이 수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 때는 이 문을 통해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었다. 주민간에는 통상 시구문이라 불러지고 있다.
신유, 기해, 병인 박해 통해 순교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 300여분의 시신이 버려진 곳이다.}
위에 설명으로 보면 수구, 암문, 시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아진다.(지도에는 11암문으로 되어있다.)
이 길이 비탈지고 눈이 쌓이고 진흙길이라 오르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10 암문 -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
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시구문을 놓친 관계로 더 주의깊게 살피며 갔었다. 표지판도 없어 잘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일 것 같았다.
철문으로 닫혔있는 상태였고 암문 앞쪽에는 돌들이 있어서 보기에 좋지 않았다.
*제3남옹성 -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기보다는 치나 용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자료에 이것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기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의 옹성만 생각하고 봤을 때는 이해가 부족했다. 자료를 찾아 보니 좀 이해가 간다.
보수 공사중이어서 초록색 그물 비슷한 걸로 덮어 놓아 있는 상태였다. 앞쪽으로 포를 쏘는 포대 3개가 있었다.
*9암문 - 여기는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막 보수공사를 마친듯하다. 암문 밖을 아이들과 나가 둘러 보았다.
*제2남옹성, 치 -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의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치에서 어느 단체에서 나와 고사행사를 하고 있었고 제2남옹성 또한 보수공사 중이였다.
제3과 다른 점은 포대로 가지전 문이 있었다. 치 앞쪽으로는 주춧돌만 남은 남장대터가 있었다.
*남장대터 -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8암문 -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7암문 - 여기도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미진선생님이 가보신 후 암문이 있는 것을 확인후 보았다.
암문 근처에는 차가 드나들도록 큰 문이 있었다.
*제1남옹성 - 시간을 맞추려다 보니 성밖을 주시하지 못하고 지나쳐 보지 못하였다.
*지화문(남문)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 들어 왔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개원사 - {개원사는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을 총지휘하는 본영사찰로 건립되었다. 고종31년
갑오경장으로 의승방번제가 폐지될 때까지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인조 15년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는데 1907년 일제는 사찰에
보관하던 무기를 수거하고 화약을 폭파시키려다 법당, 누각, 부속건물들을 모두 불태워버려 하루아침에 폐사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개원이란 근본을 새로 시작한다. 또는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 신생국가의 연호에 사용되는 예가 많다.}
개원사는 고요하고 한적하였다. 일주문(청량산개원사조계문)을 지나 천왕문에는 큰문을 달아 놓고 천왕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쪽문이 열려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머리를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나오면서 일(?)이 일어났다.
새로 지어진 절이라 규모는 크지 않았고 대각전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양옆으로 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남한산성 코스중 제일 쉬운 코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눈과 진흙때문에 걷는데 불편하였다. 하지만 하얀 눈이 내려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굽이굽이 산에 쌓인 눈이 예뻤지요. 일정 마지막에 안 좋은 일이 생겨 마음이
아팠지만 영한이의 씩씩한 모습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김미진선생님 고맙습니다.
첫댓글 선생님들과 지킴이들 모두 수고하셨어요. 하지만 남한산성이 가슴에 들어와있을거에요~
썜~~ 어제 저떔시 고생을 정말 많이하셧져...
지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담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지각했군.....ㅋㅋㅋ
아무리 즐거워도 다치면 아무 소용 없는거야~~
앞으로는 조심!!!
별말씀을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모둠장인데 불참해버렸어요...ㅜㅠㅜㅠ
활동은 최대한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