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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18강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1
이방의 희망, 예수님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민상 형제가 감사하게도 연수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우리 단톡방에 올린 글입니다. “집이랑 교회보다 훨씬 편하고 재밌어요 기숙사 생활이”,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합니다. 처음 교회에 왔던 때, 세상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거라사 광인처럼 소리 질렀던 모습을 생각하면, 많이 노력하고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달라지고 성장해가는 모습은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자립하고 성장하여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서기까지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배고픈 제자들이 사고칩니다. 안식일인대도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제 사정이 그만큼 안 좋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아픈 현실에 공감하기는커녕 ‘껀수를 잡았다’며 이리같이 물어뜯습니다.(2) “봐라봐라 마, 이게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할 짓인교! 기본도 안되었네” 유대사회는 안식일을 지키고자 39개의 세부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른 무화과 열매 두 개 이상의 무게를 들면 일입니다. 흰머리 뽑는 것, 불 피워 요리하는 것도 일입니다. 나태하고 방탕한 욕망이 끌려 핑계대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구체적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유감 표명 후에 제자들을 호되게 교육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보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굶주림 참을 수 없는 자들은 사표 써!”
그러나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 다윗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급하게 도망치느라 며칠을 굶다가 겨우 놉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한 다윗 일행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율법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했는데, 제사장은 진설병을 다윗 일행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윗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제자들을 다윗 레벨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아니, 잠깐의 배고픔을 절제하지 못한 제자들을 어찌 다윗과 견줄 수 있습니까! 너무 오바한 것 아닐까요?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숨 걸고 전장에 나선 것이나, 제자들이 인생 걸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나, 중심은 같다고 보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고난 받은 다윗과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난 받는 제자들, 중심은 같다고 보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성전의 제사장들과 견주십니다. 제사장은 안식일에도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불을 피우고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있기에 안식일 법에서 예외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성전보다 크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6)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마음은 자비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니라”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제사에 주목했습니다. 퍼펙트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신에 대한 완전한 열정,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크고 웅장한 신전을 만들고 아름다운 제단을 쌓고 최고의 제물을 바치는 것,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갑자기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이는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비가 빠진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에만 집중하다가 자비를 놓치고 있습니다. 자비를 붙들고 있었다면, 제자들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에 헌신하다가 안식일법을 어길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몰린 안타까운 제자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물고기 잡아 그럭저럭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세리였던 마태는 맛집 돌아다니며 다이어트 걱정하며 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복음역사에 헌신하다보니 코너에 몰릴 정도로 약해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천박한 자들이 아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예수님이 악하다 악한 것이다’, 예수님에게 최종 권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지요? 들을 사람들도 아니구요. 제자들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비방에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 편에 서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사람의 평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 예수님 마음이 중요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10)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고자 물어왔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다’고 답변한다면, 유대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으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가?’, 이는 ‘안락사가 옳은가’라는 질문처럼, ‘yes or no' 단순답변이 어렵습니다. ’병자의 고통‘과 ’안식일 절대성‘, 둘 다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한 가지 질문을 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라면‘,입니다. “내가 병들고, 내 가족이 병들었다면, 내 손이 말랐거나 내 가족의 손이 말랐다면,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올려놓으니까, 답 찾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당시 양은 현대인에게 반려동물입니다. 찬미님이 타타를 얼마나 아끼는지, 제 귀에까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만약 반려동물이 구덩이에 빠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탈무드 매뉴얼은 ‘응급이면 꺼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기다려서 꺼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구덩이에서 나오다가 뒤집어져 가스가 위에 차서 죽을 수 있기에, 응급 아니어도 꺼냈습니다. 내 양, 내 가족으로 생각했기에 꺼낸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남의 고통이 아닌 나의 고통, 내게 속한 고통으로 생각할 때, 함부로 비난하지 아니하고 균형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물어왔는데, 예수님의 답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입니다. 같은 말씀 같으나 다를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돈벌이 목적으로 병을 고쳤다면, 그것은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영업한 것입니다. 자비를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도록 돕는 것도 선을 행하는 것이며, 건강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도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회당 가운데 세우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사람들의 비난과 그로 인한 불이익을 생각하면, 은밀히 불러내어 일대일로 치료할 수도 있고 다음날로 예약을 잡아 치료할 수도 있었습니다. 굳이 공개치료를 감행하신 것, 병자만 돕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율법에 갇혀 말라버린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자비 없는 율법은 요리사의 칼이 아닌 강도의 칼처럼 흉기가 됩니다. 타인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망가뜨리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영혼이었다면 한손 마른 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우리는 왜 하늘의 권능을 받지 못했는가!’ 혹은 감동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돕는데 눈치 보지 않는구나!’ 그런데 분노하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병자가 손이 말랐다면,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선을 행하였으나 악으로 돌아 왔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런데도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이에 마태는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립니다. 17-21절은 이사야서 말씀을 묵상하며 발표한 마태의 소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4개의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기록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42,45,50,53장입니다. 그 중 이사야서 42장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18,19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보라! 이는 왕처럼 특별한 사람이 행차할 때 외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종, 그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종이 여호와의 영으로 이방에까지 심판을 알게 하려고 행차했다는 외침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행차해야 어울릴까요! 당시 왕의 권위를 대표하는 모습이 황금 갑옷과 백마 끄는 전차를 탄 위풍당당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종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는 모습으로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다투는 것은 부당한 공격에 맞서 강하게 보복하는 것입니다. 들렌다는 것은 ‘cry aloud’ 크게 소리치는 것, 곧 널리 알리고 자랑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자처럼 취급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니까, 바리새인들은 악령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악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때 광풍을 잠잠케 하신 능력으로 바리새인들을 쓸어버리신다면, 감히 예수님에 대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한 맹인들로 예수전도단을 만들어 유대 전역을 돌며 선전케 한다면, 예수님 인기는 상한가를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리지 말도록 입단속을 합니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더더욱 공격하고 예수님은 계속하여 오명을 뒤집어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사람들을 돕는 그 일에 집중합니다. 그것도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 진짜 소망 없는 사람들을 돕는 데 집중하십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갈대는 건축자재도 안되고 땔깜도 아닙니다. 당시 갈대 용도는 1회용 호루라기였습니다. 어릴 적 등하교 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보릿대를 짤라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는 그것조차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꺾어 버려야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그을름을 뿜어내며 타들어갑니다. 빨리 꺼버려야 민폐가 덜합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문제를, 꺼져가는 심지는 결핍문제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배고픔을 절제하지 못해 안식일 전통을 어긴 제자들이 상한 갈대입니다. 한 손이 말라 삶이 시들어가는 병자가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물론 그들만 상하고 꺼져가는 존재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실존이 그러합니다.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세상은 약한 자에 대해 자비롭지 않습니다. 약함이 드러날수록 무시하고 강한 조직을 이루는데 걸림돌로 여깁니다. 니체는 약한 자들에 대한 연민이나 자비를 실패한 자들의 감정으로 해석하고 멸시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도와주려고 하지 마라. 그를 밀어 넘어뜨려 약자와 병자들이 사라지는 사회가 되게 하라”, 독일이 기독교의 자비와 희생 같은 약한 자의 사상을 버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초인사상을 따라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이나 러시아 같은 열강을 넘어서는 강한 독일이 되기 위해 니체가 제시한 해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출현이나 1,2차 세계 대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경쟁을 통해 강한 것을 남기고 약한 것을 도태시키면 강한 개인, 강한 사회가 될 것 같으나, 병든 인간, 병든 사회로 흘러갔습니다. 니체 개인사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초인사상을 펼쳤던 니체는 인생 마지막 10년을 미쳐서 광기 가운데 헤매다가 죽습니다. 계기가 있습니다. 1889년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던 말을 불쌍히 여겨 눈물로 껴안고 막아선 이후라는 설이 있습니다. 머리는 초인 사상을 주장했는데 몸은 연민을 좇아 움직이는, 자기모순을 보며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대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권능을 가지셨고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시며 죽음조차 정복하신 부활과 영생의 주이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가장 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상한 갈대 같은 자들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자들을 끄지 않습니다. 마태는 인간적으로는 돈 잘 버는 세리였지만, 영적으로는 염려로 상하고 두려움으로 고갈된 영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은 두렵고 자신은 약하고. 돈이라도 없으면 망할까봐 세리가 된 상한 갈대처럼 약한 자였습니다. 허무와 쾌락, 정죄와 자책으로 점점 꺼져가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너 같은 사람이 제자로 살 수 있겠니? 너가 제자로 따라오면 세상은 뭐라고 말할까?’ 면접 보고 앞뒤 따지며 체크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좇으라’, 한 말씀으로 끝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핏대를 세우며 공격하는데도 부르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세리가 하나님의 의를 따라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도와주셨습니다. 나같은 사람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도록 붙들어주셨다, 20절은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놀라운 고난에 대한 증거입니다. 상한 갈대처럼 약한 영혼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픽 쓰러집니다. 꺼져가는 심지처럼 고갈된 영혼은 작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고 꺼져버립니다. 그런 사람을 감당한다는 것, 정말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목자와 양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가 원수처럼 긴장관계에 빠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상하고 고갈된 영혼은 쉽게 오해하고 쉽게 어둠으로 달려갑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압박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발전을 위하는 마음으로 목표를 제시했는데 정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 오해와 충돌을 반복하다보면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더 이상 수고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는데, 제자들은 누구 크냐, 논쟁을 벌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미리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를 듣고도 넘어집니다. 예고된 그대로 이루어진 부활을 목격하고도 물고기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도망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새벽에 디베랴 바다를 심방하십니다.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을 굽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초대하십니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꿀밤이라도 한 대씩 쥐어박고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먹이십니다. 무지막지한 세상에 짓눌려 기력을 소진한 제자들을 아셨습니다. 지금 격려하고 지금 용기를 넘어 한 고비를 넘기면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끄지 않았습니다. 아마 공생애 내내 그런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꺾어버리고 싶은 모습인데 붙잡아 주끄고 싶은데 채워주는 고난, 다시 함께 하고 다시 가르치고 다시 씨름하신 고난입니다. 돈벌레 세리가 사도로 변화된 비결입니다. 여호와의 종의 고난 첫 번 째 노래가 떠올린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자를 지지하고 고갈된 자를 채우는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할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감당할 때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나 같은 사람이 의를 따라 살게 되었으니, 이방인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살 수 있게 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고 사도가 되었으니, 누구든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오래 전 청소년 시절을 방황하며 절망에 빠진 한 청년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 정신이 들자, 지나간 시간,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인해 절망했습니다.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지금의 위기를 딛고 넘어서면 이전의 방황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최고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최고다” 경민 목자는 센타 와서 직장 잡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구원받고 자립하기까지 20년이나?’, 본인에게는 아쉽고 답답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은혜롭고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저는 자주 활용합니다. “경민 목자를 보라! 그러므로 너도 희망을 가지고 믿음 싸움을 하자!” 양들에게만 위로가 되는 메시지가 아니지요? 강철같이 강했던 사람이라도 상한 갈대처럼 약해질 때가 있고 화산같이 타오르던 사람도 꺼져가는 심지처럼 사그라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견디고 채워나가면, 예수님은 상처와 고갈의 문제까지도 빛의 이야기로 바꾸십니다. 예수님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약한 자들을 감당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묵묵히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