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129(수) ◈ 수 19:24-51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나 내가 원하는 기업에 정착한 단 지파
오늘의 말씀 수 19:24-51
아셀 지파의 기업
19:24. 다섯째로 아셀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19:25. 그들의 지역은 헬갓과 할리와 베덴과 악삽과
19:26. 알람멜렉과 아맛과 미살이며 그 경계의 서쪽은 갈멜을 만나 시홀 림낫에 이르고
19:27. 해 뜨는 쪽으로 돌아 벧 다곤에 이르며 스불론을 만나고 북쪽으로 입다 엘 골짜기를 만나 벧에멕과 느이엘에 이르고 가불 왼쪽으로 나아가서
19:28. 에브론과 르홉과 함몬과 가나를 지나 큰 시돈까지 이르고
19:29. 돌아서 라마와 견고한 성읍 두로에 이르고 돌아서 호사에 이르고 악십 지방 곁 바다가 끝이 되며
19:30. 또 움마와 아벡과 르홉이니 모두 스물두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납달리 지파의 기업
19:31. 아셀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19:32. 여섯째로 납달리 자손을 위하여 납달리 자손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19:33. 그들의 지역은 헬렙과 사아난님의 상수리나무에서부터 아다미 네겝과 얍느엘을 지나 락굼까지요 그 끝은 요단이며
19:34. 서쪽으로 돌아 아스놋 다볼에 이르고 그 곳에서부터 훅곡으로 나아가 남쪽은 스불론에 이르고 서쪽은 아셀에 이르며 해 뜨는 쪽은 요단에서 유다에 이르고
19:35. 그 견고한 성읍들은 싯딤과 세르와 함맛과 락갓과 긴네렛과
19:36. 아다마와 라마와 하솔과
19:37. 게데스와 에드레이와 엔 하솔과
19:38. 이론과 믹다렐과 호렘과 벧 아낫과 벧 세메스니 모두 열아홉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19:39. 납달리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단 지파의 기업
19:40.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19:41.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19: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19: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19: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19: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19: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19:47.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19:48. 단 자손의 지파가 그에 딸린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들의 마을들이었더라
여호수아의 기업과 땅 분배 마무리
19: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19: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19: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 주해: 성령님의 조명
이스라엘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기업'(히, 나할라),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로서 그들이 지키고 누리고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이었다. 중요한 것은 땅의 크고 작음이나 지형의 좋고 나쁨이나 대적의 있고 없음이 아니다.
환경과 여건은 달랐지만 저마다 소중하다. 풍요도 복이지만 한계도 복이다. 풍요를 통해 섬기게 하셨으며, 한계를 통해 교만하지 않게 하셨고 서로 연대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받은 복을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말고, 복의 통로가 되어 복의 근원이 하나님인 것을 알리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1. 아셀, 납달리, 단 지파, 그리고 여호수아가 요구한 기업 딤낫 세라, 이것으로 기업 분배는 마친다.
길갈에 이어 실로에서의 땅 분배가 이루어진다(18-19장). 실로에서의 땅 분배는 베냐민 지파등 일곱 지파에게 주어졌다.
먼저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나머지 세 지파, 곧 아셀, 납달리, 단, 지파에 대한 분배로 마무리된다.
아셀 지파가 그 가족대로 22개의 성읍들과 그 마을들을 받는다.
납달리 지파가 그 가족대로 19개 성읍들과 그 마을들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단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 나온다.
● 아셀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러하다.
그들의 영토는 헬갓, 할리, 베덴, 악삽, 알람엘렉, 아맛, 미살이다. 그 영토는 서쪽으로 갈멜과 시홀 림낫을 스쳐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벧다곤에 이르렀다가 북쪽으로 스불론과 입다엘 골짜기를 스친다. 또 벧에멕과 느이엘로 해서 가불 쪽으로 빠진다. 다시 에브론, 르홉, 함몬, 가나를 지나 대도시 시돈에까지 이른다.
경계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라마 쪽으로 해서 견고한 성읍 두로에 이르고 거기에서 또 방향을 바꾸어 호사 쪽으로 해서 바다
(지중해)로 빠진다. 또 움마, 아벡, 르홉이니 모두 22개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다. 이것이 아셀 지파가 받은 기업이다.
● 납달리 지파는 지리적으로는 좋은 땅을 받았으나 바알숭배가 왕성했던 북쪽 시돈과 가까웠고, 앗수르에 멸망 당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멸시받는 땅이 되었다. 즉 환경적으로 형편은 괜찮은데, 영적으로는 피폐하고 멸시당하는 자와 같았다. 그러나 주님은 납달리와 같은 자를 찾아와 영화롭게 하신다. 참된 안식과 평안은 환경과 형편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다.
● 단 지파는 강한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거주하는 지역을 기업으로 받는다. 그런데 아모리 족속에게 압박을 받자 급기야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서 안전하고 풍요로운 레셈(라이스)을 발견하고 그곳을 점령한다(삿 1:34; 18장). 단 지파는 진짜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애꿎은 대상을 적으로 만들어 짓밟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고, '이웃'이 아니라 '죄'며, '형제자매'가 아니라 내 안의 '미움'이다.
모든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을 온전히 쫓아내지 못했지만 단 지파는 자신들이 받은 기업 전체를 떠나서 하나님께 분배받지 않은 가장 북쪽 땅을 차지하였다.
단 지파가 쫓아내야 할 아모리와 블레셋 족속은 강한 족속이다. 단 지파는 분배받은 땅 중에서 극히 일부분 즉 소라와 에스다올 정도만 차지하였다(삿 13:25; 18:2,8, 11). 그리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악지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삿 1:34).
성경에서 골짜기는 한국의 산골짜기가 아니라 농사짓기 좋은 산 사이의 평야 지대다. 단지파는 좋은 땅에 거주하였으나 아모리 족속에게 내몰려 산지로 쫓겨났다.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것이다.
결국 단 지파가 분배받은 지역은 후에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에 분할되고 만다. 그리고 단 지파의 공백은 블레셋의 저항으로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기업을 받았다는 것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단 지파는 그들이 분배받지 않은 땅을, 칼로 정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분배받은 땅이 차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차지하기 쉬운 땅을 점령하였다.
말씀에 복종하여 그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받은 기업에서 쫓겨나서, 레셈을 정복하여 단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후로 단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의 숫자인 144,000명 중에서 단 지파는 제외된다(계 7:4-8).
2.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요구한 땅 딤낫 세라
요단 서편 땅의 분배는 갈렙의 요청(14:6)으로 시작하여 여호수아의 기업으로 끝난다.
열두 지파 외에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비뽑기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았다(민 13:1-33).
그들은 지도자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업을 취하고 성읍을 세웠다. 약 40세에 하나님의 눈으로 정탐하였고,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80세가 훌쩍 넘어서도 믿었고, 그 기업을 취하고 그 성읍을 건설한 믿음의 용사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기에 좋고, 쉽게 세우는 성읍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성읍을 건설하였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기업 경내에 있는 척박한 산지를 개척하고 쇠락한 성읍을 중건한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40여 년 전 믿음 그대로이다. 이들의 변함없는 믿음은 하나님이 그 땅에서 자기 백성에게 어떤 삶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
51절 '마치다'(히, 칼라)라는 단어는 천지창조(이루다', 창2:1)와 성막 완공('마치다', 출40:33)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 하나님은 가나안이 에덴이 되고 성소가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인생과 일상, 공동체와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3. 주 예수님이 주신 기업은 하나님의 생명, 아들 안의 생명, 부활하신 생명이다.
구약시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표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는 하늘 본향이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행위로써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성취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4:25-5:2).
예수를 믿는 것은 그의 메시아적 행위에 연합되는 것이다. 곧 그의 죽음과 장사됨, 부활에 연합되어 기업으로 주신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롬 6:4). 그것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이다.
그때에 세상 가운데에서 당하는 환난을 즐거이 감당하며, 그로 인해 연단 된 믿음을 창조한다.
이 믿음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그를 맞이할 유일한 소망이 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너희 믿음의 확실함(연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 기업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순종을 통하여 차지하게 되는 기업이다. 우리는 단 지파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영광스러우나 그 기업을 차지하기에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나 자신들이 원하는 기업을 차지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기 보다는 기복신앙과 율법주의로 달려가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적인 만족과 종교적 성취를 차지한다. 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전쟁하여 정복하기 보다는, 내가 차지하기 쉽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한다.
가나안 땅의 기업은 한시적이고 예비적인 기업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표 하는 영생의 기업은 영원한 기업이다. 물론 그 기업을 차지하는 것,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은 험난하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신 영생의 기업을 포기하고, 자기가 원하는 쉽고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은 단 지파와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주신 영생의 기업을 우리는 생명으로 지키고 누려야 한다.
◈ 나의 묵상
단 지파의 유혹이 날마다 실제한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힘들다고 떠난 단 지파,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정착한 단 지파는 어리석은 단 지파다. 그러나 나 또한 단 지파처럼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떠나 내가 원하는 기업을 차지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생명으로 섬기는 자로 부르셨다. 그런데 나는 생명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라 나의 최선, 나의 열심으로 섬기고 있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떠나 열심히 하는 성과 지향적인 사역을 하였다.
열심히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죄 성이 많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당찮은 일이었다.
기쁨도 없이 왜 힘든 줄도 모르고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탓하였다. 나의 부정성으로 얼룩진 나의 내면에는 단 지파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선교를 좀 더 잘하고 싶어서, 내가 받은 기업을 넘어 좀 더 나은 레셈으로 지경을 넓히고 싶었다.
선교사로 파송 받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것은 한국교회의 현실이 성과주의였다. 선교사들에게 짧은 시간에 사역의 열매를 내놓으라며 재촉하는 것이다. 현지 사역보다 이것이 더 힘들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 아버지 집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전쟁하여 레셈을 점령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기업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업을 떠난 승리, 쉽고 편한 길을 택하여 단 지파처럼 비참한 결말에 이를 뻔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게 하셨다. 다시 내가 받은 기업, 주님이 주신 기업으로 회복 시켜주셨다.
생명으로 살고 섬기는 길. 이 좁고 협착한 길로 다시 부르셨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간 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싸우며 나아간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간다.
레셈 정복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받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블레셋이 버티는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내 힘으로 쫓아낼 수 없는 블레셋, 평지에서 쫓겨났던 쓴 기억이 있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 가지 이유는 그곳이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기업으로 받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아들 안의 생명,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 내가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는 길은 말씀과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받은 기업은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 안이다. 내 힘으로 블레셋을 쫓아낼 수도, 방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주의 십자가의 용서와 긍휼을 의지하여 도망쳐 왔던 그 기업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내가 받은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십자가로 나아간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 위하여 십자가로 나아간다. 내가 용납받은 십자가, 내가 영원히 거해야 할 아버지 집으로 나아간다.
◈ 묵상기도
주님 제게 주신 기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영생의 기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인간의 일을 기업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전념하였습니다. 베드로처럼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 자를 꾸짖으셨으나 저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신 분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땅을 차지하려는 교만함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의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분복 안에서 겸손히 섬겨야 할 자가 하나님의 선택과 영역을 범하고 자기 욕심에 치우쳐서 살아왔습니다.
내가 주인 행세하며 참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탐심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왕 노릇을 하려던 교만한 인생이었습니다. 결국 썩어질 것을 위해 쉼 없이 달려가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이끄셨습니다. 말씀 앞에 머물게 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무엇을 해도 내가 하려고 하는 자기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데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하셨음을 미리 선포합니다.
오늘도 주의 약속을 믿고 나아갑니다. 한번 뱉으신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으며,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기에 의지하고 또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말씀하신 대로 순종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와 더불어 교제함으로 새롭게 되며 주 안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한 날 되게 하소서!
아들 안의 생명,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주안에 안식하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믿음 안으로 순종함으로 들어갑니다.
비참한 자이나 존귀히 여겨 주시는 아버지의 한 없는 은혜로, 날마다 감격하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