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중구 구리개의 유래
○ 땅이 질펀했던 불편함으로 생긴 지명
『한경지략』각동各洞조에는
(동현銅峴, 곧 구리개는 보은단골과 마주한 저자 마을로 구름재(운현雲峴)라고도 했다 한다. 우리 옛말에 '구리'와 구름'은 발음상 비슷한 까닭이다.)
라고 전해온다.『태종실록』16년 5월조에
(저자를 구리고개仇里古介로 옮기다.)
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우리말 그대로 '구리 고개'였던 것을 한자음으로 표기하면서 '銅구리동'자를 써서 동현銅峴으로 지명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이곳 일대는 땅이 너무 질펀해서 자그마한 고개인데도 다니기 힘들었던 지리적 불편으로 생긴 지명이 훗날 이름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서울 토박이들은 을지로 입구에 나갈 때 "나, 구리개에 좀 다녀오리다"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였다
일제도 구리개라고 불러오다가 1914년 4월 1일 구리개 입구에서 훈련원 쪽으로 죽 터진 큰 길을 따라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황금정黃金町으로 바꾸었다.
1909년 1월에는 조선의 토지 수탈 수단으로 구리개 근처 장악원掌樂院자리를 헐고 동양척식주식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세웠다. 원래 장악원은 조선 시대 궁중 전용 아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이곳 땅이 메마르고 드세었기 때문에 서리고 어린 땅 기운을 음악으로 풀어 달래기 위해 서부 여경방餘慶坊에서 임진왜란 이후 지금의 을지로 2가 181번지 일대에 건물 수백 간을 지었다. 아악은 좌방에서 속악은 우방에서 관리하고 궁궐 정전正殿에서 거해 올리는 조하朝賀등의 의례를 주관하였는데, 터가 넓고 커서 과거장으로도 사용하였다 한다.
동현은 조선조 초기 한성부 남부 회현방에서 갑오개혁 이후 남서 회현방 소공동계小公洞契동현동銅峴洞으로 쓰였으며『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考』권2 한성부 조에, 현종 때 허적許積이 구리개에 체찰사부體察使府를 설치하고 체부청體府廳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체찰사는 임진왜란 때 변경 지방의 방위 대책을 강구, 실시하는 기관이었다.
1946년 10월 일본식 동명을 정리하면서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의 성을 따서 현재의 이름인 을지로가 되었다
○ 보은단동과 역관 홍순언
중구 을지로 1 가와 남대문로 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을 보은단報恩緞골 또는 고운담골(미장美墻)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의 기원은 선조 때의 역관이었던 홍순언洪純彦에 기인된다. 홍순언이 역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기루妓樓에 들렀는데 소복한 미인이 나타났다.
어딘지 창기의 때가 묻지 않은 것 같아 물었더니 아버지의 장례비 때문에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기루에 몸을 팔았다는 대답이었다. 이에 홍순언은 그 기루에 충분한 보상비를 주고 여인이 자유의 몸이 되도록 풀어주었다. 그 후 이 여인은 임진왜란 때 한국에 원병을 보내는데 중추 역할을 한 명나라 재상 석성石星의 계실이 되었으며 이 재상의 은혜를 갚고자 손수 보은報恩이라 수놓은 비단 수십 필을 홍순언에게 주었다.
이 사실은 당대 사대주의가 뿌리박힌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더욱이 왜란에서 원군을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조선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이가 명나라 사람 가운데서도 재상의 계실이라는 점에서 이 보은 비단은 선망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보은비단을 간직한 집(현 을지로 1가 18번지 부근) 또한 눈길의 중심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보은단집이 되었고 보은단집이 있는 이 마을은 보은단골이 되었다. 고은담골이란 지명의 구전은 홍순언의 집 담이 효제충신孝悌忠信등의 글씨와 꽃, 새 등을 무늬로 그린 아름다운 담으로 둘러 있었기에 생긴 것이 라고 하나, 보은단이 고은담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면 호수언의 집이 아닌 눈에 띈 어떤 고운 담의 집이 있었기에 생긴 지명일 것으로 보인다.
탑골공원이 있는 운현동
□ 중구 진고개의 유래
구리개보다 더한 진흙탕 길
어느 유명한 가수가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30여 년간 부른 진고개 신사 에 등장하는 진고개는 그 위치가 명동의 북달재와 남산동 사이에 있는 세종호텔 뒤 부근으로, 광복 후 연예인들의 활약처로서 그 유명세를 톡톡히 했던 곳이다.
그러나 1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산 잠두봉 등성이에서 북으로 흐르던 창내와 마른내가 수표교水標橋쯤 해서 청계천에 합수되는지라, 진고개 부근 일대는 구리개보다 더 진흙탕 길로 물 빠짐이 더디었다. 따라서 비만 왔다 하면 통행에 큰 지장을 주는 동네였다고 한다. 1906년 일제는 이곳에 쌓인 2.5미터의 잔도를 걷어낸 후 길을 닦고 모기둥 꼴에 수멍을 묻고 암거暗渠(속도랑)를 설치하여 물이 하수구를 통해 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토목 하수 공사로서, 진고개라는 오명을 지워나갔다.
우리나라는 1910년 국권 피탈을 맞으며서 남산 왜성 대倭城臺기슭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주택과 기관이 확장되었고 일본인들은 진 고개 일대를 일본인들이 거점을 삼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14년 10월 1일에 진고개의 지명을 혼마치 도오리(본정동本町通)라고 바꿔버렸다.
5백여 년 동안 조선의 성과 도읍 안에 이국인이 살 수 없던 금법禁法이 깨지자 새로운 도로를 놓고 넓히면서 신시가지를 갖추게 되고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상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궁성에 최초의 전등이 가설 되자 전기 점등으로 이곳 일대는 고급 상점과 음식점, 요정들이 앞 다퉈 문을 열며 불야성을 이루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급변해 버렸다. 결국 오색했던 남산골 샌님들의 반골反骨기질에도 불구하고 쓴 소리 한번 뱉지 못하고, 고스란히 일본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만 뼈아픈 국권 상실을 간직한 동네가 되었다.
진고개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이현泥峴이라고도 많이 사용되었음은 기록을 동해서 알 수 있다. 일본은 구리개로 침투하여 세력을 확대시키면서 남대문 동으로 점점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고종高宗때 금위대장 이종승李鍾承은 지금의 충무로 2가 80번지에 살았는데, 임오군란으로 서문 밖에 있던 공사관이 불타버리자 이곳을 임시 공사관으로 사용하였다. 일본의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모토(화방의질花房義質)는 이곳 일대를 서울의 중심지라고 판단한 후 남산 밑으로부터 병영, 총독부, 관저 등을 옮겨 왔고 구리개 부근에 있던 장악원을 헐고 동양척식주식 회사를 두었다.
1942년 6월 10일 구區제도의 실시로 서울의 일번 지구라고 하는 중구로 바뀌었는데, 광복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그들이 만든 으뜸 행정구 명칭과 우편번호까지 전국 행정단위 최초 지명과 기호가 일제의 잔재로 굳어졌음이 안타깝다.
충무로 진고개
□ 종로구 신문로의 유래
○ 권세로 돈의문을 폐쇄하다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이숙번 묘소
새문안은 현재의 신문로新門路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는 문막은집(색문가塞門家)이 있었다. 이는 곧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의 공신 이숙번李叔蕃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 돈의문敦義門(서대문西大門) 근처에 살던 그는 나들이 하는 사람들의 소음이 견딜 수 없이 싫다 하며 권세로 돈의문을 폐쇄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숙번은 사람들에게 원한의 명사로 불리었고 그 마을 이름을 색문동塞門洞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새문안이란 말은 옮겨 지은 새문(신문新門)의 안이란 뜻에서가 아니라, '색문寒門의 안'이란 말이 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 이인손의 아들 5형제가 등과한 오궁동
신문로 1가에서 2가 사이의 부유한 주택가인 오궁골(오궁동五宮洞)에는 세조 때 우의정 광주廣州이李씨 이인손李仁孫이 살았다. 그런데 그 집에서 태어난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 이극균李克均다섯 형제가 모두 등과登科하고 봉군奉君되었기로 오군五君골이라 불리었는데 오궁골로 잘못 바뀐 것이라 한다.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이극돈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