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闕圖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부터 1620년에 지어졌다.
전각(殿閣)과 문(門)이 약 190여개나 되며 지형(地形)대로 東西로 길게 만들어진 큰 대궐(大闕)이였다.
이곳에 거주했던 왕(王)은 인조(仁祖)에서 철종(哲宗)까지 10여名 이다.
그중 영조대왕(英祖大王)이 가장 오래 머물렀고, 이곳에서 승하(昇遐)했다.
숙종(肅宗)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승하(昇遐)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장희빈(張禧嬪), 한중록(恨中錄)을 쓴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제 강정기때 건물들이 모두 파괴되었고 경성중학교를 지으면서 경희궁(慶熙宮)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복원(復元)되고 있는 전각(殿閣)들.
경희궁(慶熙宮)의 정문(正門)이였던 흥화문(興化門)은 많은 수난을 겪은 뒤 옛 자리를 잃고 지금의 자리에 섰다.
박문사(博文寺)는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 때에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절(卍)이다.
1932년에 이곳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 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寺刹)을 짓는다.
박문사(博文寺) 건축에는 광화문(光化門)의 석재(石材), 경복궁(景福宮) 선원전(璿源殿)과 부속 건물, 남별궁(南別宮)의 석고각(石鼓閣) 등이 사용되었으며,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이전하여 정문(正門)으로 사용하였다.
박문사(博文寺)라는 이름은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와서 그의 23주기 기일(忌日)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落成式)에는 조선총독과 춘원 이광수, 최린, 윤덕영등 친일부역자(親日附逆者)와 친일파 천여명이 참석하였다.
설립 목적에는 조선 초대총감인 '이등박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1939년에는 이 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합병(韓日合倂)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가 개최한 이 행사에는 춘원 이광수와 최린, 윤덕영등 약 1천여 명의 친일파들이 참석했다.
박문사(博文寺)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되었고, 그 터에는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이 세워져 있다.
흥화문(興化門)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흥화문(興化門)의 지붕의 잡상(雜像)들.
흥화문(興化門)을 지나면 왼쪽에 있는 옛 서울중고등학교 터 표지.
첫댓글 경희궁에도 우리의 역사가 숨쉬는 곳인데,
많이 잊혀가는 궁궐을 다시 알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