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물결, 금과 금불상도 하나다
<27>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④-2
[본문] 정명(淨名)거사가 말하였습니다. “비유하자면 높은 언덕이나 육지에는 연꽃이 프� 아니하고 낮고 습한 진흙탕에 연꽃이 핀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였습니다. “진여는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일체의 일을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인연을 따라서 두루 두루 나아가 감응하지만 항상 이 보리의 자리에 늘 계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사람을 속였겠습니까?
시끄러움과 고요함 다르지 않아
분별하면 참선공부 잘못한 셈
[강설] 증시랑이 세상사에 이끌려서 참선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을 한탄하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도 고덕의 말씀을 들어 깨우쳐 주었는데 다시 유마경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더욱 확실하게 하고자 하였다.
연꽃은 언제나 낮은 곳과 습한 곳과 진흙탕에서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듯이 깨달음이라는 것도 역시 온갖 세속의 탐욕과 진애와 어리석음 등 8만4000 번뇌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꽃을 연꽃이라 하였다. 연꽃 하나로 불교의 대의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끌어 왔다. “참되고 여여한 사람의 참 마음(眞如)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온갖 인연을 따라서 모든 일과 사람의 삶을 성취하여 간다”고 하였듯이 온갖 세상사는 곧 진여가 그 자성만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모든 인연을 따라다니며 이뤄가는 광경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사람의 삶을 진여문(眞如門)과 수연문(隨緣門)으로 설명한 점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또 한 구절 인용하였다. 사람의 삶이란 모두가 인연을 따라서 하루에도 별의별 일을 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그 사실(菩提座)에 있어서는 언제나 항상 그 자리라는 화엄경의 글이다.
[본문] 만약 고요한 곳은 옳다고 하고 시끄러운 곳은 그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세간의 모습을 파괴하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며, 생멸(生滅)을 떠나서 적멸(寂滅)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고요한 것이 좋고 시끄러운 것이 싫을 때 힘을 내기가 아주 좋습니다.
문득 시끄러운 데서 고요할 때의 소식으로 뒤바꾼다면 그 힘이 좌복 위에서 조용히 좌선할 때의 힘보다 천 배 만 배 수승할 것입니다. 다만 잘 들으십시오. 결코 그릇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설] 참선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제가 시끄러운 환경과 고요한 환경에 관한 문제다. 이 점을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여 참선을 한다면 공부에 큰 진척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그렇다. 시끄러움과 고요함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다.
세간상과 실상도 또한 하나다. 생멸과 적멸도 역시 하나다. 비유하자면 물과 물결도 하나며 금과 금불상도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끄러운 것과 고요한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을 한다면 결코 참선 공부를 바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가르침은 절대 공부인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
[본문] 또 편지를 읽어보니 “방거사의 말씀 두 구절로써 행주좌와에서 명심하여 경계하는 글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시끄러울 때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면 이것은 스스로 그 마음을 더욱 요란하게 할 뿐입니다.
만약 생각이 움직이거든 다만 방거사의 두 구절로써 이끌어 오면 곧바로 더울 때에 청량산(淸凉散)이라는 약을 한 번 복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강설] 방거사의 말씀 두 구절이란 “다만 모든 있음을 비워 없애기를 원하고 모든 없음을 간절히 있게 하지 말라(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라는 것이다. 시끄러운 환경이 다가오면 그것을 대치하여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방거사의 이 말은 시끄러운 환경에 끌려가는 마음을 치료하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라고 하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4.23]
☞'무비스님의 서장 강설'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