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naver.com/theravadabuddhists/3021 (강종미 미얀마 아라한 수행)
때인구 사야도 일대기(법명: 우욱까타, 1913년~1973년)
때인구 사야도는 ‘삼명-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을 획득한 아라한으로 명성이 높다.
속가 이름은 우아웅퉁, 1913년 3월 16일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한의사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극심한 난독증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14살에 마포아와 결혼해 딸 셋을 두었다. 20대 초반부터 46살까지 도둑과 강도들을 이끄는 대장으로 살았다. 마찌생인, 도씨, 도깐쉐인 등 세 여성과도 혼인해 부인이 네 명이었다.
한 달 동안 명상 수행처를 다녀온 넷째 부인이 순룬 사야도의 일대기를 읽어 주었다. 평생 문맹의 농부로 살았던 순룬 사야도가 아라한을 증득한 실화를 듣고 ‘그가 했다면 나도 된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부인의 낭독으로 ‘사성제, 사념처’ 등 생소한 단어를 처음 듣는 동안 전율이 엄습했다.
마지막 도적질에서 칼에 맞아 엄청난 피를 쏟으며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1960년 9월 6일 동네 사원에서 재가 수행자의 9계를 받고 친척집 큰 나무 밑에 앉아 들숨날숨을 알아차리는 수식관을 시작했다. ‘수행만 하면 된다’라는 강력한 믿음으로 코를 스치는 들숨날숨을 관찰했다. 5일이 지나자 크게 좌절하며 고비를 맞았지만 6일째부터 안정되었다.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오직 들숨날숨만 알아차렸다. 식사할 때, 물 마실 때, 꼭 필요한 말을 할 때만 바닥과 엉덩이가 닿는 느낌에 마음을 두었다. 걸을 때는 발과 땅이 접촉하는 것에 알아차림을 두었다.
오전 4시~5시 좌선, 오전 5시~5시 30분 아침기도, 오전 5시~6시 아침 죽 공양, 오전 6시~9시 30분 좌선, 오전 9시 30분~10시 점심 공양, 오전 10시~12/1시까지 좌선, 오후 1시~2시까지 누워서 휴식하며 알아차림, 오후 2시~5시 좌선, 오후 5시~7시 예불, 오후 7시~12시/1시 좌선
사야도의 일정표를 보면 24시간 중 16시간을 좌선 수행만 하셨다. 지금도 때인구 센터에선 경행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는다. 때인구 수행자들은 최소 3시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고 미동 없이 앉아서 일어나는 고통을 지켜봐야 한다. 고통을 넘겨야 죽음의 고통도 이겨낸다는 말이 있다. 통증, 아픔 등의 느낌을 시작~중간~끝까지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지켜본다는 각오로 수행한다. 통증이 참을 수 없이 커지면 의도적으로 거세게 호흡하고, 통증이 줄어들면 평상시 호흡으로 돌아갔다.
큰 나무 밑에서 좌선하는 동안 모기, 파리, 왕개미, 각다귀들이 물고 뜯어 통증이 극심했다. 당시를 아는 제자들은 ‘벌레들에게 물려 흘린 피로 흰색 수행복이 검붉게 물들었다’고 전한다.
후일 법문하실 때 ‘도저히 못 견딜 정도가 되면 마음이 통증이 없는 자리로 달려갔다. 호흡에는 통증이 없고, 소리에도 통증이 없다’라고 회상하셨다. 이런 식으로 통증이 없는 자리로 마음을 옮겨갔다. 다시 통증으로 끌려가고, 다시 통증이 없는 자리로 달려가는 마음을 계속 관찰했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았다. 몸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통증과 벌레들에게 살이 뜯기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느낌만 알아차렸다.
굳건한 믿음과 정진력으로 1960년 9월 11일 낮 12시, 수행을 시작한 지 6일 만에 첫 번째 도, 과를 증득하셨다.
1960년 10월 9일 오전 8시에 두 번째 도, 과를 증득하셨다.
1961년 3월 19일 밤 3시에 변비로 고통받으며 변을 보시던 중에, 세 번째 도, 과를 증득하셨다.
후일 법문하실 때 ‘언제 어디서나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아야 할 사례’로 자주 소개하셨다. 대부분 좌선 중에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때가 무르익으면, 장소나 시간을 가리지 않고 어느 순간이든 얻을 수 있다‘라고 강조하셨다.
세 번째 과위를 증득해 숙명통이 열리자, 자신의 과거 생을 보셨다. 빠둠뭇따라 부처님 시대, 부처가 되기를 처음으로 서원했다. 웻사부 부처님 시대에는 삼장에 통달한 왕이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학자들을 탄압해 과보를 지었다. 이를 현생에서 심한 난독증으로 돌려받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또 이번 생이 끝나면, 아나함이 가는 정거천 5천 중에서 지혜로 가는 아까닛타 범천계[Akaniṭṭha Brahma. 색구경천]에 태어날 것이라며 다음 생도 예견하셨다. 법문 중에 ’가야 할 길을 아는 아리야 성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수행을 시작하고 일년 만에[1960년 9월 6일에 수행을 시작했고 1961년 3월 19일에 아나함과를 얻었으므로 6개월 만임] 세 번째 과위를 증득하셨다. 흰옷을 입은 속인 수행자로 세 가지 도, 과를 증득한 뒤 우욱까타 법명을 받고 비구가 되셨다.
[미얀마의 Pyi Phyo Kyaw 박사는 떼인구 사야도께서 재가자로 아나함이 되신 후 1961년 3월 12일에 비구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1961년 3월 19일에 아나함과를 얻었다면 비구계를 받은 날짜가 정확하지 않다.]
비구로 정진할 당시, 오랜 과거 생에서 친인척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아귀, 범천, 지옥에 있는 모습을 보셨다. 당시 마을을 지키는 천인들과도 소통하셨다. 사야도께서 수식관을 지도하며 아귀들에게 더 나은 세상으로 가라고 권면하신 덕분에 악처를 벗어난 존재들도 많았다고 전한다.
[영역본에는 마을을 돌보는 정령들에게 아나빠나 명상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뚠때로 가는 길에 모비 우수라에 있는 본가에 들러 잠시 휴식하던 1962년 6월 7일 오전 8시에 네 번째 과위를 증득하셨다. 1960년 9월 6일 생애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한 지 20개월 13일 만에 비구의 본래 임무를 완성하셨다.
하지만 비구들의 여법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재가자로서의] 삶의 궤적들 때문에 당시 승단과 사회에선 논란이 분분했다.
1962년 12월 16일, 당대 최고의 학승 딴린또야 사야도의 질문과 점검을 받기 위해 딴린으로 가셨다. 구름 떼처럼 몰려든 군중들 중에서 사야도께서 호수 위를 날아 딴린 사원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그 후 아라한이라는 믿음이 퍼졌다.
출가 12년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전국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설법과 수행 지도에 매진하셨다.
60세가 되던 1973년 7월 8일 새벽 4시 45분 입적하셨다.
과거 생에서 때인구 사야도는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오랜 겁 동안 바라밀 행을 닦았다. 하지만 수기를 받지 못한 채 중도 하차했고, 바라밀 행을 닦을 때 만난 인연들에게 후일 법을 전할 인연도 지었다고 전한다. 다른 아라한들보다 더 오랜 시간 바라밀 행을 닦았다고도 직접 말씀하셨다.
양곤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 있는 때인구 본원 명상센타는 43에이커의 광활한 공간에 300여 채의 수행자 거처가 있다. 사야도께 직접 수행을 지도받았던 제자들이 아직도 수행하며 모여 살고 있다.
우기 결재 3개월은 집중 정진 기간이다. 300명 이상 수행자들이 모여 수식관, 부정관 수행을 한다. 전국에 수백여 개의 분원이 있다. 센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매달 7일~10일씩 집중수행 코스를 운영한다.
사야도께선 과거 생에 수행을 했던 사람만 이번 생에도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자주 강조하셨다. 수식관을 연마해 ’사마디가 생기면 과거 생에 익혔던 수행법이 자연히 드러나니, 그 수행법을 계속 이어가라‘고 권장하시곤 했다.
- 『미얀마 아라한의 수행』 中, 강종미 편역
범부의 지혜는 미약하고, 사견은 울창하다. 사견이 번창한 사람은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제 마음을 알아차려야 사견을 끊어낼 수 있다. 마음의 생멸을 관하라. 냄새가 나면 냄새 자체가 아니라 싫어하는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라. 알아차리지 않으면 '어, 무슨 냄새야? 누가 어디서 악취를 풍기는 거야!'라며 성냄, 근심 등을 연달아 일으킨다. 마음이 생멸하는 것을 관찰해야 멈춘다. 미래의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과를 받지 않는다.
위빠사나란 뒤따라 일어나는 오온을 끊는 일이다. 알아차리지 않고 좋아하면 갈애와 집착이 뒤따라온다. 실상을 관찰하지 않고 싫어하면 불안, 근심, 고통, 진심[성냄]이 뒤따라온다. 모르는 치심을 따라 무명, 행行이 뒤따라온다. 수다원이 되려면 반드시 심수관을 해야 한다.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나, 내 것이라는 집착에 빠진다.
생멸하기 때문에 고통이다. 생멸의 무상함을 알기 위해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정도正道다. 정도가 미래의 원인과 결과를 끊어낸다. 집성제와 고성제를 끊는다. 위빠사나 도는 갈애의 늪에 가라앉고 있는 범부를 구제한다. 손님 마음들 산만, 의혹, 성냄 등등, 무엇이 일어나든 관찰하라. 탐욕 없는 마음도 관하라. 자애 마음이 일어나도 오직 관하라. 관할 대상이 없다면 들숨날숨을 관하라. 무상을 알아차리면 무상을 보면 '항상하다'는 사견의 옹벽이 무너진다. 심수관을 하면 사악처를 벗어난다. 마음의 생멸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을 관하는 일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소멸할 때까지 알아차려라. 일어나는 마음은 무상, 알아차리는 마음이 바른 길正道이다. 서원과 기도가 아니라 뒷마음으로 앞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도·과를 증득한다. 놓치지 않고 알아차릴 때 앞마음은 생멸, 뒷마음은 도, 앞마음은 고성제, 뒷마음은 도성제가 된다. 알아차림이 익어지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볼 것이다.
오온을 원인으로 일어난 결과를 알려고 수행하면 '나'라는 사견이 무너진다. 남자, 여자, 사람, 중생, 그, 나 등이 그릇된 견해임을 안다. 위빠사나 지혜로 실재의 진리를 관찰하여 실상을 보면 사견을 벗어난다.
눈과 형상이 부딪쳐 눈 의식에 접촉이 일어나 형상을 본다. 이 과정 어디에도 사람이나 중생은 없다. 느낌, 갈애, 강한 집착, 업[행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다. 사람, 중생은 어디에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에도 물질과 정신만 있을 뿐 사람이나 중생은 없다. 늙음, 죽음도 물질과 정신이 낡아져 소멸될 뿐, 사람, 중생은 없다. 그저 물질과 정신이 변화할 뿐이다. 사람, 중생, 남자, 여자 등은 실재가 아니다. 말로 표현된 관념이다. 오온이 고통이다. 생겨나는 것도 고통이다, 소멸하는 것도 고통이다. 알아차림으로 사견이 떨어져 나가면 위빠사나 수행이 무르익는다.
중생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까?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이 상견이다. 상견을 벗어난 수행자는 관념에 끄달리지 않는다. 오온이 일어나는 일련의 활동, 실재의 생멸만 관찰한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없다. 지금 보고 듣고 촉감하고 지각하고 자극하고 원하고 집착하고 분투하는 의식만 있을 뿐이다. 중생, 관념, 사견 등은 벗어야 할 장애물이다.
이교도들이 '중생이 죽으면 다시 태어납니까'라고 질문하면 답을 줄 수가 없다.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중생은 실재가 아니다. 명칭에 불과하다. 오온의 어디를 관찰하건, 고통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뿐이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 중생은 없다고 정리해야 한다. 사견과 의심을 먼저 제거한 뒤 수행해야 한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생겨난 것뿐이다. 오온만 실재할 뿐, 사람이나 중생은 어디에도 없다. 오온의 생멸만 관찰해야 한다. 생멸을 볼 때 사견이 떨어져 나간다. 무수한 생멸이 일어나면 생멸을 혐오하는 지혜가 일어난다. 계속 관찰해 나가면 생멸의 종국에서 열반이 드러난다. 고통이 소멸한 자리에서 지옥의 종자가 말끔히 제거된다.
부처님은 상견과 단견, 양극단을 벗어난 중도의 길을 가르쳤다. 중도를 걸어 부처가 되시고 열반에 도달하셨다. 불교도라면 상견, 단견을 벗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다. 상견의 허물은 크지 않다. 하지만 존재계를 갈애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는 어렵다. 단견은 허물이 크다. 하지만 존재계에 대한 갈애가 적어 성자를 만나면 금세 해탈할 수도 있다. 오온의 원인과 결과를 보면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견에 얽매이면 수행력이 증장되기 어려워 도지혜를 얻지 못한다. 사견을 벗어난 순간 수행이 앞으로 나아간다. 도지혜, 과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로 눈을 관찰하는 과정을 점검해 보자. 범부는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갈애, 집착, 업을 연달아 일으킨다. 대상에서 일어나는 접촉의 생멸, 느낌의 생멸을 관하여 위빠사나 지혜로 멸을 보면 견고하다는 상견이 제거된다. 하나 뒤에 다른 하나가 일어나고, 앞마음에 이어 뒷마음이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를 보면서 단견이 무너진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생멸을 관찰하라. 생을 보면서 단견이 사라진다. 멸을 보면서 상견이 사라진다. 생멸의 실상을 알아 사견이 청정해질 때 지혜가 무르익어 도지혜가 드러난다.
- <미얀마 아라한의 수행> 중, 강종미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