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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조(東來祖) 원경(元鏡)의 초명(初名)은 경(慶)이며 중국의 원성(元城)사람이다. 고구려가 ‘도예지사(道藝之士)’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자 당(唐)나라에서는 원경등 팔학사(八學士)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왔다고 전한다.
‘ 원경은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지냇으며 고구려에 와서는, 두 나라의 국교(國交)를 회복시키고 보장왕(寶藏王)의 책봉에 힘씀으로 보장왕은 그에게 좌명공신(佐命功臣)을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의 선계(先系)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강숙(康叔)의 후손인 훠(咺)이 원현(元縣)을 다스렸으므로 그 지명(地名)을 따서 천자(天子)가 원(元)이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하고있다.
원경(元鏡)이 고구려에 와서 원주원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지만 세구무징(世久無徵)함으로 고증(考證)하기 어려워 약(略) 천여년(千餘年) 동안을 동본동성(同本同姓)이면서 각기(各其) 다른 시조를 모시고 창보통족(創譜統族)을 하였으니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로다.
그러므로 西紀1985년 을축보(乙丑譜)때에는 사계(四系)의 원로와 중진이 한자리에 모여 합보통족(合譜通族)하기로 뜻을 모아 결의하고 고증을 찻고 수보(修譜)가 거의 마무리 될 단게에 일파(一派)의 종족이 고증이 너무 소원(疎遠)하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의(反意)를 표현함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이러므로 다만 운곡계(耘谷系)만이 종전대로 원경을 시조로 모시고 42~3세(世)를 전하고 원성백계(原城伯系)는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원극유(元克猷)를 시조로 모시고 36~7세를 전하고 충숙공(忠肅公) 원충갑계(元冲甲系)는 을축보때에 원성백계와 합보통족 하였으며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원익겸(元益謙)을 시조로 모시고 32~3세를 전하고 있다.
원주(原州)의 명산 치악(雉岳)은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에는 고려말(高麗末)의 은사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충절의 기개가 서려 있다. 원주(原州) 시내에서 버스편으로 달려 20분 남짓, 돌갱이촌(석순촌(石巡村))에서 내려 치악산(雉岳山) 등성이를 오르면 울창한 송림사이에 ‘고려국자진사(高麗國子進士) 원천석지묘(元天錫之墓)’가 있다. 이끼 오른 돌비석이 홀로 지키고 선 조촐한 선비의 무덤이 그의 청빈했던 일생을 말해 주는 듯하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원주원씨(原州元氏) 문중의 정신적인 지주다. 운곡(耘谷)은 여말(麗末)의 대문장으로 방원(芳遠)(태종(太宗))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정계가 어지럽자 관향인 원주(原州)로 낙향, 치악산(雉岳山) 밑에 숨어 이름을 감추고 한낱 농부가 되어 살았다.
태종(太宗) 원년, 왕위에 오른 방원(芳遠)은 운곡(耘谷)을 정부의 요직에 등용시키기 위해 치악산(雉岳山)까지 행차했다. 그러나 운곡(耘谷)은 왕(王)의 행차 소식을 듣고 치악산(雉岳山) 기슭으로 피신, 끝내 태종(太宗)을 만나 주지 않았다. 지금도 치악산 곳곳에는 운곡(耘谷)의 혼이 깃든 절의(節義)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치악산(雉岳山) 중턱의 태종대(太宗臺)는 방원(芳遠)이 운곡(耘谷)을 기다리며 잠시 쉬었다는 기암이다.
노구소(老嫗沼)는 달아난 운곡(耘谷)을 찾는 태종(太宗)에게 짐짓 다른 방향을 알려준 늙은 여종이 임금을 속였다는 자책감에 투신자살한 연못이다. 그리고 정상 밑 고깔바위 변암(辨岩)은 운곡(耘谷)이 태종(太宗)을 피해 숨어 살았던 바위굴이다.
운곡(耘谷)은 이 굴속에서 돌우물을 파 갈증을 풀고 산채를 뜯어 시장기를 달랬다.
이곳에서 남긴 시조가 바로 5백년 고려(高麗) 왕업에 대한 충정을 읇은 유명한 ‘회고가’다.
일흥망(一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나라.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한 시사(詩史) 2권이 있으며,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曾孫) 때 이르러 국사(國史)와 저촉되는 부분이 많아 불살랐다고 전한다.
이렇듯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를 탐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결의가 곧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문중혼’이라고 원용석(元容奭)씨(75·원주원씨(原州元氏) 중앙종친회장)는 말한다.
원(元)씨의 시조는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원경(元鏡)이다. 그는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 2년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와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파견한 홍경(洪鏡)·지경(池鏡)·신경(辛鏡) 등 ‘경(鏡)’을 이름으로 하는 8학사(學士)중의 한 사람으로 천문·정치·전쟁·도덕론에 조예가 깊었다. 당(唐) 태종(太宗)이 ‘경(鏡)’을 이름으로 하사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거울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원경(元鏡)은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와 국내를 순방하며 만인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여(麗)·당(唐)간의 국교를 회복시킨 공으로 벼슬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선정(善政)을 하던 보장왕(寶藏王)이 차츰 이웃나라를 침해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여(麗)·당(唐)간의 국교까지 깨지게 되자 원경(元鏡)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에 고구려(高句麗)를 버리고 신라(新羅)로 들어가 상빈(上賓) 예우를 받았다.
고려조에 이르러 원(元)씨 문중에서 뛰어난 인물은 고려(高麗) 개국공신 원극유(元克猷)와 원익겸(元益謙)·원충갑(元冲甲)이 있다.
원극유(元克猷)는 고려(高麗) 개국에 기여한 공으로 원성(原城)(현 원주(原州))백(伯)에 봉해지니, 원(元)씨의 관향인 원주(原州)는 그가 봉해진 고을 이름을 딴 것이다.
원익겸(元益謙)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시랑(侍郞)에 올랐던 문장가다.
원충갑(元冲甲)은 충렬왕(忠烈王) 17년 원(元)의 군사가 침입, 원주성(原州城)을 포위했을 떼 별초(별초(別抄)〓정규군대가 아니라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 이름)로서 전후 10차례에 걸쳐 적의 예봉을 꺽어 원주성(原州城)을 사수한 당대의 명장이다.
이들 3명은 시조 원경(元鏡)을 정점으로 이 땅에 원(元)씨의 뿌리를 깊이 내린 원주원씨(原州元氏)의 3대산맥이다. 그러나 원(元)씨는 원경(元鏡)을 시조로 관향을 원주(原州)로 하는 단일본이다.
197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원(元)씨는 전국에 6만6천여명으로 성별 인구순위는 제51위다.
원주원씨(原州元氏) 일문은 고려조에 숱한 현신(賢臣)을 배출, 세력을 떨쳤다. 원부(元傅)는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으며 ‘고금록(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려(高麗) 때 인물로 원충(元忠)과 원훈(元訓)도 빼놓을 수 없다.
원충(元忠)은 약관 8세의 나이로 벼슬길(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에 올라 왕(충선왕(忠宣王))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대언(代言)에 임명되자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한사코 사양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한때 좌천까지 됐으나 훗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원훈(元訓)은 공민왕(恭愍王) 때 방원(芳遠)(조선(朝鮮) 태종(太宗))과 함께 문과에 급제, 왕으로부터 ‘훈(訓)’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고 고문관태학사(古文館太學士)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조선(朝鮮)개국 후 태종(太宗)이 옛날의 인분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봉하려 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고려에의 충절을 지켰다. 그러나 이조(李朝)의 개국과 함께 원(元)씨 가문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운곡(耘谷)선생과 같은 고려(高麗) 충신을 낳은 가문이 이조(李朝)에 와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풀이다. 이조초(李朝初)에 이르러 운곡(耘谷)의 충절과 기개를 이어 원(元)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 유명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다.
그는 세종(世宗) 때 문과에 올라 문종(文宗) 때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가 단종초(端宗初)에 수양(首陽)대군(세조(世祖))이 날로 세력을 떨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原州)에 은거했다. 그 얼마 뒤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좇겨나 영월(寧越)에 유배되자 그는 영월(寧越) 서쪽에 집을 짓고 단종(端宗)을 그리워했다. 마침내 단종(端宗)이 서거하자 홀로 3년상(喪)을 치르고 원주(原州)로 낙향, 두문불출했다.
세조(世祖)의 배려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일생을 이곳에서 마쳤다.
숙종(肅宗) 29년(1703)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정조(正祖) 6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적병을 섬멸한 원호(元豪)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장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경원부사(慶源府使)로 있으며 니탕개(尼湯介)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패주하는 왜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완전 섬멸, 그 공으로 여주목사(驪州牧使) 겸 강원도방어사(江原道防禦使)가 됐으며 금화(金化)전투에서 전사했다. 훗날 병조판서와 우의정에 추증됐다.
이렇듯 이조(李朝) 초기에 내리막길을 걷던 원(元)씨 일문은 그 뒤 인조를 고비로 다시 세력을 떨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두표(元斗杓)다. 그는 아버지 원유남(元裕男)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 공을 세우고 원평(原平)부원군이 되었고 현종조(顯宗朝)에 이르러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명상(名相)으로 세인들로부터 ‘도끼정승’이란 별명을 얻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李舜臣)장군과의 묘한 관계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원균(元均)장군 또한 원주원씨(原州元氏)를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원균(元均)은 교과서식의 기술처럼 겁장(怯將)이었는가. 이순신(李舜臣)을 모함한 간교한 졸장이었는가. 이같은 물음에 그의 후손들은 단호히 반론을 제기했다.
원균(元均)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우자 선조(宣祖)께서 선무(宣武)1등공신(等功臣)으로 서훈(敍勳)했으며, 그와 동시에 좌찬성(左贊成) 원릉군(原陵君)으로 추봉(追封)된 당대의 명장이라는 것이다.
원용석(元容奭)씨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史料)로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선조(宣祖)가 원균(元均)에게 내린 교지(敎旨), 그리고 이재범(李在範)씨(실록(實錄)연구가·인간문화재)가 쓴 논문 ‘원균(元均)을 바로 본다’를 제시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을 함께 당대의 명장(구이일시명장(俱以一時名將))이라고 했고 “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권율(權慄)은 모두 혈전의 공이 있다. 그때 세 장군은 모두 약간의 실책이 있었으나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균(元均)이 후세에 와서 겁쟁이로 기록된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순전히 정치적 야망에 불탄 인사들이 광해(光海) 때 편찬된 ‘선조실록(宣祖實錄)’ 중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부분을 선별적으로 수집해 만든 ‘수정실록(修正實錄)’ 때문(이재범(李在範)씨의 논문요약)이라는 것이다.
특히 ‘수정실록(修正實錄)’ 속의 원균(元均)에 대한 기록은 많은 부분에서 원균(元均)은 악장(惡將)으로 매도한 유성룡(柳成龍)(선조(宣祖) 때의 명상(名相)·이순신(李舜臣)을 전라(全羅)좌도수군절도사로 등용한 인물)의 ‘징비록(懲毖錄)’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원균(元均)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후손들은 입을 모은다.
원인손(元仁孫)과 원경하(元景夏)는 영(英)·정조(正祖)때의 뛰어난 인물이다.
원인손(元仁孫)은 영조(英祖)의 명을 받아 울릉도(鬱陵島)의 형승과 물산(物産)을 그려 바치기도 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원경하(元景夏)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불과 10여 년만에 이조·병조판서에 올랐고 탕팽책의 시행에 있어 각 당파의 인재를 등용한 뒤 당론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그는 뛰어난 문장과 검소한 생활로 이름이 높았고 훗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됐다.
원몽린(元夢麟)은 효종(孝宗)의 6녀 숙경(淑敬)공주와 결혼,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진 뒤 여러 번 도총관(都摠管)을 지냈고 원경순(元景淳)은 예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5~6세부터 명필로 이름이 난 원진해(元振海)는 진사과에 합격, 효종(孝宗) 즉위 전 그의 사부(師傅)를 지냈고 만년에 횡성(橫城)현감이 되었으며 경전(經傳)에 일가를 이루었다.
원심창(元心昌)과 원세성(元世性)은 일제(日帝)의 암흑기에 항일 독립운동으로 원(元)씨 문중의 혼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원심창(元心昌)은 박열(朴烈) 등이 결성한 흑우회(黑友會)의 멤버로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붙들려 사형선고가지 받았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풀려나 초대 재일(在日)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원세성(元世性)은 광무(光武) 2년 황국(皇國)협회 대표로 중추원 참의가 되고 광무(光武) 8년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의 황무지 개척권을 매수하려 하자 송수만(宋秀萬)·송인섭(宋寅燮)등과 보안회를 조직, 군중대회를 열어 이를 규탄했다. 그는 고종(高宗)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투쟁하다 이범창(李範昌)·신영식(申永植) 등과 같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밖에 한말(韓末)의 이름난 인물로 원우상(元禹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세에 무과에 급제,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함경도(咸鏡道)관찰사 등을 거쳐 육군참장경무사(陸軍參將警務使)·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원(元)씨 문중에서는 원용한(元容漢)·원용균(元容均)·원장길(元長吉)씨 등 3명의 제헌의원과 원세훈(元世勳)시(2대민의원·납북)등 모두 4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원용덕(元容德)씨(예비역육군중장·작고)는 자유당시절 헌병총사령관이었다.
원태상(元泰常)(공박(工博)·전(前)서울대(大)교수·작고), 원병오(元炳旿)(농박(農博)·경희대(慶熙大)교수), 원흥균(元興均)(명예문박(文博)·세종대학(世宗大學)총장), 원홍묵(元鴻黙)(정박(政博)·전상지대(前尙至大)학장)씨 등은 ‘원주원(原州元)’이 낳은 석학들이다. 원태상(元泰常)시는 한국(韓國)의 제1호 물리학박사다. 그는 52년 서울대(大)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3년간 서울대공대(大工大) 교수로 재직하면서 숱한 후학들을 배출했다.
주요 세거지
원씨(元씨)가 강원도 원주(原州)땅에 터를 잡게 된 정확한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7세 원방보(元方甫) 이래로 원주(原州)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켜왔으므로 이 무렵부터 그곳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7세 원맹량(元孟良)의 자손들은 20세 원흥(元興)의 대를 전후하여 함남 신흥(新興)에 정착하였던 것 같다.
원맹량(元孟良)의 동생인 원방보(元方甫)의 자손들은 원주(原州)와 지금의 여주(驪州) 등지에서 살다가 11세 원맹수(元孟穟)의 후계(後系)가 14세 원강(元杠)이래로 황해도 안악(安岳)·옹진(甕津), 경기도 고양(高陽)에, 16세 원유(元悠) 이래로 황주(黃州)·해주(海州), 경남 창원(昌原), 충북 중원(中原) 등지로 나뉘어 정착하였고, 다시 20세의 대 이후에 황해도 송화(松禾)·봉산(鳳山)·신천(信川), 제주(濟州), 경북 군위(軍威)·의성(義城), 경남 거창(居昌)·합천(陜川), 평남 용강(龍岡) 등지로 산거해갔다.
또한 원중수(元仲穟)의 후계(後系)는 16세 원득신(元得信)·원시발(元始發) 이래로 함북 성진(城津)·부령(富寧)에, 12세 원순례(元順禮) 이래로 경원(慶原)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 같고, 11세 원계수(元季穟)의 후계(後系)는 12세 원월춘(元月春)의 대부터 16세 원월봉(元月鳳)의 대에 걸쳐 함남 영흥(永興)·고원(高原)에 터를 굳혔다고 믿어진다.
10세 원효이(元孝而)의 자손들은 11세 원중비(元仲秠)의 후계(後系)가 원주(原州)와 20세 원경오(元景五)·원득형(元得亨) 이래로 강원도 횡성(橫城), 충남 당진(唐津), 전남 장성(長城), 경북 선산(善山) 등지에 많이 살았고, 원중거(元仲秬)의 후계(後系)는 13세 원계관(元繼寬)이 벼슬에서 물러나 전북 남원(南原)으로 퇴거(退去)한 후에 자손들이 그곳에 세거해 온 사실이 ‘을축보(乙丑譜)’에 보이며, 일부는 16세 원승길(元升吉) 이래로 전북 진안(鎭安)과 경기도 시흥(始興)에, 17세 원만재(元萬載) 이래로 충남 당진(唐津)에 정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원중육(元仲稑)의 후계(後系)는 여주(驪州)와, 16세 원두실(元斗實) 이후에 충남 부여(扶餘)와 14세 원형(元亨) 이후에 횡성(橫城)에, 15세 원중섭(元仲涉) 이후에 창녕(昌寧)에 나뉘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元亨)의 맏아들 원사봉(元士鳳)이 인조조에 처자(妻子)를 이끌고 안변(安邊) 사현(沙峴)땅으로 가 살았으므로 일부 자손들이 이 무렵부터 그곳을 세거의 터로 지켜왔다고 믿어진다.
10세 원효의(元孝矣)의 자손들은 원효의(元孝矣)의 아들 원무진(元茂稹)의 대를 전후하여 평남 성천(成川)과 순천(順天)의 자산(慈山)에, 12세 원자겸(元自謙) 이래로 횡성(橫城)에 터를 굳혔다.
한편 9세 원호(元昊)의 자손들 중에서 11세 원백온(元伯縕)의 후계(後系)는 지금의 경북 달성(達成), 경남 진주(晋州)를 거쳐 14세 원평(元平)의 대부터 거제(巨濟)에 정착·세거했으며, 원중온(元仲縕)의 후계(後系)는 서흥(瑞興)에, 원백온(元伯縕)의 후계(後系) 원백기(元伯綺)의 아들 원응보(元應保)의 대 이후에 영월(寧越)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또한 11세 원맹강(元孟康)의 후계(後系)가 경기도 광주(廣州)에, 원중강(元仲康)의 후계(後系)는 여주(驪州)와 14세 원천령(元千齡) 이래로 홍천(洪川)에, 16세 원만희(元萬熙) 이래로 황해도 연백(延白)에 나뉘어 살았으며, 원중강(元仲康)의 동생인 원숙강(元叔康)의 후계(後系)는 원숙강(元叔康)의 아들 원자정(元自貞)·원국(元國)이 예종조 기축년(己丑年)에 어머니를 모시고 정평(定平)으로 가 자리잡은 이후 정평(定平)·단천(端川)·북청(北靑) 등지에 산거하였다.
11세 원계강(元季康)의 후계(後系)는 14세 원의준(元義俊) 이래로 충남 공주(公州)와 15세 원사현(元思賢) 이래로 강원도 인제(麟蹄)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그밖에 16세 원종민(元宗敏) 이래로 경북 경산(慶山)의 자인(慈仁), 전남 나주(羅州)에도 일부 자손들이 살게 되었고, 8세 원호(元昊)의 자손들은 원국(元國)의 대부터 정평(定平)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경기고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강천면(康川面), 평택군(平澤郡) 송탄읍(松炭邑),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쇄천면(洒泉面)·수주면(水周面), 원성군(原城郡) 판부면(板富面)·지정면(地正面)·건등면(建登面), 횡성군(橫城郡) 횡성읍(橫城邑), 전북 진안군(鎭安郡) 상전면(上田面),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도면(道面), 안악군(安岳郡) 문산면(文山面), 장연군(長淵郡) 순택면(蓴澤面), 평남 순천군(順川郡) 봉명면(鳳鳴面), 성천군(成川郡) 삼덕면(三德面)·쌍룡면(雙龍面), 평북 귀성군(龜城郡) 사기면(沙器面)·천마면(天麻面)·노동면(蘆洞面), 함남 함주군(咸州郡) 상기천면(上岐川面), 정평군(定平郡) 정평면(定平面), 북청군(北靑郡) 북청읍(北靑邑)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은 시조 원익겸(元益謙)의 10대손 원중육(元仲稑)이 뿌리를 내린 이후 4백여년동안 지켜온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여주(驪州)에 터를 잡고 살았던 다른 성시들에 비해 산소치레에 정성을 들였던 탓에, 산소도 오래도록 잘 보존되어 있고 자손들도 고향을 지키며 번성하게 되었다는 곳이 북내면(北內面) 장암리(長岩里)의 원씨(元氏)마을이다.
이 마을 소달산(蘇達山)에는 원중육(元仲稑)의 증손(曾孫)인 충장공(忠壯公) 원호(元豪),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던 원두표(元斗杓)를 비롯하여 이후 10여 대의 산소가 나란히 누워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매년 음력 10월12일에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재실 소산사(蘇山祠)가 자리잡고 있다.
출처: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08672
첫댓글 와.....상세하게 잘정리된 자료이네요.....잘 보았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