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 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 소반에 만산홍엽을 내 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남해경(南海經) / 나금숙
정월 그믐 땅끝마을에서는 바다보다 하늘이 더욱 깊다
황도 십이궁을 건너가는 수레바퀴 소리에 점점이 놓인
섬들이 몸을 뒤척이고 서너 길 되는 우물 속으로 동백은
무거운 꽃잎을 떨어뜨린다 이쯤 와서야 발 씻겨 주는
내 눈 속의 바다 내 눈 속의 바다 우리들이 부려 놓은
마음이 얹혀 토말 한 자락이 기우뚱해지는데 아찔해진
동백나무가 부여잡는 하늘에 샛별 혼자 맑고 싸늘하다
된 슬픔에 쏘여 동백 가지 찌르르하다 신열이 오르는
붉은 등 붉은 쉼표를 내다 걸고
정밀(靜謐) / 나금숙
호두나무 큰 키 그늘이 넓다
햇빛 쪽으로 그늘 찍어 나르는 왜콩풍뎅이
돌아오는 발끝이 환하다
빛과 그늘이 서로 들락거려
나무는 몸속으로 길이 생긴다
불개미들이 줄지어 드나들며
나무의 부드러운 살을 물었다 놓는다
치어 꼬리같은 잎에 힘이 주어진다 흠칫 뒤척인다
맥문동 범부채 닭의장풀 우거지는 소리 아래
초록에 눈 먼 어린 암사마귀 제 수컷을 한 입 깨어 문다
먼 들판 기지개 켜는 소리
산호두나무 그늘이 깊어 간다
노란 꽃가루 묻힌 바람이
쉬엄쉬엄 십리를 간다
등천(登天) / 나금숙
긴 방황도 여기 와 걸리면 한 장 그림이다
잣나무 가지 건너다니는 새, 산문(山門) 위에
날아가 쉬기도 하는 분홍 발톱이 넘나들지 못하는
내 오랜 망설임을 물고 떠오른다 두 날개에 얹히는
무게를 치밀고 오른다 헤쳐가야 할 말씀의 깊이
더욱 육중해 오고 단단한 그 몸피에 온몸으로
부딪다가 그만 봄 공기속으로 미끄러지는 새,
높이 오르려는 새여. 네 추락에 숲에 갇혔던
향이 멀리 가는구나 빛의 탄환들이 봄의 운두를
스치고 쏟아지는 한낮에
침묵의 입 / 나금숙
수상생활을 하는 바자우족 마리아는 배 위에서
셋째를 낳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배 위에서 산 일생이
그때서야 외딴 섬 깊은 흙 속에 안식했습니다
음악행상에게서 노래를 사서
노란 비밀을 노래에 숨겼어요
노래를 들으면
비밀이 향기처럼 흘러나옵니다
눈도 안 뜬 아기를 두고
흙 속에 묻힌 마리아
죽어가는 어린 돌고래를 등에 업어
숨 쉬게 하는 어미돌고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노래를 사서 노래에 침묵을 숨겼어요
보호종료가 끝나 보육원을 떠나는
열여덟 살 은이는
어디로 가야 하지요?
마음의 근육 기르기에 좋다는
오래된 차밭을 찾아가는 길
왜 슬픔을 먹는 포식자는 없는 걸까요
새벽에 보는 죽은 이의 전화번호
페북 속 환한 얼굴이
깨달음은 늘 뒤늦게 온다고 속삭입니다
고요한 시간
시간의 등 뒤에 서 있으면
침묵의 중얼거림
침묵에도 입이 있습니다
[ 나금숙 시인 약력 ]
* 나주 출생.
* 2000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 시집 『그 나무 아래로』 『레일라 바래다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