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 중원스님(불교 TV 인터뷰 다큐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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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
돈오점수 설파한 근대 선승
1951년 3월 22일 입적
한암 스님은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이라고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근대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일명 ‘오대산 도인’, 오대산의 학(鶴)이라 불린 한암 스님은 27년 간 일체의 외부출입을 금하며 오로지 수행에 매진해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수많은 납자들에게 존경받아온 시대의 선지식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 스님은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나 한번 의문이 나면 답을 구할 때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경허 문하서 수행 정진
스님은 22세가 되던 해 소시적부터 궁금했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수행이라는 결론을 내고 행름(行凜) 노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수도를 시작한 한암 스님은 진정한 나를 찾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며, 극락에 가겠다는 세 가지 원을 세운다.
이후 스님은 1899년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선사를 만나 설법을 듣고 전법제자가 돼 수년간 문하에서 참선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은 청정율의(淸淨律儀)를 하며 참선수행 하는 납자들을 위해 선(禪), 염불(念佛), 간경(看經), 의식(儀式), 가람수호(伽藍守護) 등 승가 5칙을 제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고로는 『선문답 2조』, 『참선곡』등이 있다.
41년 조계종 초대 종정
50세가 되던 1925년에는 봉은사 조실로, 1941년 조계종이 출범됐을 때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돼 4년 동안 조계종을 이끌기도 했다.
75세 되던 해, 한국전쟁 당시 모든 사찰을 소각시킬 때 한암 스님이 계신 상원사만이 불타지 않은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때 유엔군의 총알이 스님의 장삼을 뚫어도 꼼짝 않고 좌선삼매에 드니 용무생사의 경계에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진설명>돈오점수를 설파한 근대 선지식 한암 스님의 좌탈입망 모습.
1951년 3월 22일, 스님은 자신의 세연이 다했음을 알고 깨끗한 가사와 장삼을 수 한 뒤 정좌를 하고 그 모습 그대로 좌탈입망했다.
출처 : 법보신문 | 기사등록일 2004년 03월 22일 | 안문옥
“천고에 자취 감춘 鶴이 될지언정…”
방한암(方漢岩) 큰 스님은 조선조 말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때 우연히 금강산 구경길에 나섰다가 장안사(長安寺) 행름노사를 만나 삭발 출가하였다.
24세 때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 경허대선사를 청암사에서 만나 『금강경』을 배우던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개안(開眼)의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통도사를 거쳐 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 있는 우두암에서 홀로 참선수행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부엌에서 불 지피다/홀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인연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젖는 일 없다 하리.
이 때 한암 스님의 세속 나이는 35세.
“한암 아니면 누구와 지음(知音) 되랴”
한암 스님이 해인사에서 머물고 계실 때, 스승이신 경허 선사께서 정처없는 만행길에 올라 해인사에 오셨다. 경허 선사는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 해인사를 떠나면서 한암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글 한 편과 시(詩) 한 수를 지어 한암에게 전했다.
“나는 천성이 화광동진을 좋아하고 더불어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내다 우연히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선행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인양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서게 되니, 아침
저녁의 연운과 산해(山海)의 멀고 가까움이 진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차 있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詩)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못한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렵지 않지만
뜬 목숨 흩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이 간절한 스승의 글과 시를 받아 본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스승께 바쳤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지나갔건만
어찌하여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없을까.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 달
뜬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오.
그리고 한암 스님은 스승 경허 선사와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감히 짐작이나 했으랴.
“재물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한암 스님께서 한강 건너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었다.한번은 한암 스님께서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참배길에 오르셨는데, 이 때 시봉을 들고 있던 수좌는 성관이었다.
지금은 드넓은 다리가 두 곳에 놓여서 강화도 가는 길이 편하지만 당시에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지기 전이라 배를 타고 건너다닐 때였다.
우선 김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수십리길을 걷고 걸어서 길상면 전등사까지 가자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버렸다. 게다가 비까지 억수로 퍼부었다.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색하기 그지없는 부잣집이었다. 그 부잣집 주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스님께 빈정거렸다.
“스님들은 탁발을 나오기만 하면, 보시하라, 나누어 주어라, 그러시던데, 재산이 좀 있다고 해서 허펑허펑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안 쓰고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게 옳겠습니까? 어디 한 번 대답을 해보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잣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주인 어른께서는 오른손을 한 번 펴보시지요.”“손을 펴라니, 이렇게 손가락을 펴란 말씀이십니까?”“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손가락을 쫙 펴셨는데, 그 손가락을 오무리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편 손을 오무리지 못하면 불구입지요.”“그럼 이번에는 주먹을 한 번 쥐어보시지요.”“이, 이렇게 말씀입니까?”“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주먹을 꼭 쥐셨는데,
이 손을 펴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입니까, 아닙니까?”“아, 그야 주먹을 펴지 못하면 그것도 불구입지요.”“재물도 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재물도... 그와 같다니요?”
“재물도 덮어놓고 허펑허펑 허비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재물을 덮어놓고 움켜 쥐고만 있으면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닙니다. 손을 펼 때 펴고, 오무릴 때 오무릴 수 있어야 정상이듯이, 재물도 또한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한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난 그 부잣집 주인은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었다.이 때 강화도 전등사와 보문사를 참배하고 봉은사로 돌아오신 한암 스님은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홀연 봉은사를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동구밖 출입을 끊어버리셨다. 이 때 봉은사를 떠나시면서 저 유명한 한 말씀을 남기셨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 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출처 : 법보신문 | 윤청광
"경전 외면하는 선승들… 한암 스님 죽비 맛 좀 보렸다!" '한암사상과 조계종의 정체성' 세미나 7일 조계사서 참선에 치우친 현실서 '돈오점수'의 엄정한 선풍 재조명
"자,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불을 지르시오."
노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차려 입고 불상 앞에 좌정한 채 장교에게 말했다.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 국군의 오대산 상원사 방화를 막은 주인공으로 소개된 바로 그 노스님, 한암(漢岩ㆍ1876~1951) 선사의 사상과 가르침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오대산 한암문도회(회주 현해 스님)와 월정사(주지 정념 스님)가 5월 7일 서울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여는 '한암사상과 조계종의 정체성' 세미나는 참선에 치우쳐 계율과 경전을 경시하는 오늘날의 이완된 선풍(禪風)을 바로잡자는 취지다.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의 제자 가운데서도 한암 선사는 직계 제자인 만공 선사와 함께 그 법맥을 가장 온전히 계승한 전법제자로 꼽힌다.
일찍이 경허는 서른 살이나 어린 한암과 이별하며 "슬프다! 은밀스런 원개사(遠開士ㆍ한암을 존대해 부른 칭호) 아니면 내가 누구와 지음(知音)이 되랴!"라며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한암은 경허의 법맥을 잇되, 파계를 넘나들며 대자유의 활달한 무애행을 펼친 경허의 선풍을 그대로 좇지는 않았다. 참선을 하되 계와 율을 따르고,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엄정한 선풍을 독자적으로 일구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의 이 같은 입장은 보조국사 지눌 이래 정혜쌍수(定慧雙修ㆍ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음)를 기치로 선교(禪敎)의 균형을 추구해온 전통 선풍을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그가 경허 사후 만공의 부탁으로 '경허집'을 편찬하면서 "뒤에 배우는 이들이 경허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이(行李ㆍ행위)를 배우면 안 된다"고 경계한 것도 이런 입장에 따른 것이다.
반면 최근 선풍에 큰 영향을 미친 성철 스님은 생전에 "책은 독약이니까 읽으면 안 된다"는 표현까지 썼다. 이런 분위기가 암암리에 산림선방을 감돌고 있다는 것이 한암문도회의 지적이다.
정념 스님은 "만 권의 책을 읽으신 성철 큰스님의 경우는 섣부른 문자가 치열한 선정(禪定)을 방해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 경전을 외면하라는 뜻은 아닌 것으로 안다"며 "한암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도 높은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미나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이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한암 선사가 승려들의 본분으로 제시한 '승가오칙'의 뜻을 새기고, 동방불교대학원 교수인 인경 스님이 한암 선사의 '선문답 21조'를 집중 분석한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종조관(宗祖觀)을 통해 전통 선맥에 대한 한암 선사의 입장을 재조명한다.
한암 선사는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입적 때까지 27년간 불출했다. 월정사는 최근 세미나 개최에 맞춰 한암 선사가 1931년 탈고한 '경허집' 육필원고를 소장자로부터 기증받아 영인본으로 한정 발간했다.
출처 : 한국일보 | 입력시간 : 2009/04/30 | 장인철 기자
한암 스님의 선문답 21조
조계종 초대 종정 방한암(方漢岩 1876~1951) 대종사의 문집(제명: 마음달)이 새롭게 꾸며져 발간되었다. 새 문집은 기존의 한암집(명정스님刊)과는 달리 월정사(주지 : 현해) 문도들이 총동원 되다시피해 1년 여에 걸쳐 흩어진 자료를 모아 엮은 것으로 한암집에서 미처 발굴치 못했던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암 대종사는 생전에 허명(虛名)과 난설(亂舌)을 특히 경계하여 가급적 저술을 삼가했고 그 흔한 법어집조차 남기지 않았으며 27년 동안 山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라서 이번 문집의 간행은 더욱 의의가 크다. 특히 새 문집의 백미(白眉)라 할 「선문답21조」는 간화(看話)와 반조(返照)의 필요성, 구경의 경지등을 간명직절하게 규명한 것으로 수행에 힘쓰는 후학들에게 더 없는 보감(寶鑑)이 아닐 수 없다.
선문답21조의 원문은 한자로 되어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금강선원원장 혜거스님의 번역문을 싣는다.
제1문 > 참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참선을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 달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禪)이다.”고 하시니, 선(禪)이란 곧 중생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중생심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하나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물든 마음은 무명삼독(無明三毒)의 마음이요, 청정한 마음은 무루진여(無漏眞如)의 본성이다. 무루진여를 염하고 불이(不二)를 수순(隨順)하는 것은 제불(諸佛)과 같아서 동요가 없는 해탈이요. 무명삼독을 쫓아서 많은 악업을 지은 자는 육취(六趣)에 빠져 영겁에 윤회하는 것이니, 청정한 마음은 사람의 바른 길이요 편안한 집이며, 물든 마음은 사람의 험한 길이요 불구덩이이다.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바른 길을 버리고 편안한 집을 비워둔 채 험한 길로 나아가며 불구덩이에 빠져 만겁의 괴로움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참(參)이란 합(合)함이니, 자성에 합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양(保養)하고 바깥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음이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아서 다시는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속히 불과(佛果)를 증득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제2문> 이미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답 > 참선을 하는 사람이 일단대사(一段大事)의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면, 맨 처음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마음이 법이며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음을 믿어서 철저하게 의심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비록 만겁동안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정한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조선사3)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여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고집하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진겁(塵劫 :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燒身然臂)하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묘시(09~11시)에 일종식(一種食)을 하며, 그리고 일대장경(一大藏經)을 모두 읽으며, 갖가지 고행을 한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기에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제일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곧 외불(外佛)이니, 나에게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諸佛)이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제3문> 이미 초심(初心)을 지녔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진실한 참구가 됩니까?
답 > 상근기(上根機)의 큰 지혜를 가진 이는 하나의 기연과 경계에서 이를 잡아 곧바로 사용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일 참구를 논한다면 마땅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와, 동산(洞山)의 '마삼근(麻三斤)과, 운문(雲門)의 '마른 똥 막대기'<乾00*> 등 맛이 없는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이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마치 모기가 무쇠 소에 앉아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까지 몰입하듯 하여야 한다.
만일 조그마한 차별의 생각과 터럭 끝만한 계교와 헤아림이 그 사이에 동하면, 옛 사람이 말한 “잡독이 마음에 침투하여 지혜를 손상한다.”함이니 학인이 가장 먼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옹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滅)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니, 생사의 즈음에 당하여 힘을 다해서 화두(話頭)를 들면 생사가 곧바로 다할 것이니, 생사가 곧바로 다한 것을 적(寂)이라 한다. 적(寂)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적(寂) 가운데 화두가 어둡지 않는 것을 영(靈)이라 말하나니,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부서짐이 없고 혼잡됨이 없으면 곧 바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학인은 이 말을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제4문> 이미 여실(如實)히 참구하였다면,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힘을 얻은 것입니까?
답 >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힘이 안 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이다.”고 하니, 화두가 의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짐에 이르러서야 육근(六根)의 문이 자연히 툭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며,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 마치 달빛이 시내 물결 속에 투사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흔들려도 잃지 않음과 같은 때에 이르러야 대오(大悟)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터럭 끝만큼이라도 지각의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한 오묘함이 끊어져서 대오(大悟)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간절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제5문> 이미 여실하게 힘을 얻었다면, 반드시 깨달음이 철저<大悟徹底>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입니까?
답 >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분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은 법이 없을지언정 깨달은 법이 있으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하였고, 또 다시 “깨달으면 도리어 깨닫지 못했을 때와 같다”고 하니, 만일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있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운(靈雲) 선사가 복사꽃을 보고 깨우친 것과, 향엄(香엄) 선사가 위산(*山)에게 절을 올린 것과, 현사(玄沙)스님이 손가락을 접질린 것과, 장경(長慶) 스님이 주렴을 걷어 올렸던 것 등의 많은 큰 스님들이 깨쳤던 일은 모두 거짓으로 전해온 것일까?
앙산(仰山) 이 말하기를.
“깨달음이란 없지 않으나 제 2의 경지가 됨을 어찌하리오”라고 말하니, 절반 쯤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현사(玄沙)스님이 말하기를.
“감히 노형을 보니 아직은 철저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니, 실로 노파심이 간절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를 알 수 있을까?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게송을 읊었다.
해천(海天)에 밝은 달이 처음 솟아난 곳에 암벽의 원숭이 울음 그칠 때.
제6문> 이미 깨달음이 철저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수양(修養)입니까?
답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관문을 지난 자는 굳이 다시 나루터를 물을 것이 없다.”고 한다. 이미 깨달음이 철저하다면 어찌 수양을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구름과 달은 한가지이나 시내와 산은 각기 다르니, 또한 아래 문장의 주해를 들을 지어다.
한 줌 버들가지 거두지 못하여 봄바람에 날리어 옥 난간에 실려 있다. 把柳條를 收不得하야 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제7문 > 이미 수양(修養)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증득(證得)입니까?
답 >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잣나무도 또한 성불을 할 수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있다!”
“어느 때 성불할 수 있습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때 허공이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는 옛 사람이 무생(無生)의 도리를 철저하게 깨쳐서 거꾸로 사용하고 마음대로 들어 쓰는 시절이겠지만, 오늘 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 허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잣나무가 성불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고 이르시기를.
“하마터면 주해를 잘못 쓸 뻔했다.”
제8문 > 이미 증득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히 원만하게 끝을 잘 맺는 것입니까?
답 >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앞에는 스님이 없고 여기에는 노승이 없으니, 이는 눈앞의 법이 아니오 이목(耳目)으로 이를 바 아니다.”고 하니, 제방의 선지식들이 이 말을 가지고서 어떠한 사람의 경지인가를 말들 하곤 한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모두 다 잊어 버렸노라.
제9문 > 처음 발심으로부터 끝을 잘 맺는데 이르기까지, 어떠한 마음이 제일 긴요하며 귀중한 경구(警句)가 되는 것입니까?
답 > 석두화상의 <참동계(參同契)> 맨 끝 구절에
“삼가 참선인에게 고하노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후일 법안(法眼)19)스님이 이 말을 들어 말하기를,
“여실한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고 하셨다. 나 또한 여실한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소식인가.
한 차례 큰 기침을 하고서 게송을 내렸다.
달큰한 복숭아와 감을 먹지 아니하고 산을 따라 올라가 시큼한 배를 따노라. 不喫甘桃枾하고 緣山摘梨니라.
제10문 > 간화(看話)와 반조(返照)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매양 참선인들이 서로 논쟁하니, 바라건대 자상히 논변하여 밝혀 주소서.
답>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위에서 물은 바는 엇비슷이 곡조가 같아서 들을 만 하지만, 여기에서 물은 뜻은 또다시 바람이 별조(別調)로 부는구나. 하지만 나의 한 마디 말을 들어보아라.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넘에 흐르는 물을 가로지르니 토끼와 말이 밑바닥에 닿지 못함을 관계치 말라.
알겠는가. 만일 알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 날 그대들과 더불어 자세히 말하리라.
옛날에 앙산스님이 위산20)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부처<眞佛>의 주처<住處>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과 생각이 없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반조(返照)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면, 성품과 법상(法相)이 상주(常住)하여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요, 진불(眞佛)이 여여하다.” 앙산이 그의 말에 곧바로 대오(大悟)하였다. 그 후 심문분(心聞賁)21) 선사가 이 화두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생각과 생각이 없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생각의 무궁함을 반조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시 무슨 정결한 병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시끄러운 티끌 속에 들어가서, 거스르고, 순응한 들 무엇이 물들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성나게 하리오. 그러한 이후에 밝음과 어둠 두 가지를 철저하게 타파하여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곳을 향하여, 대비원(大悲院)에서 재화(齋話)가 있다는 화두를 간파하여야 바야흐로 유래(由來)를 알 수 있으며, 바야흐로 낙처(落處)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한 쪽 눈만으로도 산하대지를 조파(照破)하니, 마치 하늘에 장검을 빗겨든 것 같아서 어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이와 같은 힘이 있어야만이 바야흐로 능히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서 인행(因行)을 부지런히 닦아 자비와 지혜의 원력을 성취하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이로운 법문도 또한 오직 이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고 별도로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신령스런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대비원(大悲院)에서 재화(齋話)가 있다는 것을 본다.”는 것이 화두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앙산은 “신령한 불꽃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말에 이미 대오(大悟)하였거늘, 심문분(心聞賁)선사는 무엇 때문에 다시 화두를 관(觀)하도록 하였을까?깨달음을 얻은 자가 모두 앙산과 같다면 다시 말할 것이 없으려니와, 만일 앙산의 깨달은 바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견(知見)이 없어지지 않아서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오(大悟)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문분(心聞賁) 선사가 반조하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처럼 특별히 말한 것이다.
또한 고봉(高峰)22)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들다가 ‘죽은 시체를 끌고 다닌다.’는 언구(言口)를 타파하여 대지가 잠기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서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지만, 설암스님의 ‘잠잘 때에 꿈도 없고 생각이 없는 곳에서는 주인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곧 바로 대답할 말이 없고 말할 수 있는 이치가 없었다. 설암스님이 다시 나에게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이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入命)을 하는가.’를 관(觀)하도록 하였는데, 결국은 함께 잠자는 도반 스님이 목침을 떨어 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그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이 툭 트이어 한 생각에 작위가 없어지고 천하가 태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그 사람이오, 옛날의 행리(行履)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일귀하처(一歸何處)’는 화두(話頭)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보라’는 것이 반조(返照)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고봉은 이미 ‘일귀하처’에서 굳건히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는데, 설암스님은 무엇 때문에 힐책하여 다시 ‘일각주인공’을 보도록 하였을까?이는 특별히 화두를 보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준 것이니, 과연 무엇이 우수하고, 무엇이 열등하며, 무엇이 원만하고, 무엇이 편벽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깨달음이 철저하고 못함이 사람의 진실과 허위, 구경(究竟)을 얻었느냐와 못 얻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방편의 우열(優劣)과 심천(深淺)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삼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상에서 부질없이 이견(二見)을 내어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종고(宗?)23) 선사가 영시랑(榮侍郞)에게 보내는 답서에 이르기를.
“다만 일상생활의 인연이 있는 곳에서 무시로 살피되, 내가 타인과 더불어 명쾌히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끊어버림은 누구의 은혜를 입은 것이며, 필경 어느 곳에서 유출되었는가를 살피고 살핀다면 평소 생소한 곳이 스스로 익숙해질 것이니, 생소한 곳이 익숙하여지면 익숙한 곳은 도리어 생소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이 익숙한 곳인가. 5음(五陰), 6입(六入),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25유(二十五有),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하는 심식(心識)이 밤낮으로 아지랑이처럼 번뜩여서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하나의 끄나풀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케 하며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지만, 이 하나의 끄나풀이 이미 생겨나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문득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다. 현전(現前)한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현전(現前)한 사량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서 말하기를.
“눈에 응한 때에는 일천 개의 태양이 비춤과 같아서 만상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귀에 응한 때에는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크고 작은 소리가 족히 응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데에서 구하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은 것이다. 자연히 인연에 응할 때에 활발하고 활발한 것이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세간의 속된 일을 사량(思量)하는 마음으로,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을 돌이켜서 사량하여 보아라. 어느 곳이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인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이 하나의 글자에 어떠한 기량이 있는 것일까? 청컨대 안배하여 헤아려 보도록 하라. 계교와 안배를 놓아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뱃속에서 번민하며 마음에서 번뇌할 때가 바로 좋은 시절이어서 제8식(第八識)24)이 서로 차례로 행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때에는 놓아 버리지 말고 다만 ‘무자(無字)’를 들어야 한다. 이를 들어오고 이를 들어가면, 생소한 곳은 스스로 익숙하고 익숙한 곳은 스스로 생소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일용 인연처에서 살피고 살피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사량진로(思量塵勞)의 마음을 가지고서 ‘무자(無字)’상으로 돌아가 이를 들어서 놓지 않는 것이 화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종고선사 또한 사람들에게 반조하는 법을 가르쳤고, 겸하여 화두 드는 법의 대략을 보여주었으니, 다만 그 법의 대략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분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보리열반과 진묘여불성(眞妙如佛性)이 문득 분명하게 드러나서 스스로 생소한 곳은 스스로 익숙하여지고 익숙한 곳은 스스로 생소하여진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살펴 본다면, 화두를 드는 것과 반조하는 두 가지의 공부에서 그 효험을 얻음이 어찌 깊고 얕음이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와 같이 가르쳐 준 기연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어 말할 수는 없으나 모두 반조와 간화(看話)로써 차별상을 가지지 않았거늘, 오늘 나의 학인들이 서로가 공격하여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이 처럼 배워 왔는가.
혹자는 본분화두에 따라서 여법(如法)히 참구하다가, 조금 쉬어진 곳이 있으면 곧 만족하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조금 이로(理路)를 섭렵해 보았다 하면 곧 이를 쓸어버리고자 하여 발자취를 없애니, 이는 불조(佛祖)의 가르침 가운데 무한한 방편이 모두 의리(義理)에서 나와서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 사람들을 위하여 철저하게 큰 방편을 삼은 줄 알지 못하니, 이러한 사람들은 냉담무위(冷淡無爲)의 깊은 구덩이 속에 빠져 꼼짝도 하지 못한 자이다.
혹자는 반조의 법문으로써 여실히 참구하다가, 조금이라도 응집된 기미가 있으면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기특한 생각을 가져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도리를 말하고 지견을 나타내니, 이는 납승가(納僧家)의 본분정령(本分正令)이 부처를 삶고 조사를 삶으며, 뼈에 사무치고 골수에 사무쳐 거듭거듭 모조리 명근(命根)을 끊어버리는 참수단인 줄 알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문호(門戶)의 빛과 그림자를 잘못 알아서 구경(究竟)의 안락처로 삼은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하고서 방치한다면, 우리 부처님의 바른 종지가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애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그대가 물은 바는 때에 맞게 힘써야 할 일을 바로 알고서 물은 것이라 하겠다. 내 비록 얄팍한 지식에 공부한 게 없으나 어떻게 한 마디 말로 분명한 것을 가려서 말류(末流)의 폐단과 고질병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하기를,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학인은 다만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사구(死句)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가 없고 재미와 모색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는 도인이 반조와 간화를 막론하고 여실히 참구하는 것은, 마치 서로 한덩이의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불 태우게 된다. 모두 불법의 지혜를 조처할 곳이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화두니, 반조니, 같으니, 다르니 하는 허다한 것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 투철하게 관조하여 남음이 없으면, 백천 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을 구하지 않고서도 원만하게 얻어서 여실히 보고 여실히 행하며 여실히 작용하여 생을 벗어나 죽음으로 들어감에 큰 자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오로지 모든 생각들이 이에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1문> 온 누리의 사람들이 색을 보고 색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떠한 것이 소리와 색을 초월한 것입니까?
(※ 이 아래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의 물음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답 > 성색(聲色)을 초월하여 무얼할까.
(※이 아래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가 공부의 절목(節目)을 물은 것이기 때문에 착어(着語)를 붙이는 데 그칠 뿐이다.)
제12문 >이미 소리와 색을 초월하였다면 반드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니, 어떻게 바른 공부를 해야 합니까?
답> 벌써 삿됨이로다.
제13문 >이미 공부를 하였다면 반드시 공부가 익숙해야 할 것이니, 공부가 익숙할 때에는 어떠합니까?
답 >밥이 익는 것은 그럴싸 하지만, 공부가 익는 것은 아니다.
제14문 > 이미 공부가 익숙하였다면 다시 더욱 콧구멍을 잃어야 할 것이니, 콧구멍을 잃어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답 > 익숙된 공부 이전에도 또한 콧구멍이 있는가, 없는가.
제15문> 콧구멍을 잃어버리면 냉랭하고 담담하여 전혀 맛이 없고 힘이 없어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행하지 않는 이러한 때에도 또한 환신(幻身)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하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시절입니까?
답>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다.
제16문 >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사이가 없고 자나깨나 항상 한결같아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아니하고 방탕하여도 잃지 아니하여,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넘보는 것처럼 핥으려고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할 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절대 자만하지 말라.
제17문 > 갑자기 120근의 짐을 부려버리는 것처럼 졸지에 꺾이고 갑자기 끊어진 때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것이 자성(自性)입니까?
답 > 장한(張翰)이 강동으로 떠나가니, 바로 가을 바람이 불어온 때이다.
제18문> 이미 자성을 깨쳤다면 반드시 본용(本用)과 응용(應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본용과 응용입니까?
답 > 몸을 감춘 곳에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는 곳에 몸을 감추지 말라.
제19문 > 이미 본성의 작용을 알았다면 생사를 초탈해야 하니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죽음을 말함)에는 어떻게 초탈해야 합니까?
답> 잠꼬대 하지 말라.
제20문> 이미 생사를 초탈하였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나누어짐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까?
답 >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제21문>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온다면, 어떻게 제접하시렵니까?
답> 너에게 대도(大道)를 체득하도록 하여줄 것이다.
또 물었다.
“이미 이러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도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답하였다.
“다만 이 하나의 봉합(縫合)을 오히려 어찌 할 수 없다.”
다시 물었다.
“위에서 말한 스물 한 가지의 대답은 철저하고 철저하지만 이후의 한 방망이는 어떻게 상량하시렵니까?”
답하였다.
양화병(養化柄)을 치면서 말하기를,
“무슨 견해를 일으키는가.”
또 물었다.
“나를 잘못 치지 마소서.”
답하였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 .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오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각주*
1) 달마(達磨): (?~528) 범어로는 BodhiDharma라 하고 보리달마(菩리達磨)라 음역하는데, 달마는 그 약칭이다.
2) 육취(六趣): 6도(道)라고도 한다. 미(迷)한 중생이 업인(業因)에 따라 나아가는 곳을 지옥취(地獄趣)·아귀취(餓鬼趣)·축생취(畜生趣)·아수라취(阿修羅趣)·인간취(人間趣)·천상취(天上趣) 등 6처(處)로 나눈 것.
3) 보조(普照): (1158~1210) 고려 승려. 이름은 지눌(知訥)호는 목우자(牧牛子).
4) 조주(趙州): (778~897) 중국 당나라 승려.
5) 무자(無字): 선종(禪宗)의 화두.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조주와 어떤 스님과의 문답에서 유래된 것임.
6)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뜻.
7) 동산(洞山): (807~869)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 조동종은 오늘날 일본에서 융성하고 있다.
8) 마삼근(麻三斤): 선종(禪宗)의 화두.
9) 운문(雲門): (864~949) 법명은 문언(文偃). 운문종(雲門宗)의 시조. 중국의 고소가흥(姑蔬嘉興) 사람.
10) 건시궐(乾屎궐): 선종(禪宗)의 화두. 어떤 승(僧)이 운문(雲門)에게 건시궐(乾屎궐)은 마른 똥 막대기라는 말.
11) 나옹(懶翁): (1320~1376) 고려 공민왕 때 승려.
12) 영운(靈雲): 당나라 복주 영운산(靈雲山)의 지륵(志勒)선사를 말함.
13)향엄(香嚴) : 당나라의 등주 향엄산의 지한(智閑)선사로 위산의 영우(靈祐)선사에게 가서 깨달음을 얻음. 어느 날 작업 중 돌멩이를 주워 던진 것이 대숲에 맞아 ‘딱’하는 소리를 듣고 확연히 깨쳤다.
14) 현사(玄沙): (835~908) 중국 스님. 운문문언의 스승.
15) 장경(長慶): 당나라 승려 혜롱(慧陵)의 법호.
16) 앙산(仰山): (814~890) 법명은 혜적(慧寂). 중국 광동성(廣東省)출생. 위산에게서 법을 받음. 후세에 스승과 제자 두 분이 있던 곳의 두 글자를 따서 위앙종의 이름이 생겼다.
17) 석두(石頭): (700~790) 당나라의 승려. 속성은 진(陳)씨. 희천(希遷)선사의 법호. 출가 후에는 조계에 가서 육조스님을 모셨는데, 육조의 유언으로 청원 행사를 찾아가 크게 깨치고 그의 법을 이었다.
18) 참동계(參同契): 당나라 석두희천(石頭希遷)지음. 5언(言) 44구 220자로 된 장편의 고시(古詩). 선종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현상이 곧 실재라는 이치를 기록한 것. 참은 만법 차별의 현상, 동은 만법평등의 본체, 계는 차별이 곧 평등, 평등이 곧 차별인 묘용(妙用).
19) 법안(法案): (885~958) 선종의 1파인 법안종(法眼宗)의 시조. 법명은 문익(文益). 중국 여항(餘杭) 사람.
20) 위산(僞山): (771~858) 중국 위앙종 초조(初祖). 법명은 영우(靈祐). 속성은 조(趙). 시호는 대원 선사. 복주 장계 사람. 백장(百丈)스님의 법회에 가서 공부하다 크게 깨달았다.
21) 심문분(心聞賁): 생몰연대 미상. 임제종 황룡파, 육왕 개심의 제자.
22) 고봉(高峰): (1238~1295) 원나라의 승려. 속성은 서씨. 이름은 원묘(原妙). 운암(雲巖) 흠(欽)의 법을 잇다. 대오(大悟)후 천목산(天目山) 서봉에 들어가서 사관(死關)을 짓고 은거, 16년 동안을 문턱을 넘지 않고 마침내 57세에 그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 선요(禪要)와 고봉록(高峰錄)을 저술함.
23) 종고(宗杲): (1089~1163)중국 송나라 때 임제종 승려.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 처음 조동종의 여러 스님들을 섬기고, 뒤에 잠당무준(잠堂無準)의 시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원오(圓悟)의 법을 이었다.
24) 팔식(八識): 유식종(唯識宗)에서 나누는 식의 종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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