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26-39, 광풍을 뚫고 광인에게로, 24.11.3, 박홍섭 목사
광풍을 잔잔케 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에 도착했을 때 귀신 들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을 때 바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있었고 무덤 사이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병행 구절인 막 5:1-5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 사람의 주소는 무덤 사이입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집에 거하지 않았고 죽은 자들의 거처인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벌거벗은 체 소리 질렀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해롭게 했습니다. 헤칠 사람이 없으면 자기 몸이라도 돌로 상하게 했습니다. 인간이지만 짐승처럼 살았고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죽은 자들과 다름없는 무덤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벌거벗었는데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고 난폭했습니다. 거칠고 잔인하며 공격적이었습니다. 군대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기 군대는 ‘레기온’이라는 단어로 약 6,000명의 군인들로 구성된 가장 큰 군사조직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만큼 많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중한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쇠고랑과 쇠사슬도 이 사람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고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있습니까? 아무도 이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사회가 그를 포기했습니다. 가족도 포기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포기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과 이 사람의 가족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쇠사슬로 묶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이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발동하는 순간 무력해졌습니다. 그는 귀신의 힘으로 쇠사슬을 끊고 광야로 치달아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에서 오셨습니다. 오다가 광풍을 만났지만, 그 광풍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고 이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거라사의 광인이 만났을 때 이 사람은 평소처럼 예수님의 일행을 공격하려고 달려들다가 갑자기 소리치며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28-29을 보십시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개들은 개장수를 무서워합니다. 아무리 사나운 개도 개장수를 보면 꼼짝을 못 합니다. 자기들을 잡으러 온 개장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시골 동네에 개장수가 오면 개들이 모두 다 함께 짓습니다. 그때 짖는 소리는 “제발 우리를 잡아가지 말라”는 두려움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귀신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귀신 들린 이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엎드러지게 하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귀신 들린 자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대면하고 엎드려졌습니다. 지금껏 그 무덤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절규했지만, 이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제발 우리를 무저갱에 넣지 말아 달라”고 절규합니다.
왜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파도와 광풍을 잠재우신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군대 귀신을 내어쫓고 그들을 영원한 무저갱으로 보낼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귀신들이 이것을 압니다. 그래서 꼬리를 내리고 두려워하면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들을 향하여 명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리고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벌거벗고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던 자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수치를 몰랐던 사람입니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양심이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아주 더럽고 치사하고 거칠고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더러운 영이 나가자 깨끗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양심이 회복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옷을 입었습니다. 예의를 알고, 겸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격이 회복되었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벌거벗고 돌아다니던 그에게 참으로 오래간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예수의 생명이 그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이 일을 큰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이런 큰일이, 이런 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에게 나가라고 했을 때 귀신들이 우리를 무저갱에 들여보내지 마시고 돼지 떼에게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님은 이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많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호수로 내리달아 몰사했습니다. 돼지 떼를 희생시키시지 않고도 능히 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귀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까?
누가복음 8장의 문맥은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맥락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 일을 통해 한 사람이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은 그냥 되지 않고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 영혼이 돼지 2천 마리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영혼 구원이라는 긴급한 일을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한 영혼을 위기에서 건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물건이나 돈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아무 대가 없이 영혼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돼지 떼와 비교할 수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지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자녀가 악한 죄에 빠져 있다면, 그 아이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집을 포기할 수도 있고 직업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사탄의 종 노릇하는 삶에서 건져 구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고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무덤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돼지 이천 마리도 아깝지 않음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거라사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돼지가 졸지에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주기를 구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제발 예수님이 우리 도시를 떠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가 거기에 계시면 자신들의 삶 하나하나가 바로잡힐 때마다 엄청난 재산의 손실이 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은 귀신들린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남자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이들은 돼지와 돼지 떼가 주는 돈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귀신들린 사람의 치료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입은 손실이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구원받은 사실에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일어난 재산의 손해가 더 분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이의 영혼의 구원만큼이나 자신의 영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돼지 떼였습니다. 그 돼지 떼로 움켜질 수 있는 재물만이 관심사였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들도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가시기를 구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두려워서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모든 죄의 습관이나 수입을 다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잃을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인해 얻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돼지 떼를 내어드리면 예수님은 돌려주십니다. 돼지 떼보다 더 귀한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돌려주십니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죄에 빠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돼지를 포기한 적이 있냐고 물으십니다. 돼지 몇 마리라도 포기할 의사가 있냐고 도전하십니다. 나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이 돼지 이천 마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이고 자신들은 돼지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가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보혈의 은혜로 사탄의 종노릇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우리를 통해 거라사의 광인 같은 한 영혼이 구원받고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필요할 때 우리의 돼지를 아끼지 않는 감사의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일을 전하고 선포하는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옮으심을 증거하는 지혜의 자녀들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좋은 밭으로 기경 되어 열매 맺는 인생들로 존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