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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없는 자, 무덤 뿐인 자
(신34:1-12)
오늘 신명기 마지막 34장 <무덤 없는 자, 무덤 뿐인 자>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무덤 없습니다. 모세가.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는 것은 아마 모세가 죽은 뒤에 그 후손 중에 누가 적어서 이 신명기 안으로 삽입해 넣었다고 여겨집니다. 모세가 이렇게 썼을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겨지고, 전체 모세 오경이 이제 오늘 끝나지 않습니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 끝이 나지요?
오늘 창세기로 시작한 모세 오경이 끝남과 동시에 또 모세의 삶도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은 이야기를 통해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불행인지 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게 되잖아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여러분 다 기억하시지요?
가데스의 므리바 물 사건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목 말라서 다시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자 그 불신앙적인 백성들의 마음 상태에 화가 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면서 ‘내가 너희에게 물을 내랴?’ 하면서 소리를 막 지르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신앙이 없다고 야단을 맞습니다. ‘너희가 불신앙적으로 행동하면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모세가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다. 죽었어요. 죽었는데 아무도 그 무덤을 모르게 됐다는 겁니다. 무덤도 없어져 버린 거나 마찬가지지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무덤이 없습니다. 근데 모세는 죽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논리적으로는.. 3,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세는 성경과 더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이 모세와 대조적으로 마지막에 보면 11절, 12절에 애굽 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의 얘기가 나와요.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바로 왕들의 무덤이 다 어떻습니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입니다. 피라미드. 엄청난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삶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믿지 않는 사람들도 웬만큼 정말 뭐 중고등학교 정도 나오는 그런 정도의 학력만 갖고 있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다 모세가 나일강물에 광주리에 떠내려가다가 나일 공주에게 건짐을 당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노예상태에서 인도해냈다 라든지 아니면 홍해가 갈라졌다든지 이런 정도의 얘기는 믿든지 믿지 않든지 다 알고 있습니다. 아주 상식이 되어버린 그런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죽지 않았어요. 3,500년을 지나는 동안에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은 확인된 바 없어요. 그거 뭐 고고학자들이 모세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없어요.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 같은 사람들 보면 무덤이 어마어마합니다. 굉장합니다. 오죽 했으면 7대 불가사의라고 그랬겠습니까? 이 7대 불가사의가 수정되기도 했습니다마는 진시황의 병마총 같은 건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마어마하잖아요. 그러나 정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그런 차원에서 진시황은 무덤만 남은 사람입니다. 바로도 무덤만 남은 사람입니다. 또 우리나라에도 동구릉이다 서오릉이다 이런 능들이 있지 않습니까? 왕들의 능이 있는데 결국 무덤만 남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한 것은 모세가 무덤이 없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있고, 사도 바울이 무덤이 없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있고, 베드로가 무덤이 없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어떤 무덤뿐인 자와 무덤이 없는 데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대표적인 아주 전형적인 모델이 우리 주님 아니겠습니까? 무덤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주님 여전히 지금까지 살아 계십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똑같이 몸을 입고 살았지마는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세월이 지나면 다 헐어빠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병이 나고 그리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이루어져서 몸이 움직이면서 되어진 그 삶 속으로 어떤 의도가 들어와 있었느냐, 어떤 의도가 들어와서 그 몸을 움직이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 산 뒤끝이 무덤 뿐인 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온 삶 전체가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서 통째로 몇 천년을 거치면서도 살아 역사하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분? 어떤 의도가 들어 있을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 일시적인 몸이 움직여간 사람들의 삶.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마치 순금이 천년을 지나 이천년을 지나도 순금이 변함없이 순금인 것처럼 영원성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 그 영원성으로 도금되어지고 영원성으로 성분이 갖추어진 그런 의도가 이 일시적인 몸 안으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삶. 이 몸은 다 없어졌지만 시간을 따라 다 없어질 것들은 다 없어졌지만 그 몸속으로 들어와서 이 땅에 종적을 남겼던 그 흔적들은 흔적뿐만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인 기록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서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고 지금도 생명의 활동을 계속해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몸이라는 게 마치 꼬챙이 같은 것으로 꽉 낀 것 같아서 그 겉껍데기가 다 바람에 아니면 모래에 쓸려서 나가고 물에 쓸려서 나가고 다 없어지고 녹아 없어지든지 닳아 없어지든지 하면 마지막에 남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게 영원성이 아닌 사람은 무덤만 남는 것이고 화려한 무덤만 남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영원성이었던 사람은 무덤이 없을 지라도 그의 생애가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해서 유지되어져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모세나 진시황, 바로 이런 사람들 비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할머니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저를 업으시고 길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요즘 치고는 장수하셨다고 할 수 없을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그 할머니하고 살았던 기억들이 있지 않습니까? 근데 아직까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80년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벌써 27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마음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기억들, 여러 가지 장면들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지만 언제나 살아서 저와 함께 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앉아서 조그마한 자개 밥상을 갖다 놓으시고 거기에 성경책을 올려놓으시고 성경책을 읽으시던 그 모습. 겨울에는 춥지 않습니까? 옛날에 연탄불을 땠으니까 연탄불을 때도 집들이 외풍이 있으니까 그러면 여러분 기억하세요? 비단 같은 것으로 된 조끼, 그래서 안에는 토끼털 같은 게 있고 옛날 할머니들이 입으시던 거. 그 조끼를 입으시고 외풍 때문에 추우니까 코가 새빨개지셔가지고 성경책을 읽으시고, 여름에는 모시로 된 저고리를 입으셔서 할머니 젖이 다 보이는 그런 투명한 모시를 입으시고 제 앞에서 부채를 부쳐가시면서 성경을 읽으시던 그 모습. 그 성경을 읽으시던 그 모습,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 영원성이 있는 의도가 거기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속에 계속 살아서 움직이고 계시는 거예요.
다른 장면들도 기억이 나요. 그러나 그 장면들은 살아 있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사진을 보듯이 한 컷으로 기억이 될뿐이지.
저희 아버님. 정말 많은 세월이 지났지요. 그리고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지요. 그러나 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이 있다면 마지막에 당뇨가 심하셔서 다리가 붓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그 추운 겨울날 수원역에 나가셔서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를 하시는 겁니다. 형님 교회에서 만드신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리고 또 몸을 좀 돌보셔야 됩니다 해도 그냥 이대로 병이 도지고 병이 악화되고 해서 이대로 전도하다가, 몸을 돌보기 위해 전도를 중단하는 게 아니라 전도함으로서 몸이 더 악화된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생각하시고 계속 전도하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신 그 마지막 장면 그 마지막 결의 이런 것들이 마음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시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의도 영원성이 우리의 시간 안으로 뚫고 들어온 것들만 남아서 결국 살아 움직이며 우리들의 자식들에게나 우리들의 이웃들에게나 역사를 하게 될 것이고 또 그것이 뿐만 아니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 살아온 흔적이 없는 겁니다. 무덤뿐인 자들, 바로나 진시황이나 그렇게 뻑적지근하게 이 땅에 살았지마는 하나님 앞에 가면 영원성과 연결된 게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영원의 의도가 순금과 같은 영원한 의도가 들어와서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건지실래야 건질 수가 없는 구원을 할래야 뭐 있어야 구원을 하지요? 천국에 데리고 가서 살려고 해도 건질게 없어요. 다 그저 쓰러져 가는 무덤이 끝인 자들로 끝이 나버리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들의 인격, 이런 사람들의 영혼 결국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모세처럼 무덤은 없지만 3,500년이 지나도록 남는 자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영원성이 구체적으로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움직여가고 얼마 안 있으면 없어질 몸의 흔적들「」을 영원히 남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오늘 본문에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10절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그랬어요.
지혜의 영이 충만하다는 게 뭐죠? 여러분?
히브리어에서 지혜라는 말은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을 보고 내가 잘 판단하는 어떤 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옳고 이것이 그르다 사리분별이 명확한 그런 총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 히브리어의 지혜라는 것은 들을 수 있는 마음.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는 게 무슨 말이죠?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께 늘 듣던 자. 이게 지혜의 영이에요.
여호수아에게 바로 이 마음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모세가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만 움직인 거예요. 이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와서 내 걸음걸음이 다 살아있는 걸음들이 되는 것이지요.
태목사가 그럼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지혜의 영이 충만한 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살아가는 발자취가 남아서 아내에게, 자식에게, 교인들에게, 말씀을 듣는 교우와 성도들에게 그 종적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또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태승철이라고 하는 인격의 삶의 흔적이 손으로 건지면 건져지는 것 이게 다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움직여지는 사람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움직일 때에 단순히 남는 것 뿐이겠습니까? 내가 시간을 추월해서.
왜냐? 영원성. 영원이라고 하는 것에 시간이 대비될 때 어떤 게 대비가 돼서 들어옵니까?
시간은 시간입니다. 그냥 한정적인 거예요.
그러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무시간적인 그런 본질이 들어와 사는 거예요.
이럴 때 남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영원성을 따라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시간으로 한정되어져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일과 모든 사건을 다 초월하게 된다는 거예요.
영원을 따라 살아갈 때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 집안에 사업상에 문제가 있다. 또 아니면 어제 수요일 끝나고 났더니 어떤 분이 집안 형제간의 문제를 얘기해요. 형제의 어떤 재정적인 상태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내가 책임을 져야 되는 그런 일이다 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여러분, 가지가지 일들이 있잖아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일들이.
근데 우리는 그런 이 세상 일들을 마음으로 느끼는 감도 자체는 어떠냐 하면 그게 마치 영원한 것인 것처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문제를 무겁게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면하여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도를 늘 들으면서 그대로만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무게를 느낄만한 일이라는 건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마찬가지에요. 베드로 같은 경우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게 옳으냐?' 이렇게 물어보잖아요.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산다는 게 이게 바로 대면하여 사는 지혜의 영이 충만한 자라는 겁니다.
그럼 이 사람이 감옥에 갇혀서 야고보 장로의 뒤를 이어서 참수형을 당하게 되는 바로 전날 밤 그렇게 깊이 잠이 들 수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영원성이 늘 마음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이 시키는 것은 대단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계속 기침을 합니다. 그 기침하는 문제에 대해서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대면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를 듣는 겁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어떤 마음이 되는가? 이거 뭐 말해야 알겠습니까? 경험해보셔야지요. 말해서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이렇게 해서 오늘 모세에서 여호수아에게로 옮겨지면서 모세는 죽게 되는데 결국은 무덤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지금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왜? 죽지 않았으니까.
왜 죽지 않았다고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움직였으니까.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게 뭐라고요?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들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마음에 받아들여서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의도를 따라서 움직여 간 사람들, 사람들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그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하건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건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영원한 종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일이 여기 보세요 뭐라고 그랬어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근데 지금 주님의 십자가 시대에 어떻습니까?
모두가 모세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누구나가 다 정말 그 더럽고 추악한 죄악 때문에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그 작은 사소한 일상에서조차도 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듣는 영, 지혜의 영이 충만해질수록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도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 되는 거지요.
여호수아가 지혜의 영이 충만하다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고는 아무리 작은 일조차도 할 수 없는 거.
아주 큰 일 이래야만 하나님께 묻는 사람 지혜의 영이 아주 안 충만한 사람, 아주 작은 일에조차도 다 하나님께 물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 지혜의 영이 충만한 사람.
지혜의 영이 안 충만할수록 아주 조금 조금 지혜의 영이 있을수록 큰 일에만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합니다. 지혜의 영이 충만할수록 작은 일에까지 다 하나님께 물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늘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나는 죽은 자다.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 근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리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도가 내게 들리고 그 영원하신 의도에 따라서 내가 장갑처럼 끼어서 내가 움직이게 되고 그렇게 움직인 삶이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또 내 자식에게 마음 속에 살아서 역사하는 거예요.
내가 죽은 뒤가 아니라도 지금이라도 아침에 만나고 나가서 낮에라도 아, 아침에 집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이 이렇게 행동한 것이.. 그거 뭐 남편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냥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그냥 밥하는 모습 속에서도 거기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고 그러면서 옆의 사람을 살려나가고, 나 좋고 옆의 사람 좋고 하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무덤이 없는 자 그리고 무덤뿐인 자.
무덤이 없어도 살아있는 자 되시길 바라고 기껏 80년 90년 삶의 끝이 무덤 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0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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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천국으로 건지실 만한 하늘의 발자취만을 남기기를 소원하며 오늘도 무덤없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십자사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안.젼.놀.ㅇㅣ.ㅌㅓ. 추.천.합.니다.
Z. M. M. 6 .9 닸.켬 (추,천,인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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