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최후의 날 그리고 매국노 예식진 이야기
아들아, 공산성에서 만난 역사와 인물들 네번째 이야기는 백제의 마지막 날의 진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당의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禰寔進)에 대한 이야기란다.
의자왕은 아들도 들어서 아는 이름일 것이고..예식진은 처음 들어볼 것이다.
예식진은 그럼 어떤 사람일까?
고려시대엔 홍복원과 홍다구 부자, 조선시대엔 한윤, 대한제국엔 이완용.
이들은 시대별로 최악의 역신(逆臣)이자 매국노(賣國奴)의 대표 인물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최악의 매국노들 이전에 예식진이 있었다. 그는 백제 최악의 역신이자 매국노였지.
아들아, 그러면..이제 백제 최후의 날로 돌아가 보자.
네가 아빠, 엄마와 함께 갔던 논산의 계백장군묘, 부여의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따라오면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660년 7월의 일이었다.
백제의 31대왕이자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왕위에 오른지 20년이 되던 해였지.
백제 31대왕, 의자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것이 빛을 발하여 신라와 당 연합군이
결성되어 백제를 멸하기로 하였단다.
신라는 대장군 김유신이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눈을 속이며 남천(경기 이천)까지
갔다가 곧바로 빠르게 남하하여 탄현을 넘었단다.
그리고 또 다른 대군은 태종무열왕이 직접 이끌고 상주 백화산의 금돌성(今突城)에
주둔하며 대기했어.
당은 총관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수백척 전함에 나누어 타고
서해를 건너와 인천 덕적도에서 신라의 향도와 합류한 후..
빠르게 남하하여 백강 하구 기벌포(起伐浦)에 상륙하였지.
이들은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 앞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단다.
황산벌 전투도
당군을 막던 좌평 의직(義直)의 군사도, 신라군을 막던 달솔 계백(階伯)의 군사도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이 포위되었지.
아들아, 이때 의자왕의 선택은 태자 융(隆)과 함께 사비성을 빠져나와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태자 태(泰) 는 사비성에 남아서 무리를 모아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사비성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함락되고 말았단다.
아들아, 의자왕은 왜 웅진성으로 갔을까? 단순히 적을 피해 도망간 것일까?
아니다. 그렇진 않았다.
위기의 상황에서 의자왕은 그래도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웅진성으로
간 것이란다.
웅진성 (공주 공산성)
웅진성은 백제의 행정구역 5방 중에서도 북방(北方)의 중심지이자..
사비성으로 천도하기전까지 백제의 왕도였던 곳.
금강을 두르고 산위에 축조된 규모도 있고 강한 방비를 갖출 수 있는 곳..
또 장기전을 위한 물자도 풍부하게 비축된 곳..그곳이 웅진성이었지.
웅진성의 성주의자 북방의 방령(方領)은 예식진이란 사람이었지.
예식진도 그렇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웅천..그러니까 웅진성 사람이고
모두 좌평을 역임하며 무왕(武王)때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던 것 같아.
그래서 의자왕도 그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이 사비성 함락의 소식을 듣고,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으로 오자..곧 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이면서 사학자이기도 하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의자왕의 항복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은 의자왕이 자발적인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반란에 의해 끌려 나온 것이라는 것이지.
그리고..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2007년 중국 뤄양(낙양,洛陽)의 한 골동품 상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들아 그것은 당(唐)의 황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서안,西安)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단다.
그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이름과 그의 출신..백제 웅천인이라 전하고 그의 가계에 관한
내용이 있었으며, 614년 출생하여 672년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예식진의 품계는 좌위위 대장군(左威衛 大將軍)으로 조정과 황제를 호위하는 부대의
지휘관이었으니 당 황제의 신임이 대단했던 모양이야.
좀처럼 이방인이 이르기 힘든 고위벼슬에 황제 측근의 중요한 자리..
게다가 당나라에 맞서 싸웠던 백제 출신 인사에게 주기 힘든 벼슬이었을텐데..
대체 이 사람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왕이자 주군, 의자왕을 잡아 당에 넘긴 것이었단다.
나라와 그의 임금에 대한..백제의 수많은 백성을 배신하고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생각한 그의 행위에 대한 당 황제의 보상이었던 셈이지.
당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예식진의 묘지명이 말한다.
의자왕과 함께 예식진이 항복했는데..예식진이 그를 앞세우고..아니 끌고 왔다고.
아들아, 물론 의자왕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이고..
그는 막다른 곳에 몰린 것은 확실해 보였을 것이다.
아무리 웅진성이 크고 험한 지리의 이점을 취했다지만 눈앞에 몰려든 18만에 달하는
대군을 보고.. 이미 나라가 기울었고 희망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아마도 눈 앞에 닥친 나당연합군 18만을 보고 예식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나당연합군은 18만에 달하는 대군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
보급이 없는 군대라는 것. 배고픈 군대는 금방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계백과 의직 장군이 패하고 전사했으나..백제 전국 각지의 지방군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지.
즉..시간은 백제의 편, 버티면 백제가 이길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게 의자왕의 마지막 승부수였는데..허무하게 좌절된 것이야. 역사가 바뀐 것이다.
백제 웅진성주 예식진, 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지만..예식진의 선택은 나라를 저버리고, 그의 주군을 버리고..
오직 일신의 영달과 영화를 탐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그는 내부 반란을 일으켜
피신해온 의자왕과 왕자들을 겁박해 당에 항복해 버린 것이란다.
예식진에 의해 끌려와 의자왕과 왕자들..백제의 귀족들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고, 의자왕과 왕자들은 항복의식을 치르며..신라의 태자 김법민의 모욕을 받았지.
그리고 그들은 당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의자왕도 당에서 한이 맺혀서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죽어 뤄양성 밖 북망산에 묻혔지.
아들아, 예식진 정도 되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나라의 위기 앞에 스스로의 영화와
영달, 그리고 살 길만 탐하여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이 행위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예식진이란 이름은 역신이자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역사에 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의자왕의 마지막 승부수가 예식진의 배신으로 좌절되고 원수의 나라에 끌려가
망국의 군주로 설움받다가 한이 맺혀 죽은 그의 쓸쓸한 최후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의자왕이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것 처럼 그렇게 황음무도한 군주가 아니라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고 충분히 일리도 있어서 참고할만 하지만..
의자왕, 그가 망국의 군주, 실패한 임금..역사의 죄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백제가 거의 7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렇게 허무하게 닫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에 말이다.
아들아, 의자왕의 마지막 승부수가 통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만약에..그랬더라면, 백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멸망, 백강 전투, 당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야욕과 나당전쟁..
이 모든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예식진, 그는 동북아의 역사를 최악의 흐름으로 몰고간 장본인이 아닐 수 없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