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독존’ 이렇게 읽어라 “진리만이 홀로 존귀하다”
카드 발행 일시2024.02.07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④“천상천하 유아독존”은 그런 뜻 아니야
붓다의 탄생에 대한 불교의 전승은 놀랍다.
룸비니 동산에서 갓 태어난 아기 왕자는 두 발로 우뚝 섰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봤다.
그런 뒤에 발을 뗐다.
정확하게 일곱 걸음이다.
아기 왕자가 발을 뗄 때마다 땅에서는 연꽃이 올라왔다고 한다.
왕자는 그 연꽃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걸었다.
그런 뒤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은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그걸 한문으로 옮기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된다.
#붓다는 이치의 과학자
불교의 이 전승은 과연 사실일까.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그래서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며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세상에 알렸다.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을 숭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첫 단추부터 달랐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불교 신자도 분명히 있지 싶다.
과연 그럴까.
나는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붓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 가르친 것은 ‘이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정체,
나조차도 알 수가 없는 감정의 정체,
마음의 정체,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정체,
삶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의 정체 등.
붓다는 우리가 품어내는 그 모든 물음표에 대해서 느낌표를 건넸던 인물이다.
그러니 붓다는 마음의 과학자이고, 이치의 과학자였다.
그런 붓다가 갓 태어난 신생아 때 이적을 행했을까.
물론 아니다.
붓다의 탄생 일화는 후대에 생겨난 이야기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인류를 위해 그 이치를 설한 붓다에 대한 일종의 찬탄이다.
고마움의 찬탄이다.
게다가 붓다의 탄생 일화는 단순한 찬탄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가 품어도 좋을
화두(話頭, 불교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궁리하는 물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다름 아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언뜻 들으면 “내가 제일 잘났어”로 들린다.
실제 우리 주위에서도 ‘독불장군’이란 말 대신 ‘유아독존’이란 표현을 갖다 쓰기도 한다.
이런 비유도 따지고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말뜻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무슨 뜻일까.
많은 사람이 아기 붓다의 외침을 풀면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말이다.
법정 스님이 번역한
일본의 저명 문학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그런 식으로 번역한다.
쇼코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 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
쇼코뿐 아니다.
불교계에서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풀어내는 사람은 많다.
또 그렇게 믿는 이들도 많다.
나는 달리 본다.
이유가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핵심은 ‘독존(獨尊)’이 아니라 ‘유아(唯我)’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아(唯我)의 ‘나(我)’는 어떤 나일까.
깨달음을 이룬 나다.
그러니 작은 나가 아니다.
너희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고 하는 비교의 선상에 있는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아주 큰 나다.
이 우주의 바탕이 되는 나다.
그걸 알면 “나 홀로 존귀하다”의 뜻이 달라진다.
“내가 제일 잘났어”가 아니라 “진리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 된다.
룸비니 동산의 마야데비 사원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아름드리 보리수가 한 그루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붓다의 외침을 비판하는 사람도 여럿 만났다.
“아니, 어떻게 자기만 최고이고, 자기가 가장 존귀하다고 할 수 있나.
그건 너무 독선적이고 오만한 것 아닌가.”
이분들의 지적도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다.
붓다가 말하는 ‘나’를 ‘작은 나’로만 보기 때문이다.
# 예수의 선언…아버지에게 가는 길
그리스도교에도 비슷한 오해의 사례가 있다.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6절)고 말했다.
이 구절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 봐, 예수님을 통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잖아.
그러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거지.
다른 종교에는 길이 없는 거야.
예수님을 통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건 이들에게 예수의 선언은 굉장히 배타적인 선언이 된다.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내치는 공격적 선언이 된다.
그건 예수를 ‘작은 예수’로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가 말한 ‘나’를 ‘큰 나’로 보면 달라진다.
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속성’으로 보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육신의 ‘작은 예수’가 아니라
그 육신 안에 깃들어 있던 ‘신의 속성’을 통과하라는 선언이 되기 때문이다.
인도 중부에 있는 산치 태탑의 조각상. 아소카 왕 시절에 산치 대탑이 조성됐다. 백성호 기자
나는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아기 붓다의 탄생불 앞에 섰다.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동산의 나무는 푸르고, 꽃들도 예뻤다.
바람도 불었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이 모든 풍경을 관통하며 붓다는 말한다.
“오직 진리만이 홀로 존귀하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