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창설자이며 야구,스케이트,농구등의
스포츠를 우리나라에 처음 보급한 사람이 "필립 L 질레트"(Phillip L. Gillette : 길례태(吉禮泰)다.
"길례태"는 "질레트"를 음차한 한자로 자신이 직접 지은 한국이름이다.
그는 당시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질레트"보다 "길례태"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필립 L 질레트" 는 1872년 10월 21일, 미국 일리노이州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YMCA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콜로라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YMCA 전도 담당 부목사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9월에 27세의 나이로 한국 YMCA 창설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에 와서
2년만인 1903년 10월 28일, 유니온 클럽에서 YMCA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가 되었다.
서울 정동의 유니언회관에서 열린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 창립총회에는
한국인과 서울에 거주하던 미국·영국·일본인 등 6개국 37명이 참석했다.
"질레트"가 초대 총무로 선임됐고 "제임스 게일"과 "호머 헐버트"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에 추대됐다.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효시였다.
"질레트"는 1904년 종로2가 대지를 사들여 가건물을 짓고 본격적인 사업을 벌였다.
"윤치호", "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속속 가입해 활기를 띠었다.
성경 공부를 비롯해 목공·제화·염색·사진·인쇄 등 기술 교육, 체육 강습, 야학,
시민 강좌 등 프로그램도 다양해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창립의 산파역인 "질레트"는 "근대 체육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야구, 농구, 스케이트, 복싱 등 각종 서구 스포츠를 소개하고 보급했기 때문이다.
1904년 미국에서 야구 배트와 글러브 등 장비가 들어오자 YMCA 야구단을 창단했다.
1906년 3월 15일 서울 동대문 인근 훈련원에서 "독일어학교" 팀과 벌인 경기는
한국인 최초의 야구 경기로 기록돼 있다.
YMCA 야구단은 지방을 돌며 야구 붐을 주도하는가 하면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 원장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1908년 12월에는 종로2가에 3층짜리 회관을 건립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대한제국의 개화파 관료 "현흥택"(玄興澤)이 토지를 희사하고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가 거액을 기부했다.
고종 황제도 은삽 두 자루와 금일봉을 하사했고 영친왕(英親王)이 머릿돌에 글씨를 썼다.
지금의 8층짜리 회관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옛 건물이 소실된 뒤 1967년 새로 지은 것이다.
YMCA는 신앙과 친교 단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1905년과 1907년 "을사늑약"과 "고종 양위(讓位) 반대운동"을 펼쳤다.
1911년에는 일제가 조선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 "이승훈", "양전백" 등 YMCA 관련 인사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질레트"는 "호러스 언더우드"와 "새뮤얼 모펫" 등 선교사들과 함께 총독부에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사건 전모를 낱낱이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국제기독교선교협회로 발송했다.
중국 일간지 차이나프레스가 이를 입수해 공개하자 총독부는 "질레트"의 사퇴를 종용했다.
결국 "질레트"는 1913년 6월 중국에서 열리는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가했다가
조선 총독부의 방해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 각지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고 상해임시정부에도 재정 지원을 하다가 1932년 퇴임했다.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838년 세상을 떠났다.
1903년 "엘런 버사"와 결혼해 낳은 두 딸 가운데 첫딸은 1905년 숨져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묻혔다.
1905년 태어나 일년도 안돼 사망한 아기이다.(왼쪽)
묘비에는 "INFANT DAUGHTER OF PHILLIP & BERTHA GILLETT 1905"
"필립L질레트"(Phillip L. Gillette)와 "버타 질레트" 선교사부부의 어린 딸" 이라 씌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