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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믿는 이는 영이 살아나고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지만 여전히 그의 영이 혼이나 몸의 억압을 당하는 육에 속한 믿는 이가 될 수 있다. 거듭난 믿는 이가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되기 위해 분명히 취해야 하는 명확한 길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최소한 생명에 있어서 두 번의 큰 변화를 갖게 된다. 즉 멸망할 죄인이 구원받은 믿는 이가 되는 것과 육신에 속한 믿는 이가 영적인 믿는 이로 변하는 것이다. 죄인이 믿는 이로 변하는 것이 참된 사실이듯 육신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도 역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분의 생명을 소유한 믿는 이로 만들 수 있다면, 육에 속한 믿는 이를 그분의 더 풍성한 생명을 소유한 영에 속한 믿는 이로도 만드실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거듭난 믿는 이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은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될 수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졌기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같이 성령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성령만이 믿는 이를 영에 속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을 영에 속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안배에 있어서 십자가는 부정적인 면에서 파괴하는 일을 하는데, 이는 곧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적극적인 면에서 건축하는 일을 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세우는 것이다. 믿는 이를 영에 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십자가이지만 믿는 이가 영에 속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영에 속한다는 뜻은 성령에 속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리도록 사람의 영에 힘을 더해 주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에 속하기를 추구한다면 결단코 성령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십자가를 묵인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왼손과 오른손이기 때문이다. 이 둘 중 어떤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다 단독적으로 일할 수 없다. 십자가는 늘 사람이 성령을 가까이하도록 인도하고 셩령은 사람을 늘 십자가로 인도한다. 영에 속한 믿는 이라면 반드시 성령과 영적인 체험을 가져야 한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몇 단계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 이 몇 단계의 체험을 주의하라는 말은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책을 쓰기 위해 선후 순서를 정했지만 사실 체험에 있어서 이것들은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우리 믿는 이가 어떻게 해야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해 언급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믿는 이는 결코 이전에 우리가 가르친 교훈(8, 9장)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믿는 이는 마땅히 사람이 영적으로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육체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 이가 육체에 대해 마땅히 가저야 할 궁극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그는 쉽게 진보할 것이다. 사람이 영에 속하면 속할수록 육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육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육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영에 속하지 읺는다.
제9장에서 언급한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은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영적 추구의 기초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체에 대해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의 어떤 진보도 진실한 것이 아니고 허망하고 얕은 것이다. 사실상 믿는 이가 범사에 육체를 거절하고 육체의 활동과 능력과 육체의 의견을 제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한 가지 적극적인 면을 다루어 보겠다.
영과 혼의 분리(제 14장 ‘영과 혼의 분리’와 비교)
영과 혼의 분리(히 4:12)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 영에 속한 직감의 지시에 따르는가 아니면 우리(혼)의 타고난 선악의 영향을 받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일에서 무엇이 어디에 속한 것인가를 우리를 위해 판단해 준다. 오직 하나님의 예리한 검만이 우리 생활의 근원을 분명히 구분해 준다. 사람의 검이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다. 이러한 분리가 처음에는 일종의 지식에 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체험이 될 것이다.
사실상 믿는 이는 오직 체험 안에서 영과 혼이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며 이러한 헌신과 기도를 해야 하고 성령과 십자가가 일하게 해야 할 뿐 이니라 또한 이것을 얻고 이러한 체험을 가져야 할 것이다. 믿는 이의 영은 실질적으로 혼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 예수님의 영과 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처럼 믿는 이의 혼과 영은 반드시 분명하게 분리되어져야 한다. 직감을 갖고 있는 사람의 영은 온전히 자유롭고 오로지 성령의 유일한 거처와 사무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은 결코 혼(생각과 감정을 가리킴)의 영향권 아래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은 반드시 혼의 모든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혼 생명에 대하여 십자가의 운행은 반드시 실제적이어야 한다. 십자가에 의해 혼 생명이 제거되는 것은 매우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혼 생명은 반드시 체험적으로 잃어버려야 한다. 혼의 기관은 반드시 영의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놓이도록 보전되어야 한다.
믿는 이의 혼과 영이 이같이 분리된 체험을 갖고 그의 영이 조금도 혼의 포위를 당하지 않아야만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온 존재가 영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므로 영의 다스림이란 우리의 혼과 몸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이 십자가의 작용으로 성령의 운행을 통해 사람의 영을 온 존재의 으뜸으로 높이는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의 영이 더 이상 혼과 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반대로 혼과 몸을 온전히 지배할 능력을 갖게 한다. 혼과 영의 분리는 영적 생활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이것은 영에 속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다. 이것이 없다면 믿는 이는 어쨋든 혼의 영향을 받아 생활 속에서 늘 그의 영과 혼이 섞이게 된다.
때때로 영에 속한 생활을 갖지만 때로는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거나 타고난 생명을 의지하여 살기도 하며 생명의 나타남이 그리 순수하거나 단순하지 못하다. 영과 혼이 함께 믿는 이의 생명 원칙이 될 때 그들은 순수한 영에 속한 생명을 가질 수 없다. 이럴 때 믿는 이는 혼에 속한 단계에 머물게 되고 그는 생명에 있어서 손실을 보며 하나님의 성령은 그를 통해 중요한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믿는 이의 영과 혼이 실지로 분리되어 혼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한다면, 그의 혼이 작용할 때 그는 즉시 더럽혀지는 것 같은 혼의 능력과 영향을 느끼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힘쓸 것이다. 실로 타고난 모든 것은 더러운 것이고 또한 영을 더럽힌다. 영과 혼이 분리되면 영의 직감은 아주 예민해진다. 혼이 작용할 때마다 영은 즉시 고통을 느끼고 이에 반항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혼의 작용이 있을 때에도 그는 즉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혼에 속한 사랑이나 감정으로 당신을 대할 때조차도 그것을 견딜 수 없거나 그것에 대해 싫증이 날 것이다.
영과 혼의 분리가 실제적인 것이 될 때 믿는 이는 비로소 실지로 청결한 감정과 동기를 갖게 된다. 또한 ‘청결함’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고 죄스러운 일이 더러울 뿐 아니라 천연적인 것에 속한 모든 것도 거절해야 할 더러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단지 이것을 알 뿐 아니라 그는 영의 직감 안에서 혼에 속한 모든 것 - 자신 혹은 다른 사람 - 을 접촉할 때마다 오염된 기분이고, 즉시 그것으로부터 청결케 되기를 바랄 것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주와 한 혼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 주는 영(고전 15:45) 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믿는 이의 연합은 그분과 믿는 이의 영과의 연합이다. 혼은 사람의 인격으로서 천연적인 것에 속한다. 혼은 주님께서 믿는 이의 영과 연합하실 때 이 연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믿는 이의 혼 안에는 주님의 생명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 없다. 오직 영만이 이러한 연합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연합이 영의 연합이므로 혼은 우리 안에서 아무런 지위가 없다. 만일 혼과 영이 여전히 혼합되어 있다면 이 연합은 불순하게 된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좇아 행하거나 어떤 일에서 자기의 의견을 갖거나 감정적인 작용이 있을 때 이 작은 것 하나가 이 연합을 불순하게 만드는 것을 족히 체험할 수 있다. 오직 동일한 성질의 것만이 연합할 수 있다. 혼합물은 서로 연합하지 않는다. 주님의 영이 청결하고 아무 섞임이 없듯이 우리의 영 또한 이와 같이 그분과 긴밀한 결합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자신의 놀라운 사상을 버리기를 꺼려하고 자신의 애호를 떨쳐 버리지 못하며, 자기의 의사를 제쳐 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다면 체험 안에서 이러한 연합이 표현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연합은 영의 연합이므로 결코 어떤 혼에 속한 혼합물도 섞여서는 안 된다.
이 연합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이는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데서 온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이 성경 구절은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이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다는 뜻임을 설명한다.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주와 연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주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을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죽음 안에서 그분과의 연합을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는 기점(입문)으로 삼아야 한다. 그 동시에 그분의 부활을 그분과 함께 죽은 우리의 부활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체험 안에서 그분과 함께 부활의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주 예수님은 거룩한 영을 좇아 부활하셨고(롬 1:4)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벧전 3:18).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할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영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속한 것에 대해 죽고 그분의 영에 대해 사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믿음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제10장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참조).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 죄와 타고난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부활 생명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과 주와 한 영 되는 것이다. 로마서 7장 4절과 6절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그리스도) …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 것이요” 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연합하였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는 우리가 아무런 섞임이 없는 영의 새로움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더.
얼마나 놀라운가! 십자가는 항상 모든 것의 기초이다. 십자가의 일의 목적과 결과는 믿는 이의 영이 부활한 주님과 한 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언제나 부정적인 것을 처리하는 면에서와 손실을 끼치는 면에서 믿는 이의 죄와 천연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리도록 깊이 움직인다. 그런 후에야 믿는 이는 비로소 주님과 적극적인 부활 생명에 연합하여 한 영이 될 수 있다. 타고난 모든 것이 영원히 상실되고 죽음 안에서 잃어버리게 되며, 부활의 새로움 안에서 영이 온전히 순결하여 아무 섞임이 없이 주와 한 영이 되도록, 믿는 이의 영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믿는 이의 영이 주의 영과 연합될 때 두 영은 합하여 한 영이 된다. 이렇게 영과 연합한 결과는 ‘영의 새로움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럴 때 그의 생활과 일에서 타고난 것과 자아가 없고 ’동물적인 어떤 활동‘도 섞이지 않게 된다. 이러므로 사람의 혼과 몸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그분의 뜻과 일과 생명을 표현하는 데만 사용된다. 이러한 영의 생명은 모든 일에서 그 생명의 성질을 나타내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늘 주님의 영을 ’흘러 보내는‘ 체험을 갖게 된다.
이것이 승천의 생명이다. 믿는 이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과 연합한다. 이것은 보좌 위에 있는 주의 영은 세상에 있는(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 믿는 이의 영 안에 흘러 들어감으로 보좌 위의 그 생명이 땅에서 살아 나타나는 것이다. 머리와 몸에 동일하게 흐르는 생명이 있다. 믿는 이가 부활한 주님과 연합하면 - 믿는 이는 날마다 ‘여기는 것’ ‘드리는 것’을 유지해야 함 - 그분은 믿는 이의 영을 통해 그분의 생명 주는 능력을 부어줄 수 있게 된다. 수도 파이프가 샘의 근원에 연결될 때에 생수를 흘러 보낼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만 영이 아닌 ‘생명 주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는 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영에 생명이 충만하고 이 생명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그의 영이 생명 주는 영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이길 수 있도록 우리 영 안에 생명이 항상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연합을 통해 주 예수님의 모든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분의 모든 뜻과 사상도 이러한 연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연합은 믿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주님의 생명과 성품을 얻게 하고 그의 안에 있는 새 창조를 건축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이의 영은 주님의 높으심같이 높이 올려지고 체험에서 ‘하늘’의 영역에 이르게 되므로 세속적인 모든 것을 발 아래 밟게 된다.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 이것은 믿는 이의 영이 다시 위축되지 않고 방해를 받지 않으며, 하늘을 날듯 구름 위를 날게 하고, 그의 영은 항상 자유롭고 신선하며,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아주 맑은 시야를 갖게 한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받은 감정의 자극과는 크게 다르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하늘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안에는 항상 하늘의 성질이 들어 있고 이러한 생활은 영에 속한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인식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고 계시지만 이것을 모르거나 이것에 순종하지 않는 믿는 이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기 안에 거하는 성령을 인식하고 온전히 성령께 순종할 필요가 있다. 믿는 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체’와 진리를 그들에게 분배하시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일은 믿는 이가 자기 혼의 무지함과 우둔함을 시인하고 이제부터 진실로 어리석은 위치에 자처하고 가르침받기를 좋아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진리를 계시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을 필요로 한다.
믿는 이가 그의 온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영 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성령께서 그를 가르치기를 기다릴 때 이 성령은 일하신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다만 가르침받기를 원할 때 비로소 성령은 우리의 생각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이 있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 하나님의 지성소인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이 영이 성령과 교통하기 위한 기관이고 하나님의 성령을 기다리기 위한 기관임을 알 때만이 그분이 실지로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성령을 시인하고 존경해야만 우리 안 은밀한 곳에서 그 능력과 일을 나타내고 우리의 혼과 지각의 생명에도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한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었다(고전 3:3). 우리는 바울이 그들에게 육체의 상태에서 떠날 것을 권한 말이 한 번 이상이었고, 또한 그들이 성령의 성전인 것과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자로 여긴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이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육체의 상태를 벗게 하는 조력자 임을 알 수 있다. 믿는 이는 반드시 믿음으로써 성령께서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믿는 이는 성령을 강론한 성경의 교리를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성령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식 안에서 믿는 이는 마땅히 자기 자신을 아무 미련 없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에 맡기고 혼과 몸의 각 부분을 성령에게 항복하고 기꺼이 인도를 받으며 교정받기를 원해야 한다.
사도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물었다. 그는 그들이 진실되고 확실한 것을 모르는 데 대해 아주 이상히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성령께서 믿는 이 안에 거하시는 이 사실을 구원의 제일 첫째 되는 결과인데 너희가 어찌 모를 수 있는냐고 묻는 듯 하다. 믿는 이의 수준이 어떠하든, 설령 고린도의 믿는 이들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들보다 더 못한 믿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주의하지 않을 때 믿는 이는 영원히 영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체험 가운데서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는 것을 모른다면 당신이 아직 믿음 안에서 서 성령께서 거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고 삼일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시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성령의 존귀하심을 생각해보고, 그분이 어떻게 육체에 속한 우리 안에 거하는 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경외와 존중함과 찬미를 금할 수 없다. 주 예수님은 죄의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죄의 육신의 모양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어떠한 은혜인지!
성령의 능력주심
사람의 영이 사람의 혼과 몸을 다스리고 성령께서 흐르실 수 있는 생명의 운하가 되며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 주심이 필요하다. 에베소서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16). 만일 이것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사도는 이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의 속사람을 강건케 해달라고 구했다. 이 ‘속사람’은 믿는 이가 주님을 믿은 후에 얻게 되는 새사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믿는 이의 영 - 거듭난 영이다. 사도의 기도는 믿는 이의 영이 성령의 능력 주심을 얻어 강건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이들 가운데 영이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는 이의 영이 강한가 약한가는 그가 성령의 능력 주심을 공급받았는가에 달려 있다. 에베소의 믿는 이들은 일찍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1:13-14). 그러므로 그들을 위한 사도의 기도 속에 내포된 뜻은 그들 안에 내주하는 성령을 얻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 안에 주입되고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는 이는 성령께서 안에 거하실지라도 약한 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믿는 이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성령께서 자기 영 안에 능력을 충만케 하시도록 기도할 것이다. 영 안에 능력으로 충만되는 것이 현재 믿는 이의 필요이다. 많은 때 믿는 이는 육신이 강건하지만 그의 감정이 게으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그의 마음은 원치 않고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영의 연약함이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정반대로 믿는 이의 감정은 매우 흥분되었어도 그의 육신의 게으름 때문에 주를 위한 수고가 필요할 때인데도 그는 감당하지 못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이러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마음(영)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영이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영이 강건해야 한다. 만일 영이 힘이 있다면 영은 육신의 약함을 이길 수 있다. 믿는 이가 사람들에게 설교하거나 일을 할 때 자신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황이 있고 자신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가 있다. 이것 역시 영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해서도 이렇다. 믿는 이는 밖의 분란함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영향을 받는다. 만일 영이 강하다면 믿는 이는 가장 분란한 상태에도 안연히 처할 수 있다. 기도는 영이 강한가 약한가의 가장 큰 시금석이다. 영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기도에 응답이 있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간은 몇 년 혹은 십여년이 걸린다.
모든 일에서 원칙은 동일하다. 강한 영이 있는 사람만이 환경과 감정을 상관치 않고 끈기있게 전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사탄과의 씨름은 더욱 영의 능력이 필요하다. 실로 오직 영에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영의 능력을 사용하여 대적을 대항하고 공격할 줄 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씨름은 희극 속의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자극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때로는 혈기의 힘을 사용하여 싸우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얻으려면 믿는 이의 측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 일들은 곧 전일한 순복을 갖고 생명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것들과 행위를 제해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영에 옮겨 부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 등이다. 믿는 이의 측면에서 방해가 없다면 하나님은 필히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즉시 하실 것이다. 믿는 이는 성령의 충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는 성령은 벌써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믿는 이는 성령으로 충만될 수 있는 조건을 이행함으로 십자가가 그의 안에서 더 깊이 일하시게 해야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충실하고 순종하며 믿음이 있다면 성령의 능력은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그의 영에 옮겨 부어져 그를 강건케 하고 생활의 힘과 일할 힘을 줄 것이다. 혹 어떤 믿는 이는 주님께 한번 순종할 때에 즉시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이미 성령으로 충만되는 조건을 이행했다면 그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그분의 능력을 믿는 이 안에 주입하는 것 혹은 믿는이가 성령으로 충만되는 것은 영 - 속사람 - 안에서 일어난다. 성령은 사람의 감정이나 몸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에 충만하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흥분되고 강건케 되는 것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다. 이것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추구할 때 몸에 감각이 있게 하거나 진동되거나, 경련이 일어나게 하거나 쓰러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고 단순히 믿음(갈 3:14)을 사용하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믿는 이는 믿음을 핑계로 하여 성령의 능력 주심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다음 구절들에서 어떻게 ‘알고’ ‘깨달으며’ ‘충만되는지’ 에 관해 사도가 말한 것을 읽어 본다면 영 안에서 우리가 얻은 능력이 영의 지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의 영도 몸과 같이 그 기능과 지각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능력의 대대적인 옮겨 부음을 받지 않을 때 믿는 이의 영의 직감을 살피기가 극히 어렵다. 그러나 영이 강건케 된 새로운 체험을 가진 후에 믿는 이의 영의 직감은 뚜렷하게 되고 더 쉽게 자기 영의 직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이 그의 속사람이 이미 강건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직감도 강건케 되었다. 이로써 믿는 이의 더욱 영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영 안에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가진 결과로 혼과 몸이 영에 귀속하도록 사람의 영은 혼과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사상이든 사모함이든 감정이든 주장이든 모든 것이 영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혼은 더 이상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고 영의 청지기가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 믿는 이의 영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흘러 보냄으로써 메마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적시고 소생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침례와 다르다. 왜냐하면 성령의 침례는 전적으로 일을 위한 것인 반면에 성령의 능력 주심은 생명과 혹은 생활의 문제를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물론 이것도 자연히 일에 영향을 준다).
영을 좇아 행함
우리는 이미 혼에 속한 믿는 이가 어떻게 해서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더 이상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는 순간순간 육체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사탄은 기회만 생기면 즉시 믿는 이를 높은 위치에서 비천한 생활로 하락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항구적으로 그를 영에 속하게 한다.
로마서 8장은 영을 좇아 행해야 할 것을 매우 분명히 말한다. 4절부터 6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4-6).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육신을 좇는 것의 반대이다. 만일 믿는 이가 영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육신을 좇는 것이다. 어떤 믿는 이는 때로 영을 좇아 행하고 때로는 육신을 좇아 행한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영만을 좇아 행해야 한다.” 믿는 이가 영만을 좇아 행하는 것은 곧 영의 직감만을 좇고한 순간도 혼이나 몸을 좇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있는 한 가지 결과는 바로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의 일을 생각한 결과 그의 온 존재는 ‘생명과 평안’이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한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믿는 이가 날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는 이는 자기의 느낌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지 말고, 생각 속의 가장 좋은 사상이나 돌발적이든 계속적이든 자기 생각대로 행할 것이 영의 직감의 인도를 좇아 행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영의 작은 의식이 바로 성령께서 자기 생각을 나타내시는 곳이다. 성령은 직접적이고 돌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성령의 모든 일은 우리의 영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 안의 직감을 쫓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영 안에 직감이 생겼는데도 우리는 그 직감의 뜻-무엇을 요구하고 뜻하는지-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직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시간 기도 해야 한다. 깨달은 후 그것을 좇아 행해야 한다. 생각이 순간적으로 직감의 뜻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갑작스런 사상을 좇아서는 안 된다. 직감의 가르침은 성령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이다. 이렇게 영을 쫓아 행하는 것에는 신뢰와 믿음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미 모든 육에 대한 속한 선한 행위가 독립적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임을 보았다. 혼의 성질은 독립이다. 만일 믿는 이가 자기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좇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심을 의지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엡 2:3)은 의지함을 요하지 않는다. 믿는 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하고 자기 성찰(스스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음--역자 주)이 아무 쓸모없고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며,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일 정도로 약화될 때 기술이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만일 믿는 이가 영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느낌과 생각을 자기의 지침으로 삼지 말고, 영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믿는 이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그분을 기다리지 않으며 그분을 신뢰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것과 할 줄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을 좇아 행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도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데에도 믿음이 요구된다. 믿음은 보는 것과 느끼는 것에 상반되는 것이다. 혼의 느낌은 항상 보이는 것과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고 붙잡으며 사모하고 또한 이것들을 행동의 보증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곧 혼을 좇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혼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괴로워하지 않고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요동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어야만 우리는 어두움 중에서도 자기의 근원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능력을 보이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욱 믿을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일을 착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많은 때 믿는 이는 영의 직감 안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계시를 얻지도 못한 그 일을 행할 영의 능력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때때로 믿는 이가 하는 일은 영 안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제8장 참고).
성령으로 시작한 것은 육체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정도로 주님에 의해 파쇄되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어떤 선한 사상도 없고 성령께서 시작하신 것을 이룰 어떤 능력도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사상과 총명과 지식과 재간과 은사를 제쳐놓고 온전히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본래 이것들을 숭배하고 맹목적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자신의 형편없음과 자격없음과 무능함과 쓸모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있어서 주장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의 직감 안의 작은 의식을 좇아 일을 시작하고 영의 능력을 힘입어 감정과 취향을 따르지 않고 직감만을 따를 때 좋은 시작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의 천부적인 재간과 능력과 재능을 의지하지 않고 영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 우리는 계속적으로 온전케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영을 좇아 행하기를 중단하자마자, 우리는 곧장 육체를 따라 행하게 되며, 육체의 일을 생각하고, 사망이 우리 영 안에 움직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육신을 좇아 행하지 말아야’ 만이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육신을 좇는 이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8:5-6).
우리의 목적은 영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만 우리의 영적 생활이 치우치지 않고 메마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며 영원히 사람일 것이다. 사람됨의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천사는 영일 뿐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몸도 없고 혼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혼도 있고 몸도 있다.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지 결코 영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혼과 몸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란 혼과 몸이 없고 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이지 사람이 아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온 존재가 영의 통제를 받고 그의 온 존재의 가장 높은 기관으로 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주의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영에 속해도 그의 혼과 가능과 기관이 제해지는 것이 아니다. 영에 속한 사람도 여전히 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여전히 혼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이것들이 혼 생명의 각 부분으로 남아 있으나 그 기능들은 사람으로서의 요소들일 뿐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기능들로 말미암아 살지 않지만 기관 자체는 제해지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들은 죽고 새롭게 되며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과 완전한 연합을 갖고 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 역활을 한다. 영에 속한 사람도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이것들은 온전히 온전히 영의 직감의 인도를 받는 다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도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의 감정은 이전처럼 단독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온전히 영의 지배를 받는다. 이제 그의 감정은 더 이상 이전처럼 자기 욕망과 자기의 애정과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것들로 인해 영을 억누르고 영의 행동에 반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영이 기뻐하는 것만을 기뻐하고 영의 지시만을 따르며 영이 허락한 것을 느끼게 된다. 영은 감정의 생명이 되며 또한 감정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영에 속한 사람도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과 같이 산만하지 않고 영과 동역한다. 이제 그의 생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나 이론으로 영의 계시를 반대하지 않고 분란한 생각으로 영의 고요함을 방해하지도 않으며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으로 영의 계시를 거스르지 않으며 영과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영적 노정을 걷는다. 또한 영에 계시가 있을 때 생각은 그 계시의 뜻을 해석하고 영이 씨름으로 인해 ’침체될 때‘ 생각은 영을 도와서 싸우게 된다. 만일 성령께서 무슨 진리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생각은 영을 도와서 생각하고 해석한다. 영은 그의 사상을 멈추게 하거나 생각하게 할 능력도 갖게 된다.
영에 속한 사람에게도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삼지않고 하나님께 독립하지 않으며 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된다. 이제 그의 의지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자아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지 않고 강퍅하지 않으며, 온전히 파쇄되고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으며, 야만적이지 읺고 쉽게 가르침받는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영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의지는 영을 위해 영의 뜻을 준행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의지는 영의 신하같이 영의 입구에 서서 영의 분부를 기다리게 되었다.
영에 속한 사람의 몸은 또한 영에 복종한다. 그는 더 이상 전과 같이 많은 죄를 범하도록 육신으로 혼을 유혹하지 않고 보혈로 씻음받고 십자가로 육체의 정욕을 처리하며 온전히 혼이 영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따르는 노예가 된다. 그의 몸은 즉각적으로 영의 모든 인도에 메아리치게 된다. 영은 새롭게 된 의지를 통하여 몸을 온전히 다스릴 권한을 갖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약한 영을 억누르지 않는다. ‘영에 속한 사람’의 영은 이미 강건케 된 영이다. 그의 몸은 영의 능력 아래 순종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사도는 영에 속한 사람의 실지적 상태를 보여준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여기서는 영에 속한 사람이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1) 그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영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얻었고, 영의 생명이 그의 온 존재에 부어짐으로 모든 기관이 영의 생명으로 살고 영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는 혼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다. 그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이상과 사랑과 의견은 모두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고 온전히 영의 영의 통제하에 있으며 다시는 단독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3) 비록 그는 여전히 몸을 가지고 있지만 몸을 벗은 영이 아니다. 그러나 육신의 피곤함과 고통과 요구 등은 결코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의 영을 승천의 위치로부터 떨어뜨릴 수 없다. 그의 전신의 지체들은 의의 병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은 곧 영에 소속된 사람이다. 그의 온 존재가 영의 다스림 아래 있다. 온 존재의 모든 기괸이 다 영의 통제 아래 있고 영의 절제를 받는다. 그의 영이 그의 생활의 특징이 되었고 무엇을 하든지 영에서 출발한다. 그는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고 자기 임의로 말하거나 일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고 영의 능력을 취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곧 영에 의해 사는 사람이다.
첫댓글 사람이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졌기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같이 성령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은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리도록 사람의 영에 힘을 더해 주는 분이시다.
우리가 성령을 시인하고 존경해야만 우리 안 은밀한 곳에서 그 능력과 일을 나타내고 우리의 혼과 지각의 생명에도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한다.
믿는 이는 성령을 강론한 성경의 교리를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성령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식 안에서 믿는 이는 마땅히 자기 자신을 아무 미련 없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에 맡기고 혼과 몸의 각 부분을 성령에게 항복하고 기꺼이 인도를 받으며 교정받기를 원해야 한다.
영에 속한 사람도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과 같이 산만하지 않고 영과 동역한다.
이제 그의 생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나 이론으로 영의 계시를 반대하지 않고 분란한 생각으로 영의 고요함을 방해하지도 않으며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으로 영의 계시를 거스르지 않으며 영과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영적 노정을 걷는다.
또한 영에 계시가 있을 때 생각은 그 계시의 뜻을 해석하고 영이 씨름으로 인해 ’침체될 때‘ 생각은 영을 도와서 싸우게 된다.
만일 성령께서 무슨 진리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생각은 영을 도와서 생각하고 해석한다.
영은 그의 사상을 멈추게 하거나 생각하게 할 능력도 갖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졌기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같이 성령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