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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1> 조준호 “초기불교로 돌아가면 두 수행법이 만난다”
우리 사회에 ‘수행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관심의 초점은 자연스레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부처님 가르침에서 연유된 것인가’ ‘연유됐다면 어느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보다 가까운 것인가’로 모아지고 있다.
본지는 이런 세간의 분위기를 반영,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교리적 근거와 차이점을 조명하는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교리적 근거와 차이”라는 주제로 쟁론(爭論)의 장을 마련했다. 이번 호에서는 먼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에서 다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국대 강사 조준호씨의 글을 싣는다. 많은 논객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예를 들면, 화두선 측의 학술논문에 의하면 위빠사나는 “조작을 의미한다”거나 “초기불교 수행은 오히려 인위적이고 조작되어 그 자체로 허물(有爲法)”이라거나 “망심에 불과한 것”이나 “지극히 입문적이고 기초단계의 것”으로 평가된다.
다시 실천수행가에 의해 “조사선이 오관을 닫아 사량분별을 가지지 않고 철저하게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위빠사나는 “오관을 열고 분별하는 수행법”, “간단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니 효력은 있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또는 “부셔져버리고 또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항상 같은 노력을 해야하는 보통사람의 수행법”이나 “하근기의 수행법”, 심지어 “바람직한 수행법이 아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수행 같지만 믿을 수 없는 공부”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나라의 화두선 이론가나 실천가의 대부분은 현재 유통되는 위빠사나를 “낮은 단계의 소승불교 수행법” 정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양측 좌선의 선정 중시… 수행결과도 비슷 서로 차별성만 강조말고 합일점 찾아내야
그것은 다름아닌 위빠사나 수행은 ‘초선 이전부터 가능하다’는 견해나 또는 ‘초선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거나, 아니면 ‘처음 시작부터 관(觀)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은 물론 심지어 ‘선정의 바탕 없이 위빠사나는 가능하여 아예 선정과 무관한 행법이라도 되는 것인 양 이해’하는데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맥락은 진리인식에 가장 중요한 용어들을 ‘알아차림’이나 ‘감지한다’나 ‘마음챙김’ 또는 ‘마음지킴’ 정도로 쓰고 있는 데에 또한 기인한다.
문제는 이 같은 위빠사나가 마치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인양 소개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위빠사나와 화두선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법으로 여기게끔 된 것이다. 그리고 갈수록 교집합의 확보는 불가능하고 교두보까지 놓을 수 없는 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따라서 미얀마 식 위빠사나와 초기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화두선과 초기불교의 중심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온전하게 만날 수 있는 장이 형성될 수 있다. 대중교화의 방편적 차원인 ‘대중적인 위빠사나’를 그대로 화두선과 비교하여 ‘분별법’이나 ‘조작법’ 정도로 밀쳐내서는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게 되고 만다.
하지만 양측 모두를 살려내려면 교리적인 연결고리를 확보하고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불교경전의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선정체계인 4선을 통해 화두선과 위빠사나를 보아야만이 서로간의 내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양자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치 시대가 다르면 옷을 달리 입듯이 외장은 달라 보이지만 내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즉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 또한 좌선의 선정을 강조한다. 위빠사나는 적어도 제4선과 같은 높은 수준의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화두선은 위빠사나의 바탕인 4선 가운데 초선(初禪)에서 ‘말과 언어의 그침’, 그리고 다시 화두선에서 ‘분별(사량)을 쉬는 것’이나 ‘심행처멸’의 경지는 그대로 제2선의 ‘언어가 쉬는 것에 따른 분별사유(尋伺)의 쉼’과 통한다.
그렇기에 초기경전에서 부처님 또한 위빠사나는 “지극히 고요하고 뛰어나 분별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4선은 제행(諸行)의 순차적인 쉼을 보여주는 데, 이는 화두선에서 ‘조작심을 쉬는 것’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화두선에서 강조하는 성성적적 또한 본래 ‘지극한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제3선의 정지(正智 : sampajana)와 또한 ‘지극한 평정심이나 고요함’을 의미하는 제4선의 사(捨: upekha)와 내용면에 있어 그대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다르다면 둘 중 하나는 불교가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는 여실하게 볼 수 있고, 투명하게 볼 수 있고, 매우 생생하게 볼 수 있고,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 집착을 끊어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지극히 높고 깊은 수준으로 고요해져 있고 투명해져 있는 상태로 그것은 오개(五蓋)와 분별사유에 의해 대상을 조작.왜곡하지 않는 상태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이 가능한 것으로 교설된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일차적으로 삼법인의 여실지견임에 대해 화두선은 견성성불로 달리 표현되지만 견성은 불성에 대한 견성으로 달리 각성(覺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각성은 위빠사나의 무상.무아를 떠나 있지 않다. 즉 양자 모두 공(空)이나 여여, 실상 또는 진여에 대한 각성이고 여실지견으로 열반.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위빠사나를 초선 이전이나 초선 정도로 보게 되면 결국 위빠사나는 언어와 문자에 사로잡힌 행법이 되며, 심사와 같은 분별사유조차 뛰어 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초선 이전의 오개, 언어와 문자 그리고 분별사유의 범위에 갇힌 위빠사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의 이해, 즉 제사선 이후라야 본격적인 위빠사나가 수행된다는 이해로 접근해 나갈 때만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이 가능해질 것이다. 조준호/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12호/ 3월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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