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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朴東完)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선생님 은 2派(문원공파) 이시고 문제공 [박충좌(朴忠佐)] 第4子 번(璠)의 후손이시고 26世孫 입니다
박동완(朴東完) - 근곡(槿谷) 1885 항일/국방 [요약정보] 시대 항일기 본관 함양(咸陽) 성 박(朴) 호 근곡(槿谷) 생년 1885 연령 57 활동분야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 독립운동가 1885(고종 22)∼1941.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근곡(槿谷). . 서울 출신.
부는 감목관(監牧官) 박형순(朴馨淳).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와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한 뒤 감리교 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申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1919년 2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27일 이인환(李寅煥)·함태영(咸台永)·박희도·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등과 함께 정동교회 내에 있던 이필주(李弼柱)의 집에 모여 천도교측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자로서 서명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 신간회(新幹會) 간사를 역임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한중 양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1933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의 목사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1년 2월 23일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비타협 민족운동의 외길을 걸어간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전도자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살을 에이고 저미는듯하던 율렬(凓烈)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 동칩(冬蟄)하였던 개구리 소리지르고 보금자리에 숨었던 종달새 노래부르며 중천에 높이 떠 펄펄 나른다. 아침 군생만물이 다 기뻐하는 희망의 때가 돌아온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동완(朴東完,1885-1941)이 자신이 주간으로 있던《신생명》(제20호, 1925. 2)에「권두어」로 실은 새 봄을 맞는 기원이다. 일제의 억압 아래서 자유의 기쁜 때를 희망하며 독립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박동완은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골’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란 아호처럼 누구보다 이 땅과 이 민족을 사랑했던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기독교의 민중적 표준과 조선적 교회를 만드는 데 골몰한 민중의 목자이기도 하였다. 일본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계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그는 비타협 불굴의 자세로 민족구원의 외길을 걸어갔다.
◆ 기독교 입교와 3․1운동 참여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박형순(朴馨淳)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던 그는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 환경 속에서 다섯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열세살 무렵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한 뒤, 10대 후반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서는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던 그는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이듬해인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이 때 그는 기독교의 세례를 받는데, 그의 개종 동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박동완이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장로․감리 연합의 기독교계 신문으로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基督申報)》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 무렵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는 한편,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역임하며 교회와 사회의 접점지대에서 활발할 활동을 펼쳤다. 그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한 중앙YMCA 간사 박희도와의 교분도 이 과정에서 맺어졌다. 뒤에 그는 법정진술에서 평소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3월 1일의 독립선언으로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주민이 되었으며, 민족자결은 그렇게 독립한 뒤에 우리가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를 만나 그의 권유로 뒤늦게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박동완은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정되었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계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초고를 검토한 그는 이튿날 밤 가회동 손병희의 저택에서 열린 민족대표들의 상견례 겸 예비모임에 참석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오전 만기 출옥으로 마포 공덕리 경성감옥의 문을 나섰다.
◆ 기독교 사회운동과 신간회 활동
출옥후 박동완은 《기독신보》 주필과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때 그는 중앙YMCA 일요강화에 연사로 나서 ‘천국이 근(近)하리라’, ‘의로운 청년’ 등을 화두 삼아 민족의 독립이 가까워 왔음을 암시하며, 청년들에게 정의와 인도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산업과 교육의 장려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유성준 이갑성 김윤수 장두현 등과 함께 1923년 1월 서울에서 발족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하고, 이상재가 회장으로 있는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였다.
이렇게 출옥 후 그의 활동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는데, 주요 활동공간은 이전에 그랬듯이 교계언론 분야였다. 그는 《기독신보》의 주필로 있다가, 1923년 7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잡지 《신생명(新生命)》을 창간하자 그 주간을 맡아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조선적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데 힘썼다. 《신생명》20호에 실은「그리스도종교와 우리의 사명」이라는 글에서, 그는 서양사람이 우리에게 전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양문명과 서양사람 고유의 민족성을 가미한 것으로, 원래 동양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의 보옥같은 복음과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랑과 평화를 주안으로 하는 그리스도교가 서양사람들의 호전적 경향과 물질주의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혼탁해진 복음을 본래대로 순결하게 되돌릴 책임이 우리 동양인에게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본래의 그리스도 복음으로 돌아가 거기에 온전히 순복함으로써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민족이 될 것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박동완의 언론계몽활동은 1925년 4월 《신생명》이 통권 21호를 끝으로 폐간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그는 한때 교계 일에서 손을 떼고 서울 동소문 안에 경성공업사란 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면서 정치적인 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로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의 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그는 여기에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이갑성 등과 함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흥업구락부에 참여하면서 그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그 반경 안에 놓여졌다.
흥업구락부 계열 인사들은 먼저 기독교의 실제화를 내걸고 1925년 11월 신흥우가 총무로 있는 조선YMCA연합회에 농촌부를 신설하여 농촌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박동완은 농촌부 위원으로 그 일역을 담당하였다. 1926년 2월 ① 기독교를 민중적 표준, ② 실제 생활을 간이화, ③ 산업기관의 시설, ④ 조선적 교회 등을 연구목표로 하여 중앙YMCA회관에서 기독교연구회를 발족할 때도 그는 신흥우 박희도 김활란 유각경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활동의 결정판은 뭐니뭐니 해도 신간회 운동이었다.
1927년 1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정치경제적 각성’, ‘공고한 단결’, ‘기회주의의 일체 부인’을 3대 강령으로 하는 신간회를 발기할 때, 박동완은 흥업구락부의 이상재 유억겸 안재홍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회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불혹(不惑)의 40대 초반 나이에 그는 신간회 본부 간사로 민족협동전선의 기초를 세우고 그것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박동완이 신간회 일로 동분서주할 때, 군벌 장작림의 지배하에 있는 중국 동삼성(東三省) 거주 백만 재만동포들이 연말까지 중국 귀화수속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퇴거명령을 내리겠다는 중국관헌의 폭압으로 박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은 12월 9일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모여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하고 위원장에 안재홍을 선출하였다. 박동완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특파원에 선정되어 1928년 1월 이도원과 함께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회자로
박동완이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인 흥업구락부를 통해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은 것은 신간회 일로, 재만동포 구제사업으로 분주하던 1928년 중반 무렵이었다. 그는 미 북감리회 소속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전도사로 시무하기는 했지만 정식 목사 안수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인기독교회는 1918년 이승만이 미국 감리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독립교단으로, 그 같은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미주 동지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여 1928년 8월 25일 경성역을 출발, 9월 8일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 와히아와(Wahiawa)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박동완은 부임 이후 1940년까지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12년간 목회를 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와히아와는 오아후 섬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이 곳에 한인기독교회가 설립된 것은 1918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평신도 예배모임으로 시작되어 1919년 20명의 한인들로 현재의 팜(Palm)가 끝자락에 위치한 집을 세내어 교회를 세웠는데, 주중에는 한글학교로 사용하였다. 1924년에는 길 하나 건너 레후아(Lehua)가 246번지로 교회를 옮기고, 와이알루아 교회의 최창덕 목사를 시간제로 청빙하였다. 그 뒤 첫 전임목회자로 부임한 것이 박동완이었다.
박동완은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목회에 힘쓰는 한편으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리고 1931년에는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귀국하여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간 머무르며 중앙YMCA회관 등지에서 하와이 동포의 근황과 신앙생활을 알리는 강연을 하였다. 국내 흥업구락부와 미주 동지회 사이에 은밀한 소통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박동완은 한인기독교회 일로 분주하였다. 1934년 7월에는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는데, 창간호 「편집뒤의 말」에 《신생명》이 폐간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교차한다며 남다른 감회를 표시하였다. 또「조선감리교회 선교 50주년을 맞으면서」라는 논단을 통해서는 국내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합동하여 순전한 조선교회를 만들자는 여론이 차차 머리를 들고 나선다며 그 귀추에 주목하였다.
앞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중앙이사로 활동하였던 박동완은 1935년 1월 중앙이사국장에 취임하여 이승만 등과 함께 한인기독교회를 이끌어나갔다. 또한 동지회의 와히아와지방 대표로도 활동하였는데, 관련기록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게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1930년 하와이 교민단(1932년 국민회로 재편)과 동지회의 충돌로 촉발된 한인사회의 분열이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1938년 8월 오랜 반목관계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할 때 연사로 나선 사실이 그 같은 짐작을 뒷받침해준다. 아무튼 하와이에서 박동완은 정치운동보다는 종교활동에 더 집중하였다.
이렇게 만리타향에서 민중의 목자로 교회 사역에 몰두하던 박동완은 1941년 초 불의의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이국 땅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 나이로 57세 때였다. 그의 유해는 한 달 뒤 가족과 친지가 있는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박동완 박동완(朴東完, 1883. 12. 27~1941) 호: 근곡(槿谷)
한국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33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기독교인이다.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와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한 후, 감리교 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申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그는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던 1919년 2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찬동하여 27일에는 이인환(李寅煥)・함태영(咸台永)・박희도・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등과 함께 정동교회(貞洞敎會)내에 있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 모여 천도교측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이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간사를 역임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한중(韓中) 양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1933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韓人敎會) 목사로 근무하는 한편,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기타]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2卷, 國家報勳處, 1986年
[출처] 독립운동가 박동완|작성자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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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양전백 신홍식 오화영 이갑성 이승훈 이필주 홍기조 권병덕 김병조 김창준 백용성 손병희 양한묵 이명룡 이종일 임예환 최성모 홍병기 길선주 나용환 박준승 신석구 최남선 오세창 유여대 이종훈 정춘수 최린 한용운 권동진 김완규 나인협 박희도 양전백 梁甸伯 1869 ∼ 1933.1.17 목사 ·독립운동가.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격헌(格軒). 평북 선천(宣川) 출생. 1897년 예수교장로회의 전도사로 일하다가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선천북교회에 부임하였다. 신성중학(信聖中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등을 설립하였으며, 여러 곳에 양로원 ·고아원도 세웠다. 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14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년 3월 1일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홍식 申洪植 1872 ∼ 1937 항일 독립투사. 3 ·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충북 청주 출생. 30세 때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충남 공주 감리교희에 있다가 3 ·1 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南山峴) 교회 목사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 후에는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오화영 吳華英 1880 ∼ ? 독립운동가 ·목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서울 출생. 1917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원산(元山) 감리교회 목사, 원산 광성(光成)보통학교 교감을 지낸 후 3 ·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27년부터 신간회(新幹會) 간부, YMCA 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39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 8 ·15광복 후 조선민족당 당수,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 반탁(反託)투쟁위원회 위원, 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정무위원 ·외교협회 이사 ·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학관(政治學館:현 건국대학) 초대 관장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50년 제2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갑성 李甲成 1889.10.23 ∼ 1981.3.25 독립운동가. 본관 전주(全州). 호 연당(硏堂). 대구 출생.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년 3 ·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4년 세브란스 의약(醫藥) 지배인이 되고, 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33년 신간회(新幹會)사건으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귀국, 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45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 47년 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하고, 50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고, 63년 공화당(共和黨) 발기위원이 되었다. 65년 광복회장(光復會長)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이승훈 李昇薰 1864 ∼ 1930 독립운동가 ·교육자. 본관 여주(驪州). 호 남강(南岡). 본명 인환(寅煥). 평북 정주(定州) 출생.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 때 납청정(納淸亭)에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林權逸)의 상점의 점원이 되었는데, 10여 년 후 유기행상 ·공장경영 등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1894년 청 ·일전쟁 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서울 ·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수릉참봉(水陵參奉)이 되었다. 오산면(五山面) 용동(龍洞)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陞薦齋)를 세워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관서지방의 자산가들을 연결하여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람과 제휴,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 ·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였다. 그 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감을 걱정하다 늦게나마 면학(勉學)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敎育振興論) 연설에 크게 감동받아, 당장 상투를 자르고 금주단연(禁酒斷煙)을 실천에 옮기고 승천재를 개축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열었다. 또한 신민회(新民會) 발기에 참여한 후 다시 재단(財團)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馬山瓷器會社)를 세웠다. 그 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세웠다. 11년 5월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관련인사의 참여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3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物産奬勵)운동과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추진하였다. 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 재직 중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필주 李弼柱 1869.12.9 ∼ 1942 독립운동가. 경기 고양(高陽) 출생.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20세 때 구(舊)한국군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尙洞)교회 목사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하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어 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상동 공옥(攻玉)소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신타파, 계급차별의 배격, 자립정신의 고취 등을 표방하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왕십리교회 ·정동(貞洞)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이상재(李商在) ·최병헌(崔炳憲) 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아리 ·청파동 ·용두동 ·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부설 유치원 ·소학교 ·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후에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홍기조 洪基兆 1865 ∼ 1938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남양(南陽). 호 유암(游菴). 평남 용강(龍江) 출생.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86년 동학(東學)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 ·대접주(大接主) ·창의대령(倡義大領) 등을 역임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天道敎)의 도사(道師) ·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권병덕 權秉悳 1868 ∼ 1944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 안동. 자 윤좌(潤佐). 호 청암(淸菴) ·정암(貞菴) ·우운(又雲). 충북 청원출생. 18세 때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하였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 전제관장(典制觀長) ·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 ·금융관장(金融觀長) ·보문관장(普文觀長)을 역임, 12년 천도교에서 시천교(侍天敎)가 분리될 때 이에 가담하여 시천교 종무장(宗務長)을 거쳐 시천교에서 경영하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8년 다시 천도교로 개종(改宗), 도사(道師)가 되었다가 다음해 3 ·1운동에 참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 ·감사원장 ·선도사(宜道師) 등을 지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병조 金秉祚 1876 ∼ 1947 독립운동가. 3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호 일재(一齋). 평북 정주(定州) 출생.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임이사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표 ·사료편찬위원 ·상하이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20년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24년 만주 지안현[輯安縣]에서 《대동역사(大同歷史)》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간행하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양성하는 한편 《한족신문(韓族新聞)》을 발행, 독립사상 앙양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운동(反共運動)에 투신하였는데 46년 반공의거를 위한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조직,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47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죽었다. 최남선 崔南善 1890.4.26 ∼ 1957.10.10 사학자 ·문인. 본관 동주(東州:鐵原). 자 공륙(公六). 호 육당(六堂).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김창준 金昌俊 1889 ∼ 1956 독립운동가. 1919년 3 ·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25년 5월 동지 37명을 이끌고 함북 영성(嶺城)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4명을 죽이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함북 일대를 뒤흔들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뒤에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川) 지방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백용성 白龍城 1864.5.8 ∼ 1940.2.20 독립운동가 ·승려. 본관 수원(水原). 법명(法名) 진종(辰鍾). 속명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전북 남원(南原) 출생. 16세 때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名刹)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3 ·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저서로 《수심론(修心論)》 《귀원정종(歸源正宗)》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등이 있으며,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손병희 孫秉熙 1862 ∼ 1922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한묵 梁漢默 1862 ∼ 1919.5.26 독립운동가.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제주(濟州). 자 길중(吉仲). 호 지강(芝江). 전남 해남(海南) 출생. 1894년(고종 31)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로 능주(綾州)에서 세무관리로 있다가 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베이징[北京] 등지를 유람,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그 곳에 망명차 와 있던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06년 손병희 ·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우봉도(右奉道)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法道師)를 거쳐 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어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3 ·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명룡 李明龍 1872.8.2 ∼ 1956.11.12 독립운동가. 본관 전주(全州). 호 춘헌(春軒). 평북 철산(鐵山) 출생. 한학을 배우고 1892년 그리스도교에 입교, 신앙생활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2년 정주군(定州郡) 상업회의소 소장이 되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한인토지수매를 적극 반대하였다. 1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였다. 16년 덕흥(德興)교회 장로가 되어 농장을 경영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45년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평동중학(平東中學)을 세워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47년 월남하였다. 54년 반공연맹 이사, 55년 평북도민회 고문, 3 ·1정신선양회 고문,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고문, 5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종일 李鍾一 1858 ∼ 1925 독립운동가. 본관 성주(星州). 호 묵암(默庵) ·옥파(沃波). 도호(道號) 천연자(天然子). 경기 포천(抱川) 출생.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金允植) ·이상재(李相宰)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82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 정3품의 위계를 받았다. 98년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회장, 제국신문사(帝國新聞社) 사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탄신일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식(誤植),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그를 중상하는 측의 고의적인 행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入敎),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인쇄소인 보성사(普城社)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 ·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임예환 林禮煥 1865.7.17 ∼ 1949 독립운동가. 호 연암(淵菴). 평남 중화(中和) 출생. 1888년 동학(東學)에 입교한 후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싸웠으며, 1912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19년 2월 24일 고종의 인산(因山)과 교주 최제우(崔濟愚) 환원(還元)기도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25일 손병희(孫秉熙)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등을 만나 거사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 28일 3 ·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신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최성모 崔聖謨 1873 ∼ 1936 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海州) 남본정(南本町)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상경하여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0년 경성(京城)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 만주로 망명하여 펑톈성[奉天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홍병기 洪秉箕 1869 ∼ 1949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인암(仁菴). 경기 여주(驪州) 출생. 천도교인으로 1894년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장로(長老)로 있으면서 교세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 ·l운동 때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26년 지린성[吉林省]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길선주 吉善宙 1869 ∼ 1935.11 장로교회 목사, 교육가. 자는 윤열(潤悅), 호 영계(靈溪). 평남 안주 출생.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고, 이 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2년 105인 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 ·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남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문집에 《영계 길선주 목사 저작집》, 저서에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이 있다. 나용환 羅龍煥 1863 ∼ 1936 독립운동가. 호 택암(澤菴). 평남 성천 출생. 23세 때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천도교 전체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준승 朴準承 1866.11.24 ∼ 1921.3.23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 비암(菴). 전북 임실(任實) 출생. 1891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97년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 수접주(首接主), 12년 전남 장성(長城)의 대교구장(大敎區長)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이 되었다. 16년 전라도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19년 3 ·1운동 때는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 ·박영창(朴永昌) ·김의규(金衣圭)에게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0장을 나누어 주어 장성 ·남원(南原) ·임실(任實) 등 각지에서 궐기하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석구 申錫九 1875.5.3 ∼ 1950.11 독립운동가. 19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평산(平山). 호 은재(殷哉). 충북 청주(淸州) 출생.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南浦) 등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는데, 3 ·1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운동의 주도인물이 되었다. 2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감리교단 차원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결의에 반대, 신사참배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 ·1절기념 방송사건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反動秘密結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 ·25전쟁 때 총살당하였다. 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오세창 吳世昌 1864.7.5 ∼ 1953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 3 ·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해주(海州). 자 중명(仲銘). 호 위창(葦滄). 서울 출생.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하다가 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 ·농상공부 참의(參議) ·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97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1902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양한묵(梁漢默)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 귀국,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년 3 ·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 ·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 ·25전쟁 중 대구에서 별세,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여대 劉如大 1878 ∼ 1937 독립운동가.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낙포(樂圃). 평북 의주(義州) 출생. 1895년 서당을 개설, 훈도가 되었고, 1900년 의주에 양실(養實)학교를 세웠다. 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의주 동교회(東敎會) 목사가 되어 일하면서 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폐교단계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31년 백마(白馬)교회 목사로 있을 때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에 《면무식(免無識)》 《위인기담(偉人奇談)》 《강도열전(講道烈傳)》 등이 있다. 62년 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종훈 李鍾勳 1855 ∼ 1931.5.2 독립운동가. 호 정암(正菴). 경기 광주(廣州) 출생. 25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고, 98년 천도교(天道敎)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자 옥리(獄吏)를 매수, 시신을 몰래 빼내어 장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등과 천도교 개편에 힘써 도사(道師)가 되었다. 19년 2월 25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손병희가 죽은 후 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고문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춘수 鄭春洙 1875 ∼ 1951 독립운동가. 본관 광주(光州). 자 명옥(明玉). 호 청오(靑吾). 충북 청주(淸州) 출생.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원산(元山)에서 영국 선교사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경성(京城)신학교 ·협성(協成)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하였다. 3 ·1운동 때 원산 남촌동(南村洞)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종사하였으며, 1934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친일행각을 한 것이 논란이 되어 청주시 3 ·1공원에 있던 동상이 철거당하였다. 최린 崔麟 1878 ∼ 1958 독립운동가 ·친일파. 호 고우(古友). 도호(道號) 여암(如庵).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함남 함흥(咸興) 출생.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다. 이어 보성(普城)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후 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 ·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50년 6 ·25전쟁 중 납북되었다. 한용운 韓龍雲 1879.8.29 ∼ 1944.6.29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 ·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권동진 權東鎭 1861 ∼ 1947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호 애당(愛堂) ·우당(憂堂). 천도교에서의 도호(道號)는 실암(實菴). 경기 포천 출생. 함안군수(咸安郡守) ·육군참령(陸軍參領)을 역임하고, 그 후 개화당(開化黨)에 들어가 혁신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도사(道師)가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1운동의 핵심적 지도인물이 되었으며,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 간 복역하였다. 8 ·15광복 후 정계에 투신하여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총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완규 金完圭 1876 ∼ 1949 독립운동가. 호 송암(松巖). 서울 출생.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 여수통신주사(麗水通信主事)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 등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봉도(奉道) ·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고, 19년 3 ·1운동 때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財政部長)을 지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나인협 羅仁協 1871 ∼ 1951 독립운동가. 호 홍암(泓庵). 평남 성천(成川) 출생. 19세 때 동학(東學)에 입문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 ·1운동 때는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동완 朴東完 1885.12.27 ∼ 1941 독립운동가.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 근곡(槿谷). 경기 양평(楊平) 출생. 한성외국어학교 ·배제학당 등에서 수학, 감리교 제일교회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新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19년 3 ·l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 ·신간회(新幹會) 상임간사 등을 지내며 사회운동에 종사하였다. 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 상황을 시찰하고 한 ·중 양 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그 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희도 朴熙道 1889 ∼ 1951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04년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영신학교 ·중앙보육학교를 설립, 부교장을 지냈다. 19년 3 ·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의 주필로 독립사상과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잡지 《동광(東光)》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하다가 48년 반민특위(反民特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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