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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거제도 답사기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3)
( 거제면 법동에서 거제면 오수리까지)
고당 하미정과 마고할미 !
거제도에 언제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 유적을 보면 아마 구석기 말기나 신석초로 추정된다. 거제도 어느 지역에 사람이 먼저 살았는지는 몰라도 여러 곳에서 오래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은 법동리 고당마을 찾았다. 법동리는 원래 둔덕면의 법동포방이었으나 고종 32년(1895년)효랑과 함께 서부면(현재 거제면)에 편입되었다. 법동을 옛날에는 고당(姑堂)이라 하였는데 이는 현재는 육지가 되었으나 옛날에 고능도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섬에는 착하고 어진할머니가 살았는데 마고할미라 불렸다. 이 할머니는 마을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다 세상을 떠나니 주민들이 제당(祭堂)을 짓고 동제(洞祭)를 지냈으니 할미당 또는 해미당이라 한다. 그러면 고당을 법동리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다. 지금 법동포마을을 법둥개라고 하는데 거기에 어원이 있는 상 싶다.
법동리에는 분청도요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유일하게 법동초등학교( 현재 지두갤러리)앞에 작은 전각이 하나 있는데 현판이 하미정(荷湄亭)이라 되어 있다. 이곳을 몇 번 지나다가 보면 옛날 가마를 넣어두던 곳인가 하는 의구심이 갔다.
할미당, 해미당, 하미정이란 지명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옛법동초등학교 (현 지두갤러리)앞에 있는 하미정은 옛날 법동초등학교가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공부를 했던곳으로, 옛날 고당에 곽종원 할아버지께서 글도 쓰고 시도 읊기도 한 곳이다.
5평정도 되어 보이는 실내에는 널빤지에 붓글씨를 써서 걸어 놓았다. 가운데 대들보에는 단기 4281년이라는 상량문구가 있다. 금년이 4342년이니 서기로 1948년 정부가 수립되던 해에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하미정운(荷湄亭韻)이라는 판각에는 경진(庚辰)년 10월21일이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920년대 이 전각이 있었고 그 뒤 1948년 집을 새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백면에는 널빤지 위에 많은 이들의 글귀가 보였는데 내가 상상하기로는 거제의 서예가들이 다 모인 것 같다. 여기가 곽씨의 집성촌이라 곽씨들의 이름이 보이고 옥씨, 김씨, 이씨, 허씨, 윤씨, 권씨, 조씨, 구씨, 방씨 등 30여명이 정도이다.
뚜렷하게 잘 쓴 글씨나 큰 현판은 없으나 옛날 거제의 유림(선비)들이 모여 정사를 논하고 글을 쓰며 시를 읊고 유유자적한 생각이 든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거제에 이런 유물이 남아 있다는 게 대견스럽다.
거제에는 문학하는 인물이 별로 없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거제는 육지와 떨어져 사람이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이며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귀양살이 지역으로 낙인찍혀, 옥씨도 그래서 생겨났다는 우스게 스러운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거제에서 서예의 원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마도 우암 송시열선생이 유배되어 온 것이 그 근원인상 느껴진다. 우암 송시열(160-1689)선생은 효종. 현종의 스승이며 유교 주자학의 대가로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에서 귀양을 밥 먹듯이 다녔다. 1679년 3월25일 거제에 유배되어 1680년 5월24일 유배가 풀릴 때까지 거제에 머물면서 유교와 서예를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암송시열선생이 거제를 떠난 후 후학들이 반곡서원을 세워 학문을 익히고 서예를 정진하게 되었다. 거제인으로 이름을 나타낸 이는 정훈성이다. 1779년에 태어난 정훈성은 시와 글씨에 뛰어나고 인품이 특출하여 정군자라 칭하였다. 그 다음이 성파 하동주씨이다. 하동주씨의 이전의 서예가들은 유물이 남아 있지 않으나 하동주씨의 작품은 몇 점 남아있다.
그래서 거제 서예의 역사는 하동주씨를 꼽는다. 하동주씨는 고종 2년(1865) 거제면 동상리 진양인 하지호의 둘째 아 들로 태어난 하동주는 영남의 서예대가로 진주에 나가서 명성을 떨치니 호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 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철종 2년 이조참판 김정희는 거제에 귀양와서 거제 반곡서원에 나다니면서 거제의 정훈성과 벗하고 서예를 전파하였는데 하동주는 아버지 하지호와 정훈성으로부터 전.예서(篆隸書)와 독창적인 추사체를 전수받았다. (김정희가 거제 유배되었다는 내용은 확인 불가능)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글씨 쓰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와 가까이 있으면서 추사체를 배웠고, 추사의 글씨가 담긴 책자를 가져와서 아들인 그에게 서법을 익히게 하면서 배우게 도움을 주었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의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부산의 범어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우리나라 서예의 아버지 김정희는 18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에 이르렸으나 현종6년(1840)제주도에 유배되어 8년 후 풀려났으나 철종 2년(1851)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 그 후 1856년 작고했으니 아마 거제도에 귀향 온 해는 1852-1856사이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상과 같이 거제의 서예역사는 송시열-정훈성-김정희-하동주로 이어오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연유로 거제에도 시를 쓰거나 서예를 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우리나라 초서의 대가 장목 김현봉씨(86살)도 자기 할아버지에게 사사를 받았다고 하니 역시 서예는 대물림하는 것 같다.
법동에 있는 하미정은 곽종원씨의 손자 곽동우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상태는 양호하나 찾는 이가 없어 2년 만에 처음 내가 방문한 것 같다. 고당에는 곽종원씨 외에 곽도순씨가 한문과 서예에 일가견이 있어 집에서 임시 서당을 만들어 동네사람들을 가르치고 현재 서책도 일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거제는 옛날 많은 사람들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기에 그 제자나 후예들이 있을 법도 한데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를 않다. 그 이유는 섬이라는 특징과 임진왜란, 6.25등을 거치면서 다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화려했던 고당은 지금은 늙은이만 있으며 약간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고당부두에는 산달도가는 카페리만 통통거리고 있다. 옛 초등학교 자리는 지금은 부산에서 온 미술가가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지두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거제면 법동리에 있는 하미당 ( 옛날 선비들이 시와 서예를 하며 서당 역활을 하던 곳)
~저녁노을에 물들은 거제만을 바라보며~
고당마을을 뒤로하고 거제면쪽으로 향하니 3~4분 거리에 소랑마을이 나온다. 소랑(小浪)개는 거제면의 내해이고 산달도가 막아 파도가 잔잔하다는 뜻이고 거제도의 동쪽 파랑포(波浪浦))와 상대되는 지명이다. 즉 파랑포는 외해로 파도가 심하게 치는 곳이고, 소량은 내해로 파도가 적어 상대되는 지명이라는 뜻이다.
소량 이웃마을이 松谷마을이다. 송곡마을은 옛날부터 儒生이 많아 生谷 또는 聖人골이라 하였고, 농사골이라 세경골이라 하였으나 고종 26년 명곡으로 부르다가 송림이 울창하여 송곡이라 하였다. 도로변의 표지판을 보니 내원사란 간판이 보여 고량을 따라 계속 직진했다. 한동안 달리니 송림이 울창하고 작은 저수지가 있는 내원사가 보인다. 산방산을 병풍삼고 작은 저수지를 앞에 둔 내원사는 적막이 흐르는 산사이다. 절 왼쪽 작은 개울에는 이끼와 함께 석창포가 보이고 가을을 알리는 누린풀이 나를 반긴다. 다시 큰길로 내려와 거제로 향해 달린다. 거제에서 제일큰 거제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물이 깨끗하여 굴양식을 많이 하는 곳이다. 저녁노을에 물들은 거제만을 조망하며 內看마을을 지난다. 이어서 外看마을이다. 외간, 내간 할 때 간(看)은 볼 간으로 邑內(옛날 거제면이 가장 중심지었음)에서 바라볼 때 가까운 바같쪽 큰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이다. 이곳에는 외간초등학교가 있으며, 동네 중간에는 수령이 300년이나 된 동백나무가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111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거제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국도변에서 차로 1~2분 거리이며 주차장과 휴식공간도 있다.
인근에 있는 아주머니의 말쌈이 몇 년 전 모 대학에서 이 나무를 측정하려고 할비비를 가져와 밑둥을 뚫으려 했으나 줄기가 너무 단단하여 철심만 두 개 뿌려 드리고 갔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다나???
돌아 나오면 외간초등학교 입구에 장군돌이 있다. 약170년전 도총관 이학규장군(정2품)이 가지고 놀던 돌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마을길을 내려와 거제농업개발원 가기 전에 큰 냇고랑이 있다. 이곳은 제법 폭이 넓으며 사시사철 철새들이 노뉘는 곳이다.
거제시 농업개발원을 지난다. 이곳은 거제시농업기술센타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농민들 뿐만아니라 일반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유치원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국화축제가 열리고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무수히 찾는 곳이기도하다.
거제도 문화유적이 살아 숨쉬는 곳, 거제면(옛 거제읍내)에 도착했다. 거제면의 중심지 서정리와 동상리에는 옛 유적이 많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거제초등학교 건물과 거제현 관아 건물이 있으며, 경상남도 지정 문화제는 거제기성관, 거제칠정, 거제향교, 옥산금성이 있고, 향토유적으로는 우암송시열이 공부하던 반곡서원과 이웃해 세진암도 있다. 옛날 유배 온 1,000여명은 대부분 이곳 거제면에 상주를 하였다. 그래서 옛 거제팔경은 거제면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곳 거제면의 문화유적을 둘러보려면 한 3~4시간 소요될 것이다. ( 추후 따로 편집 예정)
~죽림 별신굿과 곤발네 할머니~
거제면 중심지를 막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이 죽림과 죽림 해수욕장 가는 길이다. 거제시와 남해안별신굿보존회는 설날을 맞아 15~16일 이틀 동안 죽림마을에서 별신굿 공연을 벌였다. 별신굿보존회와 죽림마을 주민들은 2년 마다 한 차례씩 1박2일 동안 펼쳐졌던 별신굿을 20년 만인 2008년 재현한 후 그 맥을 이어가기로 했다. 한때 4박5일 동안 굿마당이 열렸지만 지금은 2일 정도로 축소됐다. 굿 중간의 탈놀이와 띠뱃놀이는 남해안에서 유일하게 죽림마을만 전해 온다. 2년마다 한 번 씩 열린다. 설날과 그 다음날 이틀 열리는데 일반인도 관람이 가능하다.
대숲개(죽림포) 곤발내 할머니 이야기
이 이야기는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불우이웃돕기로 마을의 빈곤한 어린이들의 생명을 길러준 아름다운 전설로 거제에서는 널리 퍼져있다.
곤은 빈곤할 곤(困), 발은 초가집 발( )이라 조그마한 오두막(烏頭幕) 초가(草家)집에 홀로 70평생을 외롭게 살아간 할머니를 곤발네 할머니라 일컬었다. 곤발네는 젊었을 때 남편을 여의고 아들 딸 하나 없이 홀로 지내면서 유일한 재산으로는 토담집 오두막 초가 단칸방이 전부였다.
돌아가신 남편의 가난했던 삶에 지쳐서 재혼하기를 단념하고 오로지 혼자서 살아가겠다는 곧은 신념으로 열행의 정열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곤발네는 젊음을 헛되이 보내기를 안타까이 여겨 무언가 사회에 훌륭한 부녀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가짐으로써 비록 초가집 돌담 오두막이지마는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 쓰며 저축해서 후세에 길이 전하기로 한 것이 오늘의 전설이다.
새벽에 잠에서 일어나 집안일을 다하고 이웃의 농사나 고기잡이 뒷일을 서슴치 않고 했으니 낮에는 논밭에서 김을 매고, 밤에는 이웃집에 길삼과 바느질을 도와서 푼푼이 모은 품삯 돈을 차곡차곡 간직하였다. 곤발네의 나이가 50이 되었을 때 애타게 번 돈으로 토담집 초가단칸을 헐고 새로운 집을 지어 살기로 생각한 바도 있었으나 자식 하나 없는 신세라 무슨 좋은 집이 소용 있느냐 하고 단념하여 근검과 절약의 빈곤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나이가 70이 넘는 곤발네 할머니는 이제 억센 노동일을 할 수 없고 이웃집 농사의 뒷일을 하기에 이르렀고 무엇인가 생각한 끝에 이제까지 번 돈의 절반으로 비전박토의 밭 한때기를 사서 수수와 조를 심어 잘 가꾸어 거두어 들였다.
때는 1885년 을유년 가을철 큰 흉년이 닥쳐와 삼백년 이래 처음 있는 굶주림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추곡을 한두 달 먹고 나니 모두가 식량이 떨어져 굶기를 밥 먹기와 같이 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가서 칡을 케고 해조류를 뜯어서 근근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풀뿌리와 해조류도 한정이 있으니 하루에 풀국죽 한 그릇으로 동민들이 연명할 수밖에 없으니 마을의 어린 아이들이 못 먹고 적게 먹어 피골이 상접 하는가 하면 퉁퉁 부어서 얼굴이 누렇게 되어가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곤발네 할머니는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굶으면 죽어야 되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가엾어 무언가 살려낼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였다. 근검과 절약으로 번 돈으로 사들인 밭에서 올 여름 수수와 조를 몇 섬 수확했던 것이다. 이 곡식으로 달밤에 당분이 든 엿을 만들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마을 어린이를 구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으며, 엿은 이틀 밤사이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곤발네 집에서 엿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온 동네 어른들이 찾아와서 나누어 먹자고 우겨댈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어른이 아닌 굶주리고 있는 새싹 어린이만을 구할 수 있을 까하고 고심한 끝에 좋은 묘안을 찾아내었다. 만든 엿을 방에다 두면 어른들에게 들통이 날것이니까 오줌통을 깨끗이 갈아 씻어서 통에 엿을 넣어서 방에 두지 않고 담장 밑 변소 옆에 두었으니 아무도 수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었다. 이리하여 어른들은 산으로 바다로 먹이를 찾아 나간 사이에 곤발네 할머니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또한 죽어가는 어린이에게 엿 한주먹씩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엿을 곤발네 할머니가 주어서 먹었다는 이야기는 부모형제 할 것 없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만약에 말을 해서 들통이 나면 어른이 찾아와서 빼앗아 갈 염려가 다분함으로 엿을 준 어리이 들에게 신신 당부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을 어린이는 굶주림에 눈을 뜨고 한한 소생하기에 이르렀다. 만들어 놓은 엿이 다 나누어주고 없어지면 또 밤을 지새워 가면서 엿을 만들어 매일 같이 엿을 먹여왔다.
이와 같이 기나긴 흉년의 겨울철도 어느새 곤발내 할머니가 추수한 수수와 좁쌀이 떨어지는 때를 같이하여 천지가 싹트기 시작했고, 봄나물을 뜯어서 먹게 되었으니 이 <대숲개>의 어린이들은 곤발네의 기지와 봉사적인 노력으로 모두 흉년을 이겨 내었다는 아름다운 가화(佳話)이다.
그러나 거제시 각 마을 부녀자들은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게으르고 먹기만 하며 “너는 대숲게 곤발네 할머니 집으로 가거라. 거기에 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오줌통에 담아 놓은 엿을 줄 테이니까” 하고 타일렀다. 아이들은 엿을 먹고 싶었지만 오줌통이란 말에 비위가 좋지 않아 “싫어요.”라고 했다.
이상과 같이 곤발네 할머니는 오늘날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린이 헌장이나 불우하고 굶주리는 이웃을 돕는 갸륵한 희생과 봉사의 선구자이고 훌륭한 민족화합의 선도자이기도 하니 우리들은 <곤발네>의 교훈을 거울삼아 맑고 깨끗하고, 정의로운 훈훈한 사회를 건설하고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후세에 길이길이 전하여야 하겠다.
~여기까지가 거제면소속이고 그 다음 산촌리는 동부면이다.~
가수 강산에씨가 거제도 출신이라 노래 한곡
첫댓글 선생님 정말로 수고하십니다
앞으로 100세까지는 끄떡없이 건강 유지하시겠습니다 ^^
쉬어가시며 천천히 느긋하게 연재해주셔요
즐겁게 잘볼께요~~
옛날에는 "다속게 곤발래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내력을 자세히 듣게되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속게 곤발래집이라고 하면 위와 같은 순고한 희생정신이 아니고 아주 저속하고 좋지않은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것은 왜 그런지... 다속게 곤발래집으로 보내 버린다고 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쳤다니...다시 한번 뒤돌아 조명해볼 사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