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왔는데요.. 건축하면서 '돈'에 대한 걱정을 하지않아도 되는 좋은 실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생긴 건 고릴라를 닮았다. 좌충우돌 TV를 틀면 나온다. 개그맨인가 하면 진행자이고, DJ인가 했더니 건축가란다. 또 가수도한다니. 별로 웃길 것 같지 않은데 은근히 사람을 웃긴다.
게다가 전방위의 박식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뚝딱뚝딱 그럴싸한집 한채를 다시 만들어내는 솜씨라니. 으악, 이제 CF모델까지.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양진석(36). 그를 ‘멀티형엔터테이너’라고 규정하자. 소위 ‘양진석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짧은 시일 안에 독특한 인기영역을 구축한 그를 만나러 서울 청담동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양진석은 내년초 코스닥 상장 예정인 양진석디자인(주)의 유망한 CEO였다.
양진석 건축연구소(주)를 양대축으로 운영하면서 짧은 시일에 건축업계의 기린아가 된
‘무서운 아이’.
조성모가 운영하는 생고기 전문점 ‘마나’와 강남 멀티플랙스 영화관 ‘주공공이’(ZOO002)의 리모델링으로 화제를 모았다.
또 그가 참여한 여의도 63빌딩옆의 쌍둥이빌딩 금호 리첸시아, 서초리시온 대림아파트는 높은 청약률로 100% 분양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또 MBC가 일산에 건설할 예정인 엔터테인먼트 스페이스 ‘MBCITY’(가칭)도 그가 따냈다. 이밖에 진행중인 프로젝트만도 수십가지.
“제 우상인 슈바이처 박사는
의료봉사를 하면서도 세계적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어요.
엔터테인먼트와 건축디자인의 접점에서 제 삶의 방향을 찾은 셈이죠”
건축의 대중화를 선언하면서 ‘건축 전도사’를 자처하는 젊은 CEO 양진석. 전방위, 다매체, 다품종의 노총각. 그의 삶은 새로운 세기 ‘멀티형 인간’의 표본이다.
부산에서의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컸다.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골프까지 배웠다. 사생대회를 휩쓸던 미술실력, 교회 합창단에서 익힌 가스펠송과 기타. 김민기와 비틀스, 아바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의 우상. 부산 브니엘고교 때 가세가 기울었다. 부와 빈곤의 극과 극. 일찍부터 돈을 초월하는 법을 익혔다.
성균관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했다.
공부보다 노래가 좋았던 시절. 한동준과 지근식, 김한년 등과 ‘노래그림’을 만들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다.
변진섭과 최호섭 등이 그와 함께 언더그라운드에서 노래 불렀던 동료였다.
“대학 졸업 무렵 군대와 음악과 건축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죠. 생각해보니 노래보다는 건축을 좀더 잘하는 것 같았어요.
노래는 제가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였구요”
하루 15시간씩 공부했다. 1988년 5월 합동앨범 ‘노래그림’을 내놓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교토대 건축학과 대학원 시절. 7년동안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좀더 멀리뛰기 위한 준비의 시간. 건설현장 숙직, 골프공 줍기와 캐디, 건축사무소 아르바이트 등.
“서울에서 들리는 소식 때문에 가끔씩 의지가 약해졌어요.
변진섭은 ‘홀로 된다는 것’의히트로 밀리언셀러 가수가 됐고, 한동준은 ‘너를 사랑하고도’로 유명해졌죠. 괜스레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나, 아쉬울 때가 많았어요”
포기하다니. 음악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렬해졌다. 틈날 때마다 일본음악을 듣고 라이브콘서트 현장을 찾았다. 귀국한 뒤에 (주)정림건축에 다니면서도 신문과 잡지 등에 일본음악에
대한 각종 평론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음악은 마약이라 했던가. MBC‘사랑의 스튜디오’를 통해 알려진 1집 ‘그게 바로 너였어’(1995)를 시작으로 2집 ‘섬머 드림’(1997)과 최근 3집 ‘10년의 사랑’(2000)에 이르기까지 노래를 향한 짝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방송과의 인연은 우연한 데서 비롯됐다. 알음알음 시작한 라디오 고정게스트. 당시 방송작가들은 양진석·김장훈·주영훈을 ‘3대 이빨’로 부르면서 선호했다.
TV 진출은 SBS TV ‘좋은 친구들’의 비교체험 ‘극과 극’ 코너. 남희석과 함께 일본 현지에서 촬영한 이 코너를 통해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신장개업’과 ‘러브하우스’ 코너에서 그는 방송과 건축이라는 양대축을 결합시켰고, 그덕분에 ‘건축가 양진석’이라는 브랜드를 극대화시킨 셈이다.
요즘도 그는 허름한 서민들의 집을 리모델링해주는데 매주 1천만원씩 자신의 돈을 쓰고 있다.
요즘 콜라와 바닥재, 자동차 광고 등에 출연하여 번 돈을 다시 재투자하는 셈이다.
“청소년기에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는 걸 경험한 게 살면서 큰 도움이 돼요.
저는 세상을 재미있고 신나게 살고 싶어요. 일찌감치 노래를 하면서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는 법을 배운 게 제 삶에 큰 재산이죠 . 제가 신명나지 않으면 대중들도 재미없어 하거든요”
불과 3년여 전. 그는 건축사무소를 그만두고 노래가 그리워 ‘고릴라 엔터테인먼트’를 차렸다가 IMF를 맞아 깡통찼던 사내였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월 2백만원을 받으면서 S·E·S의 일본 진출을 도왔던 ‘계약직 사원’이었다.
오늘 그는 한손엔 썰렁한 유머를, 한손엔 건축에 대한 전문지식을 쥐고 브라운관을 누비는‘멀티형 엔터테이너’가 됐다.
곧 ‘양진석의 일본음악 이야기’(김영사)와 ‘양진석의 건축이야기’(시공사)도 펴낼 예정이다.
그의 사무실 서재에 꽂힌 책을 봤다. 철학, 건축, 마케팅, 일본음악, 만화, 유머집에 이르기까지 잡식성 독서를 짐작할 만한 책이 즐비했다. 사람좋게 웃는 그를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지껄였다. “생각하는 고릴라야. 영락없어”.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번 호 : 22/22
입력일 : 2001/05/24 17:29:47
자료량 : 189줄
제 목 : 생각하는 고릴라? 유머아는 게릴라, 양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