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06/19 07:01 [6.25전쟁 70년] 사진으로 본 피란수도 부산 … 70년전, 그리고 오늘 굳세어라 금순아 영도다리, 점바치골목 등 곳곳 피란민 흔적 경무대·임시중앙청사 등 9곳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추진 포로수용소·비행장→벡스코·센텀시티 … 개발에 전쟁유산 사라져 『전쟁 아픔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 지금이라도 보존 노력 필요』 1952년 영도다리를 오갔던 피란민과 2020년 영도대교를 건너는 사람들 2020년 6월 연합뉴스가 촬영한 영도대교 위 모습과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영도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같이 담은 모습. 영도대교는 2013년 리모델링을 거쳐 도개 기능을 회복해 재개통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일부 제공] 70년전 피란민이 건넜던 영도대교 2020년 6월 연합뉴스가 촬영한 영도대교 모습과 1951년 촬영된 영도다리 모습 피란민의 아픔 담긴 영도다리의 과거와 오늘 2020년 연합뉴스가 촬영한 영도대교 위 버스와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에 부경근대사료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1952년 영도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촬영된 사진이 겹쳐져 보인다 대한민국 제2 도시 부산은 피란수도(避亂首都)였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1,023일 동안 서울을 대신한 임시수도였다. 부산은 1930년대 일제가 1960년 인구 30만을 기준으로 계획한 도시였지만, 전쟁이 끝난 뒤 한순간에 인구가 100만명으로 불어났다. 전쟁 중에는 피란민들로, 전쟁 후에는 이산가족으로 붐볐고 임시수도 역할까지 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생활방편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도다리〉는 만남의 장소였고, 인근 〈국제시장〉은 피란민의 생활터전이 됐다. 산 위에 집을 지으며 분단의 아픔을 딛고 성장한 도시는 어느덧 대한민국 제2 도시로 성장했다. 1953년과 2020년 부산 영도 봉래동 물양장 2020년 연합뉴스가 촬영한 봉래동 물양장 모습이 1953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봉래동 물양장 모습을 담은 사진과 포개져 보인다. 당시 사진에는 사람들이 木船에서 보급품을 내리고 있으며 뒤에는 피란민 가옥이 보인다. 현재 봉래동 물양장은 예부선 계류장으로 쓰고 있으며 인근에는 수익형 호텔들이 건립돼 있다 ◇ 『살아있다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낙동강에 방어전선이 형성되는 사이 전국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피란길에서 헤어짐이 임박했던 순간 그들이 머리 속에 떠올린 장소는 영도다리(현 영도대교)였다. 당시 동양 최초 도개교(跳開橋)인 〈영도다리〉는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다리였다. 영도다리에는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었고, 가족 이름을 적은 종이나 헌옷이 영도다리 양쪽 난간에 빽빽하게 붙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한치 앞을 모르는 삶에 위안받고 싶은 마음으로 점(占)집을 찾기 시작했다. 영도다리 주위는 점집이 퍼져나가 〈점바치 골목〉을 이루기도 했다. 피란민들은 영도다리를 떠나지 못하고 다리 주변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좁은 터전에 하루밤새 새로 생긴 판잣집은 산으로 올라갔고, 심지어 무덤 위에도 집을 지었다. 그곳은 1990년대까지 부산을 이끈 원도심(중·동·서·영도구)이 됐다. 현재도 부산 원도심 일대는 피란의 아픔이 많이 남아있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해 만든 대표적인 피란민촌이 〈감천문화마을〉. 이곳은 「부산의 산토리니」로 불리며 한해 300만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공동묘지가 피란민 삶의 터전이 된 인근 서구 〈아미동 비석 마을〉은 현재도 비석 등 그 모습이 일부 보존돼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컨트롤타워는 이곳 2020년 6월 연합뉴스가 촬영한 석당박물관(옛 임시중앙청사)이 1950년 촬영된 임시중앙청사 모습과 포개져 보인다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부산 서구 제공] ◇ 6·25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피란수도 부산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대한민국은 전쟁 개시 며칠 만에 국토 절반 이상을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전쟁 발발 이틀 뒤에 대전(6.27∼7.16), 대구(7.16∼8.17)를 거쳐 1950.8.18일 최종적으로 부산을 피란수도로 결정하게 됐다. 부산 서구에 있었던 〈경남도청〉이 임시 중앙청사로 다시 태어나 전쟁기간 국무회의 등이 열리며 전쟁중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현재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근 경남도지사 관저(현 임시수도 대통령기념관)는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경무대)로 사용됐다. 부산시는 경무대(현 임시수도 대통령기념관), 임시 중앙청사(현 석당박물관), 국립중앙관상대(현 부산지방기상청), 미국대사관(현 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 유엔묘지(유엔기념공원), 우암동 소막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등 9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조건부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다. 1952년 수영비행장과 2020년 센텀 모습 부경근대사료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1952년 촬영된것으로 추정되는 〈수영 K-9 비행장〉 모습(上, 수영강 左). 왼쪽 상단(現 벡스코 위치) 포로수용소 모습이 보인다. 下) 2020년 6월 연합뉴스가 드론으로 촬영한 해운대구 센텀시티 모습. 〈K-9 비행장〉은 김해국제공항으로 1973년 이전된 뒤 이 일대는 첨단도시를 표방하는 센텀시티로 개발돼 초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70년 〈서면 교차로〉 일대의 변화 부경근대사료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1952년 항공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면교차로〉(上). 왼쪽 상단 〈포로수용소〉. 下) 2018년께 부산진구가 부산 〈서면교차로〉를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이 두 사진은 촬영된 방향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 포로수용소 터에 첨단도시 부산이 피란수도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부산에 전쟁포로수용소가 크게 4곳에 걸쳐 있었던 것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는 기록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흔적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반발한 이후 전세(戰勢)가 불리해지고 전선(戰線)이 밀리게 되자 포로수용소를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짓고자 했다. 적합한 장소가 부산이었다. 〈서면 포로수용소〉는 일명 〈부산수용소〉로 불렸는데, 「부전도서관에서 전포2동 경남공업고등학교 일대를 아우르는곳에 모두 6곳의 수용소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영 포로수용소〉는 1950년 12월 중순 설치되었다고 알려져 있을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 파악되지않고 있다. 한 곳은 현재 원동교차로 인근으로, 다른 한곳은 현재 센텀시티 벡스코 일대로 추정된다. 이밖에 〈개금 포로수용소〉(백병원∼개금역), 〈거제리 포로수용소〉(거제역 뒷편)가 있었다. 4곳 모두 70년 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서면 교차로〉는 부산의 심장으로 불리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는 백화점이 있는 상업 중심지로 변모했고, 카페거리 등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가 들어섰다. 〈수영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에는 〈한국·아세안 정상회담〉이 두차례나 열린 벡스코가 들어섰다. 이 일대 〈부산비행장〉은 〈김해공항〉으로 이전했고, 이곳은 첨단도시를 표방하는 센텀시티로 바뀌었다. 향토사학자들은 부산은 피란수도 역할을 한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각종 개발사업 탓에 피란수도의 모습과 피란민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것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실제 연합뉴스가 1950년대 촬영된 사진과 현재 모습을 한 프레임에 비교해보려고 했지만, 형태가 보존된 유산이 많지 않았고 남아있는 사진조차 쉽게 찾기 힘들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그동안 전쟁유산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을 못하는 시대를 거쳐왔다. 그렇다보니 도시개발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지금이라도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handbrother@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6172100051?section=culture/scholarship ● 영도다리 개교식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655&v=sH6H8H0D5Mk&feature=emb_lo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