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역사에 어떻게 평가될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드러난다. 지난 호에 언급한 낙화가 박창규는 사후에 그의 뒤를 잇는 작가들이 등장하며, 그의 화풍이 후대 낙화 화풍의 모델이 되었다. 그가 이룩한 위업은 아들과 손자 그리고 친척 등 밀양 박씨 가문을 중심으로 전수되었고, 이는 다시 확산되어 전주, 진안, 담양 등지가 우리나라 낙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의 낙화는 박창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정도로, 그가 역사 속에서 성취한 업적은 뛰어났다.
일제강점기 때 전성기를 맞이한 낙화
일제강점기는 낙화의 전성기다. 그 시작은 박창규의 손자 박병수朴秉洙(1858~?)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전라북도 진안에 살던 그가 진안현감인 김승집金升集(1826~?)의 눈에 든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김승집의 동생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金弘集(1842~1896)에게 소개되었고, 김홍집에 의해 일본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918년에는 당시 백작이었던 이완용李完用(1858~1926)의 권유로 경성(서울)에 올라와 젊은이들에게 낙화를 가르쳤다. 이 일은 ‘매일신보’에서 자세히 전할 정도로 유명했다. 박병수는 연이어 친일파 관리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후원 덕분에 그는 물론 낙화도 전성기로 접어들게 된다.
매일신보 1918년 5월 19일 기사에는 낙화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다뤘다. 그 기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나무가 아니라 종이에 그리는 낙화기술은 중국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창규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라고 본 점이다. 나무나 대를 인두로 지지는 기술을 비교적 쉽지만, 종이에다 종이가 상하지 않게 그림을 그린 것은 ‘특별한 묘득妙得’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기술로, 조선에서 다른 나라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 했다. 이 가사의 소제목을 “조선에서 발명되어 조선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달았는데, 이러한 인식이 일제강점기 때 널리 퍼졌다. 당시 구미 각국으로부터 낙화의 주문이 온다고 했으니, ‘낙화의 세계화’의 시동을 건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셈이다.
실제로 일본에 박병수의 낙화가 몇 점 전한다. 카타야마 마리코片山真理子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하치노헤시미술관八戶市美術館에 낙화산수도 1폭과 교토 고려미술관에 낙화화조도 1점이 있다. 당시의 인기로 보아 더 많은 작품이 남아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병수는 박창규가 정립한 남종화풍의 낙화기법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전성기에 느끼는 기쁨을 감추기에는 이미 신바람이 넘쳐난다. 조선민화박물관 소장된 <화조도>는 활기차면서도 절묘한 구성에서 안정된 감각까지 느껴진다.
박병수의 제자로 백남철白南哲, 백학기白鶴起 등이 있다. 특히 백학기가 그를 이어 유명세를 이어갔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화회火畵會’ 혹은 ‘낙화회烙畵會’라 하여 낙화의 기술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 회화회에 대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당시 신문에서 기사로 다루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가운데 시대일보 1924년 9월 18일자 기사는 화화회가 어떤 행사인지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준다.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서 박계담朴桂淡(1869~1946)이 화화를 시연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전한다. 배경에 낙화를 걸어놓고 화상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지금처럼 인두를 받치는 집게가 없이 인두만으로 지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왼쪽에는 화판, 오른쪽에는 화로가 놓여있어 당시의 낙화 도구 및 제작 양상을 살필 수 있다.
火畵會開催(화화회개최)
白鶴起氏의 來新으로(백학기씨의 내신으로)
全北 全州郡 全州面 完山町 大火畵家 白鶴起氏(전주 전주군 전주면 완산정 대화화가 백학기씨)는 今番 南滿洲(금번 남만주)를 遊覽(유람)할 次(차)로 新義州(신의주)에 到着(도착)하였는데 生田知事 以下 五六人(생전지사 이하 오륙인)의 發起(발기)로 來 二日 下午 二時(래 이일 하후 이시)에 新義州 公會堂內(신의주 공회당내)에서 火畵會(화화회)를 開催(개최)하고 席畵(석화)를 公開(공개)한다는데 會費(회비)는 三圓式(삼원씩)이오 火畵(화화)의 種類(종류)는 人物, 山水, 花鳥, 魚蟹等(인물, 산수, 화조, 어해등)인데 아무 器具(기구)도 없이 다만 一個(일개)의 인두를 불에 달궈 가지고 하는데, 그 奇妙(기묘)한 技術(기술)은 누구나 칭찬하지만 할 수 없으며 絹屬(견속)과 紙物類(지물류)에 畵(화)하는 朝鮮 特有 發明(조선 특유 발명)인 氏(씨)의 火畵(화화)는 全世界的(전세계적)으로 廣布(광포)하리라 한다. 그 火畵 贈與方法(화화 증여방법)은 추첨으로 한다는데, 一等一人五枚, 二等一人三枚, 三等一人二枚, 四等每人二枚式(1등1인5매, 2등2인3매, 3등1인2매, 4등모두2점씩)라고.
이 기사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 때에는 낙화를 화화火畵라고 부르고 낙화를 그리는 작가를 화화가火畵家, 그 가운데 백학기는 대화화가大火畵家라는 최고의 칭호로 추켜세운 점이다. 둘째, 화화를 한국 고유의 것으로 세계적으로 알릴만한 한국 의 문화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박병수를 다룬 신문기사와 비슷한 내용이다. 셋째, 당시 화화는 지금과 달리 전국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관청의 적극적인 후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시대일보에서는 9월 21일에 열린 신의주 화화회가 모두 66인에게 76장의 낙화를 줄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는 내용의 결과 보고까지 기사로 내었다. 낙화가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낙화와 민화의 만남
박창규로 인해 문인화의 격조를 지향했던 낙화는 일제강점기까지 관리들의 취향에 맞춰 문인화의 세계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상류계층이나 사대부의 눈높이에 따랐던 낙화가 점차 서민들의 수요가 이어지면서 민화의 소재와 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낙화와 민화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0폭으로 짜인 소상십경瀟湘十景을 낙으로 놓은 그림이 있다. 보통은 소상팔경이지만, 이 그림은 두 경치를 보태어 소상십경으로 구성했다. 이 낙화 병풍은 매우 개성적이고 표현주의적이다. 가운데 계곡을 향한 산세는 독특한 주름으로 패턴화되어 있지만, 춤을 추듯 활기차다. 한편으로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董其昌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그림은 곳곳에 민화만의 자유분방한 세계가 가득하다. 현대 표현주의 회화처럼 강한 효과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낙화병풍과 같은 양식으로 그린 소상십경도가 전한다. 하나는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소상십경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영수 소장의 소상십경도다. 낙화병풍과 이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작가의 그림을 본으로 그린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낙화에서 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두 그림은 닮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낙화는 일제강점기 때 새로운 변신의 기회를 맞는다. 한편으로는 문인화풍의 낙화가 존속되는 반면, 민화풍의 낙화가 새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상류계층의 수요와 더불어 서민계층의 수용도 만만치 않게 급부상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화화회’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낙화가들은 상류계층의 고고한 취미뿐만 아니라 서민 계층의 자유분방한 취미의 세계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날 낙화를 민화의 한 장르로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민화풍 낙화가 많이 제작되면서 생겨난 시각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 관리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낙화는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막강한 후원의 힘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그 여파로 낙화가 서민들에게 확산되면서 민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점차 수요 줄어들어, 국가와 국민의 관심 필요
낙화는 칠기, 나무 제품, 엽서, 관광안내서, 지도 등과 더불어 유명 관광지의 관광상품으로 상업화된다. 여기에 한국동란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이국적인 취향에 부합한 낙화도 미군부대 앞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미군부대 앞 낙화는 초상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는 미국 민화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초상화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마저 수요가 줄어들면서, 낙화는 낙화장烙火匠 혹은 낙죽장烙竹匠이란 이름의 무형문화재로 국가 인큐베이터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낙화를 전문으로 하는 낙화장으로는 김영조金榮祚씨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와 같은 기법으로 대나무 표면에 시문하는 낙죽장에는 김기찬金基燦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게다가 낙화는 수묵화와 달리 불과 100년도 채 안된 그림조차 디테일이 희미할 정도로 보존에 어려움이 따른다. 낙화장 및 낙죽장뿐만 아니라, 정작 주인공인 낙화의 보존대책도 함께 세워야 할 판이다. 이래저래 희미해져 가는 낙화의 운명을 막는 데에는,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이 요구된다.
낙화는 조선시대의 역사 속에서 분명한 흔적을 남긴 그림이다. 낙화의 역사가 존재해왔고, 많지는 않지만, 기록과 작품들이 전한다. 그것들은 분명 한국인들이 낙화를 좋아했고 즐겼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낙화의 가치와 중요성은 이러한 역사의 흔적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낙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양반가에서 종부가 집안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소중하게 관리하듯, 우리는 낙화의 인두가 식지 않고 뜨겁게 달궈지도록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 한국회화사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긴 낙화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야 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타베 카유키田部 隆幸, 『야나기 무네요시도 찬미한 수수께끼의 낙화 발굴』
이 글은 2014년 12월 일본 세이분도 신코샤誠文堂新光社에서 발행한 『야나기 무네요시도 찬미한 수수께끼의 낙화 발굴柳宗悅も讚美した謎の燒繪發掘』이라는 책에 실린 원고로, 타베 카유키田部 隆幸가 쓴 책에 정병모 교수가 기고문 형식으로 올린 것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 낙화에 관한 책으로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처음 출간된 책이다.
이 원고를 위해 참고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
李善亨, “朴昌珪(1783)의 烙畵 ‘화조도’”, 『미술사연구』 3, 미술사연구회, 1989
金基燦, “전통적인 낙화, 낙죽에 관한 소고”, 『낙화, 낙죽공예-김기찬을 작품전』, 전통공예관 개관5주년기념 특별기획 초대전, 1993
片山真理子, 일본에 전해진 조선시대의 낙화, 『민화연구』 창간호, 계명대학교 한국민화연구소, 2012
김인규, 金榮祚, 『낙화장』, 충청북도, 국립민속박물관, 2012
첫댓글 낙중장님!
기해년 올 한해도 건안하신가운데 작품활동에 큰 정진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낙화역사.. 가슴 찡한 감동을 안고 읽었습니다.
글속 낙중장님의 존함에 기쁜마음도 크게 일어났습니다.
훗날 고운 미인제자의 손에서 피어날 멋진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우천님의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열심히 일하며 살겠습니다. ^ ^ .....
烙畵.火畵 ...모두 처음 들어본 분야입니다.인두로 어찌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나오는지 참 경이롭습니다..우리가 모르는 전통문화들이 제법 있군요...
잘 보았습니다...^^
작업도구가 다를뿐입니다.
우리나라에 약 200년 역사입니다. 문헌상으로.
잘 가꾸고 전승 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일전에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큰 관심을 가졌었지요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장인의 손길로
'낙화(烙畵) 스타벅스텀블러' 재탄생 。
김영조님, 김기찬님
대단하십니다..
부디 많은 국민들께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큰 작품활동에 응원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길..._()_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온고지신`으로 좋은 작품 제작에 매진 하겠습니다.
헌인님을 통해 낙죽, 낙화의 세계를 접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의 한 분야를 새롭게 알아갑니다.
새해에도 건강 잘 챙기시면서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열심히 한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여가를 만들어 이렇게 책상 앞에서 소통하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좋으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