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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창세 3-5장
- 창세 3,1-24 사람의 범죄
3장에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창세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과 사람 삶의 고통스러운 체험,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심리적 통찰을 통해 사람과 악의 숙명적인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기술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겪게 되는 온갖 고통을 죄의 결과로 설명한다.
이 본문은 두 번째 창조 설화를 전해 준 야훼계 저자의 작품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은망덕한 태도와 이로써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이렇게 들어온 죄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야훼계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깊이 있게 묘사함으로써, 매일의 삶속에서 하느님 앞에 등을 돌리는 인간의 죄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점점 불거져 가는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변함없이 펼쳐진다.
3장에서 저자는 인류의 첫 범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드신 남자와 그의 갈빗대로 만든 여자가 행복하게 살도록 에덴 동산에 거처를 마련하셨다. 그러고나서 온갖 풍성한 나무 열매들을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3장 1절에 뱀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죄와 벌에 대해 이야기 한다.
-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 유혹의 시작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3,1)
3장의 무대는 에덴 동산이다. 등장하는 요소는 2장에서 창조된 남녀와 동물, 식물(나무),그리고 하느님이다. 2장에서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면,3장에서는 피조물들이 저지른 일을 하느님께서 마무리하는 흐름이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존재는 뱀이다. 고대 동방세계에는 뱀에 관한 신화와 숭배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집트의 왕관에는 코브라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왕을 보호하는 뱀의 여신 부토(Buto 혹은Wazit)의 상징이었다. 또 이집트 악마 중의 하나인 아포피스(Apophis) 역시 뱀으로 표현되었다. 가나안에서 풍요와 다산(多産)을 관장하는 바알(Baal)신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뱀이었다. 이처럼 고대 동방 지방에서 뱀은 무언가 신령한 힘을 가진 권능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는 독을 만들고 껍질을 벗는 뱀이 삶과 죽음을 아는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생각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뱀 신화와 숭배의식은 가나안을 통해 이스라엘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야훼 신앙을 위협하였으리라 짐작된다(민수21,8-9: 2열왕 18,4: 요한3,14참조).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했던 뱀을 소재로 사용하면서도, 뱀이 어떤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거나 사탄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뱀은 단지 하느님께서 만드신 동물 중(2,19)의 하나로 어떠한 신화적인 성격도 갖지 않으며, 단순히 유혹의 제공자로 사용되었다. 굳이 뱀이 선택된 것은 ‘뱀이 제일 간교한, 또는 지혜로운 동물’ 이라는 민간의 믿음(마태 10,16 참조)을 반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에덴 동산은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선물로 기쁨의 땅, 행복의 땅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동산을 돌보고 가꾸며 일을 해야 한다(창세 2,8.15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규율이 따른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2,16-17)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에덴 동산을 돌보도록 이르신 말씀은 축복(창세 2,16)과 금령에 따르는 저주(창세2.17)와 연결된다.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를 따 먹는다. 성경에서 ‘알다’ 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머리로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즉, ‘몸으로 체험한다.’ 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안다.’ 라는 표현은 착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가르는 윤리적 규범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구원과 멸망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을 가져다주신다는 사실을 잊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구원과 멸망을 책임지려 했다는데에,한마디로 하느님처럼 되려 했다는 데에 죄가 있다. 그렇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인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야훼계 저자는 인류가 걸어가게 될 타락의 길을 소개하고자 상징적인 매개물로 뱀을 끌어들인다. 성경에서 뱀은 다양한 상징을 띠는데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대인들은 뱀을 지혜의 상징, 혹은 영물(靈物)로 여겼다. 이는 뱀의 움직이는 모습이 교활하고 간교하며 음흉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전통적으로 뱀은 생명이나 치유를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이 또한 해마다 자신의 허물을 벗는 뱀의 모습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지금도 뱀은 의술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셋째, 뱀은 죄를 상징하였다. 가나안에서 뱀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신전 창녀들과 바알 신을 상징하는 뱀이 교접을 하면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였다. 시나이에서의 오랜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이러한 이교 제의에 물들게 되면서 뱀을 점차 죄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기게 되었다.
- 3,2-7 범죄의 과정: 여자가 쳐다보니
야훼계 저자의 의도대로 뱀은 아주 교활한 질문을 여자에게 던진다(3,1). 그 물음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특정 나무 열매만 따 먹지 말라고 하셨지, 모든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과장된 표현을 덧붙인다. ‘만지지도 마라.’ (3,3)는 표현이다. 그러자 뱀은 여자가 허점을 드러낸 틈을 타서, 그 열매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않을뿐더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여자를 유혹한다. 마침내 뱀의 펌에 넘어간 여자는 먹어서는 안 될 열매를 따 먹은 후,남편에게 주었고 그 또한 그 열매를 먹었다. 이로써 둘은 눈이 열려 자신들이 알몸임을 부끄러워하며 하느님 앞에서 몸을 숨기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여자가 먼저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남자에게 건네주었기에 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다는 논리가 아니다. 문제는,그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금령을 받은 이는 남자였고(창세2,15-17),그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이 둘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결국 모든 책임을 하느님께 뒤집어씌우고 있다(3,12.13). 여자에 대한 남자의 고발은 결국 여자를 맡기신 하느님께 대한 고발이자 그분을 배신한 꼴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3,12). 이처럼 죄는 남자와 여자, 하느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파괴한다.
- 3,8-24 범죄의 결과: 관계의 분리
하느님이 두려워 자신들의 모습을 감춘 인간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와의 사랑과 일치 관계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죄’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깨어진 잘못된 관계를 ‘죄’ 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처럼 되려 했기에 그래서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깨뜨린 첫 인류의 범죄 앞에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3,23)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 날 죽을 것이라 이르셨던(창세2,17)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죽지 않았지만 대신 하느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숨이 끊어져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고 자신뿐 아니라 남까지 타락의 길로 떨어지게 하는 결과 그 자체로 이해한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는 순간 남자를 죄악으로 유인하게 되고, 그 결과 그 둘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기에 그때가 바로 죽음에 이른 시점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시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단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냈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결별 선언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여기서부터 구원사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뱀에게는 저주를 내리시지만(3.14-15) 여자에게는 산고를 말미암아 모든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후기 유다교 전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죄론(原罪論)’으로까지 발전하였는데 바오로는 이 사상을 구원론과 연결지었다(로마 5,12-21 참조). 즉,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창조 이야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복음에 앞서 하느님께서 첫 인간을 위해 약속하신 내용이 언급된다(3,15). 이른바 ‘원복음(Proto-evangelium)’ 이 그것인데, 인간을 악에 물들게 한 뱀을 밟게 될 여자와 그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는 약속이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구원에 대한 첫 번째 기쁜 소식(福音)이다. 여자의 후손은 인간의 혈통에서 나온 메시아로 하느님과 온 인류를 위해 사탄에게 복수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여자를 일컬어 마리아라 하며 여자의 후손을 가리켜서는 예수님이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가 죄를 짓고 알몸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두렁이를 만들어 입은 것(3,7)을 보시고서는,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다(3.21). 에덴 동산이 아닌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뒤덮인 황량한 땅에서도 그들이 잘 견딜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이 구절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를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사람은 자신의 아내에게 ‘하와’ 라는 축복의 이름을 지어 주는데, 이는 ‘모든 생명제의 어머니’ 라는 뜻이다.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여러 상황을 보여 준다. 곧, 인간의 불순종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심판자 하느님을 묘사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삶과 노동 출산의 고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남녀의 불화 관계이며, 산고와 노동이 결코 인간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죄를 지어 받게 된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인간을 용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언제나 용서하고 계신다.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지은 죄의 자리에서 인류 구원사가 시작되는 하느님 사랑의 역설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 4,1-6,4 카인 이야기와 족보들: 위기의 확산
* 카인 이야기의 의미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오히려 이야기가 기술된 본문을 자세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읽다 보면 이 이야기에서 허술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제사가 등장한 배경, 주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그들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를 카인과 아벨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또 원조 아담의 아들인 카인이 복수를 두려워했다면 다른 사람이 있었는가, 같은 맥락에서 카인은 어떻게 아내를 얻었을까 등등의 의문이 제기된다. 또 서술 부분에 비해 대화 부분이 상대적으로 길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사항을 고려하면 카인 이야기는 원래 복잡한 내용을 가진 카인에 관한 독립 설화였으며 그 분량도 더 길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이야기의 본래 배경에는 고대의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갈등이 배어있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당시 팔레스티나 남부와 홍해 연안지방의 초원을 떠돌아 다니며 야훼를 숭배했다고 추정되는 켄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가 이 이야기를 압축시켜 낙원 이야기 뒤에 놓음으로써 특수한 문화나 종족의 단순한 배경사에서 사람의 근원적이고 보편적 문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그 성격을 변화시켰다. 저자는 사람의 첫 범죄 이후에 다양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사람의 죄악상을 ‘형제 살해’ 라는 극단적인 예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준다. 카인 같은 보통 사람도 형제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은 범죄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카인은 낙원 이야기의 아담과 하와와 같이 인간이 갖는 보편성의 한 측면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글의 흐름으로 볼 때 낙원 이야기와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매우 유기적이며 보완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앞 장에서는 남녀로 대표되는 가장 기본적인 가정 공동체가 강복 속에 창조된 모습과 죄를 범하는 한계성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그에 반해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는 또 다른 사회 공동체인 형제, 동료 관계에서 다양하게 일이 분화되는 긍정적인 모습과 함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쟁 관계 등부정적 측면을묘사함으로써 사람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기본 흐름은 아담 이야기와 병행되는 ‘범죄와 신문, 처벌’ 구조로 짜여져 있다. 카인의 범죄를 기술하면서 저자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를 반복하여 강조함으로써(2.8.9절) 하나의 범죄가 단순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연대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그는 아우를 살해한 카인을 처벌하면서도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을 서술함으로써 죄인까지도 감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다.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한 것은 복수의 악순환으로 죄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데 근본 의도가 있다.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하여 세상 안에 들어온 죄가 어떻게 확산되어 가는지 보여 주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인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전개된다.
- 4,1-16 관계의 파괴: 카인의 범죄 그리고 처벌과 자비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직역: 그를 알게 되니)...”(1절). 히브리어에서 ‘알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다(yada)’는 오직 사람에게만 적용되며, 그 의미도 매우 폭넓다. 앞 장에서 나오는 “선과 악을 알게 된다”(3,5)와 같이 지식, 지혜의 앎뿐만 아니라 경험과 만남, 나아가 남녀간의 성적 결합 등 체험의 결과로 알게 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하와는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님(야훼)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하와의 이 고백은 온 인류의 어머니라고 불렸던(3,20) 여자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잇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 둘이 등장한다. 첫째는 카인이고 둘째는 아벨이다. 카인은 히브리말로 ‘창’ 을 뜻하고, 아벨은 ‘숨’ 바람’ ‘무상’ 을 뜻하는 히브리 말 ‘하벨’ 과 어원이 같다. 아벨은 이름값대로 형 카인에 의해 헛된 죽음을 맞이한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아벨이 바친 제물(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은 기꺼이 받으시면서 카인이 바친 제물(곡식)은 거절하셨다고 전할 뿐(4,4-5),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히브 11,4 참조). 하지만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하느님께는 제물보다 그 제물을 바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물만 받아들이셨다고 해서 동생에게 질투와 분노를 드러내는 카인의 행위는, 장자(長子)로서 누리게 되는 특권처럼 하느님의 호의를 동생보다 더 받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재능이나 지위, 재산 등 어떠한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온전한 자유로 제물을 선택하시는 분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카인의 제물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카인을 배척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도 당신의 선의를 충분히 보여 주지만, 그보다 먼저 카인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을 보시고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하신다(4,6-7).
하느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꾀어내어 죽이고 만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다. 이는 또한 창세기가 보여 주는 죄의 두 번째 원형이라 하겠다. 즉, 폭력은 인간 상호간에 지을 수 있는 가장 큰형태의 죄임을 이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준다. 성경 본문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느님께 울부짖는다고 전한다(4,10).
당신께 울부짖는 소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라는 카인의 대답은 형제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 관계, 곧 이웃 사랑을 저버린 모습이며 나아가 하느님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카인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벌로써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저주를 내리지만(4,12) 그의 애절한 호소(4,13-14)를 들으시고 카인을 보호해 주는 표를 찍어 준다(4,15). 그 표는 그가 살인자라는 고발과 수치의 표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카인을 특별히 보호하시며 그를 해 치는 자는 누구든지 보복하시겠다는 표시이다. 생명과 구원으로 인류를 이끄시겠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형제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 앞에 꺾일 법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피의 복수로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正義)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제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 동쪽 놋지방에 정착한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머문 ‘에덴의 동쪽’ 에서 더 밀려난 것이다(3,24 참조). 동쪽은 지리적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의 현존에서 멀어진 ‘변두리’ 삶을 상징한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놋(nod)이라는 이름도 지명이 아니다. 이 이름은 ‘떠돌다, 방랑하다’ 를 뜻하는 희비르어 놋(nod)과 연관된다. 따라서 안식과 평화가 없고 한없는 고독과 소외로 가득찬 비참한 삶의 터를 가리킨다.
- 4,17-22 카인의 자손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14절)가 된 카인도 자기 아내를 알고 나서 아들 에녹을 낳았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경우에서처럼,죄인에게 도 생명을 허락하셔서 그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농부였던 첫 살인자 카인은 이제 ‘성읍의 건설자’로 등장한다. 인류사에서 성읍은 마을에서 진화한 형태로, 공동의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음으로써 생겨났다. 떠돌아다니던 카인이 성읍을 세운 것은 더 이상 유랑하지 않고 정착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에녹도 계속 자손을 보는데,7은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여기서는 한처음 이야기와 관련된 세대 전체를 가리킨다. 카인의 6대 후손인 야발은 천막에 살며 양을 치는 목자들의 조상으로 등장한다.
창조의 6일 동안 갖가지 피조물이 생겨나듯, 아담에서 라멕에 이르는 7대의 족보에서 카인의 후손들은 여러 직업과 문화를 창시한다. 특히 후손들의 이름이 그들의 직업을 표기하는 히브리 단어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인이 건설한 마을은 그의 아들인 에녹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에녹과 동의어 인 히브리어 하녹(hanok)은 ‘시작하다, 창설하다, 봉헌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하닉(hanak)(l열왕 8.63 참조)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4,23-24 라멕의 노래
족보를 보면 라멕은 두 아내를 얻었다. 이 구절을 남녀 관계의 무질서 내지 타락상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확대 해석하기보다 일부다처제의 현실을 지적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본래 라멕의 노래는 부족장이 자기 부족들 앞에서 전투나 재난을 이겨낸 용맹을 자랑하던 노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노래는 적들에게는 두려운 마음을, 자기 부족에게는 새로운 용기와 일치를 촉진시키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이 노래를 카인과 아벨 이야기와 연결함으로써 성격을 크게 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무용을 찬양하는 단순한 시가였던 라멕의 노래는, 에덴에서의 범죄와 카인의 사건 이래로 점차 심각해지는 죄의 양상과 무질서한 삶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인류가 진보할수록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은 커간다. 오늘날 핵무기의 위력이 생생한 예이다.
사람의 힘이 커질수록 자기 주장이나 자부심도 커져 아무리 작은 피해라도 무한정 보복하려는 경향을 띤다. 이는 지금도 강대국들이나 권력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라멕은 ‘나를 다치게 했기 때문에 사람 하나를 죽였으며 나에게 생채기를 입힌 한 아이를 죽였다’ 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피살을 막기 위해 스스로 복수를 맡으셨는데(4,15 참조), 아담의 5대 후손인 라멕은 자신을 다치게 하거나 사소한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사람 죽이는 것을 하나의 자랑 거리로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갑절로 앙갚음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라멕에 와서는 사람 스스로가 복수의 주인이 되어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하겠다고 나선다. 사람이 “하느님처럼” 된 것이다. 라멕의 이 말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마태 5,38-42:18,21-22)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 4,25-26 셋의 족보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를 알게 되니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 이때 아들을 낳은 여자(하와)의 말은 카인을 낳았을 때의 표현과 다르다. 맏아들을 낳았을 때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그 대신 생명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로 가득하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25절) 셋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통속적으로 여자의 말에 나오는 ‘주다, 임명하다, 두다’라는 뜻의 쉬트(shit)와 연결시킨다(1역대 1,1 참조). 여자의 말에 나오는 ‘자식’(zera) 은 창세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zera) 과 동일한 단어로서, 그 약속의 맥락이 셋의 후손과 이어짐을 시사한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Enosh)의 이름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지칭하지만 특히 ‘죽어야 할 이’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체험하게 되었음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야훼)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즉 주님을 처음으로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26절). 이는 인류 초기부터 야훼 신앙이라는 특정한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인류는 원시 시대부터 절대자를 예배하여 왔다. 성경 저자는 그 절대자가 바로 야훼임을 언급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알기 이전부터 그분은 계셨고 그분께 드리는 제의가 있었다고 기술한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야훼를 알게 된다(탈출 3.13-15). 예배로 표현되는 종교 역시 인류 사회의 핵심 문화에 속한다. 사회 경제적,예술 문화의 창시자로 소개된 카인의 후손과 대비하여,셋의 후손을 통해서는 종교 문화가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담의 또 다른 아들인 셋의 후손은 에노스로 그친다. 문헌 가설에서는 셋의 족보를 야훼계 문헌(4,25-26; 5,29)과 사제계 문헌(5,1-8.30-32)으론 나눈다. 전자는 짧고 부분적이나 후자 비교적 체계적이다. 야훼계 문헌에는 셋의 족보가 짧게 나오지만 본래는 사제계 문헌처럼 아담에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긴 족보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더 자세한 사제계 족보로 바뀌면서 머리글(4,25-26)과 마침글(5,29)만이 남았다고 설명한다.
- 5,1-32 생명의 지속: 홍수 이전의 족보 - 아담의 족보에 대해 앞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함.
셋의 짧은 족보에 이어 아담의 긴 족보가 소개된다. 족보는 어느 특정 공동체의 선조와후손들에 대한 연속적인 기억 또는 기록으로, 현재를 과거와 연결시키려는 목적으로 작성된다. 따라서 족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형성되는 기록으로, 그 과정 중에 변화될 여지를 항상 품고 있다. 족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친족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위-아래로 조상과 후손을, 옆으로는 형제 관계를 일러준다. 그래서 족보에는 아버지와 맏아들만 소개하는 단선형과 아들들을 모두 소개하는 다선형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족보는 신분과 친족 관계가 중시되던 고대 사회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성경에서 족보는 여럿 소개된다. 특히 창세기와 탈출기, 역대기와 에즈라기, 느헤미야기에 많이 소개된다. 이 성경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형성,그리고 나라가 망한 뒤 유배에서 돌아 온 다음에 재형성되던 시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족보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 또는 유다인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그 기원을 창조와 주변 민족까지 넓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5장은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첫 번째 긴 족보이다. 아담의 족보(톨레도트)는 이러하다~' (11절), 또는 “이는 ... 의 족보이다”는 구절은 문헌 가설에서 사제계 문헌으로 분류된다. 사제계 전승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온 여러 족보를 정리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구성하였으며, 그 기본 틀에 여러 이야기를 포함시켜 긴 흐름을 갖는 구원사로 형성하였다. 사제계 족보는 마치 비문과 같이 일정한 틀( ... 낳고 ... 살다가 ... 죽었다)로 되풀이되고, 고정적인 표현(낳고 등) 속에 일부 내용(이름,나이 등)을 바꾸면서 단조롭게 쓰였다. 루카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족보(루카 3,36-38)는 칠십인역 성경에 실린 이 족보의 틀을 인용한 것이다.
이 족보의 중요성은 흔히 이야기하듯 홍수 이야기를 잇는 고리 역할에 그치지 않고, 창조의 지속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역사를 보여주는 데 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악과 폭력을 확산시켜 가지만 하느님의 복(1,28)은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 기사를 다시 압축해서 첫머리에 소개하는 의미가 중요하다. 즉 “하느님과 비슷하게” (1,26: 5.1.3),“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 을 간직하고 이를 후손에게 넘겨 준다. 각 사람은 죽으나 “제 모습으로~' (5,3) 후손을 낳음으로써 하느님의 창조를 지속시킨다. 이때 특기할 사항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 이름을 ‘사람(아담)’으로 직접 지어 주셨다는 점이다.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1,27 참조). 여기서 아담은 물론 특정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의미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공동의 선조에게서 유래되었고,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또 하느님 강복의 역사 안에서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비록 사람들의 족보만 소개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온 창조 세계와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하느님의 복이 똑같이 흐르고 있다.
아담 이후 10대의 족보는 맏아들을 낳았을 때의 연령과 생존기간 등을 짤막하게 언급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사제계 문헌과 야훼계 문헌의 족보에 나타나는 이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를 보면, 두 문헌이 고대의 동일한 전승을 토대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배열 순서에서 야훼계 전승은 아담의 범죄와 짝을 이루는 카인의 범죄 이야기를 바로 연결시켜 기술하려고 셋과 에노스보다 카인을 먼저 언급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셋과 에노스는 따로 떨어진 족보를 이루어 또 다른 관심 대상인 라멕의 노래 뒤에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제계 전승에서는 마할랄엘과 에녹의 순서를 뒤바꿔 상징적으로 중요한 숫자인 일곱 번째에 에녹이 놓이도록 하였다.
아담의 족보에서 특이하게 다루어진 인물은 에녹과 노아이다. 일곱 번째 선조인(7은 완전, 완성을 뜻함) 에녹은 365년을 살았다. 365는 태양력의 1년을 가리키며 완전한 숫자를 뜻한다. 에녹이 태양력과 연결되듯이 바빌론의 7대임금 엠멘두르 안나도 태양신 샤마쉬의 도성을 다스리는 임금이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23.24). 인류가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 홍수 이전 일이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으나(6,9),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서’ 걸아가라는 말씀을 듣는다(17,1).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말이다.
에녹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믿으며 살았고 그 결과 죽지 않았다. 에녹은 엘리야처럼(2열왕2,9-11) 죽지 않고 사라졌다. 노아는 아담이 죽은 후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다. 이 사실은 홍수 뒤에 새로운 세대가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또한 노아는 아담과 아브라함의 한가운데 있어 둘을 연결시킨다. 선조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산 므투셀라가 죽은 해는 홍수가 일어나던 해와 일치된다. 곧 노아의 조상들은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모두 죽었다.
성경에 기록된 선조들의 수명과 첫 아들의 출생연도는 인위적인 도식에 맞추어져 있다. 즉 므투셀라 수명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5의 배수이거나 5의 배수에서 7을 더하거나 뺀 숫자로 되어 있다. 라멕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땅에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자신과 가족들이 그의 아들로 인해 위로 받기를 기대하면서 그에게 ‘노아’라는 이름 지어 주었다(29절). 노아의 어원은 ‘위로해주리라’에서 나온다. 따라서 노아 이야기는 삶의 고통과 불행 속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의 희망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