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망할 당시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당나라가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는데 37주(州), 250현(縣)에 모두 24만호 620만명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대당평백제국비의 다른 말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이다. 전문가들은 24만호 620만명은 24만호 120만명의 오역(誤譯)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인구다.
그외 삼국유사에는 전성기에 가구수가 15만 2,300호라고 되어 있다. 가구당 5명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약 80만명정도 되는 셈이다. 한편 당서(唐書)는 76만호, 약 380만명이 살았다고 되어 있지만 모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2017. 10. 현재 부여읍 인구는 23,000여명으로 부여군 전체의 1/3에 이른다. 그럼 1,300년전 사비성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사비도성내에 1만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가구당 5명이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5만여명이 살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오늘날의 부여 인구가 1,300여년전 사비성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비성이 큰 도시였을까? 부여가 쇠락한 도시일까?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초기 부여현의 인구는 382호에 1,337명이었다고 한다. 조선말에는 가구수는 350호로 줄고 인구는 1,498명으로 약간 늘어난다. 그러던 부여 인구가 1930년대 들어 2,238호에 12,405명으로 급증했다.
무슨 까닭이 있을까?
백제가 망한 이후 쇠퇴일로를 걷던 부여는 우리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에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일본 제국은 내선일체 이념의 선전을 위하여,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신도(神都)를 건설한다는 부여신도계획(扶餘神都計劃)을 1939년 10월 31일에 공표했다. 신도 건설 계획의 핵심으로 부여신궁이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짓기로 하고, 1939년 6월 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관폐대사(官弊大社)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 땅에 있던 관폐대사는 서울의 조선신궁과 부여의 부여신궁 두 곳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른 시가지 계획면적은 4,424만 m2로 당시 대전의 3,442m2, 전주의 1,975m2에 비해 월등히 큰 도시계획이 세워졌다. 부여신궁은 1943년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늦어지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으로 종전되면서 완공되지는 못하였다.
부여신궁에 주제신으로 봉안될 신은 진구 황후, 오진 천황, 고교쿠 천황, 덴지 천황으로 고대 한일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진구황후(神功皇后)는 오진(應神)천황을 임신한 몸으로 신라와 가라 7국을 평정한 후 백제를 복속시켰다고 하는 여걸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황후이다.
오진천황은 진구 황후의 아들로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아직기와 왕인이 백제에서 왜로 건너간다. 한편 오진 천황은 비류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다는 주장(김성호 박사)과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昆支)라는 주장도 있다.
고교쿠(皇極)천황은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동생인 고토쿠(孝德)천황에게 양위했다가 고토쿠가 죽자 사이메이(齊明)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극하는데 의자왕의 여동생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덴지(天智)천황은 사이메이의 아들로 백제 멸망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던 천황이다.
쇠락의 길을 걷다가 일제강점기에 잠시 빛을 볼 뻔 했던 부여, 2000년대 들어 대다수의 작은 지방도시들처럼 인구가 줄고 도시발전이 정체되고 있다. 이제 공주 및 익산시와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다시 옛 영화를 찾을 수 있을지~
첫댓글 2017. 10. 현재 부여읍 인구는 23,000여명으로 부여군 전체의 1/3 이고 면적은 58.86㎢ 이다.
부흥운동 초기 흑지상지가 봉기하자 몰려든 지원군이 3만에 이르고, 백제 유민까지 더하면 엄청난 사람들이 임존성으로 몰려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흥군은 유민들을 보호하고 지원군을 육성하기 위하여 안전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곳이 주류성 이다.
주류성은 수만명이 생계를 위한 척박한 땅을 개간하며 머무른 산악지역의 상상하기 힘든 넓은 공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금산성 장곡산성 같은 특정 산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사비도성내에 1만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가구당 5명이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5만여명이 살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인구 5만명의 백제 수도 사비도성 이라면 지금의 부여읍은 턱없이 좁은 면적이다.
더구나 부여읍 중앙에는 정림사지가 존재한다.
지금의 부여읍이 백제의 왕사이고 사비도성은 또다른 어느곳에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