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의 기억- 원평동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이종희(여, 1939년생) 씨
2020.11.09
아산시가 고향이며 26살에 동갑내기 배상복과 혼인하여 서운면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3년 뒤 평택으로 이주해서 원평동 인근에서 지금까지 살았다. 여성생활사와 관련된 기억이 많다.
평택에는 언제 오셨어요?
한 50년 됐슈.
혼인은 언제했고요?
26살에 안성 서운면에 살던 최학수씨하고 했어요. 우리는 동갑인데 서운초등학교 옆이 시댁이었슈.
시댁은 형제가 어떻게 됐어요?
우리 형제는 딸 5, 아들 2인데 지금은 다 죽고 딸 둘에 아들 하나만 살았어. 내가 넷째 딸이지. 우리 남동생은 소사벌초등학교 교장을 했슈. 교장노릇 한다고 섬에서 3년 살다 왔어. 우리는 엄마가 딸을 많이 나았슈. 첫째 딸은 낳아서 집안이 화목하라고 ‘화순’이라고 했고, 둘째도 딸을 낳으니께 분하다고 ‘분순’이라고 짓고, 셋째는 또 딸이라고 ‘또남’이라고 했슈. 호적에는 다 종자를 붙여서 올렸지만 동네서는 다 그렇게 부르지.
호적에도 그렇게 올렸어요?
아니 집에서만 그렇게 불렀다니께. 딸 셋 낳고서 아들을 낳았어. 그러니 얼마나 귀해. 애지중지하다가 100일 잔치도 얼마나 거창하게 했는데. 그런디 너무 소란을 떠니께 애가 놀라서 경기가 났는데 왜 그런지 모르고 있다가 죽었어. 얼마나 애통해. 그래서 또 아들을 낳았는디 그 때는 100일 잔치도 안 하고, 시계 치는 소리도 못나게 하고, 아주 받들고, 애 기르는 여자도 없는 집 여자를 데려다 키웠데야. 그렇하구서 나를 낳은 거지. 나를 낳고 나서 아들을 낳으면 좋았는디 또 여동생을 낳은 거여. 그런디 그 아래로 아들이 나오니께 우리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여동생을 업고 다녔디야. 우리 오빠는 ‘부귀’여.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부귀라고 했어. 나는 내귀여. 왜 그런지는 몰라. 호적은 다 종자로 올리고 집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그랬지.
막내 여동생 이름은 뭐예요?
게는 금자. 왜정 때 금자라는 이름이 싫어서 종자로 바꾸려고 했는디 안 된 거여. 남동생은 종철이, 오빠는 호적에 종석이, 집에서만 부귀여.
친정이 온양이라고 했죠?
온양 현충사에서 100호 되는 큰 동네가 있고 거기를 지나서 한참을 들어가면 20호 되는 산골동네여. 경주 이씨만 20가구가 살았어. 거기서 자라서 안성 서운면으로 갔지.
중매는 누가 했어요?
동네사람이 했지.
동네사람이 다 일가네요?
일가들이지.
맛선도 봤어요?
(맛선 볼 때)시어머니하고 시누이만 왔더라고. 신랑자리하고. 시어머니는 자식 8명을 다섯 여섯 살에 홍역으로 다 죽였디야. 홍역만 오면 다 잡아 갔디야. 시어머니는 자식을 20명도 더 낳았디야. 내가 시집오니께 쌀 한 가마니를 번쩍 번쩍 들더라니께. 우리 시어머니가 17살에 맏딸을 낳았디야.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디 그 아래로 여덟을 다 죽였디야. 마마, 홍역, 돌림병만 오면 다 죽었디야. 그걸 고치려고 황소 한 마리씩 나갔는디도 못 고쳤디야. 시아버지가 여덟 명을 지게다 져다가 공동묘지에 묻었는디, 자식 여덟이나 뭍었으니께 내가 시집가니까 시아버지가 앞을 잘 못 보더라고. 내가 막내며느리를 보고 싶은디 잘 못 본다고 그려. 우리 남편이 큰 시누이한티 엄마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나이가 졌어.
그럼 바깥어르신이 막내네요?
막내여. 내가 혼인했을 때 우리 큰 아버지는 두 내외가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어떻게 스무 명을 낳았대요?
그러게. 돌림병에 죽고, 지우고 스무 명 넘는디야. 우리 시어머니는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힘을 꾹 주면 애가 나왔디야. 나더러 그러더라고. 애 낳고 사흘만 지나면 보리 찧어 꼽해서 밥해 먹었다구. 그렇게 힘이 좋아. 세상에 보리쌀 씻어서 물을 쪽 따르고 뒤집어 이고 샘에서 오면 어디서 총알같이 달려와서는 얼른 가서 노깡에 물을 기르라고 혀. 솥단지도 부시고 해야지 물을 안 가져오면 어떡 하냐고.
어르신하고 기본 체급이 달랐네요?
우리 시어머니가 다른 마을에서 초상이 나서 구경 가고 싶은디 동네 앞으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으니께 그걸 구경 가고 싶어서 대청에 있던 쌀가마를 누가 가져갈 까봐 전부 방에다 옮겨 놓고 갔다 왔다네. 그러니께 시아버지가 그러드래야. ‘아니 쌀가마 놓고 어딜 갔다 오냐’고. 그래서 ‘방안에다 쌓아 놓고 문 잠그고 갔는디유’라고 했더니 ‘그 무거운 걸 어떻게 쌓았냐’라며 놀래더라지. 그래서 ‘가볍던디유’라고 했디야. 그렇게 힘이 장사여.
체격도 좋았어요?
체격도 좋고 힘이 장사였고. 그런디 우리 시아버지는 힘이 없어가지고. 옛날에 볏단을 논에서 져 와서 마당에다 볏가리 쌓잖어. 그런디 우리 시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쩔쩔메니께 시할아버지가 ‘야 며늘아기 내보내라’라고 했디야. 우리 시어머니가 던지면 번쩍 번쩍 날아갔디야. 우리 시아버지는 힘도 없었어.
시아버지가 힘이 없었으면 어떻게 애를 20명이나 만들어요?
아녀 없당께.
시댁에서는 몇 년을 살았어요?
3년을 살았어. 3년 살았는디 첫애 낳고서 시아주버니가 옆 동네에다가 살림을 내주더라고. 거기서 우리 딸을 낳았거든. 그런디 집 임자가 집을 내 놓으라고 해서 그거 내주고 평택으로 나왔지.
평택으로 나와 사는디 우리 시어머니 흉 좀 봐야지. 첫 아들을 낳고 둘째 딸을 낳게 되는디 낳을 때가 되니께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거동을 보니께 기미가 없거든. 어떤 보살한티 점을 봤는디 5월에 낳으면 아들이라고 했데야. 그런디 4월 31일 밤 10시가 넘으니께 아이구 아들을 낳으려는가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누우려니께 우리 남편이 와서 애 낳았다고 문을 두드리더래. 그러니께 우리 시어머니가 ‘아이구 기집애가 한 시간을 못 참고 나왔다고’ 그랬데야.
내가 태를 흩어서 가위로 길게 잘라서 실로 쯤매놨는데, 시집오기 전에 친정어머니한테 태 자르는 법을 배웠어.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건너오더니 그러는 거여. ‘한 시간을 못 참고 나와 가지고는’이라고 툴툴거리면서 미역국을 끊여가지고는 내 앞에다 탕 하고 내려놓는 거여. 그 바람에 국물이 눈에 들어갔지 뭐여. 아이구, 어찌나 기분 나쁘던지. 그것도 삼일 밥 해주더니 딸네 집 간다며 서울로 도망가 버렸어.
그러니 아수 본 놈 있지 낳은 놈 있지. 산모가 그걸 어떻게 다 챙겨. 우리 아수 본 놈이 아수를 타느라고 기집애 젓을 못 주게 하더라고. 젓만 주려면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거여. 그래서 옆에 큰 집이 있으니께 갔다가 맡겼는디 우리 큰동서가 시샘이 많어. 애를 봐주지도 않고 그냥 놔두니까 우리 집 대문을 들어서면서 또 나자빠지는 거여. 그러다보니 우리 딸이 많이 울었어. 젓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오죽 했으면 옆집 아줌마가 애 젓도 안주고 울린다고 했겠어.
내가 그렇게 산후조리를 못해가지고 허리를 못 썼어. 시어머니가 사흘 밥해주고 갔으니 어떻게 산후조리를 혀. 딸네 집 가려면 손주라도 데리고 갔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그렇게 허리를 못 쓰니께 동네 아줌마들이 그러더라고. 산후조리 못하면 애를 하나 더 낳고 산후조리를 잘해야 낳지 약도 없다고. 그래서 큰아주버니가 평택에다 집을 마련해줘서 딸내미를 데리고 평택으로 왔지.
평택에서는 셋방에서 살았는디 어떻게 애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것을 낳고 산후조리 잘해서 허리를 고쳐야겄다고 생각했지. 우리 셋째 아들. 그런디 주인집 여자도 애를 뱄는디 같은 달에 낳게 생겼어. 그런디 사람들이 주인집 여자가 먼저 낳으면 상관없는디 같은 집에서 나중에 낳으면 안 된다고 그래. 그래서 눈치만 보고 있는디 이놈의 애가 밤중에 나오려고 하잖어. 우리 아저씨가 목수여. 일을 갔다가 왔데.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애가 나오려나 봐’라고 하면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고모 딸네 집에서 낳을 수 있냐고 알아보라고 했어. 그랬더니 오라고 하는 거여. 그래서 신랑하고 걸어가는데 애가 자꾸 밑으로 나오려고 해. 길바닥에서 애를 낳을 수 없어서 나오려고 하면 다리를 꼬고 쑥 집어넣었어. 그러면 쏙 들어가. 또 나오려면 다리를 꽈서 쑥 집어넣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서 가자마자 7월 보름에 애를 낳았는디 애가 죽었지 뭐야. 우리 남편이 그래. ‘여보 애가 나왔는디 죽은 거 같여’라고. 그래서 일어나가지고 애 뒷다리를 거꾸로 들고 궁둥짝을 쎄게 세 번 때렸어. 그랬더니 애가 피가 돌면서 울더라고. 우리 친정엄마가 가르쳐 줬어. 애가 나와서 울지 않으면 태를 가르지 말라고도 가르쳐줬고. 애가 피가 돌고 울어서 이제는 됐다 싶어 방바닥에다 뉘어 놓으라고 했지. 그래서 살았어.
애를 낳았더니 그 집(남편 고종 사촌)에서 어디서 미역을 사다가 끊여주더라고. 그것을 먹었더니 신랑이 택시를 잡아서 집으로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튿날 택시를 타고 왔더니 우리 옆집 쌍과부집이라고 아가씨 치는 집이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깜짝 놀래여. 어디서 애를 낳아가지고 들어오냐고 그래. 그래서 저 어디 가서 낳고 오는 거라고 말했어.
애를 낳고 내가 신랑한티 그랬어. 시어머니한티는 알리지 말라고. 딸 낳았을 때 서운한 맘에 그런 거지. 그런디 우리 신랑이 아들 낳았다고 너무 좋아서 안성에 호적 올리러 갔데. 그랬더니 우리 시어머니가 ‘뭐 낳았니’라고 묻더래. 그래서 아들 낳았다고 그랬더니 ‘이 이눔의 시키 아들 낳았으면 진즉 얘기를 해야지’라고 말하고는 쌀하고 미역국을 가져와서 한 달을 산후조리 해줬어. 내가 곤하게 자고 있으면 살살 깨우면서 ‘아가 아가 미역국 먹어라. 미역국 먹어야 젓 난다’라고 깨워. 참 내.
그 때는 버스 차장이 있었잖어. 둘째 아들 낳고 서운면 큰집에 가는데 버스에 타면 애가 죽는다고 난리가 나.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서 큰 집까지 걸어가는 디 내가 온다며 집안 조카를 시켜 짐자전거를 보냈어. 그 짐자전거에 애를 등에 업고 탔는디 자전거가 턱턱거리고 흔들리니께 속이 안 좋았던 가봐. 집 안에 들어서자 대청마루에 내가 쓰러졌어. 시댁에서는 난리가 났지. 한참 정신없이 누워 있다가 눈을 떠보니께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 때 죽다가 살아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