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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송수권의 [김치와 서정시], [여름 낙조], [우리들의 땅], [순이삼촌]
김치와 서정시
송수권
같은 접속어로만 가지고 말 하더라도
'하더라도'가 아니라 '하였는디'로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하였는디'로
전라도 말가락에만 있는 판소리 표준어
그 細柳靑靑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
이제 우리 서정은 비닐깡통 속에 들어 있고
윤나는 버터의 질 속에 유해색소와 함께
섞여 있다
감옥소의 뒷마당 내리는 눈 속에
쓰레기 하치장 바퀴벌레의 단단한 갑피질 속에
김치맛이 돌지 않은 솔벤油처럼
우리 서정시는 반들거린다
맵고 짜고 새콤한 그 맛!
통영갓을 썼던 그 시대에도
개털모자를 쓰고 북만주를 떠돌았던
독립군의 모자 속에서도
얼큰하고 맵고 짜고
헬멧이 유행이었던 일제치하
아니 해방 후 중절모 속에서도
4,19 이후 신동엽의 쭈그렁 등산모 속에서도
그 맛은 그 맛인 것!
요즘은 물 건너 아메리칸들도 좋아한다는 군
사할린 콜사코프 남쪽 항구
한평생 안개 속을 떠돌다 눈감은
李老馬씨의 무덤 속에서도
뻘겋게 김나는 김치
오늘은 세 마치 장단으로
오리발 궁둥이를 달싹이는
이승엽의 방망이 끝에 터지는 알싸한 그 맛!
우리 서정시 또는 김치
----{애지}, 2005년 여름호에서
나는 이미 문태준의 [가재미]를 분석하면서, “시는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의 장르이며, 그것은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타나게 된다. 서사시의 주인공이 통개인적이며 문화적 영웅으로서 그가 소속된 국가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인물이라면, 서정시의 주인공은 사적인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또,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주관적인 감정은 보편적인 감정으로 승화되고, 그 감정의 토대가 되는 그의 삶은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원형이 된다. 시는 맑고 깨끗한 영혼을 얻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하고, 또한 시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연출해내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하다”라고,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역설한 바가 있었다. 시는 T.S 엘리어트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그 주체자의 모국어와 깊숙이 관련이 있고, 그 모국어와의 관계를 빼어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어로 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어로 느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산문은 외국어로 번역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되지만, 민족어의 특수한 형식인 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가장 민족적인 문학 장르이며, 언제, 어느 때나 최종심급은 그 주체자의 생활 현실(물질적 토대)일 뿐인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194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고,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꿈꾸는 섬},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파천무}, {아내의 맨발} 등의 시집을 출간했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송수권 시인은 ’남도의 말‘과 그 ’판소리 가락‘으로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를 선보여 왔지만, 그러나 그의 서정시는 토속적인 세계로 움추러 들지 않고, 그 토속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를 선보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속적인 세계는 어떠한 시대의 변화도 거부하고 움추러 든 세계를 말하지만, 서정시의 세계는 자기가 살고 있는 토속적인 현실에 밑줄을 치면서도, 그 토속의 세계를 보편의 세계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는 세계이다. 고백과 독백의 언어인 서정시의 언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보편적인 언어로 승화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같은 접속어로만 가지고 말 하더라도/ '하더라도'가 아니라 '하였는디'로/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하였는디'로/ 전라도 말가락에만 있는 판소리 표준어/그 細柳靑靑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를 그 이상적인 모형으로 제시해놓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가 살고 있는 언어의 현실은 ‘남도의 말’과 ‘판소리 가락’에 의해서만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수권 시인은 ”전라도 말가락에만 있는 판소리 표준어“와 ”그 細柳靑靑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를 최고의 서정시로 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토속주의도 아니고, 더 더군다나 그토록 편협한 지역주의도 아니다. 오늘날, ”하더라도'가 아니라 '하였는디'로/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하였는디'로“라는 전라도의 사투리가 판소리의 표준어가 되어가고 있듯이, ”그 세유청청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가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바로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 영역의 확대는 그 주체자의 영역의 확대이고, 그 주체자의 영역의 확대는 세계 영역의 확대이다. 표준어와 사투리의 구분은 지극히 인위적인 것이며, 그것은 시대의 환경에 따라서 그 위치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송수권 시인은 “이제 우리 서정은 비닐깡통 속에 들어 있고/ 윤나는 버터의 질 속에 유해색소와 함께/섞여 있다”라고 탄식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오늘날의 서정시는 “감옥소의 뒷마당 내리는 눈 속에/ 쓰레기 하치장 바퀴벌레의 단단한 갑피질 속에/ 김치맛이 돌지 않은 솔벤油처럼” 반들거린다고 탄식을 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자본과 상품이 실시간대로 국경을 넘나들고, 세계화의 흐름 속에 그 모든 전통들을 망가뜨려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돈의 가치가 최고의 가치가 되고, 모든 사건과 사고들은 오직 그 돈의 움직임에 따라서 발생하게 된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제 아무리 썩지 않는 비닐깡통도 문제가 될 리가 없고,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유해색소’의 사용도 문제가 될 리가 없다. 또한 남극과 북극의 빙산이 녹아내리고 그 온실 효과에 의해서 온갖 기상이변이 속출해도 더 이상----더욱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의 문제가 될 리가 없고, “감옥소의 뒷마당 내리는 눈 속에/ 쓰레기 하치장 바퀴벌레의 단단한 갑피질 속에/ 김치맛이 돌지 않은 솔벤油처럼/ 우리 서정시”가 반들거려도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어느 독일 사람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과연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고통스럽게 물은 바가 있지만, 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야 말로 서정시가 그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역사와 전통이 파괴되고, 더 이상의 삶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생태환경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서정시는 그 물질적인 토대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김치와 서정시]는 비닐깡통과 솔벤油 속에서 반들거리는 서정시의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서정시의 화려한 부활을 기원하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인간의 피와 땀과 생명이고, 만일, 그 시가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도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인간을 생각해보고, 또한 노래도 잃고 꿈도 잃어버린 인간을 생각해보아라! 그는 눈뜬 봉사이며, 말 못하는 벙어리이며, 나사가 빠지고 녹이 슬어버린 기계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서정시의 화려한 부활과 그 물적 토대의 온전한 회복을 꿈꾸면서, 서정시와 김치를 대등한 관계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김치는 “맵고 짜고 새콤한 그 맛”도 있지만, “통영갓을 썼던 그 시대에도/ 개털모자를 쓰고 북만주를 떠돌았던/ 독립군의 모자 속에서도/ 얼큰하고 맵고 짜고/ 헬멧이 유행이었던 일제치하/ 아니 해방 후 중절모 속에서도/ 4,19 이후 신동엽의 쭈그렁 등산모 속에서도” 언제나 “그 맛은 그 맛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시대가 수없이 바뀌어도, 이를테면, 통영갓을 썼던 그 시대에서부터 4,19 이후 신동엽의 쭈그렁 등산모에 이르기까지, 그 모자의 양식이 수없이 바뀌어도, 김치맛은 언제, 어느 때나 “맵고 짜고 새콤한 그 맛”이지 않으면 안 된다. 송수권 시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느닷없이 통영갓, 개털모자, 독립군의 모자, 헬멧, 중절모, 쭈그렁 등산모 등을 그 시대의 순서에 따라서 나열한 것은 그 모자가 단순한 모자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두뇌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의 변모는 두뇌(사유)의 변모이며, 두뇌의 변모는 그 인간 사회의 변모를 뜻하게 된다. 그러나 김치와 서정시는 그 인간의 사유와 시대의 변모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그 맛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되고, 오히려, 거꾸로 “요즘은 물 건너 아메리칸들도 좋아한다는군”이라는 시구에서처럼,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맛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인 태양’, ‘어머니인 대지’가 ‘원형상징의 언어’이듯이, 원형상징이란 수많은 인종, 시대, 문화적 환경의 변모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변모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한다. 김치도 원형상징의 언어가 되어야 하고, 서정시도 원형상징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김치란 무엇인가? 김치란 대한민국 특유의 채소 가공식품이며, 2001년도에, 드디어 국제식품규격위원회로부터 ‘국제식품 규격’으로 승인을 받은 바가 있다. 김치란 무, 배추, 오이 등을 소금에 절여서 고추, 마늘, 생강, 파, 젓갈 등의 양념을 넣고 저온에서 발효시킨 식품으로, 우리 한국인들의 식탁에서는 빼어놓을 수 없는 반찬임을 뜻한다. 지방에서는 김치를 지漬라고 불렀고, 제사 때는 침채沈菜로, 그리고 궁중에서는 젓국지, 짠지, 싱건지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치의 기원은 머나 먼 상고시대上古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김치는 각종 무기질과 비타민의 공급원이 되어주고 있다. 젓산균 의해서 장腸을 청소해주고, 동물성 젓갈류들은 쌀에서 부족한 단백질을 공급해준다. 마늘에서 비롯된 항암 효과와 함께, 변비, 장염, 결장염, 동맥경화, 빈혈, 식욕증진은 물론, 이제는 ’사스‘, 즉, ’조류독감‘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내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김치의 종류를 찾아본 결과, 김치의 종류는 놀라웁게도 300여 가지가 넘고 있었고, 나는 그 수많은 김치의 종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정말로 한국인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추를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김치류: 배추 김치, 통배추 김치, 보쌈 김치, 양배추 김치, 속대 김치, 강지, 백김치, 씨도리 김치, 얼가리 김치, 봄동 겉저리 김치, 배추 겉저리 김치, 동아 석박지 김치, 배추 석박지 김치, 배추 동치미, 연배추 물김치, 배추 물김치, 평안도 통배추국 물김치, 풋배추 물김치, 소금 배추 물 김치, 배추꼬지 장아찌배추잎 짱아찌, 배추 짠지, 배추쌈 오이 소박이, 배추 시래기지 등.
무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김치류: 총각 김치, 알타리 김치, 빨간 무김치, 숙김치, 서거리 김치, 채 김치, 비늘 김치, 무청김치, 나박 김치, 애무 김치, 단무지, 열무감자 김치, 비지미, 무 묶음김치, 무 백김치, 무 명태 김치, 무 국화 김치, 무 배 김치, 무 장아찌, 무 말랭이, 파 김치, 무 짠지, 무 석박지, 무 겉저리 김치, 알 깍두기, 굴 깍두기, 아마기 깍두기, 명태 깍두기, 쑥갓 깍두기, 우엉 깍두기, 쑥 깍두기, 대구 깍두기, 대구알 깍두기 ,즉석용 후인 깍두기, 열무 오이 깍두기, 오이 깍두기, 풋고추 깍두기, 풋고추잎 깍두기, 삶은 무 깍두기, 창란젓 깍두기, 동치미, 서울 동치미 ,나복 동치미, 실과 동치미, 무청 동치미, 총각무 동치미, 알타리 동치미, 궁중식 동치미, 알타리 국물 동치미, 열무 물 동치미, 열무 오이물 동치미, 무채 짱아찌, 무청 짱아찌, 무 말랭이 젓 짱아찌, 무 짠지, 무 배추 고추잎 짠지, 열무 짠지, 빨간무 소배기, 무청 소배기, 무 생채 등.
오이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김치류: 오이 깍두기, 인삼오이 물김치, 오이 물김치, 소박이 김치, 호배추 소박이 김치, 오이 소박이, 통대구 소박이, 배추쌈 오이 소박이, 고추 소박이, 오이 송송이 등.
기타 야채들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김치류: 호박 김치, 깻잎 김치, 미나리 김치, 냉이 김치, 시금치 김치, 콩나물 김치, 고들빼기 김치, 박 김치, 죽순 김치, 쑥갓 김치, 고구마줄기 김치, 고춧잎 김치, 가지 김치, 달래 김치, 메밀순 김치, 도라지 김치, 두릅 김치, 부추 김치, 고추 김치, 풋마늘 김치, 실파 김치, 쪽파 김치, 오징어 파김치, 전라도 파김치, 황해도 파김치, 상치 겉저리 김치, 실파 겉저리 김치, 깻잎 양파 김치, 겉저리 김치, 부추 겉저리 김치, 석류 김치, 갓지, 율장 김치, 시금치 물김치, 가지 물김치, 돌나무 물김치, 콩나물 콩물김치, 더덕 물김치, 삭물김치, 마늘 장아찌, 마늘쫑 장아찌, 달래 장아찌, 고춧잎 장아찌, 풋고추 장아찌, 파 짠지, 파강회 짠지, 부추 짠지, 삭힌 고추 짠지, 갓 소박이, 더덕 소박이, 도라지 생채, 노각 생채, 파 생채, 더덕 생채 등.
해물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김치류: 파래김치, 미역김치, 청각김치, 청각 물김치 등.
육류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김치류: 가자미 식혜, 마른고기 식혜 ,굴 김치, 꽁치 김치, 새치 김치, 대구 김치, 북어 김치, 오징어 김치, 전복 김치, 닭 김치, 꿩 김치, 제육 김치, 오징어 생채, 제육 생채, 통돼지 소박이, 굴 깍두기, 아마기 깍두기, 명태 깍두기, 대구 깍두기, 대궐 깍두기, 창란젓 깍두기 등.
우리 한구인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김치의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가꾸고, 그 ‘김치문화’를 세계적인 음식문화로 가꾸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수많은 생명공학자들과 요리연구가와, 그리고, 정부와 기업들과 시민단체들이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이 ‘김치문화’의 초석을 연구해보고 또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김치는 요즈음 미국인들과 일본인들도 좋아하고, “사할린 콜사코프 남쪽 항구/ 한평생 안개 속을 떠돌다 눈감은/ 李老馬씨의 무덤 속에서도/ 뻘겋게 김나는 김치”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시인이고자 한 사람은 영원히 시인임을 포기할 수가 없듯이, 진짜로 김치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李老馬씨'처럼 그 무덤 속에서도 그 맛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그 ‘김치’와 ‘서정시’의 맛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고 멋지게 표현해 놓고 있다.
오늘은 세 마치 장단으로
오리발 궁둥이를 달싹이는
이승엽의 방망이 끝에 터지는 알싸한 그 맛!
우리 서정시 또는 김치
오늘도 전라도의 ‘세 마치 장단’으로 그 특유의 오리발 궁둥이를 달싹이며 ‘아시아의 홈런왕’이 되어가고 있는 이승엽, 그 이승엽의 힘의 원천이 이 ‘김치’와 ‘서정시’에 있다는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남도의 말’과 그 ‘판소리 가락’으로 대한민국 서정시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렸고, 또한 우리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우리 한국어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같은 접속어로만 가지고 말 하더라도/ '하더라도'가 아니라 '하였는디'로/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하였는디'로/ 전라도 말가락에만 있는 판소리 표준어/ 그 細柳靑靑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라는 아름답고 멋들어진 제일급의 시구와 “오늘은 세 마치 장단으로/ 오리발 궁둥이를 달싹이는/ 이승엽의 방망이 끝에 터지는 알싸한 그 맛/ 우리 서정시 또는 김치”라는 아름답고 멋들어진 제일급의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김치와 서정시]를 읽다보면 서정시가 종말을 맞이한 이 시대에도 그의 ‘김치’와 ‘서정시’는 언제나 “맵고 짜고 새콤한 그 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만일, 아우슈비츠 이후와 자본주의 사회 이후에도 우리 인간들이 살아만 남는다면, 인간성의 회복과 함께, 그 생태환경의 파괴도 곧 복원시킬 수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는 우리 인간들의 노래이자 꿈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는 송수권 시인의 시이며, 송수권 시인의 시는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건너지 않는 사람과는 일체 사귈 필요가 없다. 그는 잔머리의 대가이며, 그의 소심함은 인간이라는 종의 쇠약화에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의로운 사건이나 일 앞에서는 언제, 어느 때나 사나이 대장부답고 대범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논쟁을 포기할 때 그는 위대한 사상가의 길도 포기하는 것이며, 적 앞에서 용기를 갖지 못할 때, 그는 그의 위대한 삶의 양식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문화의 성과는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전쟁의 성과일 수밖에 없다. 백일장, 노래자랑, 장기자랑, 김치축제, 소싸움대회, 스포츠, 맛자랑, 연극경연, 미술전람회, 음악회, 학술대회, 잡지발행, 대학입시,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선거, 무역수출 등, 이 모든 축제의 형식도 가상의 적과 실제의 적들과의 싸움(경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전쟁의 형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문화, 어떤 축제의 형식도 세계적인 대사건으로 연출해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인식의 제전(앎의 투쟁)에서 철두철미하게 패배를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만 준다면 이 ‘김치축제’를 세계적인 축제로 연출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그리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만 준다면, 이 서정시의 축제를 세계적인 인식의 대제전으로 연출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낙천주의 사상의 창시자인만큼 우리 한국인들과 모든 인류의 영광을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천성이 호전적이고 전투적이며, 그 어떠한 싸움도 마다하지를 않는다(반경환 {명시감상} 1에서).
여름 낙조
송수권
왜 채석강변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왜 채석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나르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10여 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청호반으로 귀향을 하면서 ‘낙천주의자의 꿈’을 더욱 더 가꾸고 키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산책을 하고 들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나의 학문에 방해가 되는 그 모든 장애물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리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자는 나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나에게 기쁨을 준다”라는 어느 옛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따라서, 어느날, 나는 옛 친구들을 만나서, “사랑하는 친구가 성공을 하고 행복해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다소 가슴 아프고 충격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공부를 쉬면 그것을 만회하는 데 이틀이 걸리고, 이틀을 쉬면 나흘이 걸린다. 1년을 쉬면 2년이 걸리고, 2년을 쉬면 4년이 걸린다. 나는 아무 때나 제멋대로 만나자는 그들의 무례함도 싫었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을 만나면 애주가愛酒家로서의 과음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면 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과음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과음을 하면 그 이튿날이 괴롭고, 또, 그 다음날도 정신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이중 삼중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집을 떠나서 어디를 가든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여러 과제들 때문에 한 번도 마음이 편해 본 적이 없었다. 꿈이 큰 자는 모두가 혁명가이며, 고독한 혁명가이다. 그는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타인들의 요청은 모두가 거절하는 사교계의 무법자이다. 나는 나의 건강에 이로운 숲과 강을 거닐면서, 오늘도 학문과 예술의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다. 사교계의 무법자는 그와 가까운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최고급의 인간들과 사귀게 된다. 그의 고독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의 고독이 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독이 된다.
다이아몬드는 그것의 값이 그 가치를 결정하고, 덕은 수도의 어려움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 종교는 고행의 어려움이 그 가치를 결정하고, 약은 쓴 맛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 이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 공짜가 없고, 금욕주의는 오늘도 기적을 연출할 수 있는 모태가 되어주고 있다. 꿈을 꾸는 자는 보다 더 강력한 적을 찾아나서고, 강력한 적과의 어렵고 힘든 싸움,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최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한 마디로 천동설의 모순을 일축하고 지동설을 역설했던 갈릴레오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꿈을 사랑하고, 그것에 값하는 고통을 찾아나섰던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다 강력하고 위대한 적들(지배 계급의 인사들)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하여 레스보스 섬으로 추방된 이후, 그 고장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갔던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추방했던 로마 당국은 그를 재소환하여 그의 자택 내에 연금시키는 형벌을 다시 부과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 사회에서의 추방은 예로부터 가장 어렵고 무거운 형벌이었는데, 그가 그 형벌의 고통을 극복하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산 정약용의 유배 생활이 만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듯이, 그 형벌의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은 청동보다도 더 강하고 튼튼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부모형제나 처 자식들의 문제에도 언제나 속수무책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 한 사람의 목숨을 먼지나 티끌처럼 자연의 법칙에 맡기고 모든 사사로운 인간 관계에서 떠나 버리면 엄청난 사유의 깊이가 녹아든 글을 쓸 수도 있고, 진정으로 맑고 투명한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밥만 먹고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청송보호소의 독방에 수감되는 영예를 차지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볼 때도 있고, 문학상이나 그 모든 영광에 대한 욕망을 버린지도 오래되었다. 나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가장 커다란 신성모독죄를 범했지만, 그 형벌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향유를 하고 있다. 보다 강력하고 위대한 적, 좀더 어렵고 힘든 고통, 그러나 이것은 나의 행복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것은 내가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송수권의 [여름 낙조]를 살펴보면,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나 동정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공감을 표하게 만든다. 그는 사회가 제공하는 온갖 편의를 거절하고, 학교의 강단에서 그만큼 멀어진 순수한 앎의 세계를 파고 들어간다. 그는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살면서도 자기 자신이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살라 버리고, 자기 자신의 고통을 사소한 고통이라고 깎아내리면서도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나르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고, 타인들의 고통을 더욱 더 크게 끌어안고 있다. 자기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때는 그의 자존심이 더욱 더 오만방자해지고, 자기 자신이 이해받을 때는 그의 동정심이 더욱 더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이 참된 혁명가의 고독이지만, 그러나 그 혁명가의 진정한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은 그와 동등한 또다른 혁명가일 수밖에 없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에게 빵을 제공해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의 이성과 두뇌를 마비시키고, 학교의 교육은 쉽게 배우고 익힐 수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될 수 있는 앎은 모진 비 바람과 거친 파도 속에서도 그 굴절을 모르는 자연으로부터 터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채석강변은 보다 강력하고 위대한 적과 좀더 어렵고 힘든 고통이 살아 있는 곳이고, 무차별적인 만인의 폭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일인의 고독이 살아 있는 곳이다. 만 권의 책과 깊고 깊은 절벽의 단애, 오늘도 끼룩끼룩 울며 서해 바다를 날아가는 변산 갈매기들, 그리고 앎에의 의지에 충만하여 만 권의 책 속에서 신음하는 시인, 어느 누가 그 시인에게 그의 삶의 이유를 물을 수가 있겠으며, 그 아름답고 장엄한 [여름 낙조] 앞에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앎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고, 그 새로운 인간을 통해서 보다 건강하고 완전한 ‘종種’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송수권의 [여름 낙조]가 나를 부르면 나도 그 [여름 낙조]가 되어 달려간다. 그 뒤를 이어서, 김광규, 김수영, 호라티우스, 앤토우니와 옥타비오 시이저가 달려오고, 그들은 다같이 서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우리들의 우정의 바다는 무한히 넓고 푸르고, 우리들의 [여름 낙조]는 더없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나는 현실의 모든 친구들을 다 잃어 버렸지만, 이처럼 최고급의 시인들과 사귈 수가 있어서 행복하다.
아아, 이태화 변호사여! 나의 생활은 더없이 단조롭고 따분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한 달에 거의 한 두 명의 외부 사람을 만날까 말까하고----그대를 제외하고----, 자동차도 운전할 줄을 모른다. 양복도 통 털어서 세 벌 밖에 없고, 돈이 드는 오락은 커녕, 그 모든 오락마저도 언제나 사양을 하고 있다. 그처럼 좋아했던 바둑도 모든 정석을 다 잊어버렸고, 애주가로서의 술마저도 모든 식구들이 잠든 밤에, 일주일에 한 두 번, 그것도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이 고작이다. 때때로 친구들이 그립고 내가 만나지 않고 있는 여러 친구들의 거친 험담과 욕설이 들려 오지만, 내가 좋아하는 몇 권의 책 속에 파묻히다 보면, 내가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사귀고 싶었던 최고급의 친구들이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무수히 살아 나온다. 술 한 잔도 못 사고 언제나 타인들의 신세만을 지고 살아가는 사교는 나를 더욱 더 왜소하고 초라하게 만들지만, 이처럼 깊고 깊은 고독 속으로의 침잠은 내 마음의 행복의 바다가 된다. 그들은 내가 만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고,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나의 팔베개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꿈의 주인공이 되어 주기도 한다. 우리들의 우정에는 질투도 없고, 시기도 없고, 사사로운 이해타산도 없다. 우리는 그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헐벗었으면 헐벗은 대로 그를 사랑하고, 그가 기쁘면 그와 함께, 상상의 날개를 타고 머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가 슬프고 우울하면 톡 쏘는 그 맛처럼 한 잔의 달콤한 술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통, 더욱 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독은 행복해진다. 우리는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독 속을 거닐면서, 한 시대, 한 문화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사상의 신전을 건축하고, 너와 내가 함께, 살 수 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에 여념이 없다.
내가 사귀고 있는 최고급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호머 전지 전능한 신들을 창조하고 그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우리 인간들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했던 휴머니스트.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
소크라테스 한 마리의 등에처럼,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의 ‘무지無知’를 일깨워주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철학적 명제를 양식화시켰던 인물. 그의 앎과 행동이 일치된 ‘애지愛知’의 철학을 배우되, 언제나 내가 논쟁을 해보고 싶은 위대한 스승.
플라톤 그의 이상국가를 방문하고, 내가 시와 예술의 진수를 가르쳐 주고 싶은 인간.
아리스토텔레스 그와 함께 시와 예술을 논하고 그의 중용의 미덕을 배워보고 싶은 인간, 그러나 내가 중용의 미덕의 약점을 지적하고 혁명가의 날쌘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싶은 위대한 스승.
셰익스피어 아직도 그의 언어와 문체 속에서, 마냥,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 보고 싶은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더없이 초라해지고 더없이 행복해지는 위대한 스승.
쇼펜하우어 나에게 최초로 염세주의를 가르쳐 주고 염세주의자도 그처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 준 위대한 스승. 니체에게 철학적인 진실과 명랑함과 항상성을 가르쳐 준 위대한 스승. 그러나 내가 나의 ‘낙천주의’를 꼭 가르쳐 주고 싶은 위대한 스승.
니체 좀더 강력하고 위대한 적을 찾아서 언제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을 가다듬었던 디오니소스 유형의 철학자. 그러나 내가 나의 ‘낙천주의’를 꼭 가르쳐 주고 싶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최초의 스승이자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
프로이트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의 학문에 정진했던 유태인. 내가 그의 외디프스콤플렉스의 망령을 잠재우고 시와 예술의 진수를 가르쳐 주고 싶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괴테 그토록 오만방자하고 시건방진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수십 번씩, 수백 번씩 인용을 해먹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던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그의 {파우스트}를 수십 번씩 되풀이 읽어가면서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인용한 구절들을 체크해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내 스스로 분석을 하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다시 태어나면 독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고 {파우스트}의 원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세계적인 대작가.
오딧세우스 그의 뛰어난 지혜와 강인한 정신을 배워보고 싶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헤라클레스 건강, 힘, 용기, 그의 열두 가지 노역을 마다하지 않던 대담성과 용기를 배워보고 싶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보들레르, 랭보 그들의 저주받은 운명을 배워보고 싶은 시인들.
반 고호, 폴 고갱 가난, 광기,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에 매달렸던 위대한 예술가들.
김수영 건강, 정직, 성실, 용기, 그리고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소유자. 그 미완의 가능성 앞에서, 아아!라는 탄식의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내가 존경하는 최초의 한국인이자 최후의 한국인.
내가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 한국인들은 다음과 같다.
유ㅇㅇ 여자처럼 나약하고 언제나 줏대가 없는 인간.
김ㅇㅇ 재승후덕의 탈을 썼으나 다독의 폐해에 젖어서 정신의 탄력성을 몽탕 잃어버린 인간. 사상이 무엇인지, 문학 이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프랑스비평사}라는 엉터리 책을 써낸 천하의 사기꾼. 그의 {행복한 책읽기]는 ‘나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않았소!’라는 그의 묘비명.
백ㅇㅇ 언제나 쩨쩨하고 가부장적인 권위만을 내세우는 인간. 창작과 비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런 학문적 연구 주제도 갖지 못한 민족주의적인 괴물.
김ㅇㅇ 언제나 서구의 사유인들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 태도와 함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수성도 전혀 없는 인간.
고ㅇㅇ 염세주의자에서 민족주의로 변신한 사기꾼. 그리고 민족 시인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20세기 말의 최대의 사기꾼.
이ㅇㅇ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르스와도 같은 괴물. 대한민국의 모든 작가들을 다 잡아먹고 텅텅 빈 관악산 기슭에서 그 배고픔을 참지 못해 오늘도 울부짖고 있다. “아아, 대한민국의 작가들은 고작 이것 뿐이란 말인가! 아아, 이 요상한 괴물 미노타우르스의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란 말인가! 나는 단 한 줄의 소설도 쓰지 않고 노벨문학상을 타려고 했는데, 여기서 굶어 죽다니......스웨덴의 한림원이여! 이제는 그 수상 제도를 개선하여 아무 소설도 쓰지 못하고 굶어죽은 이 미노타우르스에게도 그 상을 수여해다오!”라고, 오늘도 그 미노타우르스는 그렇게 간절하게 강청을 하고 있다.
김ㅇㅇ 루카치를 베껴먹고,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을 베껴먹고,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를 신봉하는 사기꾼. 서울대학교라는 폐허의 신전에서 가짜의 왕관을 쓴 채, 교육시장의 개방과 정년 퇴직을 두려워하여 오줌을 질금질금 싸는 사기꾼.
정ㅇㅇ 스승 앞에서는 언제나 여자처럼 유약하고 용기가 없는 나약한 인간. 그의 화려한 수사는 사상의 빈곤을 은폐하고, 그의 불성실을 은폐하는 아주 유치한 화장도구에 불과하다.
(이상 공히 사상의 신전이 아닌 권력의 신전을 세운 대한민국의 제일급의 인사들. 이미, 나의 사상의 칼날을 맞고 조용히 죽어가고 있는 괴물들)
한국사회에서 나만큼 학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우리 학자들을 그토록 무섭게 비판을 하고 매도를 한 사람은 일찍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학문 이전의 야만의 사회이며, 영원히 그 발육이 중단된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가 다같이 문학이론이나 사상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의 생산을 역설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들의 실력이 도저히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학자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은폐하고 모든 제도를 움켜쥔 채, 사색당파와도 같은 정치적인 음모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학문 연구나 진리 탐구보다는 언제나 정중하고 겸손한 예의와 자기가 속한 집단과 그 보스에 대한 충성의 강도가 더욱 더 우선시 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언제나 정중하고 겸손한 예의와 충성의 강도는 굳건한 동지, 변함없는 당원의 영원한 징표가 되고, 대학제도, 학회, 언론, ㅇㅇ문화재단, ㅇㅇ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명예와 명성의 보증수표가 된다. (생략)
*이 글은 나의 {행복의 깊이} 제3권, 제6장 [우정에 대하여] 중, 송수권 시인의 [여름 낙조]를 다룬 대목에 해당된다. 나의 {명시감상}의 독자들을 위하여 꼭 소개해보고 싶었던 글이기도 하다. 새천년 {애지}의 창간호에 실린 글이기도 하지만, 나의 시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는 글이기도 한 것이다.
----반경환 {명시감상} 4에서. (확인해볼 것)
우리들의 땅
송수권
나는 다근바리처럼 하예 마을*에 숨어들어
옛날 옛적 변당장이가 사 놓았다는
땅을 보러 갔다
그러나 그 땅은 누군가의 손에 팔리고
흔적조차 없었다
서울서 왔다는 반백의 사내들도
내 등 뒤에 붙어서서
이 마을에 살 땅이 없느냐고 묻는다
서울 양반은 바나나 농장을 하나 갖고 싶단다
그런 땅은 다 팔리고 없다고
마을의 한 청년은 훠이훠이
손을 내어젓는다
나는 다시 변당장이가 사 놓은 땅을
찾아 설명했다
동으로는 족다리 서로 족다리
북은 맨드롱 동산
아래로는 허구대양……
그때서야 청년은 얼굴이 붉어진 채
앞바다를 가리킨다
때마침 바다에서는
봄비 내리고
비바리 숨비소리
한창이었다
서귀포여
너의 정신을 팔고
이 끈끈한 바람과 햇빛 말고
이제는 무엇을 팔 것인가.
* 하예마을 : 옛날 옛적 중문리에 사는 변당장이란 사내는 이곳 하예마을에 와 친구에게서 땅을 샀다. 친구는 땅문서에 「동으로는 족다리, 북으로는 맨드롱 동산 남으로는 허구대양……」이라고 땅의 경계를 표시했다. 이듬해 봄, 변당장이는 소를 몰고 쟁기를 짊어지고 땅을 갈러 왔다. 그러나 땅은 없었고 친구 부인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변당장이가 오자 홀랑 벗고 누워 「동으로는 족다리, 북으로는 맨드롱 동산 남으로는 허구대양……」하고 노래를 불렀다. 변당장이는 자기의 무식했음을 뉘우치고 아들 하나는 잘 가르쳐 만경 군수를 지냈다 한다.
----송수권 시집 {흑룡만리}(도서출판 지혜)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섬인 제주도가 부동산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곳을 골라서 이 땅의 재벌들이 선점을 했고, 이제는 그 뒤를 이어서 중국인들이 벌떼들처럼 몰려오고 있다. 당나라의 수탈, 몽고의 수탈, 명나라의 수탈, 청나라의 수탈, 일본의 수탈, 그리고 8.15 해방과 함께 4.3사건으로 인하여 28만 중, 3~4만여 명이 죽어나갔다는 제주도----. 제주도민의 한과 그 수난의 역사는 송수권의 [우리들의 땅]에도 나타난다.
이기주의의 화신인 투기꾼, 기회주의와 변절의 화신인 투기꾼, 온갖 거짓과 강도와 강간을 일삼는 투기꾼----그러나 이 투기꾼들이 옛날 옛적의 ‘변당장이’처럼 졸딱 망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나 “동으로는 족다리 서로 족다리/ 북은 맨드롱 동산/ 아래로는 허구대양”이라는 시구처럼, 마누라의 아랫도리나 팔아먹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그대들은 언제, 어느 때나 그 노예적인 삶에서 해방될 것이란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 즉,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이러한 저주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앞으로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자기 땅, 자기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세계적인 강도집단에 불과한 미국에게 대한민국의 영토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혼을 더욱더 유린해달라고 사정하는 이 땅의 극우진영의 추태는 가히 세계적인 꼴불견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교육을 받고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댓가는 애국심이 곧 대역죄가 되고, 그 민족은 남과 북, 동과 서, 좌익과 우익, 기독교와 불교와 천주교 등으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분열을 하게 된다.
철학은 정치, 역사, 문학, 사회, 경제, 과학 등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학문이며, 학문 중의 학문이다. 철학의 토대는 윤리학이며, 모든 학문은 이 윤리학의 토대에서만이 자라난다. 철학자는 역사 철학적인 문맥을 제대로 알고, 그가 소속된 국가와 민족, 혹은 인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정책(방법)들을 제시하게 된다. 철학자의 시야는 천리안이 되고,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은 인신 人神의 경지에 가깝게 된다.
인신人神이라는 이름의 사상가, 가장 탁월하고 가장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인 사상가는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좀 더 높이 높이 끌어올리고 있기는커녕, 그토록 소중하고 당당한 사상가의 길을 외면한 채,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기 땅, 자기 영토를 더욱더 유린해달라고 미군에게 생떼를 쓰는 우리 한국인들의 추태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것인지도 모른다.
순이삼촌
송수권
이웃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제주에선 고유명사인 순이삼촌을
보통명사로 쓴다
이웃 사촌을 한 촌수 더 당겨서
순이삼촌이라 부른다
순이삼촌은 복수의 언어가 아닌
홀수의 언어
한솥밥을 먹고 자란 가족이란 뜻이다
순이삼촌 어데 가 하면
남자 대답이 들리는 게 아니라
‘곤을동 물 길러간다’라고
올레길 담구멍 물허벅 속에서도
여자의 숨비 소리가 들린다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둘둘 빙떡을 말다가도
순이삼촌 홀아방 식개* 언제 먹엉?하고 물으면
빙떡 메밀향이 입안 가득
혀끝을 아린다
* 식개食皆 : 다 같이 모여 먹는 제사떡 또는 그 음식.
----송수권 시집 {흑룡만리}(도서출판 지혜)에서
동아시아의 회전문, 태평양의 관문, 한반도의 귀걸이, 평화의 섬, 자연의 섬, 1만 8천의 신이 사는 섬----.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은 도덕이 없어도 되었고, 법이 없어도 되었다.
너와 나는 다같이 하나가 되었고, 그 모든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해결되었다.
순이삼촌, 참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말이다. 삼촌은 특수한 혈통과 인척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제주도에서는 그러나 그의 이웃들, 즉,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뜻한다.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인 순이삼촌, 남자만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니라 여자들도 지칭하는 순이삼촌, “한솥밥을 먹고 자란 가족이란 뜻”의 순이삼촌.
송수권의 [순이삼촌]이라는 시를 읽으면 제주 사람들의 더없이 다정다감한 천성과 함께, 그 아름다운 풍습이 생각나고, 그 아름다운 풍습과 어진 천성이 죄가 된 제주 사람들의 불행이 떠오른다.
아름다움의 저주, 그 천형의 형벌, 오늘도 순이 삼촌은 그 천형의 형벌의 삶을 살아간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달궁 아리랑}, {빨치산}에 이은 네 번째 장편 대서사시집이며, 일제식민시대를 거쳐서, 남북분단과 좌우 이념투쟁에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
들의 역사적 상처와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노老 시인의 정신
이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기념비적인 대서사시로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
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가 있듯이, 우리 한국문학사도 이제는 송수
권 시인이라는 대서사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 이 밤 감동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5.10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