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이 M14 시제품
그러나 M1A1 톰슨에서도 그랬드시 '한때의 열풍'으로 그칠 것이다....라는 예상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필자도 이 예상에 동조하는 사람중 하나인데, 실제로 M14 커스텀 전동건을 사용하는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느끼는게 한가지 있다. 이양반들....기껏 M14 구해서 입이 쫙...찟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새 시들 시들해 지는게 아닌가...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공통적으로...
"M1 개런드가 갖고 싶단 말이지..."
일색이다. 이런 배부른 사람들 같으니라구. 그런데 실제로 마루이 M14 발매와 비슷한 시기에 타 메이커에서 에어소프트 M1 개런드가 발매되거나 발매 예정으로 되어 있다.
마루신 8mm 가스 블로우백 버전
Smokey's Gun Factory 버전. 6mm 비비탄과 가스가 충전되는 탄창을 이용해서
격발 기능도 즐길 수 있고 .30-06 클립을 끼워 탄피 배출도 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
필자 나름대로 M14 < M1 현상을 분석해 보자면, 아마도 M14의 빈약한 역사성 때문이 아닐까...생각해 본다. 이미 여러차례 건넷 기사에서 M14라는 총에 대해서 언급했었지만,
M14....하면 떠오르는 뭔가 강력한 이미지가 없다. 베트남 전쟁 하면 M16, M60, AK47, 2차대전 하면 M1개런드, M1A1 톰슨, KAR98K, MG42 같은....
마루이 M1A1 톰슨
어짜피 개인적 취향에 의해 선택하는 제품들이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실총에서 뭔가 한끗발 날리던 총을 재현한 제품을 수집하고 싶어하는게 사람의 욕심 아닐까. 실제로 M14는 M1 개런드와 M16의 중간에서 이리 저리 헤메다가 미군 제식 라이플 역사상 가장 단명한 총이다. 물론 영화 <블랙호크 다운>에서 보여지듯 강력한 라이플로 제자리를 찾은 듯도 보이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하겠다. 뭐 이런 평가야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니 여기에 동조하실 필요는 전혀 없으실 듯 하고...
블랙호크 다운에서 M14를 사격중인 델타포스 랜디 슈가트
실제 랜디 슈가트
이번 시간에는 마루이의 화제작 M14의 직계 선조에 해당하는 M1 개런드 라이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 보기로 하자. 당연히 실총에 대한 소개로 시작을 할 텐데, 좀 쌩뚱맞긴 하지만 스프링필드 조병창이란 곳에 대해서 먼저 뒤집어 살펴 봐야 할 듯 하다. M1 개런드 라이플을 비롯해서 후속모델인 M14를 개발했고 M1911 피스톨을 대량으로 뽑아내기도 했으며, M1개런드 라이플 이전에 미군이 사용하던 자국산 제식 라이플들을 지속적으로 만든 곳이 바로 스프링필드 조병창이기 때문이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남서부의 공업도시인 스프링필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병창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며 농구경기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7세기부터 군사 훈련지로 쓰인 이곳은 전형적인 시골 깡촌이긴 했지만 주 도로와 코넥티컷 강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고 숙련된 노동력과 제조시설에 필요한 수자원은 풍부해서 미국 독립전쟁(1776∼1783년)때에는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로 영국군과 치열한 교전이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스프링필드 대학에는 미국 농구의 전당이 자리하고 있다.
독립전쟁 당시 워싱턴 장군의 주력 포병부대의 지휘관이었던 헨리 녹스는 스프링필드야 말로 조병창이 들어서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해서 1777년에 이지역에 병기고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탄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인 셈이다. 이 병기고는 미국의 독립전쟁기간에 군수품 보급 창고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고, 스프링필드에는 수많은 무기 판매점이 들어서면서 머스켓 라이플을 비롯하여, 대포등의 무기류를 비축해 두긴 했지만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정부는 이 상점들을 그대로 존속시켰으며 이곳은 미국 최대의 탄약, 총기 비축지가 되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초기 전경
결국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들은 힘을 합해 영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연합 회의라는 중앙정부를 수립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독립전쟁 이후에 일어난 공황 상태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력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1787년에는 '다니엘 쉐이'라는 인물이 이끌고 온 메사추세츠 출신의 가난한 농부들이 스프링필드 무기고의 총들을 약탈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미국 연방 헌법이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들은 훔친 총기를 이용해서 국가와 법원이 소유하던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 했지만 주 방위군이 출동하면서 이들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부유계층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중앙 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니엘 쉐이 일당이 깽판을 친 해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 의회가 열리고 연방헌법이 채택되었다.
1794년 새로운 연방정부는 외국산이 아닌 자국산 머스켓 라이플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워싱턴 대통령은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하퍼스 페리와 스프링필드를 연방 조병창으로 지정했는데, 이 두군데의 조병창은 서로 경쟁적으로 총기 개발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위싱턴이 머리를 잘 쓴 셈.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는 1795년부터 매주 40명의 노동자들이 245자루의 부싯돌 격발식 머스켓 라이플을 만들기 시작했고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곧 미국의 무기 개발의 중심지가 된다.
스프링필드 M1795 부싯돌 발화식라이플
1819년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토마스 블랜채드는 라이플 스톡을 대량생산하는 특수 선반을 개발한다. 덕분에 숙련공이 아니더라도 쉽고 빠르게 총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총도 대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총기 제작에도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 영향으로 군의 총기와 대포는 부품을 규격화 해서 사용중 망가지면 손쉽게 부품을 교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규격부품의 대량생산을 위해선 수작업 대신 기계의 힘이 필요했고 정밀한 계측과 철저한 분업이 이루어 졌으며 제조된 부품들로부터 총괄 조립 라인이 꾸며졌다.
토마스 블랜차드와 그가 개발한 라이플 스톡 선반
1840년에는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는 부싯돌 발화식 라이플을 대신해서 훨씬 단순해지고 신뢰성이 대폭 증가한 충격 격발식 라이플을 만들어 냈으며, 이 총들은 1861∼ 1865년에 벌어진 남북전쟁에 투입되어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남북전쟁기간중 하퍼스 페리 조병창이 파괴되고 스프링필드 조병창만이 남아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스프링필드 M1861 충격 격발식 라이플
쑥밭이 된 하퍼스 페리를 교훈삼아 남북전쟁이 끝나자, 스프링필드 조병창에는 방어를 위한 울타리가 둘러쳐진다. 울타리를 둘러칠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제임스 W. 리플리는 독립전쟁 당시부터 쓰던 구닥다리 대포들과 같은 고철을 모아 인근의 제철소로 팔아 치웠다. 제철소에서는 이 고철 대포의 대금을 지불해 주기도 하고, 대포를 녹여 펜스용 말뚝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1865년에 스프링필드의 에르스킨 앨린은 후장식 라이플을 도입했다. 그는 1853년부터 그가 사망한 1879년까지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총기 담당관이었는데 그가 스프링필드의 수장이 된후 만들어낸 총은 트랩도어 라이플 시리즈였다.
트랩도어 라이플....이름의 유래를 아시겠는지...^^
이름에서 눈치채셨겠지만 리시버의 위쪽 뚜껑을 열어 탄을 장전해서 쏘는 단발 후장식 머스켓 라이플이었다. 앨린이 디자인한 총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기존의 머스켓 라이플의 부품을 대폭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주로 1861년에 만들어진 .58구경의 머스켓 라이플에 해머와 후장식 메커니즘을 짜넣어서 새로운 총을 만들어 냈다.
스프링필드 M1866 '앨린 컨버전' 트랩도어 라이플
1877년에 들어 미정부는 매거진 급탄식의 새로운 총을 찾기 시작한다. 단발식 총의 한계를 깨닳은 셈. 그리고 무려 15년 후인 1892년에 노르웨이 코니히베르그 암스라는 총기 메이커의 올레 크랙과 에릭 조젠센이 공동으로 개발한 '크랙-조젠센' 라이플(보통 크랙 라이플이라 부른다)을 제식으로 채택한다. 매거진 급탄방식(물론 탈착식 매거진이 아니라 총 내부에 고정식 매거진이 끼워져 있고 탄 클립을 여기에 끼우는 방식)의 총은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45-70 트랩도어 라이플같은 단발식 모델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연사속도면에서 훨씬 유리했다.
스프링필드 M1898 크랙 라이플
미군이 매거진 급탄식 라이플의 채용을 뒤늦게 한 것은 아직 매거진 라이플에 필수적인 무연화약 제조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무연화약은 프랑스에서 개발되었는데 개발 당시엔 1급 비밀이었다. 미국측에 무연화약 제조법이 알려진 뒤에야 매거진 급탄 방식의 총기를 채용하게 된 셈이다. 크랙 라이플의 초기형은 1892년에 처음 등장했지만 1896년에 개량형이 등장하고 이후 M1892는 모두 M1896으로 개수되었다. M1896은 1897년에서 1899년까지 3만정 가량이 만들어졌다.
스페인 전쟁 당시 스프링필드 M1898 크랙-조젠센 라이플로 무장한 미군
이런 와중인 1898년에는 미국과 스페인이 식민지 영유권 문제로 한 바탕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미군 병사들은 스페인군이 사용하던 마우저 볼트액션 라이플에 깜짝 놀란다.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최신형' 크랙 라이플보다 훨씬 강력하고 장전도 훨씬 간편했기 때문이다.
마우저 M1893 라이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 마우저 라이플에 큰 충격을 받고 곧바로 신형 라이플을 개발에 착수한다. 1900년에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는 독일의 마우저사에 20만달러를 내고 마우저 볼트액션 라이플의 메커니즘을 사용하기로 계약을 맺고 이 신형 라이플에 사용할 탄의 개발도 시작해서 1903년에 신형탄과 총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탄은 기존의 .30-40 (1840년에 개발한 .30구경) 크랙탄보다 13%가량 파워가 증가된 탄으로 .30-03탄이라 불리웠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여공들
이 신형 라이플의 초기 디자인은 상당히 길죽...했는데 당시 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너무 길었다나... 참고로 루스벨트가 미군 제식라이플의 <길이>에까지 까다롭게 굴었던 것은 그 자신이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의 해군차관을 지낼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고, 1898년 전쟁이 선포되자 돌연 사퇴하여 '러프라이더 연대'(Rough Rider)로 알려진 제1 의용기병대를 조직해서 산티아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기도 한 전술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병대에게 짧은 총이 얼마나 절실한지 그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1859 ~ 1919)
2편으로 계속
첫댓글 블랙호크를 보고 오 저거 괜찮은데 이런인산이 강하게 남아서 땡기는 제품인데~
ㅋㅋ저는 그냥 땡긴다는ㅋㅋ
콜트 육군 군용버젼도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검사 낙인을 찍어서 모자라는 군용수요를 민간콜트를 가져다가 때우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블랙호크다운에서의 이미지가 각인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