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豪族)을 무마(撫摩)하고 포용(包容)하는 전략으로 임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 인해 강성했던 후백제가 936년 멸망했다. 『고려사』<태조 원년(918) 8월 기유일>에는 “왕이 신하들에게 ‘여러 지방 도적들이 내가 처음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혹시 변방에서 환란을 일으킬까 염려된다. 단사[1]를 보내 선물을 넉넉하게 주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서 화해의 뜻을 나타내 보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귀부하는 자가 과연 많았으나 견훤만은 교빙[2] 하려고 하지 않았다.”[3] 여기에서 도적이란 전국에 봉기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호족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명왕 6년(922)>에는 “하지성(안동)장군 원봉과 명주(강릉)장군 순식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성(하지성)을 순주로 삼고,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었다. 또 같은 달에 진보성(의성)장군 홍술이 태조에게 항복했다.”[4] 또 <경순왕 4년>에는 “재암성(청송)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했다. 태조가 후하게 예로 대우하고 상보[5]라고 불렀다.[6]” 장군 호칭은 호족들이 각자 그 성에 웅거하면서 마음대로 자칭(自稱)한 것이다. 태조는 항복한 호족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여 왕족 일원으로 삼기도 하고, 상보(尙父)라고 존칭하는 등 후하게 대했다. 호족들은 봉건영주(封建領主)처럼 각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통치조직과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대로 둔다면 이른바 봉건사회(封建社會)로 진입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호족이 봉기(蜂起)하여 다시 난세(亂世)가 될 수도 있었다. 태조는 정치력을 발휘, 호족들을 잘 무마하여 고려 조정에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태조는 호족이 자기 영지를 통치함은 물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군대를 해산하고, 기인[7]을 볼모로 잡아 두고, 연고가 있는 고위관료를 사심관[8]으로 지정하여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제하니, 호족은 자기 영지를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금 거두고,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는 실무자, 즉 향리(鄕吏)가 되어버렸다. 태조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인해 한국 역사는 일본처럼 봉건시대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성종 2년(983) 12월>에는 “주, 부, 군, 현 향리 직함을 고쳤다.”[9] 신라하대(新羅下代, 780~935) 호족들은 당대등(堂大等), 대감(大監), 제감(弟監), 성주(城主), 장군(將軍) 등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불렀는데, 이때 이르러 직위를 향리로 만들었고 호칭도 호장(戶長), 사호(司戶) 등으로 격하(格下)시켰다.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를 보면 호장으로 세계가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이른바 양반(兩班) 귀족사회로 과거에 급제해야 양반이 될 수 있었다. 향리는 영지를 세습해 엄청난 부자이었으므로 자제(子弟)를 공부시켜 양반으로 만들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큰 부자들이다. 완산최씨도 호족에서 향리로 전락(轉落)했는데, 과거에 급제 고려중기(高麗中期, 1171~1274 )부터 양반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 각주 ------------------
[1] 單使. 한 사람만 파견하는 사신.
[2] 交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내고 외교를 맺음.
[3] 諭群臣曰朕慮諸道寇賊聞朕初卽位或構邊患分遣單使重幣卑辭以示惠和之意歸附者果衆獨甄萱不肯交聘.
[4]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降於太祖太祖念其歸順以元逢本城爲順州賜順式姓曰王是月眞寶城將軍洪述降於太祖.
[5] 尙父. 아버지처럼 모신다는 뜻.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공신 여상(呂尙, 강태공)을 존칭하여 사상보(師尙父)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
[6]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太祖厚禮待之稱爲尙父.
[7] 其人. 호족 견제를 위해 인질로 서울(송도)에 머물게 한 호족 자제(子弟)
[8] 事審官. 연고 있는 고관(高官)이 자기 고장 호족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
[9] 改州府郡縣吏職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