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임제선맥을 전한 명나라 은원선사 이야기
제주도에는 육지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가 있다.그러나 최근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와 관광객의 증가로 제주 사투리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 오사까에 살고잇는 제주교민사회에는 제주에서 사라진 사투리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화는 현지에서는 사라졌지만 외부에서 보존되는 사례가 많다.
일본 차로 유명한 우치의 황벽산 만복사도 마찬가지이다.
이 절에 가면 중국에서 볼수없는 명나라때 사원건축을 그대로 볼수 있다.그 당시의 사원요리.전차.예불의식 범패.좌선방법등이 명나라 임제종 총림방식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만복사는 일본속의 차이나타운이다. 명나라 임제종의 수행가풍을 그대로 전해주는 블랙박스 만복사로 들어가 그 역사를 살펴본다.
일본불교에 선이 전파된 횟수는 총 46회이다.그중에 선맥이 전해져 일본에 뿌리내린 종파는 24개파이다.
그중 일본 유학승에 의한것이 11개파이고 중국 도래승에 의해 전해진 것이 13개파이다.조동종은 3개파이고 나머지는 임제종이다.
일본 선종에 중국 도래승이 많은 까닭은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원나라가 들어서고 갈곳이 없어진 송나라 선승들이 지리적으로 안전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조선이 불교국가였다면 그들은 모두 조선으로 왔을 것이다
청나라가 들어서고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대의 선승들도 일본으로 들어온다.
일본선종의 황금시대가 열린 이유이다.
명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대표적인 고승이 은원융기(1592~1673)이다.그는 중국 복건성 황벽산 만복사의 방장으로 임제선맥을 잇는 33대 선사이다.일본의 4대쇼군 도꾸가와 이에쓰나가 배를 보내고 비용을 보내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초청하였다.
은원선사는 63세때인 1654년 1000여명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상당법어를 한후에 30여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당시 나가사끼에는 화교들이 모여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은원선사는 막부에서 기부받은 토지에 중국임제종 대본산 황벽산 만복사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선의 깊은 세계로 이끌었다.은원스님이 일본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건축.미술.의학.출판인쇄.범패음악.사찰요리.전다법등의 명대 고급문화가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일본에는 세개의 선종이 있다.임제종(화두선).조동종(묵조선).
황벽종(염불선)이 그것이다.교세는 조동종이 가장 크다.영평사를 대본산으로 말사가 16000개에 이른다.임제종은 14개산문을 중심으로 4500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은원융기가 개산한 만복사는 황벽종 간판을 내걸고 염불선을 종지로 수행한다.
만복사를 방문했을때 그곳 스님께 물었다.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종단인데 왜 황벽종이라고 하나요?
은원융기스님이 일본의 임제종을 보니 임제종의 종풍이 많이 왜곡되어 있었다.그런 이유로 임제의 스승인 황벽의 이름을 따서 황벽종이 되었다.
만복사 스님의 대답이다.
만복사에서는 1년에 한차례씩 일본 전차대회가 열린다.송나라때 전해진 다도는 다완을 이용한 말차위주 다법이다.명나라 은원융기가 일본에 전한 다법은 다구를 이용한 전차다법이다.
만복사가 전차다법의 본산이 된 이유이다.
명나라때는 선종과 정토종이 결합하여 선정쌍수의 시대를 열었다.황벽종의 종풍이 염불선을 내세우는 이유이다.
명대의 사대고승이 모두 선정과 정토를 함께 수행했던 것이다.
1번 사진은 임제종 33대 선맥을 이은 은원융기의 진영이다.
그는 나가사끼 화교촌인 흥복사에 3년간 머물다가 막부정권의 후원으로 우치역 다음 황벽역 가까이 터를 잡아 황벽산 만복사를 개산한다.
중국식 대본산 총림이 일본에 들어선것이다.
대본산 만복사의 본전에서 1년에 한번씩 일본 전차대회가 열린다.